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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의 옷 벗자'는 조선일보의 '변신술'
이념대결 색깔론 선도하던 조선, 총선 이후 '좌우 공존' 목청, 탈이념 선도
 
문한별   기사입력  2004/04/27 [06:26]

요즘 조선일보를 보면 어지럽다.  아니 어지럽다 못해 현기증이 난다.  변신의 속도가 너무 빠른 탓이다.  사사건건 반북보도를 일삼던 신문이었다.  북한 수재민구호나 식량난 등에 대해 "수재민 돕기운동을 벌이기 전에 먼저 근거자료부터 마련"(조선 사설, "종교계와 북한 수재민", 1996.1.17)해야 한다느니, "우리가 보낸 쌀이 북한의 군량미로 쓰인다"(조선 사설, "북 군대로 간 쌀", 1997.6.1)느니 하며 '깽판'놓는 식의 발목잡기로 일관하던 조선일보였다.

그런 신문지가 이번 용천역 폭발사고를 당해서는 갑자기 태도를 돌변해 "北 열차참사 피해자도 우리 이웃이다"(조선데스크, 2004.4.24)고 소리친다.  "北 용천 사고 구호에 官民 모두 관심을"(조선 사설, 2004.4.24) 갖자고 설쳐댄다.  "용천 참사를 전화위복의 계기로"(조선 사설, 2004,.4,26) 삼자고 괴성을 질러댄다.  "비탄의 땅에 사랑과 희망을"(조선 시론, 2004.4.27) 심어주자고 호소한다.  이어 "긴급 구호물자는 육로수송이 최선"(조선 사설, 2004.4.27)이라고 설레발을 떤다. 
 
그 뿐 아니다.  '대한민국의 정통'을 자임하며 이념대결을 선도하던 조선일보가 4.15 총선 이후 "세상은 그렇게 변해가고 있다"며 "이제는 보수와 진보가 공존하는 것이 현실임을 서로 인정하면서 선의의 경쟁을 할 때가 되었다"고 새살거린다.  "보수든 진보든 선택의 문제이지 선악(善惡)의 차이일 수는 없다"고 귓속말을 속삭인다. 급기야 "시대의 거울에 스스로를 한번 비쳐"보고 "낡고 철 지난 이념의 옷"을 벗자며 뇌쇄적인 눈웃음도 서슴치 않는다.(이상, 태평로, "철 지난 이념 대결론", 2004.4.27)

▲조선일보 27일자 기사, 철 지난 이념 대결론     ©조선일보PDF

대단한 변신이다.  "과연 조선일보~!"라는 탄식이 절로 나온다.  '변검'의 묘기를 능가하는 조선일보 둔갑술의 승리라고나 할까.  특히 조선일보가 자랑하던 '이념대결론'을 '철지난 것'으로 치부하고 '세상의 변화'에 자신을 맞춰나가는 '태평로'의 칼럼은 경탄스럽기까지 하다.  총선결과 중도좌파로 분류되던 열린우리당의 과반 승리와 극좌로 낙인찍힌 민주노동당의 의회진출로 매듭지어진 새로운 정치지형에 적응하고자 하는 조선일보의 강인한 생존본능이라니....!

여자의 변신은 무죄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여자의 본능인 한에서 그렇다.  마찬가지로 조선일보의 변신도 무죄다.  정론을 추구하는 것이 언론의 본능인 한에서 그렇다.  단 여기에는 조건이 있다.  조선일보도 정론을 추구하는 언론이라는 것을 실증적으로 보여줘야 한다.  그 방법은 간단하다.  조선일보의 어제와 오늘의 변화를 책임있게 해명해 주면 된다.  언론의 힘은 신뢰성에 있고, 신뢰성은 일관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변신을 밥먹듯 하는 조선일보라고 이를 모를 것인가.

