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과학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에이즈, 광우병보다 무서운 결핵을 우습게 안다
1년 수천명 사망, 결핵사망율 OECD 국가중 1위, 대책은 깜깜
 
예병일   기사입력  2004/03/26 [11:15]

지난 3월 24일은 결핵의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오래간만에 결핵 관련 기사들을 매스컴에서 볼 수 있었는데 그 중 가장 크게 눈에 뜨인 것이 “한국에서 결핵으로 인한 사망률이 OECD 가입국가중 1위”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여러 신문의 내용중 3월 23일자 서울경제신문의 기사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 나라 결핵사망률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0개 가입국 가운데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보건복지부와 대한결핵협회는 OECD 가입국의 인구 10만명당 최근 결핵사망률을 비교한 결과 2002년 우리나라가 7명으로 가장 높아 일본(1.8명)의 3.9배, 미국(0.3명)의 23.3배에 달했다고 23일 밝혔다.

국내 결핵사망률은 2001년의 인구 10만명당 6.7명보다 4.5% 증가한 것이다. 결핵은 2002년 우리나라 질병 사망 원인 가운데 10위를 차지했다.
우리나라는 또 지난해 1년간 보건소나 병원 등에서 새로 결핵진단을 받아 신고된 결핵환자가 모두 3만687명으로, 인구 10만명당 64명이었다.
연령별 분포를 보면 0~19세 8%, 20~39세 38.7%, 40~59세 25.7%, 60세 이상 27.5% 등으로 20~30대가 많았으며, 인구 10만명당 결핵환자율은 60세이상 노령층이 113~188명으로 가장 높았고 다음으로 20대가 85.4명이었다.

복지부 관계자는 “우리나라는 20~30대에서 결핵환자 발생률이 높은 후진국형 분포를 보이고 있다”며 “경제위기와 높은 실업률로 인한 노숙자 증가로 결핵이 늘어나는 추세”라고 말했다.

결핵은 인류와 역사를 함께 해 온 질병이며, 산업혁명 시기에는 영국 등 산업화되어가는 국가에서 결핵이 유행하여 큰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중세 시대에 유럽인들에게 가장 공포의 질병이었던 페스트와 비교하여 “백색 페스트”라는 별명을 가지기도 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20세기에 들어서서 스트렙토마이신을 비롯하여 결핵에 잘 듣는 여러 가지 항생제가 개발되면서 결핵은 더 이상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쉽게(?) 치유될 수 있는 질병으로 여겨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위의 기사에서 볼 수 있듯이 현재도 결핵으로 인한 사망자수는 인구 10만 명당 7명이니 대한민국 인구를 4700만 명이라 가정하면 1년에 3290명이 결핵으로 사망하는 셈이 됩니다. 1년에 많아야 수백명이 사망하는 에이즈나 아직까지 한 명의 희생자도 발생시키지 않은 광우병과는 비교도 안 되는 큰 숫자입니다.

이렇게 폐해가 큰 병이 왜 소홀한 대접(?)을 받고 있으며, 한국에서 결핵으로 인한 사망률이 높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필자주> 매스컴에서 가끔씩 수퍼결핵이라는 용어를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공식적인 의학용어는 아니지만 결핵중에서 항생제 내성을 가진 경우를 일컫는 말입니다. 항생제가 듣지 않으니 당연히 치료하기가 어려워서 치사율이 높을 수밖에 없습니다.

