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일 경향신문의 정동칼럼에 진중권의 “‘여중생과 병사’ 두개의 죽음”이라는 글이 실렸다. 마지막 부분에 김동민 교수와 내가 그를 ‘매도’했다면서 슬쩍 이름을 거론한 그 글은 미군의 우리 여중생 압사사건과 서해교전 사태의 와중에 그가 객관적 입장에 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핍박받고 있는 듯이 썼으나, 사실은 과장과 왜곡, 그리고 엄살로 채워져 진정성이 결여된 글이다.
[관련기사][7.1일자 민주노동당 논평] 안타까운 연평도 교전진중권, [시론]서해교전이 안타깝다고? (경향신문, 7. 3)여인철, [기고]진중권씨가 더 안타깝다?(경향신문, 7. 9)진중권, <정동칼럼> "'여중생과 병사' 두개의 죽음"(경향신문, 7. 19) 임흥재, 진중권의 경향시론 ‘서해교전이 안타깝다고?’에 대하여, 대자보 87호{IMAGE1_LEFT}서해교전 사태 이후의 전개과정에서의 그의 활약상은 그가 극단적으로 '편향'되어 있으며, 그 스스로가 언급한 '두개의 극'의 한편에 서 있음을 보여주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판이 '두개의 극'으로 갈라지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으며, 그보다도 더 중요한 사실은 그가 자칭 '좌파'로서 당연히 서 있어야 할 '극'의 반대편에 서 있었다는 점이다.
◀ 7월 15일 미 대사관 앞에서 부시의 사과를 요구하며 1인시위에 나선 필자(대자보 자료사진)그러니 그가 신문칼럼에서 ‘편향’ 또는 ‘극단’을 얘기할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이제 한 명의 논객을 넘어 권력가(?)가 되어 버린 진중권의 유명세를 고려할 때 이번의 글은 상당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염려가 있어 부득이 반론 성격의 이 글을 쓴다.
먼저 그는 “죽은 자도 차별을 당하는가”라며 자못 비장하게 글을 시작하고 있다. 민주노동당이 “‘여중생과 병사’ 두개의 죽음”을 차별했다고 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그가 과연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물론 민주노동당이 차별을 했다고 볼만한 이유를 짐작은 할 수 있으나, 그 문제와는 별도로 말이다.
지난 6월 13일 일어난 미군 궤도차량의 우리 여중생 압사사건에 대해 그는 시종일관 침묵을 지켰다. 나로서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침묵이었다. 사회의 거의 모든 문제에 대해 ‘문화비평가’라는 직함으로 한마디씩 하던 그가 유독 그런 비극적 사건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다니.
나는 어느 인터넷 싸이트에서 누군가가 진중권이 그 사건에 대해
“단순 후진사고”라고 한데 대해 분개하는 글을 보았을 뿐이었다. 미군 궤도차량의 여중생 압사사건이 “단순 후진사고”라...기발한 착상이다. 궤도차량이 앞으로 가다가 두 여중생을 치었고 이어 뒤로 다시 후진하면서 한번 더 친 그 사건을 두고 “단순 후진사고”라니...감히 범인이 상상하기 어려운 분석이다. 그러나 나 역시 그 네티즌과 같은 범인이기에 진중권의 그 발언에 분개했음을 솔직히 밝히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침묵을 지키던 그가 서해교전이 일어나자 종횡무진 맹활약을 하기 시작했다. 사건이 일어난 그 날부터 민주노동당에 논평을 내라고 재촉하며 하루에도 몇 건씩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마치 조선일보가 여중생 압사사건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다가 서해교전이 일어나자 불과 몇일 사이에 사설을 십 수 개 써대는 등 온통 지면을 뒤덮은 것과 흡사하다. 논평이 지연되자 그는 정식으로 문제제기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기까지 하였다.