하여 묻는다.  조선일보는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년 전에 "남북 분단 상황이 지속되는 한 우리 사회는 이념적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고 했다.  "이념을 거론하는 것 자체를 백안시하는 시각은 그 자체가 위험할 수도 있다"고도 했다.(조선 사설, "국정원장 이념 따지면 ‘색깔 씌우기’인가", 2003.4.26)   그런 조선일보가 이제 와서

"이제 시대의 거울에 스스로를 한번 비쳐볼 일이다. 낡고 철 지난 이념의 옷을 입고 있는 자신의 부자연스런 모습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고 딴소리를 해대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새 '남북 분단 상황'이 해소되기라도 했는가?    "이념을 거론하는 것 자체를 백안시하는 시각은 그 자체가 위험할 수도 있다"고 주장한 조선일보가 "낡고 철 지난 이념의 옷을 입고 있는 자신의 부자연스런 모습" 운운하는 것도 부자연스럽다.  불과 1년 사이에 '이념문제'가 '위험한 일'에서 '안전한 일'로 바뀌고 말았는가? 

조선일보는 이보다 앞서 2001년 7월에는 "현실의 어떤 정치사회 현상을 특정한 방법론적 시각(perspective)에 따라 분석하고 해석하는 것은 조금도 잘못된 일이 아니다"며 '색깔논쟁'을 옹호했다.  "민감한 정치사회 현상에 대해서일수록 정당들로서는 각자의 이념과 노선에 따라 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당연"하며, "논리전개의 규칙을 크게 일탈하지 않는 한 그에 대해 반론을 펼 수는 있을지언정 그것을 ‘원천적으로 있어선 안 될 일’인양 매도할 수는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조선 사설, "웬 색깔논쟁", 2001.07.04)

각자의 이념과 노선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조금도 잘못된 일이 아니"라 오히려 "당연"하고 "그것을 ‘원천적으로 있어선 안 될 일’인양 매도"해서는 안된다던 조선일보가 이제와서 그것을 시대착오적인 일'인냥, 부자연스러운 일인냥 '낡고 철 지난 이념의 옷' 운운하며 매도하고 나서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그새 정치사회 현상 내지는 정당정치를 분석.해석하는 조선일보의 방법론적 시각이 달라지기라도 했는가?  

하나하나 따지자면 밤을 새도 모자랄 듯 하여 이쯤해서 그만 두겠다.  각설하고, 조선일보는 책임있는 언론기관으로서 상기한 물음들에 대해 성의있게 답해야 한다.  그럴 때에만 조선일보의 변신은 무죄다.  어제의 말과 오늘의 말이 극적으로 상충되는 것에 대해 합리적으로 해명하기가 껄끄럽거든 솔직하게 사과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이도 저도 못한다면, 조선일보의 변신은 유죄라고 단정지어 말할 수 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태평로'칼럼의 끝단락을 패러디해서 조선일보에게 돌려주련다.  조선일보가 '낡고 철 지난 이념의 옷'을 벗고 '시대의 거울'에 맞는 섹시한 모습으로 거듭나기를 바라는 뜻에서다.  조선일보의 눈부신 화장발이 이번만큼은 제발 벗겨지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이 어디 나 하나 뿐이겠는가.  조선일보여, 들으라.

"대다수 국민들은 이 나라의 저력을 믿으며 조용히 나아가고 있고 이미 저만큼 갔다. 세상은 그렇게 변해가고 있다. 이 세상이 선거날 하루 사이에 갑자기 바뀐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것은 주로 시대변화에 뒤떨어진 조선일보 기자들이다.  저쪽이 잡았으니 세상이 뒤집어질 것처럼 걱정에 싸여 있거나, 반대로 이제 승리했으니 내가 하는 일은 모두가 정의롭다고 믿는 이들이 있다면, 이제 시대의 거울에 스스로를 한번 비쳐볼 일이다. 낡고 철 지난 이념의 옷을 입고 있는 자신의 부자연스런 모습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태평로] 철 지난 이념 대결론(2004.4.27)

