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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센병 환자들에게서 희망을 발견했습니다"
[인터뷰] 70순 맞는 간호사의 대부, 한국의 나이팅게일 조애형여사
 
김철관   기사입력  2004/12/23 [11:31]
한해 한해 나이를 먹을수록 사람들은 지나온 과거를 되돌아 본다. 스쳐간 기억들을 되새기며 소중한 추억을 간직하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고 할까.
 
서울 양천구 목동 신시가지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 조애형(70) 씨가 살아온 인생역정은 감동 그 자체이다. 남편과 부부금슬이 좋기로 소문난 조 씨가 지난 70여 평생 살아온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털어놨다.
 
▲어렵고 힘들고 소외된 계층에게 집중적으로 간호활동을 펼친 한국의 나이팅게일이라 불리는 조애형 여사     ©김철관
“39년 3개월간 투철한 사명감과 박애정신을 바탕으로 모든 사람들이 경원시하며 기피한 나환자, 정신질환자, 폐결핵 및 법정전염병환자 등을 수용 치료한 특수병원에 근무하면서 불우하고 가난한 저소득층 환자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한 공로가 커 상훈을 내린다.”
 
지난 97년 6월20일 대통령이 조 씨에게 준 ‘녹조근정훈장’ 공적 조서의 내용의 일부이다. 그는 누구나 근무하기를 기피한 나병환자, 폐결핵환자, 정신병환자 등이 입원해 있는 특수병원을 찾아 평생 간호사로서 불쌍한 환자들을 묵묵히 돌보았던 한국의 나이팅게일이라 할수 있다.
 
실제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간호사라면 누구나 받고 싶어하는 국제적인 최고상인 영예의 ‘나이팅게일기장’을 87년 국제적십자사로 추서받게 된다. 당시 이로 인해 화제의 인물이 됐던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가 간호사로 굳게 마음을 먹게 된 동기는 단연 그의 모친의 영향이 컸다. 해방과 6.25전쟁, 여순반란사건 등의 혼란기에 전남 고흥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조 씨는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조산원을 한 어머니 밑에서 힘겨운 삶을 살아왔다.
 
“모친 생각만 하면 지금도 눈물이 나요. 제가 9살인 해에 아버지를 여의였는데 저 밑으로 동생들이 7살, 5살, 3살 등 4남매가 있었어요. 철없는 아이 4남매를 키우면서 용수철처럼 살았거든요. 모친은 조산원 생활을 한 37년간 가난한 산모들을 위해 사신분입니다.”
 
당시 전남 고흥은 오지였고 버스, 택시 등 대중교통이 지금같이 않았다. 수 십리 떨어진 마을에서 생사의 기로에 선 산모들의 산고의 고통을 접할 때면 만사를 제치고 칠흑같은 밤에도 발길을 재촉했다는 것. 조씨는 쉴새없이 모친의 얘기를 이어갔다. 
 
“심지어 당연히 받을 조산료는 커녕 주머니를 털어 산모의 밥과 미역국을 끓여 주면서 모친은 산모의 건강을 돌봤어요. 산모의 건강이 회복될 때까지 며칠을 지새우다 집에 귀가하면 코를 골고 주무시기 일쑤였지요. 다시 산모의 진통소식을 들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그곳으로 달려가곤 했지요. 나이팅게일 기장은 어머님이 받아야 할 상입니다. 어머니의 유업으로 제가 대신 받게 된 것 같아요.”
 
조 씨가 처음 간호사로서 첫발을 내딛은 곳은 일제시대부터 시작된 나병환자 집단수용소인 ‘국립소록도 갱생원(현재 국립소록도병원)’이다. 그가 고흥소록도갱생원을 찾게 된 계기는 그가 살아온 역사를 더듬어 올라갈 필요가 있다. 중학교 2학년 해인 열다섯 살의 나이에 우리나라 남쪽 끝 반도에 자리 잡고 있는 전남 고흥에도 어김없이 6.25전쟁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친다. 부친의 고향인 경기도 양평에서 친척들이, 평안도 개성에 살던 외삼촌 등 친척 30여명이 일거에 고흥집으로 피난을 와  함께 기거를 했다는 것.
 
부친이 없는 탓으로(해방 1년을 남기고 44년에 돌아가셨다) 모친 혼자서 피난 온 여러 친척들을 수발했고 친척들이 데리고 온 어린 조카들을 모두 학교에 보낼 형편이 안됐기 때문에 모친이 딸인 조 씨를 관비생(지금의 국비생)인 간호고등기술학교 진학을 권유하게 된다.
 