드디어 민주노동당은 7월 1일 성명을 발표했고 그의 문제의 시론 “서해교전이 안타깝다고?”가 7월 3일자로 경향신문에 실렸다. 그에 대하여 나는 7월 9일자 같은 신문의 "진중권씨가 더 안타깝다" 제하의 기고에서 민주노동당의 성명을 과도하게 비방한 그의 시론에 대해 완곡하게 이의를 제기하였으며,
김동민 교수 또한 시민의 신문에 7월 15일자로 "진중권과 민주노동당"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실은 바 있다. 그의 이번 정동칼럼은 말하자면 김동민 교수와 나에 대한 재반론의 성격도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어쨌든 두 여중생의 참혹한 죽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차가운 이성을 유지하던 그가 무슨 일로 서해교전에서는 그렇게 흥분을 한 걸까. 병사의 죽음에 대해서는 ‘북한의 윤리적 책임’을 거론하며 그렇게도 오랫동안 집요하게 문제제기를 해오던 진중권이 어째서 두 여중생의 죽음에 대해서는 “단순 후진사고”라며 외면한 것일까. 이거야말로 ‘두 죽음에 대한 차별’ 아닐까. 그런 그가 “죽은 자도 차별을 당하는가” 하며 분노할 수가 있는 것일까.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그는 그 ‘차별’의 한 이유로서 ‘진보진영에 널리 퍼진 어떤 편향’을 얘기한다. 진보진영에 편향이 없다고 말 할 수는 없다.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진중권의 말대로 차별을 한 이유가 진보진영의 ‘편향’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편향’이라고 붙여진 성향 뒤에는 진보진영의 오랜 동안의 학습효과도 있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과거의 수많은 유사한 사건에 있어서 우리측의 발표가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이 우리의 진보진영으로 하여금 이런 사안에 대해 조심스럽게 행동하게 했을 수도 있고 그리하여 그렇게 ‘편향’된 것처럼 보이게 한 측면도 분명 있을 것이다. 요컨대 ‘진보진영의 편향’에는 최대한 진실을 확보하자는 측면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 배경을 모를 리 없는 그가 앞뒤 가리지 않고 ‘진보진영의 편향’ 운운하는 것은 듣기 거북스럽다.
그가 ‘편향’의 예로 든 것이 민주노동당의 홈페이지에 올라 있다는 두 여중생의 영정이다. 그는 “민주노동당 홈페이지에는 벌써 사고로 숨진 여학생의 영정과 함께 이런 글이 걸려있다“고 했다. 여중생이 사망한 것이 6월 13일이다. 진중권이 그 글을 쓸 때가 7월 16일쯤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한달도 넘었다. 그런데 ‘벌써’ 여학생의 영정이 걸려있다니. 그러면 얼마나 더 기다려서 영정을 걸어야 진중권의 맘에 흡족하겠는가.
그리고 서해교전에 대한 논쟁이 진행되는 와중에 인터넷에 어민의 월선조업에 대한 글을 올린 ‘연평총각’이라는 네티즌이 있었다. 돈을 벌기 위해 연평도로 들어간 대학 휴학생이라는 그 네티즌에 대한 그의 공격은 그가 얼마나 편향되어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좋게 생각해서 그의 천재성이 돋보인 이 해프닝은 그가 상식인이 아닌 천재일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 네티즌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일수도 있는
“여론조작을 위한 주체의 문예소조”라는, 듣기만 해도 소름끼치는 딱지를 붙이며 그는 “글쟁이는 척 보면 안다”고 했다 한다.
역시 군계일학 같은 상상력이다. 그의 앞뒤 돌보지 않는 과감한 예단, 역시 나 같은 사람은 감히 범접하기 어려움을 느낀다. 사태가 이쯤 되면 어떤 말도, 합리적 논쟁도 힘든 수준이 아닐까. 나는 그저 그의 오만이 어디까지 갈 것인지를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이어 “판을 이렇게 두 개의 극으로 갈라놓고 한쪽 편을 들라고 한다”며 마치 피해자가 하소연하듯 한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부분이다. 독자들, 그리고 그를 예의주시하고 있던 많은 사람들을 우롱하려고 작정을 한 것이 아니라면 이런 말을 쓸 수가 있을까.
