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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눈은 달려 있나-‘울 줄 아는 눈’을 위하여
[Book世通] 눈의 역사와 미학으로 본 '위험성과 폭력성'
 
임흥재   기사입력  2004/07/08 [16:05]
“눈이 있는 한 인간세계는 파국을 면할 길이 없다. 종교용어를 구사한다면 인간에게 구원은 없다.” 
 
▲눈의 역사 눈의 미학 / 임철규 저     © 한길사
영문학자이며 연세대 교수인 임철규의 <눈의 역사 눈의 미학/한길사 간>의 책머리에서 인용한 어구다. 인간은 누구나 눈을 통해 사물을 본다. ‘본다는 행위’, 즉 ‘봄’은 사물을 인식하는 것이다. 인식이 있은 후에야 우리는 사유라는 것을 할 수 있다. 필자는 그 ‘본다는 것’에 대하여, 대상을 응시하는 다양한 시선에 따라 인식과 사유가 달라지는 것에 일찍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우리가 이 땅의 존재로서 살아가는 한 숙명과도 같은 것이어서, 인간으로 살기 위해서는, 좀 더 나은 개인으로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본다는 것’에 깊은 성찰을 필요로 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저자 임철규는 바로 그런 ‘본다는 행위’의 주체, 즉 눈이 가지고 있는, 눈이 행하는 구체적 행위인 ‘봄’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의 성과를 위 책을 통해 보여준다. 단순히 다양한 시선의 존재와 그로 인한 인식의 차별을 세상을 이해하는 수단쯤으로 생각하고 있던 나에게, 임철규의 ‘눈은 감옥이다’라는 선언은 가히 충격적이다. 그가 지적하는 눈의 폭력성과 위험성, 나아가서는 눈을 통해 저장된 의식의 작란(作亂)과 개념화를 전제로 하고 있는 언어의 폭력성을 읽으며 섬뜩한 공포와 전율을 느낀다.

이 때의 섬뜩함이란 무서운 대상에 대한 공포와 전율이 아니라 날카로운 지적과 분석에 대한 지적 충격으로서의 커다란 울림이다. ‘인식작용’을 통해 대상을 개념화하는 것이 인간의 고유한 능력이라고 할 때 이러한 인식작용은 주로 ‘봄’(見)을 통해 가능해진다. 인간만이 ‘봄’을 통해 사유한다. 저자는 인식의 전제조건인 ‘봄’이 없었다면, 인간의 모든 사유뿐만이 아니라 인간의 역사, 인간의 문명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너무도 지당한 말이다.
 
그러나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눈의 위험성이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인식할 때, 그 대상을 전체로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어떤 것을 ‘안다’고 할 때, 그것은 이 ‘안다’는 부분에 속하지 않는 ‘알지 못하는’ 부분에 대한 배제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언제나 부분밖에 파악하지 못하는 것, 이것이 모든 인식작용의 한계라 저자는 말한다.  저자의 표현을 빌면 “눈이 있다는 것은 본다는 것이며, 본다는 것은 인식한다는 것이며, 인식한다는 것은 전체 중의 부분만을 파악한다는 것이기에 눈이란 진정 감옥이다.”
 
따라서 인식의 세계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두지 못하고 전체 가운데 부분을 떼어내어 그것을 전체적인 것처럼 ‘틀짓는’ 감옥의 세계, 관견(管見)의 세계다. 저자의 표현대로 “인식은 감옥의 역사이며, 인간사유의 역사는 ‘틀짓기’의 역사이고, 이는 전체를 부분으로 난도질하는 ‘비틀기’의 역사다.” 저자는 고대 그리스의 이오니아학파의 철학자들, 탈레스(만물의근원은 물이다)와 아낙시만드로스(그에게 만물의 근원은 혼돈이다), 아낙시메네스(그에게는 공기다) 등 동시대를 살았던 그들이 ‘사물을 어떻게 보고 인식하는가’에 따라 만물의 근원이 다르게 규정되는 것을 예시하면서 인식의 개념화를 설명한다.

