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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kDoo의 소름돋기] '신체강탈자의 침입'
매카시의 악령, 허구에 지배당한 지난 50년간의 공포는 오래 지속돼
 
김정곤   기사입력  2004/07/23 [19:16]

1947년 미 대통령 트루먼은 세계를 공산주의와 자유세계로 단번에 양분해 버리는 저 유명한 트루먼독트린이라 불리는 미국외교정책에 관한 원칙을 선언합니다. 그리하여 1950년 매카시는 국무성 안에는 205명의 공산주의자가 있다라는 말로 새로운 세기에 시작되는 마녀사냥의 깃발을 드높이고 일순간 미국은 두 개의 공포에 사로잡혀 버리고 맙니다. 바로 공산주의자마녀사냥이지요.

 

1950년대는 대상에 대한 공포가 넘쳐나던 시절이었지요. 그러니까 고도로 발달해가는 문명에 대한 공포<지구 최후의 날, The Day the Earth Stood Still>, 고도로 발전해가는 사회에서 소외되어가는 개인에 대한 공포<엑스레이 맨 The Man with the X-ray Eyes, 4차원의 사나이 4D Man>, 그리고 핵에 대한 공포<그것들! Them!>와 함께 공산주의(자)에 대한 비판/공포<금단의 행성 Forbidden Planet>가 그것입니다.

 

53년에 최초 출간된 잭 피니의 소설 <신체 강탈자, Body Snatcher>를 영화화한 돈 시겔 감독의 <신체강탈자의 침입, Invasion of the Body Snatchers, 56>은, 그러나 일방적으로 매카시의 저주에 응답하듯 만들어진 영화라는 데는 사실 어느 정도의 무리가 따르기도 합니다. 그건 50년 전에 만들어진 이 영화가 지금도 관객들에게 공포를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이 반증하듯 획일화되어 가는 인간사회의 소외된 개인을 여전히 공포스럽게 나타내고 있기도 하기 때문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현실을 반영하는 게 아니라 현실이 영화를 구축한다는 말을 상기해 봄으로서 매카시(영화의 주인공을 연기한
마일즈의 본명 역시 매카시이지요.)가 불러온 두 개의 극단적인 공포는 거의 완벽하게 이 영화에 맞아 떨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돈 시겔은 두 개의 공포를 나열하는데 있어 어느 쪽에도 손을 들어주지 않음으로써 관객의 자율적 선택에 공포의 결과를 맡겨 놓습니다. 더군다나 절반의 희망을 상정하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는 당시로서는 너무도 극단적인(미쳐버린 마일즈의 절규로 끝을 맺는) 결말에 질겁한 제작사가 첨가한 것이니만큼 말이죠.

▲<신체강탈자의 침입, 56>마일즈와 베키     © 김정곤
 

영화는 [산타 마이라]라는 소규모의 도시에 외부학회를 마치고 돌아온 의사 마일즈가 최후의 공포를 벗어난 직후 경찰서에서 증언하는 내레이션을 따라 흘러갑니다. 그리하여 마일즈가 만난 공포에 질린 이들은 모두가 감정이 사라진 사람들에 대한 증언을 풀어놓지만 이내 그들마저도 감정이 사라져 버리고 결국에는 이들이 외계에서 뿌려진 식물처럼 보이는 종자로부터 복제된 사람들이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이들 복제인간들의 묘사에서 우리는 자본사회에서 교육받아 왔던 공산주의자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동일한 사고에 사랑, 욕망, 야망 등등의 감정은 모두 거세되고 집단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후반부에 보여지는 아름다운 음악소리에 맞춰 일을 하는 집단농장으로 구체화되어 보여집니다. 하지만 이 집단에 대한 평가는 전적으로 관객의 몫으로 돌려집니다. 물론 관객의 선택은 당연하게도 개인의 자유의지 쪽에 손을 들어줄 테지만 이 영화에는 두 명의 매카시가 등장하지요.


그러니까 이미 복제인간이 되어있었던 정신과의사
카우프만(공교롭게도 동명의 감독이 78년에 이 영화의 리메이크를 만들지요)과 마일즈, 이렇게 두 명의 매카시는 이성과 감성의 대립으로 나뉘게 됩니다. 카우프만은 증명 불가능한 현상에 대해 주위의 사람들이 사실은 그들이 아니라고 확신하는 그러한 현상들을 전염성 강한 정신병적 징후라는 판단을 내리고 그러한 전염병에 걸린 마일즈의 이성이 마비되었다는 판단을 내리며 마일즈는 실제 복제물이 있었던 위치를 안내하며 그것들의 실존을 증명하려 합니다.

그리하여 단순 폭로로 세상을 뒤집었던 매카시로 위치 지어진 마일즈(그의 마지막 대사
그들이 여기 있다)는 순식간에 마녀사냥의 희생자로 전락해 버리고 공산주의자로 위치 지어진 카우프만은 동시에 비이성적 결과(증명 불가능한)에 대한 가해자의 자리에 우뚝 서게 되지요. 이렇게 가해자이자 피해자를 자리를 확립하게 된 두 명의 매카시는 정말 소름 끼치게도 50년이 지난 현재에까지 그 자리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글의 최초에 제시했던 50년대의 공포들이 생산된 방식은 반세기가 지난 현재에까지 동일한 방식으로 그들의 영향력을 확장하고 있다는 것인데 현재 불거지고 있는 미 대선 11월 연기론의 생산방식은 정말 소름 끼칠 정도로 <신체강탈자의 침입>이 그려낸 가해자이자 피해자인 미국의 그것과 정확하게 맞아 떨어집니다. 다만 공산주의호의 침몰 이후 테러의 가해자이자 피해자의 자리로 한걸음 이동했을 뿐이며 그리하여 이제는 테러리스트와 이에 따른 마녀사냥이 그 자리를 바꿔 치기 했을 뿐입니다.

 

덧붙이자면 송두율 교수와 의문사위에 대한 언론의 생산방식 역시 이러한 50년대 식의 공포에서 한걸음도 나가지 못했다는 것인데 굳이 다름을 따지자면 가해자가 느끼던 공산주의자에 대한 공포와 피해자가 느끼던 마녀사냥의 공포가 결합한 채 이 두 가지의 공포가 모두 공격의 대상을 쓰이고 있다는 차이뿐입니다.

 

50년대의 공포를 종합하자면, 대상에 대한 공포이되 그 공포는 현재 우리가 딛고 있으며 안전하다고 믿었던 이 자리가 어느 순간 붕괴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다름 아닙니다. 그리하여 존재하는지도 모를 그 공포의 대상을 방어하기 위한 정신병적 불안심리일 뿐이란 것이지요. 그러니까 공포는 내자신의 안녕을 파괴할지 모를 그 무엇이 사실은 권력의지로부터 생산된 증명 불가능한 허구의 존재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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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4/07/23 [19:16]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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