결핵의 역사와 발견자 코흐

결핵은 인류와 함께 역사의 주인공으로 살아 왔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질병입니다. 기원전 5000~8000년 경으로 추정되는 사람의 뼈에서 결핵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고, 기원전 1000년경의 이집트 미라에서도 결핵에 의한 척추질병이 발견되어 유구한 역사를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기원전 1000년경 발행된 인도의 문헌에서 폐결핵에 관한 기록을 찾을 수 있고, 중국의 수나라 의학책에서도 폐결핵으로 추정되는 기록을 찾을 수 있어 결핵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널리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히포크라테스를 비롯한 그리스 의사들도 폐결핵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며, 아리스토텔레스는 결핵이 공기를 통하여 전파됨을 처음 주장하였고, 로마의 빅토르비우스도 폐결핵에 관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유사 이래 한시도 인류의 곁을 떠나지 않은 결핵은 중세 시대를 거쳐 르네상스기에 이르기까지 가장 흔한 질병 중 하나였으며, 문명이 재탄생하던 르네상스기에는 여러 예술 작품에 작가의 의도와 관계없이 결핵환자들이 등장하곤 했습니다. 근대 산업혁명 시기에 이르자 집단생활에 따른 보건위생상의 문제점에 의해 다른 폐질환과 함께 결핵 환자의 수도 현저히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결핵으로 목숨을 잃은 루소와 쇼팽    
근대 유럽에서는 일반인들보다 국왕, 왕족, 귀족들의 결핵 유병률이 높았는데 이것은 당시 상류 사회 사람들은 집단적인 사교 생활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철학자이자 과학자인 데카르트, 계몽 사상가인 볼테르와 루소, 시인인 쉴러와 키츠, 철학자인 스피노자와 칸트, 과학자 프리스틀리, 문학가 포우와 에밀리, 음악가 쇼팽 등 수많은 유명 무명인들이 결핵으로 목숨을 잃은 후에야 결핵이 전염병이라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1865년 프랑스의 위망은 사람의 결핵 병소를 토끼에 주입시켜 토끼에서 결핵이 발생하는 것을 확인하여 결핵이 전염병임을 증명하였고, 그로부터 17년이 지난 1882년 코흐(Robert Koch, 1843~1910, 1905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는 결핵의 원인균을 분리해냄으로써 인류가 결핵으로부터 해결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코흐가 “세균학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가지게 된 것은 현미경의 영향이 컸다.
코흐는 결핵균 외에도 탄저균, 콜레라균 등을 발견하였으며, 한 종류의 병원균만을 순수배양하기 위한 방법으로 세균 연구시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네 가지 원칙을 정립하였을 뿐 아니라 현재도 이용되고 있는 멸균법을 자신의 연구에 적용시켜 실험 기자재들의 오염을 방지하는데 공헌하습니다. 독일 정부는 코흐를 베를린 국립 보건 연구소장으로 임명하였고, 이 연구소는 프랑스의 파스퇴르 연구소와 함께 전세계의 연구자들이 모여드는 중심지로 자리잡았습니다.

코흐의 다음 목표는 결핵균 치료제를 개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결핵균의 배양액으로부터 투베르쿨린을 제조하였지만 투베르쿨린은 진단에는 이용될 수 있으나 치료효과는 없는 것으로 판명되어 그의 명성에 금이 가게 되었습니다. 

1891년 그를 위해 설립된 베를린 전염병 연구소장으로 취임한 코흐는 서서히 학문적 능력을 발휘하면서 다시 한 번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896년 남아프리카에서 우두 예방법을 정립한 그는 다음 해에는 인도에서, 1903년에는 아프리카에서 말라리아, 수면병, 페스트 등의 연구를 한 것을 비롯 수많은 연구를 여러 나라에서 진행하여 수많은 국가, 수많은 학회에서 셀 수 없을 만큼의 상과 감사패를 받았고, 1905년에는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로 결정되어 과학자로서의 일생에 절정을 구가하였습니다.

▲코흐의 결핵균 발견 기사가 실린 신문이 도안된 시트  
학자로서의 인정은 받았으나 결핵 치료제를 개발하여 인류의 구원자라는 평을 듣고 싶어했던 코흐는 자신의 희망을 달성하지 못하였으며, 1906년 칼넷과 게랭이 결핵균에 대한 백신 제조에 성공하여 자신들의 이름을 붙인 BCG(Bacille Calnette-Guerin) 백신이 보급되면서 결핵의 발생이 현저히 감소하게 되었습니다.

1910년 세상을 떠난 코흐는 1944년 왁스만(Selman Abraham Waksman, 1888~1973, 1952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이 결핵치료제인 스트렙토마이신을 발견하여 자신이 찾아 놓은 결핵균을 인간세상에서 쫓아내는 것을 지하에서 지켜보아야만 했습니다.

결핵은 어떤 질병인가?

결핵은 결핵균(Mycobacterium tuberculosis)의 감염으로 인해 발생하는 만성 전염병을 모두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결핵을 일으키는 결핵균은 길이가 약 2~4μm, 폭이 0.2~0.5μm인 막대기 모양의 간균이고, 지방이 많은 세포벽을 가지고 있으므로 염색시 산성 물질에 의하여 탈색되지 않는 항산성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항산성 염색시 그림 5와 같은 모양의 균을 발견하면 진단이 가능합니다. 환자의 전파능력을 판단할 수 있는 도말검사로 확진할 수 있으나 민감도가 낮은 점이 단점이며, 배양법은 정밀진단에 도움이 되지만 1개월 이상 걸린다는 점이 단점입니다. 신체검사시 가장 흔히 시도하는 가슴 X선 사진은 결핵을 비롯한 흉부 이상을 찾아내는데 아주 간편하고 쉬운 방법이기는 하지만 이 때 발견되는 결핵의 경우 치료를 요하지 않는 환자들이 많이 있으므로 진단 후 의사의 지시를 잘 따라야 합니다.

