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미국 남북전쟁에서 배우는 한국전쟁의 비극
'게티스버그'의 리장군과 이승만 김일성은 어떻게 다른가?
 
황진태   기사입력  2003/11/19 [00:51]

300원 비디오에서 300원 이상 뽑아내기
 
일본에서 ‘잃어버린 10년’을 보내는 동안 생겨난 100엔 샵의 마케팅을 한국에서 벤치마킹 한 것이 300원 비디오샵이 아닐까? 실상 300원 비디오 대여란 게 `신프로`가 아니라 먼지가 부옇게 쌓였고 방구석에서 감상하라는 듯이 구석에 박혀 숨어 있다. 이러한 300원 비디오 영화 중에서 최근 다시 보게 된 두 편의 영화에서 한국사회가 겹쳐진다.  
 
이번에 소개하고자 하는 영화는 남북전쟁을 소재로 한 `라이드 위드 더 데블(Ride with the devil)`과 “남북전쟁을 남부인의 시각에서 다룬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대한 테드 터너의 대답”으로 불리며 화제를 모았던 `게티스버그(Gettysburg)`다. 우선 두편의 간단한 줄거리부터 살펴보자.
 
라이드 위드 더 데블(Ride with the devil)의 간단한 줄거리
 
▲라이드 위드 더 데블(Ride with the devil) 포스터     ©씨네서울
영화의 시대배경은 남북전쟁 초반기. 영화의 주인공은 죽마고우인 제이크와 잭으로 미국 남부에 살면서 분리주의가 습속 되어-독일계 이민을 온 자는 대부분 합병론자임에도 불구하고제이크의 아버지도 합병론자다- 제이크는 잭과 함께 남부의 대표적인 분리론자로 북부와 싸운다. 이들은 비정규군으로 활동하는 데 거기서 만난 홀트라는 이름을 가진 흑인은 ‘흑인’임에도 불구하고 남다른 사격솜씨와 조지란 백인과의 ‘우정’으로 인해서 정규군으로 활동한다. 겨울이 다가와 ‘동면’을 하기 위하여 도움을 요청한 이들은 봄까지 훗날을 기약하며 흩어지게 된다. 동면을 부탁한 곳에서 잭은 수우라는 과부댁과 사랑을 꽃피우지만 결국 잭은 총격전에서 숨을 거두게 되고, 이후 계속된 전투에서 제이크와 홀트도 부상을 입어 홀트의 주인격인 친구 조지도 숨을 거두게 된다. 부상을 치료차 다시 만난 제이크와 수우는 결혼을 하게 되고, 전쟁은 북부의 승리로 끝나면서 제이크는 캘리포니아 근처로 수우와 잭의 아이와 함께 떠나고 홀트는 진정한 자유를 찾아 어머니를 찾기 위해 헤어진다.
 
게티스버그(Gettysburg)의 간단한 줄거리
 
게티스버그의 배경은 남북전쟁이 한창 중인 1863년경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북군 지휘관인 체임벌린과 남부군을 맡고 있는 로버트 리 장군과 롱스트리트가 있다. 영화의 시작은 로버트 리 장군이 북군을 치기 위해서 포토맥 강을 건너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남군이 만약  포토맥에서의 전투에서 패할 경우 미국 대통령 자리를 북군에게 내줘야 하는 절대절명의 순간이었고 때마침 북군에서 군단이 파견되는 정보를 접하고 전략적으로 중요한 ‘게티스버그’에서 전투는 7월 1일 첫 전투가 시작된다. 

체임벌린은 상대적으로 터무니없이 적은 병력과 무기로 작은 둥근 꼭대기(?)라는 고지를 지키기 위해서 남부군을 상대로 전투에 임한다. 이 전투에서 사실상 체임벌린이 지휘하는 북부군의 탄약이 바닥나는 등 북부군의 패배가 확실시 되었지만, 백병전을 각오한 마치 ‘마르스(Mars)의 재림’을 보는 듯한 신들린 마냥 북군과 싸워 결국에는 승리한다. 영화는 종막으로 치달아 7월 3일 전투가 남겨졌다. 예상외의 패배로 인하여 롱스트리트와 로버트 리는 작전에 관한 의견충돌을 하는 데 결국 아군의 희생이 적은 측면공격을 주장한 롱스트리트의 의견은 묵살되고 정면돌파를 주장한 로버트 리의 의견이 결정된다. 하지만 예상했듯이 로버트 리 그리고 남부군은 체임벌린의 북부군에게 여지없이 패배한다. 그렇게 무참히 패배했지만 사기가 남아있는 남부군의 모습 그리고 게티스버그 전투에서 승리한 북부군의 모습을 보여주며 영화는 끝을 맺는다.       
 
라이드 위드 더 데블 VS  게티스버그, 영화는 시대고민을 담지해야만 하는 가?
 
