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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컨의 포용정치를 다시 생각한다
[김영호 칼럼] 정치적 반대자의 소리 소통, 설득, 포용으로 감싸 안아
 
김영호   기사입력  2013/03/20 [13:32]

미국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 그는 역사의 고비마다 새롭게 태어나 재조명되곤 한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감독한 영화 ‘링컨’이 아카데미 남우 주연상을 수상함으로써 그의 포용정치가 다시 세계인에게 감동을 안겨준다. 링컨 역을 맡아 세 번째 아카데미 주연상을 받은 다니엘 데이-루이스의 연기가 링컨보다 더 링컨다워 빛을 더한다. 그는 당초 스필버그의 출연요청을 거부했다.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서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그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후일담이다.

이 영화의 원작은 역사학자 도리스 컨스 굿윈이 부제를 통해 말한 듯이 링컨의 정치적 천재성을 재조명한 ‘경쟁자의 팀’(Team of Rivals)이다. 굿윈은 하버드 대학교에서 10년간 ‘대통령의 통치’를 가르쳤으며 1995년 풀리처상 역사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는 링컨의 가난과 역경의 삶을 중심으로 경쟁자들의 이야기를 엮었다. 링컨과 동시대인의 일기, 회고록, 신문기사, 그리고 사학자들의 글을 분석하고 정리해 엮은 944쪽의 방대한 역사책이다. 스필버그는 그가 책을 집필하기도 전에 판권을 사들여 영화제작을 준비했다.

링컨은 독학으로 변호사가 됐다. 그는 단 한번 하원의원에 당선되었을 뿐이고 상원의원 선거에서 두 번 낙선했다. 무명 정치인인 그가 1860년 11월 대통령 선거에 도전했다. 공화당의 대통령 지명전은 처음부터 뉴욕 상원의원 윌리엄 시워드, 오하이오 주지사 새먼 체이스, 미조리주 판사 에드워드 베이츠의 각축전이었다. 결과는 의외여서 링컨이 3파전의 틈새를 비집고 세 차례 투표 끝에 과반수를 겨우 넘겨 당선됐다.

링컨은 1858년 상원선거 유세에서 “인간은 노예제도를 옹호하면서 자유를 사랑하는 위선자”라는 연설로 정치적 두각을 나타냈다.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남부지역이 긴장했다. 그의 막료들은 남부를 무마하기 위해 노예제도에 유연한 자세를 보이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그는 무언의 정책을 고수했다. 어떤 발언도 남북을 자극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860년 12월 20일 사우스 캐롤리나가 연방탈퇴를 선언한 데 이어 남부 6개주가 뒤따라 남부연방을 결성했다. 남북부 8개주도 탈퇴를 위협하고 나서 연방붕괴의 상황이 전개되었다.

링컨은 공화당 결속에 나서 대통령 경선 경쟁자들부터 포섭했다. 붉은 양탄자를 밟고 살아온 그들은 성장배경과 교육환경이 링컨과는 판이했다. 그 까닭에 그들은 링컨을 촌뜨기 변호사로 업신여겼다. 포용의 지도력이 그들을 설득했다. 윌리엄 시워드가 국무장관, 새먼 체이스는 재무장관, 에드워드 베이츠는 법무장관을 맡았다. 경쟁자와 경쟁자의 조합이 이뤄진 것이다. 전쟁장관 에드원 스텐턴는 그를 팔 긴 원숭이라고 조롱하던 인물이었다. 1864년 대선에서는 부통령 후보로 민주당의 앤드류 존슨을 발탁해 그의 주위가 또 다시 놀랐다.

1861년 4월 12일 남부군이 사우스 캐롤리나 찰스턴항의 북부군 요세 포터에 포격함으로써 전쟁이 기어코 터졌다. 링컨은 전쟁을 막기 위해 남부군의 요구대로 포터에서 군대를 철수하자는 각료들의 권유를 거부했다. 철수는 남부연합의 독립을 인정하여 분단을 영구화한다는 이유였다. 4년 넘는 전쟁으로 62만5,000명의 전사자가 발생했다. 전쟁피로증이 쌓여 그의 재선전망이 어두웠다. 휴전논의가 있었으나 링컨은 이 또한 단호하게 반대했다. 휴전은 분단을 고착화한다는 이유였다. 그의 결단력이 분단된 미국을 다시 하나로 묶었다.

통합과 포용의 지도자 링컨, 그는 노예해방에 확고한 신념을 가졌지만 반대자를 끌어안기 위해 유연한 자세를 보였다. 그의 의지를 의심하는 급진적 폐지론자들을 오히려 설득해야만 했다. 전쟁 막바지에 노예제도 폐지를 명시하는 수정헌법 13조의 의회통과가 불투명했다. 공화당의 표가 2/3에서 20표나 모자랐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그를 ‘에이브러햄 아프리카누스 1세’ 황제라고 격렬하게 비난했다. 그는 노회한 정치꾼이라는 소리를 감수하면서 그들을 설득하여 2표 차이로 인류의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

남부군이 항복한지 닷새 뒤인 1865년 4월 14일 링컨은 흉탄에 맞아 쓰러졌다. 그의 정적이었던 국방장관 에드윈 스탠턴은 그를 안고 “여기, 가장 위대한 사람이 누워 있다고 말했다. 남부연합 대통령이었던 제퍼슨 데이비스는 ”그의 죽음은 남북전쟁 패배 다음으로 암울한 일이다“라고 말했다. 그가 죽은 지 150년 가까이 지났지만 아직도 많은 미국인들이 그를 민주주의의 순교자하고 말한다. 그는 마지막 날까지 정치적 반대자의 소리를 소통, 설득, 포용의 지도력으로 ‘세 귀를 열고 들었다’.



 

 





언론광장 공동대표
<건달정치 개혁실패>, <경제민주화시대 대통령> 등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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