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순의 문학과 여성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남편'을 '오빠', 대통령이 어머니인 나라
[정문순 칼럼] 가족주의 나라는 독재에 대한 저항 의식이 있을까
 
정문순   기사입력  2016/03/03 [17:15]

우리말에서 ‘아저씨’는 자신보다 항렬이 한 계단 위인 친족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아저씨의 배우자가 ‘아주머니’다. ‘삼촌’은 촌수 관계일 뿐 호칭이 아니었다. 또 ‘언니’는 자매 사이뿐 아니라 남자 동생이 형을 부르는 말이기도 했다. 조선시대에 ‘자기’는 자신과 항렬이 같은 상대나 제3자를 가리켰다. 명절 때나 친지 결혼식에서 먼 친척을 만난 젊은이들이 느끼는 불편은, 우리말에서 친족 용어가 매우 세밀하고 다양함을 알려준다. 이는 혈연으로 이루어진 사람들이 무리지어 살던 농촌 공동체 사회의 유산이다.
 
그러나 산업사회로 바뀌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마을 공동체가 사라지고 핏줄이 닿지 않는 남들과 부대끼며 살게 되자 이들을 가리키는 말이 필요해졌다. 친족 용어가 남에게도 문호를 개방한 것은 이 때이다. ‘아저씨’, ‘아주머니’는 본뜻이 날아가고 연장자를 편하게 가리키는 말이 되더니, 이제는 남의 남편이나 자신의 남편도 ‘아저씨’가 돼버렸다. 안면만 터는 사이가 돼도 바로 ‘언니’나 ‘형’이 만들어지는가 하면, 오빠의 배우자도 ‘언니’가 되고, 밥그릇 개수가 더 많다고 애인이나 아내의 ‘오빠’가 되는 남자들도 허다하다. 최근에는 서비스 업종에서 일하는 젊은 남자는 ‘삼촌’이 되고, 식당 노동자나 가사 노동자 등 사회적으로 저평가되는 직종에서 일하는 연장자 여성에겐 ‘이모’라는 호칭이 굳어지고 있다.
 
친족 용어가 사회 전체로 퍼지는 현상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친척이나 가족 사이 존재하는 위계 질서나 연고 의식도 동반하여 확산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권위주의나 연고주의가 완강하게 버티고 있는 현실은 친족 용어의 오용이나 남발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일본에서 건너온 ‘국가(國家)’라는 용어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나라를 확대된 집안으로 보는 전체주의적 사고는 아무한테나 아저씨, 아줌마라고 하는 태도와 다르지 않다. 한 가족이나 친족 안에서 작동하는 가부장 문화나 정실주의가 전체 사회 구조의 원리가 되는 폐해를 우리는 정치에서 고스란히 겪고 있지 않은가. 대선에 개입한 국정원에게 국민 감시의 권한을 주는 법안이 버젓이 태어나고 있는 오늘날은, 잠깐일망정 개혁적인 북한전문가가 핵심 직책인 기조실장으로 부임하거나 국정원 스스로 독재 정권 당시 인권 유린을 자행한 과거를 반성하던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이 거짓말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21세기에 저 어두운 유신 시대로 되돌아가는 세상이 어떻게 가능한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만은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집권 당시 어머니의 마음으로 국민을 보듬겠다고 했다. 보듬겠다는 약속은 지키지 않았지만, 국민은 자식이고 자신은 어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의 진심이었다. 집권당 국회의원이라는 사람들은 엄마 허락 없이 나무에 올라갔다가 혼쭐이 난 아이처럼 대통령 앞에 안절부절 못한다. 대통령이 국민의 대표라는 국회의원들을 철이 덜 든 아이처럼 대하거나 테러방지법을 빨리 통과시키라고 책상을 탕탕 치며 호령하는 것도 삼권 분립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수준을 넘어 국민을 슬하의 자식으로 보는 태도가 아니면 나오기 힘들다.
 
그래도 대통령에게 초심으로 돌아가라고 요구하는 사람들도 있는 듯한데, 대통령이 ‘대한민국 100%’라고 말한 약속을 버렸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대통령이 약속을 어겼다는 건 오해다. ‘100%’라는 표현부터 전형적인 가부장적 사고방식의 산물이다. 5천만 사람들이 100%로 하나가 될 수 있는 방법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부터 독재적인 발상이거니와, 대통령이 제 아버지가 그랬듯이 안되는 것을 되게 하려고 덤비니 무리수를 써야 한다. 5천만 중에 ‘테러 용의자’를 가려내고, ‘비국민’을 추려내고, ‘IS'와 비슷한 사람들을 솎아내는 것은 대통령의 정신세계에서는 무리가 아니다. 그런 대통령은 평지돌출이거나 하늘에서 떨어진 사람이 아니다.
 
남편을 오빠라고 부르는 사회가 독재 회귀가 연착륙하는 발판 구실을 할 수 있다고 말하면 권력을 편드는 발언이 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족 관계의 원리가 전체 사회에도 적용되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는 태도는 독재권력에 얼마나 저항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입니다.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16/03/03 [17:15]   ⓒ 대자보
 
  • 도배방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