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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흥재의 BOOK世通]모던의 눈물 유혹 그리고 KTX
고속철 개통시점에서 생각하는 근대성의 의미
 
임흥재   기사입력  2004/04/03 [11:45]

 지난 4월 1일 건국 이래 최대의 국책사업이라는 한국형 고속철도(KTX)가 첫 운항을 시작하면서 방송과 신문에서는 연일 생활혁명 시간혁명이니 하는 고속철 개통의 의미와 파급효과들에 대하여 보도하고 있다. 나 역시 대중교통을 자주 이용하는 생활인으로서, 세계에서 5번째로 고속철도를 갖게 된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적지 아니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보도되고 있거나 관계자에 의해서 우리에게 전해지는 고속철 개통의 의미는 우선 운항시간의 단축에 따른 전국의 반나절 생활권화와 그로 인한 여러 파급효과를 들 수 있겠다. 경부고속철도를 중심으로 여객수송능력은 이전의 3.4배, 화물수송능력은 7.7배 증가함으로 물류혼잡비용으로 해마다 낭비되는 약12조원의 비용절감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출퇴근 지역의 확대로 탈수도권 현상이 가속화 될 것이고 이로 인한 도시근로자의 생활의 질이 향상될 것이며 비즈니스 패턴의 변화(예를 들면 무박의 장거리 출장이 가능)와 주5일 근무제의 확산과 웰빙문화에 대한 선호 등으로 관광레저문화가 활성화 될 것이라는 장미빛 예측들이다.

산업적인 파급효과로는 고속철 건설 과정에서 축적된 노하우와 기술은 미래산업분야에서 한차원 높은 발전의 밑거름이 될 것이고 그 핵심기술은 소재산업, 자동화산업, 정보산업, 항공우주산업에 활용될 것이며 고속철도의 설계 및 시스템 운영 노하우는 향후 대중, 대량교통수단의 종합적인 설계 및 운영능력의 향상으로 이어지고 기술자립과 기술수출의 첨병 역할을 담당할 것이라는 가슴 벅찬 청사진이다.

▲모던의 유혹 모던의 눈물(근대 한국을 거닐다)/글 노형석/사진 및 자료 이종학     ©생각의 나무
과연 고속철의 개통이 그토록 가슴 벅차고 장밋빛 예측의 현실화만을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것일까? 하는 시덥잖은 생각을 하다가 지난 겨울 읽었던 한 권의 책을 다시 꺼내 읽게 되었다. 노형석 한계레 기자가 쓰고 방대한 양의 귀중한 자료들을 제공해 준 사운 이종학 선생의 필생의 숨결이 들어있는 생각의 나무 간 <모던의 눈물 모던의 유혹-근대 한국을 거닐다>였다. KTX의 개통이 우리에게 안겨줄 생활의 변화와 그에 따른 명암에 대한 살피기는 글의 말미로 돌리고 우선 나는 위 책에서 내가 새삼 다시 음미하게 된 ‘우리에게 근대란 무엇인가’하는 화두에 관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철도란 곧 우리에게 근대성의 상징인 동시에 우리 민족의 애환을 함께한 살아있는 현재의 역사이기도 한 까닭이다.

