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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에 무릎꿇는 자칭 일등신문 민족정론지
광고, 정치, 그리고 언론의 함수관계, 발행부수 만능버려야
 
황진태   기사입력  2003/12/29 [11:20]

최근 한국방송광고공사(kobaco.co.kr)가 발간한 2003년 MCR 연례 보고서 (Media & Consumer -매체 및 제품 이용행태 연구)에 따르면 국민들의 매체 별 관심도가 TV(4.8점), 인터넷(3.8점), 신문(3.5점), 라디오(2.9점), 잡지(2.7점) 순으로 TV의 매체 영향력이 가장 높게 나왔으며, 상승 추세인 것과는 대조적으로 신문은 인터넷에 추월당하고, 하강 추세인 것으로 나타났다. 신문사의 근본적인 체질 개선이 되지 않는 한 앞으로도 신문의 매체 영향력이 계속 떨어짐으로써 광고주들의 신문 광고 기피와 맞물려 고질적으로 신문 경영에 악순환을 불러 일으킬 것이다. 즉, 신문사 재정의 8~90%를 이들 광고수입으로 유지되는 것을 상기해볼 때 이는 한마디로 신문사보고 문닫으라는 소리. 뻔한 말이나 근본적인 신문사의 체질 개선이 시급한 때다. 하지만 체질 개선이 쉬운 일일까. 이 글에선 신문사의 체질 개선을 위한 몇 가지 얘기를 나눠보고자 하다.

정론지? 광고지? 판단잣대는 편집권 독립이 관건

▲한국경제신문사 홈페이지     ©한국경제신문
기자는 한국경제신문이 삼성 이건희 회장의 변호사인듯 착각을 불러오는 말랑한 기사와 그 반대급부로써 한국경제신문의 삼성 광고수주와의 연결고리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비판해왔듯이 대기업으로부터 광고를 수주하는 대부분의 신문사들은 대기업이 좋아하는 논조에 보도프레임을 맞출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광고지와 정론지의 갈림길에서 신문은 어떤 길로 들어서야 할까.

여기서 한국 신문사들의 선례를 보는 것도 좋은 참고가 될 듯하다. 한국 신문사의 선배 격인 100여년 전 독립신문의 광고와 관련된 김광수의 분석을 보면 “광고료 수입은 전체 수입의 10.6%를 점하였는데, 독립신문사는 명함 찍는 기계를 들여오고 문구류도 판매하는 등의 방법으로 사업다각화를 통해 재정난을 타개하고자 하였다.”(김광수,독립신문과 광고 분석,언론과 사회,1997년,67쪽, 강준만,권력변환,107쪽 재인용) 이를보면 언제든 신문사의 재정난은 늘 상 상존해왔음을 알 수 있고, 독립신문사의 수익모델은 현재 신문사들에게 신문사가 ‘수입의 다각화를 통해서 편집권의 독립을 유지해야 한다’는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교훈을 알려주고 있다.

혹시 시대의 간극이 얼마인데 기계적인 비교를 할 수 있냐며 반론하는 사람도 있을 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프랑스에서 망명생활을 하며 프랑스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보여줬던 홍세화 씨를 통해서 프랑스 신문의 재정상태를 보도록 하자.

“<르 몽드> 지면에서 광고가 차지하는 비율은 10~15%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신문사의 경영 총비용에서 신문 판매대금과 광고 수입의 비율이 현재 40대 60정도인데 앞으로 반반 정도로 균형을 맞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여기에는 신문 자체의 가치를 광고 가치를 위해 떨어뜨릴 수 없다는 주장이 담겨 있다. <르 몽드>는 신문 판매대금을 ‘시민 독자들이 동참하는 부담금’으로 아주 소중히 여긴다. 광고 수입을 늘리려 한다면 그만큼 독자 판매대금을 늘려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는 셈이다.” (홍세화,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 131쪽)

이렇게 과거와 해외사례를 통해서 한국 신문들이 ‘배보다 배꼽이 더 크게’ 비데와 자전거를 경품으로 주는 광고지, 상업지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는 변명의 틈은 보이지 않는다. 개선의 의지는 있는가. 틈은 스스로가 만드는 것이다. 제도적인 침식작용은 그 다음이다.

