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진주귀걸이'로 이어진 화가와 소녀의 영원한 사랑
[Cine Preview]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베르메르와 하녀간의 예술과 사랑
 
임흥재   기사입력  2004/09/01 [17:30]
 그림을 보는 지금 나를 숨막히게 하는 건 바로 그 시선이다.

누군가, 언젠가 그녀를 쳐다보았겠지. 그토록 사랑스럽게 그토록 뜨겁게........

그런 애틋한 시선을 한번도 받아 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는 사람도 있으리라.

살아 있다는 것의 기쁨과 허망함이 내 안에서 교차된다. 아쉽고도 안타까운 순간이다.

이 그림의 모델은 누구였을까? 그러나 지금은 그녀도 죽고 그도 죽고......... 오로지

화가의 따뜻하면서도 잔인한 시선만이 남아 있는 것이다.


-최영미의 <화가의 우연한 시선> 중, 베르메르의 ‘연애편지’ 중에서


필자가 요하네스 얀 베르메르Johanness Jan Vermeer를 알게 된 것은 최영미의 서양미술감상 에세이집에 관한 서평을 쓰면서부터다. 그 때에도 그의 그림에 관한 에세이가 책의 제목으로 뽑혀 있는 것 이상의 관심은 없었다. 최영미의 친절한 해설대로 그저 유럽의 중심과는 다소 동떨어진 북구의 풍습과 복식, 베르메르 작품의 기하학적인 구성에 대한 이해를 얻는 정도였다. 그 뒤로, 나와는 별개의 영역으로 생각되었던 미술의 영역과 감상의 취미를 몇 권의 책을 통해 얻어가는 과정에 있었지만 여전히 베르메르는 금세 잊혀진 화가일 뿐이었다. 그런 필자가 이 지면을 통해 다시 베르메르를 언급하는 것은 엊그제 본 한 편의 영화 때문이다.


▲영화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의 한 장면     © 피터 위버 필름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
(피터 웨버Petter Webber 감독, 트레이시 슈발리에Tracy Chevalier 원작)가 그것이다. 필자는 영화가 끝나도록 이 영화의 제목이 베르메르의 불후의 걸작 제목인 것을 몰랐다. 미개봉영화라는 호기심과 주인공의 복식이 어디에선가 본 듯한 친근함으로 선택하여 보게 된 영화였다. 영화를 보면서 나의 기억은 영화의 유사성을 쫓아 자연스럽게 베르메르를 떠올리게 하였고 화가가 주인공임을 알게 되면서 그제서야 이 영화가 화가 베르메르의 안타까운 삶에 대한 영화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자마자 부리나케 검색창을 두드렸다. 그리고 나서야 내 짐작대로 마지막 장면의 그림이 베르메르의 걸작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임을 확인하였다. 


17세기 북구(北歐)에서 피어난 안타까운 사랑


내일모레(9.3)면 이 영화가 개봉되는 것으로 안다. 미리 보는 영화 한 편, 사전이해를 가지고 바라보는 영화감상은 꽤나 유익할 것이라 생각하며 이 글을 쓴다. 영화의 역사적 시대적 배경은 17세기 네덜란드의 델프트다. 당시 네덜란드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여 해상무역의 강국으로 성장 중이었다. 칼뱅교도들에 의해 세워진 역사상 최초의 공화국에서는 혈기왕성한 신흥 부르조아들이 사회 전부문의 중심세력으로 부상하였다. 다른 글을 통해 여러 번 언급하였듯이, 문학 혹은 미술을 비롯한 예술의 발전은 상업자본주의 발달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네덜란드도 마찬가지여서 당시에는 대규모의 공공미술을 주문할 강력한 군주도 귀족도 추기경도 없었다. 도시의 부유한 상공인들이 귀족과 교회를 대신해 주요한 미술 후원자로 등장하였고 이런 후원자들은 자신들이 새로이 획득한 지위에 걸맞은 세속적인 미술을 요구하였다. 종교화와 역사화의 수요는 줄어든 반면 집단 초상화와 풍속 그리고 정물이 미술의 주제로 각광을 받았다. 이 당시 네덜란드 같은 신흥 부르조아의 나라에서 많은 위대한 화가들이 나타나게 되는 것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아무튼 그 17세기의 네덜란드가 영화의 시대적 장소적 배경이다.


