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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의 삼성과 이건희, 그리고 대구시
폐허가 되어가는 대구 삼성상회, 성공한 근대경제학의 발상지로 개발해야
 
서태영   기사입력  2004/04/25 [10:52]
"호암 이병철 선생은 1938년 일제치하의 암흑기에 사업에 투신, 한국최고의 기업 삼성을 창업하여 성장시킨 한국 기업인의 대명사이다. 또한 당시 불모의 한국경제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앞서가는 경영인으로서 국가경제발전을 선도해 온 재계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호암은 사업보국, 인재제일, 합리추구로 대변되는 철학을 가진 경영자로 가시적 업적에 못지 않게 신념과 경륜을 가진, 경영의 여러 분야에 걸쳐 원칙을 제시하고 또 일관된 실천을 보여줌으로써 많은 교훈을 남겼다." <호암재단> 

'소표국수' 문화행정 언제까지 할 것인가?  

대구 중구청의 삼성그룹의 모태 '삼성상회'에 대한 소개는 엉터리로 기록되어 있다. (소표국수 운운하는 중구청은 당장 그 입 다물라! 삼성은 '별표국수'를 만들었다. 삼성은 삼우가 아니다.) 

"1938년 삼성그룹의 모체인 삼성상회를 고 이병철 회장이 설립하게 된다. 그 후 제일제당, 제일모직을 설립하고, 안국화재, 동부생명을 인수하면서 지금은 59개의 자회사를 가진 큰 재벌기업으로 성장한다. 창업의 의미를 살리기 위해 박물관을 만들었지만 지금은 폐쇄된 상태이다." 대구중구청 삼성상회 옛터(소표국수가 있던 곳) 설명

▲ 1930년대 삼성상회의 모습과 역사, 그리고 가치     ©서태영

호암 이병철 회장은 1938년 3월1일 대구 인교동-당시 수동-에 삼성상회를 설립하고 삼성그룹의 싹을 틔웠다. 5평 남짓한 사무실과 전화기 한 대와 국수기계, 직원 40명으로 출발한 삼성상회는 별표국수를 시판했다. 후일 삼성은 대한민국 지식정보산업의 별이 되었다.

그런 삼성상회 옛터는 폐허로 방치되고 있다. 인교동 삼성상회 옛터를 지나치면 대구와 삼성의 내연관계가 빚은 희생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달성공원으로 가는 길의 오토바이 부속골목 끄트머리에 부속되어 있는 인교동은 삼성의 터전이었다. 대구시의 안중에 인교동 삼성상회는 문화재가 아닌 모양이다. 아니 대구사람들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거기에 대구시의 문화행적은 찾아볼 길이 없다. 기업하기 좋은 도시를 만들겠다는 대구시가 이러한 상징조차 발굴할 안목이 없다는 것은 대단히 유감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대구중구청에서는 엉터리로 소개하고 있고, 대구시 관광유람지에서는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삼성상회를 기업하기 좋은 도시의 상징물로 민투사업하라!!!  

삼성은 대구가 낳았고, 물론 아직도 삼성라이온스는 대구의 상징으로 살아있다. 똥인지 된장인지도 구분하지 못하는 문화정책으로 '꺼져 가는 불의 도시'를 진화할 수는 없다. 

대구시가 입으로 문화를 떠벌리지 않고 몸으로 문화에 눈을 뜨면 대구의 일부분으로도 '실물 근대경제학의 발상지'로 가꿀 수도 있을 것이다. 대구시가 대구를 가장 모르는 것 같아 씁쓸함을 넘어 화가 치민다. 세계관광문화 소재를 폐허가 되도록 방치하고 있는 대구시의 문화정책은 삼성의 하청공장 수준도 면치 못하고 있다고나 할까. (정말이지 대구시 공무원들은 삼성이 대구시의 문화정책을 납품 받아줄까를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한다.)

▲  방치되고 있다시피한  삼성상회 옛터 뒤편에 ㅊ기업 새사옥이 들어서기 전과 초라해보이고 갑갑해 보이는 그 후의 모습     ©서태영

대구오페라하우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400~500억원으로 추정되는 기부를 받아놓고, '대구오페라하우스'로 꿀컥삼켜버리면 뒤늦게 되살아나고 있는 기부문화는 어느 세월 어느 계절에 다시 꽃을 피우겠나?

설령 삼성상용차 부도로 삼성에 대한 악감정이 존재하는 것이 현실이라지만, 일테면 '이병철음악당'이나 '호암음악당'이라고 선심을 베풀지 않고 묵은 감정에 기운 일은 좌고우면하는 행정무능과 정치외교력의 빈곤함을 드러낸 것으로 지적할 수 있겠다. 