당시 그는 고흥중학교에서 공부는 물론 음악, 연극, 노래 등에도 뛰어난 재능이 있었다. 이런 탓에 간호고등기술학교의 진학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는 상태였다. 결국 모친의 뜻대로 간호고등기술학교에 입학했다. 그곳에서의 3년은 그에게 인내와 사회 봉사정신을 일깨워준 계기가 됐다.
▲조앵형 여사가 받은 훈장     ©김철관
그는 간호사로서 더 큰 뜻을 이루고자 서울로 올라와 서울대와 이화여대 의예과에 입학원서를 접수하려 했으나 간호고등기술학교는 정식 고등학교로서 인정할 수 없다는 학교 측의 거부로 커다란 좌절감을 맛보게 된다. 결국 광주 전남대 영문학과를 입학해 2년을 마친 후, 57년 가을 우연한 기회에 고흥도양중학교 시간강사로 근무를 하게 되면서 가깝게 위치한 소록도 나병환자(한센병)들에게 관심을 갖게 된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도 좋지만 전공을 찾아 간호원을 하고 싶었어요. 소록도갱생원 관계자를 찾아가 면담을 했고 승낙을 받았습니다. 당시 관계자는 대학생 간호사가 어떻게 이런 힘든 일을 하겠냐고 했어요. 할수 있다고 했지요. 중학교 2학기가 시작될 무렵이었는데요. 학교에서도 수업을 한곳으로 몰아주는 등 소록도병원을 다닐 수 있게 배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한 학기 동안 겸직을 한 셈이지요.”
 
당시 국립소록도갱생원은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직원지대와 병사지대로 나눠졌고 병사지대는 7개 부락 6000여명(한개 부락 800~900명)의 환자들을이 존재했고 의사 3명과 간호원 10여명(보조원포함)이 진료와 간호를 맡고 있었다. 현재 소록도병원은 700여명의 한센병 환자 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갱생원 명칭은 ‘버려진 삶을 되찾게 하는 병원’이란 뜻을 지니고 있었다.
 
“독신자와 부부가 생활하는 곳도 따로 있었어요. 환자들이 결혼하면 정관수술을 하고 부부실로 옮겼지요. 중앙리라는 부락은 중환자들이 모여 살았는데 팔다리가 모두 떨어져 없는 데다가 눈, 코도 문들어진 상태여서 형상부터가 험하고 가없기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상태였어요. 만일 내가 저병에 걸리면 어떻게 하나 하고 무섭고 두렵기도 했지요. 환자들의 삶을 보면서 남모르게 눈물 흘릴 때가 한두번이 아니였습니다.”
 
소록도병원에서 근무하던 59년 11월 28일 서울시 말단 공무원으로 근무하던 남편 박봉식(당시 27살) 씨를 만나 결혼을 했고 결혼 후 2년간 남편과 떨어져 소록도병원에서 계속 환자들을 돌보게 된다. 지난 61년은 정든 소록도병원을 떠나 서울 중곡동 국립정신병원으로 전근돼 떨어져 살던 남편과 한 지붕에 둥지를 틀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정신병 환자들과의 새로운 환경에서의 고락이 시작되는 해이기도 했다.
 
“당시 중곡동은 시내버스가 다니질 않았습니다. 병원버스를 놓지는 날이면 30분 이상 들길을 걸어야 했으니까요. 초창기라 정신병원은 제대로 조직이 가동된 상태가 아니었고 간호원수도 턱없이 모자라 8시간 3교대 근무는 엄두도 못낸 형편이었어요. 간호원1명과 감시수 1명으로 팀을 짜 1조는 공무원 출퇴근 시간대로 근무를 했고, 한 팀은 24시간 풀로 근무를 했습니다. 24시간 풀로 근무한 팀은 그 다음날 하루를 쉬었습니다. 근무조건이 아주 열악했어요.”
 
정신병원 환자들의 흥분은 대단했고 하루도 바람잔날 없는 긴장의 연속이 이었다. 더운 물도 흔하지 않는 상태에서 똥을 뒤집어 쓴 환자를 씻어줄랴 자해를 한 환자를 진정시키랴 정신이 없었다고.
 
“정신병 환자들은 도망칠 것을 궁리합니다. 임신 5개월 째였는데 어느날 출입문을 여는 틈을 타서 한 20대 남자 환자가 후다닥 도망치는 것을 재빨리 잡다가 그 환자의 뒷발길에 채어 배에 심한 통증을 느꼈지요. 낙태가 된 줄 알았어요. 그 아이가 벌써 40대 중반이 된 큰아들이랍니다.”
 
지난 68년 그가 부임한 시립서대문병원은 법정 전염병 1종과 결핵환자를 취급하는 무료환자 병원이었다. 당시 서대문병원은 환자들과 직원들의 사이가 원만치 않았고 투서, 진정, 칼부림 등의 위협 등 극도로 혼란한 상태에 있었다. 그는 이런 환자들을 진정시키느라 온갖 노력을 다했다. 환자들은 원장실까지 찾아와 폐결핵 혈담을 뱉았고, 흉기로 위협하는 등 규칙위반을 하는 사례가 빈번했다.
 