뒤틀린 근대성의 상징 - 철도

‘책을 통해 세상을 안다’라는 <B00K世通> 맨 처음의 자리를 차지한 <모던의 눈물~>은 ‘제1부 뒤틀린 근대성의 상징들’과 ‘제2부 변화의 소용돌이 조선팔도’로 구성되어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 그리고 해방공간까지의 우리의 근대화 과정에 대한 고찰을 담고 있다. 무엇보다 이 책이 내게 큰 감명을 준 것은 우리에게 근대란 정말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대하여 피상적인 근대화의 전개과정을 서술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역사의 중심에서 우리의 민초들이 겪었음직한 애환과 눈물, 근대라는 괴물의 침입과 유혹 앞에서 당황하고 절망하던, 그러나 또한 기민하게, 또는 억지 춘향식의 강제되고 강요된 근대에 적응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 선조들의 삶의 기록을 생생한 자료와 함께 전혀 과장됨이 없이 담담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노형석이 쓴 서문 중 일부를 옮기면 “정치, 사회제도의 폭압성과 소비문화의 매혹이 뒤얽힌 근대생활의 파노라마가 바로 당대의 시공간 속에서 표출되었다는 것은 식민지 근대를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기본전제다. 근대성 또한 시공간을 통해 생생한 역사적 실체로서 인식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후대 한국인들은 20세기 초 식민지 시대를 일부 독립투사나 선각자들의 항쟁사, 정치, 경제적 모순 등의 중심개념으로 사고해 왔다. 농촌공동체를 뒤흔든 전기와 전화, 신작로, 철도 등과 도시공간을 주름잡은 전차, 버스, 카페촌 같은 근대문물들 앞에서 뒤바뀐 감수성과 인간관계, 일상 생활양식들의 다기한 양상들이야말로 근대의 참모습이 아닐까. 현기증 나는 속도전으로 치달아온 근대사의 뒤안길 속에서 놓쳐버린 식민지 일상의 하찮은 기억을 끄집어내고, 근대가 일상 시공간에 남긴 미세한 흔적들을 새삼 더듬는 것은 지겨운 근대의 미몽을 직시하기위해 필요한 통과의례일 것이다.”

우리의 근대를 한마디로 표현해주는 ‘식민지 근대’라는 것은 곧 우리의 근대화가 우리 스스로의 자주적인 역량과 필요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고 따라서 우리는 강요된 근대화 과정에서 우리의 전통과 신문물의 융합과정을 가지지 못했던 불행한 근대의 경험과 유산을 여전히 안고 살아가고 있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노형석은 그 불행하고 뒤틀린 근대성의 상징으로 맨 앞에 철도를 자리매김하면서 ‘문명의 얼굴은 한 수탈’인 일제의 식민지 철도 건설과정과 그 안에서 제국의 이익을 위해 죽어간 식민지 백성의 한과 눈물을 이야기 한다.

“근대적 생산력이 미진하고 발달된 도로교통망도 전무했던 이 땅에서 철도는 공간의 권위를 제압하기에 앞서 민중의 삶과 터전부터 박살내며 가지를 쳐나갔다. 뒤이어 분초 단위로 잘게 조각난 근대의 시간체계가 철마의 바람을 타고 들어왔다.”

우리에게 있어 철도는 야수와 폭군의 얼굴로 나타났고 민초들에게는 노역의 고통으로 등골이 휘고 뼈가 녹아내리도록 만든 공포의 대상이었다. 철도용지는 아무 대가 없이 징발되었고 노역과 식량 등은 식민지 백성의 몫이었다. 그 속에서 수많은 민초들의 목숨이 희생되었고 징발과 노역, 수탈을 견디지 못한 민초들은 정처 없이 떠도는 유랑민이 되어 갔다.

이처럼 철도는 우리에게는 문명의 이기가 아니라 한없는 희생과 고통을 강요하는 무시무시한 괴물일 뿐이었다. 특히나 식민지 철도의 애초 목적이 일제의 철저한 병참보급로로 건설되었다는 점과 식민지의 산물을 수탈 운송하기 위한 목적으로 건설되었다는 점에 비추어보면 그 잔혹한 이면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일제의 철도 건설비용은 평균건설비가 10만 6천원에서 6만2천 여원으로 이는 세계 철도의 평균건설비용(16만원)에 비해 훨씬 낮았고 철도사에 유례없는 이 기적은 해외자본이 미약했던 일본의 사정을 감안하면 토지강탈과 강제동원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경부선 경의선의 노선 또한 일제의 필요에 따라 수시로 변경 되었고 경부선의 경우 공주 논산을 거친 노선이 당시 허허벌판이던 오늘날 대전(한밭벌)노선으로 변경 되면서 조선의 전통적인 도시체계 및 지리교통의 특수성은 깡그리 짓밟히게 된다. 경의 경부 노선이 병참보급물자의 수송 등 일제의 전쟁수행 목적에 따라 철저한 서북동남 중심축을 견지함으로써 서울-대전-대구-부산 축에 여객과 화물 수송량의 절대 다수가 몰리면서 호남 쪽의 정치 경제적 소외감을 더욱 증폭시키는 잠재적 요인이 되었고 이는 곧 특정지역 차별을 조장하는 한 원인이 되어 오늘날 까지 그 뒤틀린 근대의 결과를 우리가 경험하고 있다면 지나친 판단일까? 

