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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용무도, 사실은 이 뜻이라 전해라
[변상욱의 기자수첩] 명군(名君)이라 주장하는 혼군(昏君)이 최악
 
변상욱   기사입력  2015/12/21 [17:17]

 



올해의 사자성어 '혼용무도'(사진=교수신문 제공)
 
'교수신문'이 선정해 발표한 2015년 올해의 사자성어는 '昏庸無道'(혼용무도)이다. 교수신문은 '나라 상황이 마치 암흑에 뒤덮인 것처럼 온통 어지럽다'는 뜻이라고 주석을 달았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다른 때와 달라 보인다.
 
첫째는 교수신문이 선정해 온 올해의 사자성어 안에 임금 군(君) 자가 들어가 대통령을 직접 겨냥하거나 대통령을 지목하는 걸로 이해되도록 선을 넘은 것은 지극히 드문 일이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 들어 교수들이 뽑은 올해의 사자성어는 2013년 '도행역시(倒行逆施)', 2014년 '지록위마(指鹿爲馬)'였다. 모두 정치권이나 위정자에 대한 비판의 뜻을 담고 있지만 대통령을 직접 일컫지는 않았다. 이명박 정부 때도 마찬가지다. '호질기의(護疾忌醫)', '방기곡경(旁岐曲逕)', '장두노미(藏頭露尾)', '엄이도종(掩耳盜鐘)', '거세개탁(擧世皆濁)'에 이르기까지 군주나 임금을 가리키는 글자가 없고 세상을 걱정하고 정치가 바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데서 멈추고 있다.
 
그러나 '혼용무도'는 군주를 지목하는 임금 君(군)이 두 번이나 거푸 사용되고 있다. '혼용무도'에서 '혼'과 '용'은 어리석고 무능한 군주를 가리키는 '혼군 昏君'과 '용군 庸君'이 합쳐져 이뤄진 말이다. 우리가 흔히 임금 군(君) 자를 써서 사용해 온 말은 성군(聖君)이나 폭군(暴君)일 것이다. 성군(聖君)은 어질고 덕이 높은 임금. 명군(名君)은 치세를 잘해 명망 높은 임금. 현군(賢君)은 덕행을 베푸는 어진 임금이요, 혜군(惠君)은 자비심 넘치는 임금을 칭찬할 때 쓰는 말이다. 가장 귀에 익숙한 폭군(暴君)은 포악한 임금이고, 난군(亂君)은 나라를 오히려 어지럽게 만든 임금을 가리킨다.
 
흔히 쓰이지 않던 혼군(昏君)은 사리에 어둡고 어리석은 임금이다. 그 비슷한 말로 암군(暗君)이 있다. 무능하고 어리석음에도 자기 식대로 해보겠다고 계속 헛발질하다 나라를 막장에 이르게 하는 경우에 혼군 또는 암군이라 한다. 옛말에 "명군 같은 암군이 더 위험하다"는 말이 있다. 이는 자기를 따라 오라고 마구 내달리지만 통찰력이 없어 실패로 이어지거나 당장은 위기에 빠지지 않지만 훗날 돌이킬 수 없도록 해결 불가능의 상태로 몰고 가는 걸 혼군이나 암군 치세의 특징으로 여겨 경계한 것이다.
 
물론 혼군·암군 시대에 희망이 없는 건 아니다. 신하라도 똑똑하고 임금이 신하에게 각각 제자리에서 소신껏 일하도록 밀어주면 나라를 지켜갈 수는 있다. 폭군 시대와 다른 게 이 점이다. 폭군 주변에는 간신이 존재하고 폭군 역시 명민한 신하가 커나가는 걸 참아내지 못한다. 아마도 올해의 사자성어가 혼군 치하에서의 무도(無道)한 상황으로 여겨지는 건 박근혜 정부에서 혼군과 폭군의 문제가 겹쳐 보이기 때문은 아닐까?


◇ 명군(名君)이라 주장하는 혼군(昏君)이 최악
 
그 다음 등장한 용군庸君은 그저 평범하니 존재감이 없는 군주를 가리킨다.


용비어천가에 이런 대목이 있다.

"…원량을 흔들려고 요성으로 참소하니, (당나라 예종은) 용군이시지만 천성은 밝으시니…"
군주가 "별 능력도 없고 존재감도 없으나 사람이 천성은 괜찮다"는 뜻인데 군주에게 감히 '눈에 띄는 바가 없는 평범한 수준'이라고 평을 붙일 정도면 그 무능함이 어느 정도일지는 짐작할 수 있겠다.
 
2015 사자성어 혼용무도에 담긴 두 번째 시사점은 마치 교수들이 그나마도 격정을 억누르며 한 표 한 표 던진 느낌이 확연해 보인다는 것. 혼용무도 외에 '사시이비 似是而非'(14.3%), '갈택이어 竭澤而漁'(13.6%), '위여누란 危如累卵'(6.5%), '각주구검 刻舟求劍'(6.4%)의 순으로 우리 사회 전체의 모습을 포괄적으로 그려낸 후보작들이 있었지만 응답 교수들의 59.2%가 압도적으로 최고지도자의 문제로 지목한 것은 최근 지식인 사회의 분위기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또 후보작 중 하나인 정부와 정치권의 불통을 성토한 '대우탄금(對牛彈琴, 소에게 거문고를 탄다)'도 응답자들의 심경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더 격한 비판을 담은 사자성어가 후보작에 있었다면 아마 그리로 몰리지 않았을까? 어쨌거나 이번 사자성어 '혼용무도'는 이 기획이 시작된 이래 가장 강도 높은 비판을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 지도자들에게 퍼붓고 있음이 분명하다.
 
'혼용무도'를 추천한 고려대 철학과 이승환 교수의 추천에 붙이는 글이 교수신문에 실려 있다.

 

그 마지막 구절을 읽어보자.


"사람이 중요하다. 한 해를 보내면서 새삼 느끼는 일이지만, 제도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역시 사람이다. 제도를 만드는 자도 사람이고 제도를 운용하는 주체도 사람이기 때문이다. 공자는 사람의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문왕과 무왕의 (훌륭한) 정치는 서책에 넘치도록 기록돼 있다. 그러한 사람이 있으면 그 정치가 일어나게 될 것이고, 그러한 사람이 없다면 그 정치는 스러지게 될 것이다'(『중용』20장). 그 사람이 있어야 그 정치가 흥하게 된다는 뜻이다.


플라톤은 일찍이 정치를 외면한 가장 큰 대가는 '자기보다 못한 저질스런 자들에게 지배당하는 일'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국가』 347C). 비록 공자가 말한 '그 사람'(其人)은 현재로서는 기약조차 무망한 일이라 할지라도, 플라톤이 말한 '저질스러운 자들'에게 지배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내년 다가오는 총선에서 모두가 소중한 주권을 포기해서는 안 될 것이다. 교수사회가 올해의 사자성어로 '혼용무도'를 채택한 것은 하루빨리 우리사회가 어리석고 용렬한 자들의 지배체제에서 벗어났으면 하는 간절한 염원을 반영한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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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5/12/21 [17:17]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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