즉 다르게 규정한다는 것은 자신이 보는 부분적인 현상만을 관찰하고 그러한 관찰의 결과에 입각해서 그 부분적인 현상을 전체인 것처럼 틀짓고 개념화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인식파편화의 산물이다. 존재론의 역사는 전체를 부분으로 난도질하고, 부분을 전체인 양 틀짓고, 다시 그 틀을 ‘비트는’ 끝없는 개념화의 역사에 지나지 않는다. 예를 들면, 가공할 천둥과 번개를 ‘보고’ 이를 제우스의 이름으로 신격화하고 그를 악한 자나 금기를 위반한 자를 다스리는 ‘정의의 신’으로 개념화하는 것 따위가 ‘봄’을 전제로 하는 인간 인식의 파편화에 따른 결과물인 것이다.
 
저자는, 그럼으로, “전체에서 부분을 떼어내어 이를 전체로 틀짓고 절대화하는 인식의 파편화 그리고 파편화를 가져오는 눈의 ‘작란’(作亂)이 없었다면, 종교분쟁이나 전쟁과 같은 파국의 역사는 없었을 것이다. 눈은 그만큼 위험하기 짝이 없는 감각이다”라고 단언한다. 

어떤 사물에 대한 개념화 작업은 이전에 우리가 어떤 대상을 보고 인식했던 경험의 내용, 우리 의식 속에 저장된 기억의 내용을 기반으로 한다. 우리는 우리 의식 속에 저장된 ‘기억’의 내용에 의지하지 않고는 어떠한 대상도 개념화할 수 없다. 즉 의식 속에 저장된 기억의 작란이 다름 아닌 개념화인 것이다. 경험의 단편에 속하는 그 때의 기억이란 얼마나 국소적이고 파편적인가. 하이데거의 계승자, 쟈끄 데리다Jacques Derrida는 ‘본 바’는 ‘회의’의 대상임을 암시하며 스켑티시즘(skepticism)이란 영단어를 거론한다. 전체를 부분으로 난도질하여 개념화하는 이러한 ‘폭력’에는 눈이 초래한 기억의 단편적인 작란이 자리하고 있다는 뜻이다.
 
개념화가 이처럼 일종의 폭력이라면, 개념화를 전제로 한 모든 언어 역시 폭력적일 수밖에 없다. 폭력적 개념화의 가장 흔한 예는 ‘재현(표상)’에서 찾을 수 있다. 니체는 그의 초기 저작 <<비극의 탄생>>에서 모든 재현, 특히 언어에서의 재현이 폭력적일 수밖에 없음을 시사한다고 저자는 귀뜸한다. 그는 재현에 의해 왜곡 표현된 자연 등, 왜곡되기 이전의 어떤 실체의 흔적에 주목하면서 언어로 번역되기 이전의 순수한 상태를 동경한다.
 
눈이, 즉 인식작용이 전체에서 부분을 떼어낸 한계와 숙명을 가지고 있다면, 인식작용의 총체적 산물인 언어도 숙명적인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고, 언어에 내재한 폭력성이란 곧 눈의 작란에서 연유한다고 저자는 진단한다. 눈은, 인식작용은 ‘본 바’를 ‘타자화’하며, 이 ‘타자화’는 ‘차별화’를 전제로 한다. 차별화를 통해 대상을 타자화할 때 인식의 주체가 남성이면 여성의 주로 주체의 욕망이나 억압의 대상이 되고 인식의 주체가 강자면 물론 약자가 억압이나 지배의 대상이 된다. 저자의 주제 ‘눈’에 내가 흠뻑 빠져든 이유다. 로마의 학자이자 시인이었던 바로Marcus Terentius Varro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시각. 즉 힘으로부터 본다. 왜냐하면 시각은 오감 가운데 가장 강한 감각이기 때문이다. 다른 감각은 300미터 떨어져 있는 것을 지각할 수 없지만, 눈의 지각이 뿜어내는 힘은 별들에도 이른다...”(같은책 37쪽)