광고정치학의 시점에서

언론과 광고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는 요즘, 기자는 앞으로 언론학과에서 광고정치학이라는 강의를 개설해도 재밌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떠올려보았다. 이렇게 학습사례가 다양하니 말이다.

얼마 전 공군에서 차세대 전투기(FX)사업으로 미국에 굴욕적이고 종속적으로 ‘한물 간’ F-15전투기를 선택 한 후에 조선일보는 물론 이거니와 한겨레에서도 보잉사 전투기 광고가 실렸었다. 이 때문에 네티즌들 간의 비판이 거세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간에 한겨레에서도 F-15 전투기가 선정되는 과정에 대해서 비판적인 기사를 실어왔음을 상기한다면 비판 받아 마땅하였다. 하지만 손석춘 논설위원은 한대신문(한양대)과의 인터뷰에서 “신문기사와 광고를 분리해 생각해 줬으면 좋겠다. 그런 광고를 안 넣었으면 좋겠지만 신문사도 자본주의시스템에 의해 돌아가는 한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그 만큼 국내 대기업들이 한겨레에 광고를 주지 않는다. 그런 광고를 내면서 한겨레는 그들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한겨레는 세계 몇 안 되는 국민주 신문으로 실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 ‘장렬한 최후’를 맞이할 수 없지 않은가.”라며 ‘변명’을 하였다. 과연 손석춘의 말대로 신문기사와 광고를 분리한 채 보는 게 가능할까. 물론 그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퇴로를 만들었지만 말이다. 

이러한 ‘광고와 신문기사의 분리론’은 얼마 전 오마이뉴스에 기사를 제공해왔던 인권운동사랑방이 지난 11월 20일 오마이뉴스가 ‘한-칠레 FTA(자유무역협정)’ 비준을 촉구하는 경제5단체의 의견광고로 실자 “현실의 권력관계에서 사회적 약자인 농민들을 생존의 벼랑 끝으로 떠미는 ‘특정 정책의 홍보 광고’를 싣는 것은 ‘진보언론’을 표방한 오마이뉴스의 창간정신과 존재이유를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라”며 기사제공을 중단했던 사건에서도 다시 불거졌다. 당시 오마이뉴스의 변명 또한 광고와 신문기사는 분리된다는 손석춘의 “어쩔 수 없는 상황”과 비슷하였다.

광고는 이미 신자유주의를 옹호하는 경실련이나 정부정책에 맞추어 ‘정치화’되어 있다. 대기업의 부패, 비리 관련기사를 축소하여 국민의 알권리를 침해하는 상황에서 신문은 이미 사회적 공기(公器)가 아니라 사익추구집단이 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손석춘이 국내 대기업이 광고를 주지 않는 다고 하여 끊임없이 한반도 전쟁위기를 불러일으키는 군산복합체의 광고를 받는 것은 결코 정당화 될 수 없다. 한겨레의 재정상태가 어렵다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러나 손석춘의 논리는 ‘한겨레’ 기획위원인 홍세화의 <르 몽드> 사례를 언급과도 모순이지 않은가. 오히려 ‘한겨레 정기 구독 캠페인’과 같은 새로운 방식의 도전이 진정한 개혁이고 정론지로서 꾸준히 진전시켜야 하지 않겠는가. 기자가 너무 한겨레의 재정상태를 너무 안이하게 보는 걸까. 인터넷 신문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손석춘이 한 때 기자로 재직했던 동아일보가 유신체제하에서 선배 동아일보 기자들이 군사독재정권에 맞서며 민주화 투쟁의 결과 1974년 12월 16일부터 동아일보 백지광고사태를 상기해본다면 그때 보다야 현재의 상황이 낫지 않은가.   
  