 * 대구관광정보센터에서 운영하고 있는 관광프로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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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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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정보센터월곡역사박물관화원동산남평문씨본리세거지 용연사(달성군농업기술센터)관광정보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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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구역의료선교박물관월곡역사박물관남평문씨본리세거지 용연사(달성군농업기술센터)동대구역
동대구역도동측백수림불로동고분군동화사부인사신숭겸장군유적지동대구역
동대구역경대박물관오페라하우스매곡정수장육신사 동대구역
동대구역대구수목원화원동산남평문씨본리세거지 용연사(달성군농업기술센터)동대구역






대구국제공항경주최씨종가국립대구박물관모명재영남제일관(광복회관)대구국제공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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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우공원, 두류공원, 대구월드컵경기장, 이서공원, 달성농업기술센터
산 업 탐 방
7개소
섬유개발연구원, 서문시장, 약령시전시관,
종합유통단지, 대구전시컨벤션센터, 매곡정수장, 스파밸리
문화유적 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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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대구박물관, 육신사, 녹동서원, 도동서원,
남평문씨본리세거지
, 신숭겸장군유적지, 도동측백수림, 동화사, 파계사, 부인사, 용연사, 불로동고분군, 모명재, 현풍곽씨12정려각, 대구향교, 유가사, 경북대박물관, 경주최씨종가(옻골), 의료선교박물관, 낙동강승전기념관, 팔공산 갓바위, 월곡역사박물관, 오페라하우스

삼성과 대구는 속으로 내연(內燃)관계이다. 겉으로도 내연(內緣)관계이다. 분명 오늘 삼성이 보여주는 초일류 속의 반노동자관이나 물질만능주의, 편법상속을 기릴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5평짜리 사무실 국수가게에서 출발해, 오늘 초첨단 대기업을 일군 실물 근대경제학의 발상지를 세계관광문화재로 가꾸지 못하는 대구시의 문화행정력이 어찌 한탄스럽지 않겠는가. 

내연관계로 꼬인 실타래는 앞을 내다보는 원시안으로 풀어야 한다. 관광문화재는 잘 가꾸면 큰 돈 들이지 않고 목돈 벌어들이는 굴뚝 없는 공장이라고들 확성기를 틀어대지만, 앵무새 노릇으로 문화산업을 일구진 못한다. 실상에서는 문화재를 폐허로 존치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문화에 기생하는 야만행정이 21세기에 기생하고 있는 것이다. 

 
▲400-500억대 음악당 기부를 받고 대구시가 삼성에 감사하는 뜻을 전하기 위해 대구오페라하우스 입구에 세운 감사비 ©서태영

민간의 창의력이 빈곤한 대구에서 대구시를 믿고 있다간 보리밥 먹기 십상이다. 대구시를 도배한 2천원 짜리 간판 붙은 돼지고기집 앞을 지나치면 보리밥경제학 생각이 난다. "우리는 언제 5천원짜리 돼지고기 먹나?" '보리문둥이경제학'만도 못한 문희갑 이래의 민선'보리밥경제학', 정말 지긋지긋하다. 대구시는 호암을 중재자로 내세워서라도 대구시민들이 보리밥 먹지 않게 해주기 바란다.

어디론가 떠나가는 것이 희망이 되어버린 사람들의 동네에는 대구를 떠났던 호암의 전철을 밟는 후예들로 넘쳐 흐른다. "공장이 이전하고 인재들이 이주하면 그들이 남겨놓은 문화유산으로라도 먹고 살아가지 않겠소!" 대구를 이끄는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다. 대구가 먹고 살길은 역사문화도시로 가는 것이다. 경남 의령 태생의 호암이 대구에서 창업을 한 것과 떠나간 이유를 밝혀내는 일은 대구시 차원에서 호암을 기리는 일 못지 않게 중요한 숙제로 남아 있다. 불타고 가망없이 사멸해가는 도시에서 제2의 호암을 기르는 도시가 되기 위해서는 말이다.  

▲오페라하우스로 가는 길에서 만난 철조망은 기부하는 자와 기부받는 자 사이의 감정의 벽처럼 느껴진다.     ©서태영
 

 * 부도를 냈던 삼성상회의 호암은 삼성상용차의 이건희 회장과 달랐다.1947년 5월경, 호암이 새로운 제조사업을 구상하고 서울로 상경하자 삼성상회는 자금난으로 문을 닫게 되었고, 별표국수 또한 생산이 중단되었다고 한다. 공장 문은 닫고 있어도 호암은 월말이 되면 어김없이 직원들의 월급을 내려보냈다고 한다. 그 일은 8개월 정도 계속되었고, 직원들이 밀을 빻아주고 그 삯으로 밀가루를 받아 다시 국수를 만들어 팔게 되면서 공장을 정상 가동하게 되었다. 1941년 삼성상회는 주식회사가 되었고 국수공장으로 1960년대 말까지 존속했다. 호암은 삼성상용차를 부도내고 나 몰라라 했던 이건희 회장과 다른 행보를 보였고 또한 굴지의 삼성그룹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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