여기서 바로는 시각을 힘과 동일시한다. ‘시각’을 의미하는 visus와 ‘힘’을 의미하는 vis는 다 같이 ‘나는 본다’는 의미의 video에서 연유한 것도 이를 뒷받침 한다. ‘힘’을 의미하는 vis가 때로는 ‘성폭력’이나 ‘강간’이라는 의미로 쓰이기도 하는 데, 이는 눈의 폭력성과 위험성을 상징하는 경우다. 실제로 ‘봄’으로부터 연원하는 라틴어 ‘힘’이라는 단어는, ‘폭력’이나 ‘적대세력’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더 많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이와 같이 저자에게 있어, 욕망, 억압, 지배의 대상을 전제로 한 ‘타자화’는 인식이라는 국소적인 틀 속에서 이루어지는 폭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사르트르는 이를 ‘지옥, 그것은 타인들’이라고 표현하였음을 저자는 상기시킨다. 한걸음 나아가 저자는, 인간의 역사와 문명 그 어디서 인간다운 ‘진보’의 역사, 인간다운 ‘발전’의 문명이라는 것을 찾아볼 수 있는가 반문하면서, 오히려 시기, 음욕 등으로 가득 찬 인간의 눈은 “좋은 눈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는 악한 눈”이라는 라깡Jacques Lacan의 말처럼, 인간의 눈은 모든 대상을 ‘타자화’하고 폭력을 유도하는 파괴적인 눈이라 결론짓는다.
 
그렇다면 맨 처음 인용한 어구처럼 진정으로 우리에게 구원은 없는 것인가. 저자는 그 구원에 관한 문제를 책의 말미에서 다루면서, 그 결론으로 “그러나 예수를 닮아가려는 ‘선한 눈들’, ‘보고 있는 눈물’로 가득 찬 ‘울고 있는 눈’들로 인해 역사의 파국, 인간의 종말은 ‘유보’되고 있을 뿐, 인간에게 ‘구원’이란 없다. ‘보는 눈’이 있는 한, 파국을 향해 내달리는 폭력의 역사, 야만의 역사는 멈출 수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단정한다.
 
‘울고 있는 눈’을 위하여

많은 예술사조들과 신화, 동양의 철학 등을 통해 ‘눈의 폭력성’과 그 결과로 숙명처럼 우리가 안고가게 된 파국의 역사에 대하여, 저자는 ‘울고 있는 눈’을 언급하고 그것이 ‘유보’하고 있는 종말을 말한다. 책의 깊은 내용을 다 언급할 수 없으므로, ‘울고 있는 눈’이란, 예를 들면, 예수의 사랑을, 아니 그의 전부를 사랑했던 어떤 그림 속의 여인처럼 그를 닮아가려는 진정한 인간들의 눈이다. 다시 말해, 예수의 절대적 사랑 같은, 절대적 자기희생을 감수하는 사람들의 눈이다. 그것을 닮아가려는 사람들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른다.

그 ‘울 줄 아는 눈’을 위해 모든 종교와 예술은 이바지 한다. 이제 눈의 폭력성과 위험성을 지각한 우리는 울 줄 아는 눈을 위해, 영화를 보고 책을 읽고 그림을 감상하며 감동을 수태시켜야 한다. 그러나 영화가 주는 감동은, 진정으로 ‘울 줄 아는 눈’을 수태시키기 위해서는 정력이 모자란 것 같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종교의 세계에 귀의할 수 없는, 그럼으로 나 같은 많은 이들은, 책을 읽고 명화를 보아야 한다. 어느 것이 먼저이든 상관이 없겠으나 불민한 우리는 그림 속에 녹아 있는 ‘눈물’을 보기 위하여 책을 읽어야 한다.
 
달리 탄생 100주년 기념하여 달리Salvador Dali의 회고전이 열리고 있는 이 때에, 화가 정은미의 ‘로맨틱 갤러리’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아주 특별한 관계/한길아트 간>>를 통해 현대 미술을 탄생시킨 파트너들 간의 사랑을 훔쳐보는 것도 유익할 것이며, 화가이자 시인인 최영미의 서양미술 감상 에세이인 <<화가의 우연한 시선/돌베게 간>>을 일독하는 것도 즐거운 경험이 될 것이다. 르네상스에서부터 현대의 순수추상까지 미술감상의 안목을 길러주는 다카시나 슈지의 <<명화를 보는 눈/눌와 간>>를 빼놓지 않고 읽는 것도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내 ‘눈’을 찾는 의미 있는 독서여행이 될 것임을 믿는다. 예술을 ‘볼 수 있는 눈’, 그 눈을 통해 진정으로 울 수 있다면 우린 너무너무 행복하지 않겠는가. /편집위원

[사족] ‘아주 특별한 관계’나 ‘화가의 우연한 시선’에 관한 필자의 에세이는 필자의 블로그 http://blog.naver.com/epogue21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 필자는 한겨레신문이 만든 지식커뮤니티 서점 <노우21> http://www.know21.co.kr 의 명예기자이며 [BOOK世通]클럽을 운영 중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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