렘브란트의 뒤를 이어 시민적-프로테스탄트적 바로크를 대표하는 베르메르는 미술품 거래상이자 여관을 경영하던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다. 그 당시, 군주와 교회로부터 자유를 얻은 대신에 화가들은 가난을 껴안고 살아야 했다. 그러기에 할스Hals나 얀 스텐Jan Steen의 경우처럼 여관을 경영하는 화가들도 있었다. 베르메르 역시 장모의 도움으로 겨우 생계를 유지하는 신세였고, 일설에 의하면, 말년에는 빚에 몰려 화병으로 죽었다고 전해진다. 영화에서 탐욕스런 장모로 등장하는 인물의 분장과 표정 연기는 그대로 베르메르에게는 무거운 마음의 짐이자 고통이었음이 느껴진다.


그런 베르메르의 집에 ‘그리트(스칼렛 요한슨Scarlett Johansson 분)’라는 하녀가 들어온다. 그리트는 가난한 집의 살림살이를 위해 하녀가 된 것이다. 이 때부터 자본이 지배하는 새로운 계급 간의 불평등이 이미 등장하는 것이다. 군주와 신하 그리고 백성으로 정해진 신분의 대물림과 계급 간의 고형적 불평등은 사라진 대신에 부를 매개로한 새로운 신분질서가 베르메르와 그리트를 주인과 하녀로 만나게 하는 것이다. 주인집의 남자는 화가이고 마님은 많은 아이들이 귀찮기 만한 사치스런 여인이다. 섬뜩한 감시의 눈길을 보내는 마님의 어머니는 그 집의 실질적인 권력자다. 사위의 그림을 가지고 후원자인 ‘라이벤(톰 윌킨스 분)’의 비위를 맞추는 수완 좋은 사업가이기도 하다. 


자신의 처소(부엌에 딸린 지하방)처럼 어두컴컴한 생활 속에서 청초한 그리트에게 희망이란 보이지 않는다. 시장을 보러 다니며 만나게 되는 푸줏간집 아들 피터를 만나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다. 주인마님은 쌀쌀 맞기 그지없고 그 어머니의 시선은 징그럽기만 하다. 마님의 큰 딸은 심술궂게 그리트를 골탕 먹이며 알 수 없는 적개심을 그녀에게 드러낸다. 갑갑하고 고단한 삶은 계속되고 좀처럼 벗어날 길이 없다. 그런 그녀에게 변화가 우연처럼 찾아든다. 마님조차 들어가기를 꺼리는 화가의 화실에서 사건은 시작된다.


그리트는 왠지 모르게 그 화실이 편안하다. 묘한 분위기가 그녀를 끌어당긴다. 화실의 유리창을 닦던 그녀를 화가는 바라본다. 화들짝 놀란 그녀에게 화가는 그윽하고 깊은 시선을 던지며 그녀를 훑어본다. 마침내 주인과 하녀는 화가와 모델로 새로운 신분관계를 맺는 것이다. 화가는 그리트를 그리게 되고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화가에게 이끌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화가의 조수가 되어 물감을 타고 색을 만드는 일이란 부엌의 허드렛일과는 비교할 수 없는 충만함을 준다. 화가는 그녀를 자신만의 공간인 다락방으로 이끈다. 그녀의 처소는 지하에서 가장 높은 꼭대기로 바뀐다. 아침을 열며 들어오는 밝은 햇살, 그 곳에서 화가를 위해 물감을 섞고 만드는 그리트, 삶은 아름다워진다. 사랑이 그녀에게 찾아든 것이다. 화가 또한 그녀를 사랑한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에는 현실의 장애가 너무나 많다. 주인과 하녀라는 신분의 벽, 이미 아내가 있는 화가와 처녀인 그리트, 낌새를 눈치 챈 마님과 장모의 감시의 눈초리, 화가의 의중을 알아차린 딸의 적개심, 화가의 주인인 후원자 라이벤의 그리트를 향한 끈적끈적한 애욕의 시선. 그러니 그들의 사랑은 더욱 애틋하고 안타깝다. 그럼에도 화가를 향한 그리트의 애틋한 사랑은 멈출 수 없다. 사랑이 깊어지면 질수록 그녀는 불안하다. 자신의 의지로 제어되지 못하는 사랑에 초초한 그리트는 피터를 향해 달려간다. 그녀를 거의 유일하게 미소 짓게 만드는 피터를 위해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자신의 순결을 처음으로 주는 것뿐이다.


사랑하는 화가에 의해 그림으로 그려진 자신을 보는 것이 어느새 유일한 희망이 되어버린 그리트. 그녀는 창을 닦고 있는 자신의 그림에서 의자를 치운다. 화가는 그녀에게 묻는다.

“왜 의자를 치웠지”
“답답해 보였어요, 왠지 갇혀 있는 느낌이 싫었어요”

 

그녀는 자유롭고 싶었던 것이다. 주인과 하녀, 화가와 모델이 아닌, 아무런 제약과 방해를 받지 않고 화가에게 다가가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그리트의 사랑을 알기에 화가 또한 흔쾌히 의자를 치웠을 것이리라. 이제 적어도 정신의 교감과 마음속에 갈무리 한 사랑의 영역에서는 그들은 한껏 사랑하는 사이가 된 것이다.