발행부수 만능주의를 버려야

MCR 보고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직은 인터넷 광고 집중도가 낮은 수준이지만 매체별 관심도에서는 신문을 앞서고 있다. 조선일보에서는 ‘조선닷컴’을 한겨레에서는 ‘인터넷 한겨레’ 등을 세우는 등 종이신문에서도 점차 인터넷 신문시장에 대한 대비와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듯이 이러한 시대흐름에 비추어 갑자기 종이신문시장이 없어지는 일이야 없겠지만 넓게 보아서 인터넷 신문으로의 전환을 주시해야 할 것이다. 최근, 메트로, 포커스 등의 지하철 광고 찌라시로 인하여 가판 판매률은 더욱 떨어지고 있고, 신문공동판매제 등의 제도적인 보완만으로 과점 세력인 조중동을 제외한 영세신문들의 발행부수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그런데 여기서 꼭 200만부가 넘어야만 정론지이고, 영향력 있는 신문이라는 ‘발행부수만능주의’를 버려야 하지 않을까 충고 드리고 싶다. (기자들 중에는 물론 이러한 ‘발행부수와 정론지 간의 함수’관계가 성립되지 않는 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노파심에서 사주나 몇몇 기자들은 아직도 잘 모르고 있어서 언급한다.) 한겨레만 하더라도 50만부 수준의 발행부수를 보이고 있는데 이 또한 기계적인 비교일 지는 모르지만 르 몽드의 발행부수도 보통 50만부 수준이 아닌가. 영국의 ‘선(Sun)’지 같은 옐로우 저널리즘이야 300만부를 넘기는 것을 볼 때 조선일보의 질보다 양을 추구하는 촌스러운 숫자자랑은 결국 조선일보가 스스로 옐로우 저널리즘을 추구하는 상업지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조선일보 보도프레임은 물론이거니와 이러한 조선일보식 발행부수만능주의를 좇아갈 필요가 없다.

자발적 유료화는 구걸인가

또한 종이 신문에서 인터넷 신문으로의 전환에 대해서 앞에서 언급했듯이 현재 인터넷 신문 시장에서도 수익성 창출과 관련하여 종이 신문과 비슷하게 대기업 광고주가 중요하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 오마이뉴스가 시행하는 ‘자발적 유료화’는 광고주로부터 신문이 독립적일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고 본다. 월간 인물과 사상과 같은 잡지에서도 후원회를 통하여 독자배가운동을 지원하는 방법을 이용하는 데 인터넷 신문뿐만 아니라 종이신문에서도 이러한 다양한 대안을 제시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혹자는 이러한 독자들이 돈을 내는 것에 대해서 ‘구걸’이란 용어를 쓰면서 못마땅하게 보는 의견도 있지만 “성숙된 시민의식은 신문을 판단할 때에 광고가 아닌 신문 자체에 높은 가치를 주는 신문일수록 정론지로 평가할 것이다. 시민들의 참여 속에 공익을 지향하는 신문과 광고에 의존하여 신문사의 이윤을 추구하는 광고지를 확실하게 구분할 줄 아는 시민의식의 성장”을 강조한 홍세화의 주장처럼 이는 시민의식의 부재로 밖에 볼 수 없다.

다시 거듭 강조해서 말하지만 언론은 사회적 공기(公器)다. 언론을 정부의 제4부라고 일컫듯이 언론의 역할인 국민의 알 권리를 만끽해주는 서비스를 향유하는 대가로써 독자의 자발적 유료화는 ‘구걸’이 아닌 ‘세금’의 형태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광고는 정치다

정치라는 말이 너무 남발되어서 ‘광고는 정치다’라고 말하는 것도 식상한 감이 없지 않다. 커뮤니케이션 이론을 공부하지 않더라도 광고의 영향력이 일상 생활에서 얼마나 광범위하고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는 지는 독자 개개인이 일상생활에서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독자나 기자나 ‘광고는 정치다’는 것을 은연 중에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자가 다시 이런 글을 쓰게 된 연유는 최근에 ‘오마이뉴스와 인권운동사랑방’ 사건과 더불어 기자가 삼성에 대한 언론의 봐주기식 혹은 변호사인 듯한 보도에 대해서 경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자 하는 뜻에서 썼다. 광고와 신문기사의 분리론은 유령일 뿐이다.

길거리 나이트 찌라시부터 시작하여 유비쿼터스(Ubiquitous) 사회의 모바일 폰을 통한 첨단방식으로 전송되는 광고까지 삶 곳곳에서 봇물처럼 쏟아지는 광고들에 대하여 앞으로는 이러한 광고를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의식적으로 필터링 하는 사고를 독자들이 조금 더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한다. 그러한 관심에서부터 신문시장은 살아날 것이다./사회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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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3/12/29 [11:20]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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