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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이여, 제2의 황우석 박사는 바로 당신들
[주장] 과학적 상상력으로 장애인의 관점에서 세계를 해석하고 재편해야
 
이훈희   기사입력  2004/10/26 [09:46]

1922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덴마크의 닐스 보어는 대학 시절 기압계로 고층 건물의 높이를 재는 방법을 묻는 문제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푼 것으로 유명하다. 당시 그 스스로 가장 만족스러웠던 답변이 “기압계를 건물 관리인에게 선물로 주고 설계도를 얻는다”였음을 아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이렇듯 과학적 상상력이란 기상천외하다. “법칙은 깨지기 위해 존재한다”는 아인슈타인의 말처럼 법칙을 깨기 위해 온갖 아이디어를 짜내는 과학자들의 발상. 이 중에는 블랙홀 이론 등 우주의 신비를 한 꺼풀 벗겨내는데 큰 공헌을 한 영국의 스티븐 호킹 박사도 빼놓을 수 없다. 그리고 호킹 박사는 희귀, 난치성 질병인 루게릭을 앓는 장애인이다.

 

장애인의 반사신경은 비장애인의 자유의지를 압도해

 

다시 닐스 보어로 돌아가보자. 그가 고전 물리학의 알을 깨고, 양자 물리학의 새 지평을 열던 과학적 반란의 진원지인 덴마크의 이론 물리학 연구소에 재직할 당시 있은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헐리우드 영화가 생산한 각종 격투 장면 때마다 단골 소재로 애용되는 장면인, 뒤에서 총을 들고 몰래 다가오는 적과 주인공이 싸울 때 항상 주인공이 이기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이론적으로 증명해낸 사건이 그것.

 

보어와 연구소 동료들은 “자유 의지는 결코 반사신경을 앞지를 수 없다”는 가설을 세웠다. 이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보어와 그의 친구 가모브는 연구실에서 물총을 들고 결투 장면을 재현했으니, 결과는 뒤에서 몰래 다가온 가모브가 보어의 물총에 먼저 맞은 것이었다. 가설이 입증된 역사적 순간(?)인 셈이다.

 

이 같은 에피소드를 통해 정설이 된 반사신경 이론은 비장애인에 비해 자유의지가 상대적으로 매우 제한된 장애인에게 아주 큰 시사점을 남긴다. 예컨대, 혼자 힘으로 화장실에 가기 힘든 장애인이 있다고 보자. 그는 분노에 사로 잡혀 위축된 자기 모습을 발견할 수밖에 없다. 도움이 없다면 자유의지를 충분히 발휘할 수 없기 때문. 그렇다고 양변기에 앉아 24시간 앉아 생활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이 장애인에게 남은 것은 과학적 상상력이다. 화장실까지 도르래를 설치하거나 방에서 용무를 보더라도 냄새가 전혀 나지 않고 위생적으로 청결한 자연분해 변기를 개발할 수 있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하지 않는가.

 

실제로 호킹 박사 역시 그의 광범위하고 위대한 과학적 업적을 이미 글도 쓸 수 없고, 말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 과학적 상상력으로 발견해낸 것임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누워서 할 일이 없다는 말은 반사신경이 퇴화한 비장애인에게 해당되며, ‘한가함이야말로 최대의 고통’이라는 말 또한 비장애인에게 적용된다. 장애인의 뛰어난 반사신경은 자유의지를 압도하며, 이를 증명한 장애인은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다.

 

아직도 장애인을 소외하는 과학적 성과

 

장애인은 의학적 규정이기도 하다. 경증 장애인, 중증 장애인 등등 이러한 판단은 의사들의 진단명에 기초한다. 이 같이 인간을 의학적 가치 규범으로 판단하는 의료 행태에 대해 서구에서는 오래 전부터 ‘의료 권력’이라고 하여 위험하다고 경계해왔다. 나아가 의학은 과학이 아니다. 미국 뉴욕 의대의 사르노 박사는  의사를 ‘엔지니어’라고 규정하면서, 의학과 과학의  갈림길이 모호해지는 것을 경계한다. 이 점에서 장애인은 인간을 장애인으로 규정하는 사회적 환경의 토대가 바로 ‘의료 권력’에 있음을 정확히 지적해야 한다.