결핵균은 공기를 통하여 재채기 등을 할 때 환자의 몸에서 빠져나와 공기 중에서 균을 둘러싸고 있는 수증기가 증발된 후 균만 떠다니다가 다른 사람이 숨을 쉴 때 호흡기관을 통해 들어와 폐세포로 들어오게 되면 감염될 수 있습니다. 초기감염 후 2~10주 동안의 잠복기에는 인체내 면역작용을 받지 않고 증식하여 임파계를 통해 퍼져나갈 수 있으며, 혈류를 따라 콩팥, 뇌, 뼈 등을 침범할 수 있습니다. 이 때 투베르쿨린 반응으로 검사하면 진단할 수 있으나 증상이 잘 나타나지 않으므로 적당히 분포하여 인체 면역 기전에 의해 억제되어 있다가 면역 억제제 사용, 과로, 긴장, 규폐증, 기타 면역 기능을 떨어뜨리는 질병에 이환된 경우 면역 기능이 약화된 틈을 타서 인체를 공격하여 위험에 빠뜨릴 수 있습니다.                     

결핵에 걸린 젖소의 우유는 과거에 결핵 발생 원인의 하나였으나, 요즈음은 우유를 소독하여 소비자에게 공급되므로 문제시되지 않으며, 환자의 소유물이나 음식물을 통한 전파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폐결핵 환자는 전체 환자의 85~90%이고, 나머지는 폐외에만 결핵균이 존재하며, 결핵균이 인체 밖으로 나올 정도가 되어야 전파 가능하므로 객담 도말 검사는 전염성을 판단하는데 중요하게 사용됩니다. 
 
폐결핵인 경우 기침, 객담, 발열, 무력감, 체중감소 등이 나타날 수 있으나 특징적인 증상이 없으므로 증상 만으로 진단하는 것은 어렵고, 특히 소아결핵의 경우 증상이 없는 경우가 많으므로 진단이 더 어렵습니다. 스트렙토마이신 이후 많은 결핵약제가 개발되었으므로 의사의 지시에 따라 항결핵제를 복용하면 결핵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으며, 마스크를 착용하고, 실내의 공기를 순환시키며, 위험지역에 자외선 조사를 통한 결핵균 멸균 및 적절한 약제 사용으로 예방이 가능합니다.

결핵이 치료가능한 질병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결핵이 세계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이유로는 (후진국의 경우) 치료약제가 부족하고, 국가적인 결핵 관리 제도가 부족하며, 질병 발생 초기에 부적절한 치료를 하거나, 환자들의 인식이 부족하여 적어도 6개월을 요하는 치료 과정중에 임의로 중단하는 경우가 많고, 또한 치료과정 중에 규칙적으로 약을 복용하라는 의사의 지시에 따르지 않고 투약을 중단했다 재투여하는 등 불규칙적으로 약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일단 결핵으로 진단받으면 의사의 지시에 따라 몇 가지 약을 함께 복용하는 복합요법을 정해진 기간 동안 중단없이 복용하는 것이 절대 중요합니다. 증상이 호전되었다고 해서 환자 임의로 투약을 중단하는 것은 삼가야 합니다.

세계보건기구의 추산에 따르면 현재 전세계에 약 17억명의 환자가 존재하고 있으며, 매년 발생하는 새로운 환자가 800만 명에 이르고 있으며, 매년 290만 명이 사망하는 무서운 질병의 하나입니다. BCG 백신에 의해 예방할 수도 있고, 왁스만의 스트렙토마이신 발견 이후 수많은 항결핵제가 발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진국과 달리, 후진국에서는 아직도 해결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는 까닭에 전체 환자 중 95%가 후진국에 존재할 정도로 후진국에서는 결핵이 건강을 위협하는 가장 큰 원인중 하나입니다.

세계보건기구는 2000년까지 결핵으로 인한 사망률과 이환율을 현저히 감소시키고, 85%의 완치율과 70%의 환자발견율을 목표로 노력해 왔으나 그 결과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참고로 결핵 근절이란 100만명의 정상인 중 1년에 한 명 미만에서 결핵이 발생하는 경우를 가리키며 2030년이 지나야 결핵이 근절되는 국가들이 생겨날 것으로 예상됩니다.