4·15 총선 결과를 두고 여러 해석들이 있지만, 이제 이념의 문제를 비켜가기는 어려운 것 같다. ‘권력의 대이동’이라고 말할 때부터 거기엔 이념의 문제가 깔려있다. 진보세력이 전면에 등장했다고 하기도 하고, 외국언론들은 좌파가 한국의 집권·주도세력이 되었다고도 썼다. 표현이 어떻든 모두 이번 총선결과를 이념의 잣대로 구분하려는 시도들이다.
우리 사회에서 이념만큼 민감한 주제가 없지만, 정부도 그것을 피해가지는 못하는 것 같다. 최근 국정홍보처가 앞으로 현 정부의 정책을 설명할 때는 ‘좌파’ 대신 ‘개혁파’라는 표현을 써 달라고 요청할 정도가 됐다. 정부가 좌파라는 말을 싫어하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좌파란 급진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공산주의적 사상으로 인식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표현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실체다. 이 나라의 실질적 집권·주도세력이 된 사람들의 생각과 정치적 지향점이 무엇이냐이다. 이것은 정체성(正體性)인데, 이 부분이 지금 흐릿한 게 문제다.

비교적 분명한 한가지는 이제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가 ‘좌파’라고 해서 그를 아직도 사회주의 혁명론 신봉자라고는 생각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계 12위의 경제규모에 이처럼 다원화된 나라에서 사회주의 계급혁명론이 통하기나 할 것이냐고 생각한다. 마치 군사 쿠데타가 더이상 가능할 것으로 믿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서 좌파란 실은 다소 과격한 진보파에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한다.

보수는 속성상 방어적이고 기존 제도와 체제를 정당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고 보수주의를 수구반동적인 것으로 보는 게 무지의 결과이듯이, 진보주의를 위험한 좌파와 동일시하는 시각도 이념과잉일 가능성이 높다. 이 시대 보수와 진보는 대의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국가의 운영원리로 받아들이는 공통의 기반 위에 서 있다. 서로가 선거라는 시장에서 경쟁하는 정치상품이라는 데서는 자본주의적 경쟁원리가 똑같이 작동하고 있다.

그러기에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보수든 진보든 선택의 문제이지 선악(善惡)의 차이일 수는 없다. 서로가 상대방의 가치를 인정하고 경쟁하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이 원리를 부인하고 굴복을 요구한다면 시대착오적 혁명론자일 뿐이다. 심판은 오로지 다음 선거 때 유권자의 손에 달린 몫이다.

우리 정치도 이제는 보수와 진보가 공존하는 것이 현실임을 서로 인정하면서 선의의 경쟁을 할 때가 되었다. 우리 사회가 좌우의 극단적 혁명론을 무시할 만큼 폭과 깊이가 커졌다면, 좌든 우든 양쪽 다 유권자들의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를 신뢰해야 할 일이다. 그리고 사회의 변화에 맞춰 자신을 수정하면서 다음 선거 때 유권자들의 선택을 받도록 노력하면 된다.

대다수 국민들은 이 나라의 저력을 믿으며 조용히 나아가고 있고 이미 저만큼 갔다. 세상은 그렇게 변해가고 있다. 이 세상이 선거날 하루 사이에 갑자기 바뀐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것은 주로 시대변화에 뒤떨어진 정치권 사람들이다. 저쪽이 잡았으니 세상이 뒤집어질 것처럼 걱정에 싸여 있거나, 반대로 이제 승리했으니 내가 하는 일은 모두가 정의롭다고 믿는 이들이 있다면, 이제 시대의 거울에 스스로를 한번 비쳐볼 일이다. 낡고 철 지난 이념의 옷을 입고 있는 자신의 부자연스런 모습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허용범 논설위원 heo@chosun.com )


* 필자는 언론인권센터 대외협력위원장으로서 이 시대의 바른 말글살이와 바른 사람살이를 위해 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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