 

▲장애인은 의학적 규정이기도 한 편견을 깨고 장애인을 위한 과학적 상상력을 마음껏 펼쳐야 할 때이다. 그림자료는 줄기세포 분야에서 세계적 권위를 인정받은 서울대 황우석 박사     © 동영상 이미지

 

더 중요한 것은 장애인 스스로 과학적 상상력을 통해 현실 과학과의 유기적인 연결을 꾀할 필요가 있다는 그것. 현재 과학계 일부는 일반 대중이 이해 못할 형이상학적 학문으로 전락되는 현상을 스스로 조심하면서 과학과 대중과의 직간접적인 연결고리를 이어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실정이다. 초등학교 방문 실습 강연 등이 대표적인 보기다. 그런데 누구보다 과학적 성과의 적용이 필요한 장애인만이 여전히 소외되고 있어 안타까움을 심어준다.

 

과학적 성과의 주체는 장애인이 되어야

 

줄기 세포를 이용한 희귀, 난치 질환 치료 방법 개발 등 혁신적인 발견을 촉진시키고, 앞에서 뒤에서 이 노력을 응원해야 될 대중은 다름 아닌 장애인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또 과학적 발견이 의학적 성과로 이어져 일반 대중에게 되돌려질 수 있도록 정부 정책을 힘 있게 강제해야 될 주체 역시 장애인이다.

 

그리고 소아마비 등 이미 치료방법이 존재하고 있으나 어떤 알 수 없는 이유로 사장된 해외의 각종 사례들을 수집하고 구체적으로 취합하여 일반화시킬 사람 역시 장애인이다. 인터넷은 역사상 어느 시기보다 장애인에게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영어를 해석하고, 자료를 가공하는 방법을 모른다면 앞으로 몇 년이 걸리든 배우면 될 일이며,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장애인 당사자주의가 아닐까.

 

양자역학은 이 세계가 관점에 따라 해석될 뿐 누구에게나 일치하며 온전히 존재하는 자연계의 질서는 없다고 설명한다. 학문적 능력이 뒤떨어진다고 믿는 일부 멍청한 비장애인의 사고방식은 있는 그대로 ‘멍청함’일 뿐 장애인 당사자는 자신을 낮게 평가할 필요가 없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내가 갈 길을 간다”는 단테의 ‘지옥편’ 첫 장을 장식한다. 이 세상을 지옥이라고 본다면 장애인에게는 누가 뭐라고 해도 내 갈 길을 가는 당당함만이 손에 쥐어져 있으며, 이 세계를 장애인의 관점에 맞게 재해석하고, 정당하게 평가할 차례만 남았다. 과학적 법칙은 장애인 당사자의 이념이 옳다는 걸 증명하고 있으며, 과학적 상상력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유기적인 협력이란 점을 웅변하기에 충분하다.

 

아인슈타인의 말처럼 “편견은 길거리의 쓰레기”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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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4/10/26 [09:46]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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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명윤리가 있었나 2004/10/26 [12:43] 수정 | 삭제
  • 장애인의 기본적인 이동권도 (과학적 연구지원비 없어도) 제대로 없는 인권후진국에서 뜬금없는 줄기세포연구라니.
    강제로 격리당한 장애인에게, 과학연구에 대한 지지를 해야한다니.
    마치, 동의없이 24시간실험을 당하는 당사자에게 도덕적 완벽을 요구하는 어처구니없는 경우를 보는 것 같다. 24시간 사생활침해를 하는 당사자들이 빅브라더에 의한 감시를 견제해야 한다는 주장과 같다고 할까. 그들 스스로가 빅브라더임을 모른채(?) 빅브라더 출현을 견제하자는 주장이니까.
    생명윤리에 대한 사회적 합의, 제도적 보호도 없는 나라이며, 게다가 장애인은 어둠의 자식으로 몰아부쳐져 있는 현실에서 웬 줄기세표연구?
    BT가 돈되는 사업이고, IT처럼 개발해야 하며,돈을 벌기위해 뛰어들어야 하며, 기본적 인권이나, 생명의 존엄성은 뒤에 논의를 하던지 말던지 하자라고 해야 말이되지.
    왜 사회적 약자에게 준엄한 목소리로 의무를 논하는가? 마치 그들이 해야할 일을 하지 않고 있는것처럼.
    인권후진국은 이유가 있다. (강간세계 1위, 낙태 세게1위, 고아수출 세계 3위, 이혼율, 음주 세계 2위,등등등등)
    문화가 인권을 배재하고 있고, 너뿐만 아니라 나도 인권의식이 궁핍하다는 것이다.
    줄기세포연구보다 더 시급한 문제가 아닐까? (인권없는 나라에서 줄기세포연구라니?? 상식적으로 어떻게 진행 될 것이라 보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