우리 나라의 결핵

우리 나라 문헌에서 찾을 수 있는 결핵에 대한 기술은 <삼국유사>에서 죽은 자의 저주에서 병인을 찾고 있는 구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의서인 <향약집성방>과 <동의보감> 등에서도 결핵에 대한 기술을 찾을 수 있으나, 한의학에서의 결핵은 객관적으로 촉진되는 단일결절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고서에서 현재의 결핵과 같은 질병을 찾아내는 일은 어려운 일이며, 대한결핵협회에서 발간한 <한국결핵사>에 의하면 서양의학이 도입된 후에야 결핵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우리 나라가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것(?) 가운데 의학 분야에서는 단연 결핵과 B형간염이 손꼽히며, 한 때는 “결핵국가”라는 오명을 가지고 있었을 정도입니다. 과거에 비교할 때 현재는 상황이 상당히 호전되었지만 아직도 결핵은 우리 나라에서 큰 문제가 되는 질병의 하나입니다.

1893년 캐나다 출신 선교의사인 제임스 홀과 로젯타의 아들로 태어나 한국에서 태어난 최초의 외국인으로 기록된 셔우드 홀(Shewood Hall)은 캐나다에서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한국에 돌아와 1925년부터 황해도 해주에 있는 구세병원에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에 결핵환자가 많았고, 이들을 위한 치료시설을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으로 1928년 해주에 결핵요양원을 설립한 홀은 한국인들에게 결핵의 위험성을 알리고, 전국민이 결핵 퇴치운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선진국에서 이미 행하고 있었던 것처럼 크리스마스 씰을 처음 발행하였습니다.

지금도 그다지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는 1932년 씰에는 남대문(국보 제 1호는 남대문이 아니라 숭례문이라 해야 옳습니다. 일본이 숭례문이라는 이름을 마음대로 남대문으로 고쳐 놓은 것을 수년 전 문화재 관리국이 공식적인 이름을 숭례문으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입니다)이 도안되어 있으나 원래의 도안은 거북선이었습니다. 그러나 항일 사상을 고취한다는 이유로 일본이 거북선을 도안으로 사용하는 것을 막은 것이 첫 번째 씰에 숭례문이 등장한 이유입니다.

크리스마스 씰은 1940년까지 9회 발행되었으나 태평양 전쟁 발발 직전 일본이 홀에게 간첩의 누명을 씌워 출국시키면서 발행이 중지되었습니다. 그 후 문창모의 주도로 1949년 씰 발행이 재개되었으며, 1953년부터 지금까지는 그 해 설립된 대한결핵협회에서 크리스마스 씰을 발행하고 있습니다.

광복이 되고, 한국전쟁을 거치면서도 결핵은 여전히 무서운 질병으로 남아 있던 중 1962년부터 국가 결핵관리 제도가 도입되었고, 1965년부터 5년마다 한 번씩 국가에서 결핵실태 조사를 실시하면서 우리 나라도 서서히 “결핵 국가”라는 오명에서 벗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X선 사진에 나타나는 유병률은 1965년의 5.1%에서 1995년에는 1.0%로 낮아졌고, 1년 동안 감염될 수 있는 위험률은 1965년의 5.3%에서 1995년 0.5%로 낮아졌으며, 30세 이하의 경우 BCG 접종률은 1965년의 24.3%에서 1995년 91.8%로 높아져 결핵 환자 발생이 현저히 줄어든 것입니다. 1970년대만 해도 농촌 지역을 순회하는 보건소 차들이 X선 사진기를 싣고 돌아다니며 건강검진을 하는 모습들을 쉽게 볼 수 있었는데 당시 X선 사진 촬영의 가장 큰 목적이 결핵환자 발견이었습니다.

대한결핵협회 설립과 범국가적인 결핵실태 조사, 그리고 경제 수준 향상에 의한 국민 보건 수준의 향상, 항생제 발달과 국민 건강에 대한 관심 증가 등에 의해 결핵에 대한 위험성이 과거보다 현저히 낮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 나라의 경우 노년층은 물론 20~30대 환자발생이 계속되고 있으므로 완전 해결을 위해서는 더욱 더 노력을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최근에 와서 결핵에 대한 내성균 발생 빈도가 높아져 같은 결핵에 걸려도 외국에서 걸린 환자는 쉽게 치료되지만 국내에서 발생된 환자는 치료되기 어렵다는 속설까지 등장할 정도입니다.

어렴풋하게 이제 사라져가는 질병으로 생각되고 있는 결핵이 사실은 지금도 우리 나라에서 1년에 3,000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 가는 무서운 질병이며, 매스컴에 자주 출연하는 에이즈(후천성 면역 결핍증)나 광우병보다 훨씬 우리 곁에 가까이 있는 발생빈도가 높은 질병이고, 아직도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은 질병이라는 점을 명심해야겠습니다. / 편집위원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04/03/26 [11:15]   ⓒ 대자보
 
  • 도배방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