“생활이 곤란해 가족들이 외면한 환자들이라 불쌍하고 딱한 환자가 많았어요. 폐결핵환자는 각혈로 숨지는 경우가 허다했어요. 환자가 각혈을 하면 입에 손을 집어넣어 응고된 혈을 파내주는데도 죽어갔고, 함께 밥 먹다가 각혈을 해 저 세상 사람이 돼 버린 경우도 허다했어요.”
 
장티푸스, 세균성 이질, 디프테리아 등 제1종 법정전염병과 콜레라 등 검역전염병 환자들을 격리수용한 병원에서만 조씨는 환자들과 함께 23년이란 세월을 보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심신의 피로로 인해 두 번의 유산을 경험하는 등 말못할 아픔도 있었다.
 
“지난 76년 여름철(6월부터 9월까지)은 유례없이 장티푸스환자가 1481명이 발생했어요. 한개 병동에 130여 명씩 수용해 병동마다 간호사 3명이 모든 환자를 책임졌어요. 힘들고 어려움이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지요. 중요한 것은 한명의 희생자 없이 전원 완쾌돼 퇴원했다는 사실입니다.”
 
▲지난날을 회고하면서 밝게 웃으시는 조애형 여사     © 김철관
지난 80년 9월 전남 무안에서는 198명의 환자가 전염성이 강한 콜레라에 감염된 상태에서, 상경해 입원을 한 사례도 있었다. 감염의 두려움도 대단한 문제였지만 콜레라 환자에게서 콜레라균은 확인됐지만 설사 증상이 없어 환자들의 ‘퇴원요구’ 항의소동이 벌어진 일이 더힘들었다고.
 
“멀쩡한 환자들을 내보내지 않고 가둬둔다고 난리였습니다. 주로 부녀자들은 시골집에 아이들을 두고 와 아이들 걱정 때문에 나가야한다고 아우성을 치고, 생선장사를 하는 분은 생계를 책임지라고 고함을 질렀지요. 이들을 설득하느라 진땀을 빼야 했습니다. 접촉자 관리도 너무 어려웠어요. 이 때도 한명의 희생자 없이 모두 완쾌돼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 간호사로서 자부심을 느꼈어요.”
 
그는 40여년의 간호사 생활을 모두 청산하고 지난 97년 6월 30일 시립서대문병원 간호과장을 끝으로 간호사 생활을 마감한다.
 
“저소득층의 환자를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해 왔으며 불우환자를 돕기 위해 각급사회단체참여운동도 지속적으로 전개해 수많은 환자의 건강관리와 사기진작에 이바지 했다. 박봉의 생활 중에서도 일부를 할애해 극빈환자의 치료와 생계비를 지원하는 등 사회 귀감이 됐다.”
 
지난 93년 대통령이 추서한 그의 ‘근정포장’의 공적 내용이다. 이외에도 청백리봉사상, 보건복지부장관상 등 수많은 훈장과 표창을 상신했다.
 
내년 1월22일 고희연(古稀宴, 칠순)을 준비하고 있는 조 씨는 현재 서울 목동 아파트에서 서울시 9급 공무원으로 시작해 국장까지 올라 지난 95년 6월 양천구청 시민국장으로 공직을 마감한 남편 박봉식(72, 현 한국생활폐기물협회장)씨와 함께 지나온 과거의 기억을 더듬으며 회고록을 준비하고 있다.
 
성실하고도 아내의 일에 묵묵히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남편 박씨와의 슬하에 3남1여를 뒀고 현재 큰아들 박찬원(43)씨는 경영인(경영학 박사)으로, 둘째 석우(39)씨는 검사로, 셋째 딸 성희(38)씨는 유명 옷 브랜드 디자이너로 우뚝 서 각자 나름대로의 길을 개척해 가고 있다.
 
 매주 일요일 저녁이면 어김없이 목동집에서는 자식, 손자할 것 없이 가족 회합을 갖고 화목을 다지고 있는 박봉식·조애형 씨 가족. 그녀는 현재 전남 고흥에서 조외과의원을 경영하면서 어려운 이웃을 위해 의료 봉사활동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조대형 원장의 누님이기도 하다.
 
남편이 70여 평생 건강하게 살아 사회활동을 왕성하게 하고 있다는 점, 3남매가 자기목표를 실현해 건강하게 생활하고 있다는 점, 평생 간호사로서 근무하면서 사회에서 인정받았다는 점 등을 조씨는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조씨는 젊었을 때의 역경과 고난 때문인지 현재 약간의 고혈압과 신경쇠약 증세를 보이고 있지만 비교적 밝은 표정이 역력했고, 현재 이화여대 평생교육원에서 수필공부를 하면서 ‘그리운 어머니’, ‘나환자와 함께 한 삶을 감사하며', '여름방학으 여정', '추억' 등 단편 에세이 4편을 습작해 발표하는 등 왕성한 글쓰기 실력을 뽐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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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4/12/23 [11:31]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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