누가 판을 두 개의 극으로 갈라놓았다는 말인가. 그가 판을 두 개의 극으로 갈라놓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것은 웬만한 네티즌들이라면 다 알 것이다. 그런 그가 슬쩍 그 자리를 피해 저만치서 마치 강요당하고 있는 듯이 엄살을 떤다.
지난 7월 9일의 경향신문 기고에서 나는 그의 7월 3일의 시론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조선일보를 닮았다고 말했다. 그것은 매도를 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번엔 정말 그 얘기를 조금 더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조선일보를 닮았다는 것을 ‘매도’라고 하니 아직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어쨌든 이번에 자신을 뒤돌아보는 기회를 갖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조선일보도 여중생 압사사건에 대해서는 일체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 사실이 일반 국민에게 알려지면 반미정서를 자극하여 큰 일이라도 날 것을 염려한 때문인지 오히려 더 월드컵으로 눈을 돌리려 애쓴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월드컵에 열광했다.
그러더니 서해교전이 일어나자마자 물 만난 고기처럼 맹활약을 하기 시작했다. 마치 여중생 압사사건 같은 것은 기억에서 지워버리자는 듯이 맹렬하게. 미군의 우리 여중생 압사사건과 서해교전 사태 이후 진중권의 행동거지는 “여중생 압사사건이 단순 후진사건” 또는 “연평총각은 주체의 문예소조”라는 그의 발언에서 볼 수 있듯이 조선일보를 닮았다기 보다는 오히려 한 술 더 뜬 것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물론 진중권과 조선일보가 같은 이유에서 그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어쨌든 조선일보와 수구 세력과 유사한 주장을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그들에게 큰 힘을 실어주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어느덧 조선일보의 수법을 답습하고 있다는 것이다. 조선일보의 가장 큰 폐해가 무엇인가. 매사에 몰아가고자 하는 방향을 정해놓고 그 방향에 따라 사실의 왜곡, 축소, 과장, 은폐 등을 자행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결정적으로, 자기의 잘못을 교묘하게 남에게 떠넘기는 것 아닌가.
이번 그의 글에서 보듯 그는 상황을 그에게 유리하도록 왜곡, 과장할 뿐만 아니라, 그의 허물을 남에게 떠넘기고 있다. 그의 ‘차별’을, 그의 ‘편향’을 ‘진보진영’에 떠넘기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그냥 보아 넘기기 힘들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모두 그보다 한 수 아래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눈에 뻔히 보이는 그의 결함을 남에게 뒤집어씌울 수가 있는가.
그리고는 글 마지막에 슬쩍 나의 이름을 끼워 넣었다.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북의 사과가 선행돼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 내가 ‘조선일보와 같이 들린다’며 매도를 했다한다. 진중권은 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자는데 나는 그것을 조선일보 같다며 매도했다고?
이번 사태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은 사람들이 처음 읽으면 나는 분명 ‘나쁜 놈’ 정도로 인식되기 딱 알맞다. 내가 마치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또 한번 어처구니가 없다. 이건 명백한 사실 왜곡이다. 분명히 하자. 7월 3일자 시론에서 그가 어떻게 썼는지.
“무장을 하고 내려와 같은 민족에게 다짜고짜 총질을 한”다든지 “서해로 가서 NLL한테 사과와 재발방지의 약속을 받아올 일이다”, “이제는 휴전선을 통째로 체포해야 할까보다” “그럼 분단이 종식될 때까지는 이런 일이 발생해도 꾹 참고 그것을 운명으로 알고 살아가란 말인가” 등이 그의 글 수준이었다.