한편 시간대별로 움직이는 열차운행은 사람들의 시공간에 대한 습관을 바꿔놓았다. 즉 분,초 단위로 움직이는 근대의 인위적인 시간 개념이 일상의 모든 행위를 규정하는 새로운 질서로 등장하게 되고 남녀노소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열차를 타기 위해서는 시간표에 맞춰 의도적으로 스스로 행동의 범위를 미리 짜는 버릇을 들여야 했다. 비가 와도 경망스레 뛰지 않았던 조선의 지사들이나 한나절 혹은 2~3시간 단위로 넉넉하게 움직이던 조선인의 시간은 증기기관차의 헐떡이는 기적소리마냥 숨 가쁘게 움직였다. 

일제의 만주진출과 대륙침략이 본격화 되면서 경원선, 함경선, 호남선 등의 철도는 우리 강토의 구석구석으로 가지를 쳐나갔고 이런 철도의 건설로 조선 방방곡곡에 새로운 도시들이, 순전히 일제의 군사주둔지나 병참기지 혹은 조선 산물의 수탈을 위한 전진기지 등으로 세워진 도시들이 하나 둘씩 생겨났다. 경원선의 종착역인 원산은 그야말로 일제에 의해 생겨난 전형적인 수탈항구였으며 두만강 압록강을 있는 국제철교와 그 관문인 신의주, 청진 나진 등은 일본?항구에 바로 연결되어 단기간에 물자를 수송하기 위해 개발된 도시들이다.

비단 철도뿐만이 아니라 일제 시대 근대화 과정의 산물인 전기 전화 신작로 자동차 등 이 책에서 근대성의 상징으로 예시하고 있는 것들은 그 도입과 건설과정의 어둡고 아픈 이면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이 땅에 ‘모던’ 혹은 ‘근대’ 혹은 ‘신식’으로 통칭되는 시대의 개벽, 문화의 발전을 앞당겼다는 것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다만 그 근대의 태동과 숨결이 우리 스스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고 제국주의 열강의 수탈과 탐욕에서 강제된 근대라는 한계로 말미암아 우리의 근대는 살펴보았듯이 맞지 않은 옷을 입고 나서고 싶지 않은 거리에서 온종일을 돌아다녀야하는 어색하고 슬픈 근대의 모습이었다. 이는 우리의 근대를 이제라도 제대로 이해하고 다양한 층위에서 혹은 더 많은 지역적인 특수성 등을 십분 고려하여 되새김질 해보는 우리의 노력을 통해 우리에게 지금 진정한 근대의 의미는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해보아야 하는 충분한 이유가 될 것이다.

KTX와 근대성

이 글에서나 소개하고 있는 책에서의 근대란 중세와 현대의 가운데, 또는 국사학에서 정의하고 있는 구한말과 해방공간의 시기적인 구분이라고는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책의 제목에서 일컫고 있듯이 모던 혹은 근대란 한 시대의 문화적인 패턴 또는 사회 경제적인 정형들이 새로운 이론 기술 기풍들에 의하여 전시대와는 상당히 다르게 변화하는 것을 일컫는 것이 근대성이 아닐까 필자는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고속철의 개통은, 서두에서 간단히 언급하였듯이 우리의 생활과 문화, 사회경제적인 모습들을 변화시킬 그 파급효과들을 염두에 두면, 하나의 근대성이라 말하여도 지나친 억지는 아닐 것이다.

고속철의 개통이 불러올 많은 변화와 순기능은 이 글에서 적시하고자 하는 바가 아니다. 나는 앞서 책의 내용을 소개하면서 대부분의 지면을 할애하였던 근대의 이면에 숨어 있는 어둠의 그림자는 혹 없는지를 독자들과 함께 생각해보고 싶었다. 과연 고속철의 개통이 국토의 균형발전과 지방시대의 도래를 앞당기는 순기능만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수도권의 인구분산과 삶의 질의 향상, 산업기술의 발전적 담보 등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다.