화가와의 사랑이 찾아들기 전, 피터는 그리트가 모자를 벗길 원했었다. 그녀는 피터에게도 허락하지 않은 모자를 화가를 위해 벗는다. 그리트의 하얀 모자는 처녀의 순결성이다. 그 모자를 그리트는 화가의 한마디에 벗어 던진다, 그를 사랑하고 있음으로. 모자 속에 감추어져 있던 처녀의 사랑이 마침내 화가의 사랑에 의해 탐스런 금발로 드러나는 것이다. 모자를 벗은 그리트에게서도 부족한 무엇인가가 있음을 화가는 고민한다. 바로 자신과 그녀를 가로막고 있는 신분의 벽 현실의 담벼락은 의자를 치웠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들의 사랑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화가와 소녀의 사랑은 진주귀걸이의 영롱한 빛으로 영원하다.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     ©베르메르
화가는 더 이상 그리트를 향한 사랑을 애틋한 연민을 포기할 수 없다. 그녀의 귀에 진주목걸이를 걸어주고 싶은 것이다. 이 때의 진주귀걸이는 단순한 장신구 혹은 보석이 아니다. 화가와 그리트를 대등하게 해주는, 하녀와 주인 간의 단절을 이어주는, 이어지지 못하고 막히어 있는 그들의 사랑의 문을 열어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열쇠다. 그리트는 진주귀걸이를 함으로써 마침내 그동안 그토록 자신을 괴롭혔던 신분과 현실의 벽을 뛰어넘어 화가의 진정한 동반자의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때뿐이다. 그리트가, 영악한 장모의 묵인과 공모에 힘입어 마님의 진주귀걸이를 할 수 있는 때에만 그리트와 화가는 사랑할 수 있다. 그러하기에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의 눈빛은 안타깝고 처연하다. 그들의 슬픈 사랑은 곧 끝이 날 것임 알기에 애틋하다. 화가 역시 슬프고 처연한 숙명을 안다. 콜린 퍼스Colin Firth의 애잔한 눈빛 연기를 극찬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파국은 바로 찾아온다. 극도로 분노한 마님의 히스테리는 누구도 막을 수 없다. (어머니의 장신구를 숨겨 그리트를 곤경에 처하게 한) 딸의 모함으로부터, 후원자 라이벤의 집요한 요구로부터도 그리트를 보호해주었던 화가도 이번에는 어쩔 수 없다.


천으로 덮혀진 그림을 향해 마님은 소리친다.
“저 천을 걷어내, 치워버리란 말이야” “왜 내게는 보여주지 않는 것이야”

화가는 대답한다.
“당신은 그림을 모르잖아, 이해하려고도 않잖아!”

그렇다. 화가의 영혼을 이해하고 사랑한 사람은 그리트가 그 집에 들어서기 전까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장모에게 그림은 돈일 뿐이었고 라이벤에게는 자신의 부를 치장하는 도구일 뿐이었으며 마님에게는 자신의 사치를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오직 그리트만이 화가의 정신세계를 이해하고 사랑해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화가는 때문에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의 가슴 저미는 사랑은, 손 한 번 잡아보지 못하였으나 누구보다 깊게 신뢰하고 교감한 화가와 하녀의 사랑은 진주귀걸이가 마님의 손에 돌려졌을 때 끝이 났다. 그들의 사랑은 이제 그림 속의 처연하고 애틋한 시선 속에서만 존재한다. 영화를 본 우리는, 그러나 그 진주귀걸이의 진정한 주인은 그리트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들의 안타까운 사랑은 비록 현실의 높은 담벼락 밑에서 깨어졌으나, 그와 같은 이유 때문에, 오히려 영원하고 빛나는 사랑으로 태어났다. 필자를 비롯한 우리는 ‘북구의 모나리자’라는 베르메르의 걸작 속에서 슬프도록 아름다운 시선을 던지고 있는 그녀를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이다, 그들의 안타까운 사랑과 함께. / 논설위원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04/09/01 [17:30]   ⓒ 대자보
 
  • 도배방지 이미지

  • sakuraqueens 2004/11/11 [08:30] 수정 | 삭제
  • For your information, I am watching the movie now. While I was watching it, I wanted to know more about Colin Firth and Johannes Jan Vermeer as well. Your Review was very helpful and informative. Keep doing it for others who try understand the movie and the world of artist (particularly in this movie). Good work and I appreciate your wo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