그 시론에서 그가 주장한 것은 오로지 하나, 같은 당의 성명을 ”공당으로서 책임을 지라“며 감정적인 그리고 조롱 섞인 언사로 ”북한의 선제총질의 윤리적 책임을 성명에 담지 않은 책임”을 추궁하는 것, 그것뿐이었다.
그는 어디에도 ”평화적 해결“을 입에 올린 적이 없다. 그런 그가 나중에 ‘평화’에 눈떴다는 것일까. 그렇다면 다행한 일이지만 적어도 내가 그의 글에 대한 반론성격의 기고를 그 신문에 할 때까지는 그런 평화를 위하는 조짐(?)은 없었다.
오죽하면 김동민 교수는 7월 15일자 시민의 신문 칼럼 “진중권과 민주노동당”에서 “진중권의 불만은 북측의 '발포'를 지적하지 않은 점에 있었다. 이런 지적은 타당하지만, 발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원인과 진상의 규명 및 재발의 방지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중권은 북측의 이유 없는 '총질'만 문제삼는다”고 까지 하였겠는가.
그가 그의 말대로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북의 사과가 선행돼야 한다”고 했다면 나는 그런 식으로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진중권은 부디 이런 얄팍한 글쓰기를 중지하기 바란다. 그리고 글을 정직하게 쓰기 바란다. 이번 글에는 진정성이 크게 결여되어 있다. 재능이 있는 사람으로서 정직하게 쓰면 오래갈 것을 왜 이렇게 글을 부정직하게 써서 스스로의 수명을 단축하려 하는가.
지난 7월 9일자 나의 기고 “진중권이 더 안타깝다”라는 글도 진정으로 그를 위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내가 조심스럽게 나 나름대로의 완곡한 경고를 담은 글이었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안타깝다. 어째서 이 시대 우리나라 최고의 논객중의 한 명으로 인정받고 있는 그가 사태를 파악하는 힘이 이렇게 떨어진 것일까.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진중권은 이번 서해교전 사태 이후의 정국전개에서 수구세력 쪽에 섰다. 그것을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이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물론 같은 자세를 취했다고 다 같은 의도로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은 이해한다.
그러나 어쨌든 진보진영에서 힘들게 조선일보를 비롯한 수구언론 그리고 수구세력과 싸울 때, 그리고 목소리를 모두 합쳐 싸워도 힘든 대상들을 앞에 놓고 그는 힘을 보태기는커녕 진보진영의 힘을 빼는데 온 힘을 보탰다. 이제 그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럽다.
이공학을 전공하는 사람이면 대개 누구나 배우는 고체물리의 내용 중에 탄성체의 탄성, 소성영역이란 것이 있다. 탄성체에 어느 정도 이상의 힘을 가하면 그 탄성체에 영구변형이 일어나며 원래의 성질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다른 영역으로 들어가 버린다. 예를 들면 스프링은 어느 정도 잡아당기면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지만(탄성역, elastic range), 어느 선을 넘어버리면 다시는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지 못하며(소성역, plastic range) 본래의 기능도 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위태롭게 느껴진다. 진중권의 지금 모습이. 마치 그가 탄성역과 소성역의 경계 어디 쯤에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제 조금만 더 밖으로 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소성역으로 떨어지게 될 것 같다. 그 탄성한계점은 그에 대한 나의 인내의 한계점이기도 하다.
진중권은 나도 한때 열렬한 지지를 보냈던 사람이다. 그래서 묻는다. 민주노동당 내부의 작은 허물보다, 그리고 진보진영의 작은 허물보다 더 시급히 손을 봐야 할 큰 허물들이 얼마나 많은가. 시급히 통렬한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야 할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진중권은 한때 그의 팬(?)이었던 많은 사람들을 이제 더 이상 실망시키지 말기 바란다. 나는 이제는 열렬함은 다 버렸지만, 그렇다고 지지를 접고 싶지는 않다. 그의 재능이 너무 아깝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그를 아끼는 마음에서 하는 소리다. 진중권, 위험한 그곳에서 놀지 말고 탄성역으로 돌아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