지면의 제약상, 또한 이 글이 고속철도 개통에 따른 명암을 구체적으로 밝히고자 쓰는 르뽀가 아닌 관계로 그 어두운 그림자들을 간단히 서술하면 우선 고속철도 정차역 주변과 그렇지 않은 소도시의 상대적인 위화감과 발전의 소외감은 말할 것도 없이 단축된 시간과 위치 이동의 편리함은 자칫 역으로 지방의 상권을 더욱 피폐하게 할 여지 또한 충분할 것이고 도시노동자의 60%이상이 비정규직 노동자인 점과 상대적 임금의 격차를 생각하면 관광레저문화의 확산과 삶의 질의 향상에 얼마나 기여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부터 철도 이용자의 대부분이 서민인 점을 감안하면 서민의 발로써 기능하던 통일호 열차의 퇴역과 경부선 기준 70% 넘게 줄어든 무궁화호, 50% 이상 줄어든 새마을호 열차 운행의 편성은 결국 국민의 혈세로 건설된 고속철이 국민의 생활고를 더욱 가중시키는 역기능을 초래하는 것은 아닌지? 그로 인한 다른 물가의 연등 또한 불을 보듯 뻔한 것이라 생각하면 그저 좋아라 반길 일만은 아니다.

괜한 시비와 투정으로 고속철의 운행의 시대적 의미를 폄하하고자 쓰는 글이 아니다. 우리의 근대가 일제의 강점과 강제에 의해 반신불수의 근대였고 그 불행한 역사 속에서 우리의 민초들은 근대의 여명이 가져다주는 아름다운 경험의 향유를 해보지도 못하고 근대의 손톱과 발톱에 그저 찢기고 피 흘렸을 뿐이었다. 오늘 우리의 고속철이 그런 근대의 아픈 이면을 보이지 않는 어느 곳에서 배아하고 있다면 우리는 이를 경계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이다. 속도와 이를 통한 시공간의 극복이 반드시 우리에게 편리와 행복만을 가져다주지 않을 수도 있음을 미리 짐작하여 대비함이 무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KTX의 근대성이란 시간과 속도의 혁명이며 그로 인한 생활과 시대상의 변화를 의미한다. 그 근대성의 현재사적 의미들은 감히 필자가 단언하기는 어렵고 건방진 일이다. 이 글이 한 권의 책을 소개하고자 쓴 글이기에 속도와 시대의 모습을 곰곰이 생각하게 하는 책의 몇 구절과 그림을 말미에 계시하는 것으로 끝맺고자 한다.

‘최영미의 서양미술 감상’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는 <화가의 우연한 시선/돌베게 간> 124쪽에는 터너(Turner영국의 풍경화가)의 <비, 증기, 그리고 속도-위대한 서부철도>라는 그림이 실려 있다. 1844년 템즈강변의 철로를 증기기관차가 달리고 있고, 그리고 보이지 않는 속도를 상상력으로 그려낸 속도가 있다. 최영미는 그의 그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터너의 그림     ©터너

“터너의 풍경에는 19세기 영국의 최첨단 산업기술과 속도에 흥분한 군중, 봉건귀족을 대신해 지배층으로 부상한 시민계급의 자신감이 배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국 자본주의의 빛나는 나날들을, 1844년 어느 날 템즈강변에 서지 않아도 그림 속에서 함께 느끼고 목격할 수 있는 겁니다”

나는 터너의 이 그림을 보면서 최영미와는 다르게 속도를 표현해낸 흐릿한 붓터치의 기교에서 산업자본주의의 발달과 함께, 즉 신흥 브루조아 계급의 등장과 함께 훨씬 많이 생겨난 도시 빈민과 노동자들의 암담한 미래, 알 수 없는 불안한 내일을 보았다. 우리의 철마는 그러하지 않기를.... 이제 막 시작한 속도의 혁명이 우리 모두에게 즐거운 모던과 행복한 근대의 경험을 실고 달리는 아름다운 내일을 꿈꾼다. 그런 날에는 나도 경치 좋은 강가에서 지나가는 속도를 그려볼 참이다. /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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