▲게티스버그(Gettysburg) 포스터     ©씨네서울
라이드 위드 더 데블과 게티스버그의 배경은 남북전쟁이다. 하지만 같은 시대배경 속에서도 두 영화는 대조되는 점이 발견된다. 나는 먼저 ‘그 시대상황이 얼마나 리얼하게 영화에 녹아있느냐’에 관해서 중점적으로 비교해보았다. 이점에 있어서 라이드 위드 더 데블은 게티스버그 보다 현실에 땅을 밟고 있지 못한 듯하다. 라이드 위드 더 데블의 배경장소인 ‘캔사스’(“1850년대 초 캔사스가 새로이 주로 가입될 때, 이 지역은 원래 1820년에 맺었던 ‘미주리타협:북위 36도 30분 이상이 지역에는 노예주를 만들 수 없다는 안건’에 의해 자유주가 되어야 했다”(연동원, [영화 대 역사], 학문사)가 노예제와 밀접하게 관련된 정치적인 뇌관임에도 불구하고 등장 인물들의 고민은 총맞아서 새끼 손가락이 잘리고, 친구의 팔이 잘리는 장면에서 적(북부)를 향해서 욕 한번 하는 장면이 없으며 그저 '달관한 듯한' 순응으로 일관하며, 단지 연애에만 미쳐있는 듯 보인다.

특히 가수로 알려져 있는 jewel의 연기를 기대했던 나로서는 영화의 시대적 상황에 대한 고민과 반추는 없이 전쟁을 통해서 죽은 남편을 헌신짝처럼 버리고(아무리 사랑이 고달픈 젊은 여자라도) 새로운 남자(잭)를 만나서 아이를 낳고서 다시 그 새로운 남자가 죽자 그 새로운 남자의 친구(제이크)를 다시 결혼한다는 거. 오직 결혼에만 애걸복걸하는 듯한 장면에서 이 영화의 시대배경보다도 훨씬 뒤인 한국전쟁에 의하여 이산가족이 된 남편과 부인의 재회장면만을 보더라도 jewel이 맡았던 수우 역은 그 시대상황에 있어서 현실적이기 보다는 요즘 연애영화의 ‘인스턴트 러브’에 더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면에 게티스버그는 시대고민이 영화 곳곳에 잘 녹아져 있었다. 7월 1일의 첫 전투가 벌어지고 난 후에. 체임벌린이 부하와 흑인노예제에 대해서 토론하는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체임벌린이 “포틀랜드에서 본 흑인들의 눈을 보면 그들은 모두 백인과 똑같은 사람이란 것을 알 수 있어. 인간은 무한한 능력과 놀랄만한 활동력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야. 실로 천사와 같다고 할 수 있지.”하고 주장하자 이에 대해서 부하상사는 “만일 인간이 천사와 같다면, 이는 죽음의 천사가 틀림없어요. 사실 지구상에는 어떤 것도 똑같은 것은 없다고 봅니다. 저보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있듯이 말입니다. 종족 혹은 국가라는 문제가 결코 작은 문제라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정의입니다. 그것이 제가 여기 있는 이유죠.”라며 반론한다. 이러한 토론은 비단 북부군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남부군에서도 벌어진다.
 
역시나(?) 남부군은 북부군의 전쟁논리와 상반된다. 남부군의 한 지휘관은 “저희 집은 버지니아에 있습니다. 내 고향에 있는 정부가 나의 국가입니다. 따라서 워싱턴에 있는 대통령이 버지니아를 다스릴 수는 없으며 버지니아 사람에 의해 다스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링컨은 단지 양키들의 대통령일 뿐입니다. 그들은 돈밖에 모르고 흑인얘기만 합니다.”라며 자신들의 흑인노예제 옹호 논리를 펼친다.
 
▲영화 게티스버그중 한장면    ©씨네서울
게티스버그의 원작인 마이클 사라의 ‘killer angels’가 퓰리쳐 상을 수상했던 것은 아무래도 이러한 사회적인 의제에 대한 고민과 성찰이 영화 곳곳에 짜여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
 
영화라는 게 재미를 추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영화가 ‘사회를 보는 거울’로서의 역할에 점수비중을 두고서 평가한다면 나는 라이드 위드 더 데블 보다는 게티스버그에 더 많은 점수를 주고 싶다. 그렇다면 라이드 위드 더 데블은 그저 별볼일 없는 영화일까? 그건 아니다.
 
보통 역사라 하면 '승자의 역사'이고 역사의 주체가 되는 인적요소는 마치 하나로 통일 된 듯이 서술된다. 이는 80년 5공 집권당시 모두가(대부분의 매체에서) “광주민주화운동”을 “광주사태”로 “광주시민”을 “폭도”로 규정한 극우의 애꾸눈으로만 잣대를 들이 내밀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이러한 한쪽으로 과잉된 편향은 그 ‘사건성’에 대한 올바른 역사인식이 결여될 수 있다. 라이드 위드 더 데블은 이러한 편향을 피할 수 있는 시선을 제공해준다. 영화평론가 연동원에 의하면 이 영화는 “남북전쟁을 소재로 한 기존의 영화들의 이분법적인 구조를 벗어난다. 즉 감독은 북부가 노예폐지를 지지함으로써 정의의 편이고 남부는 정반대의 입장이라는 도식적인 틀을 따르고 있지 않다. 더불어 일반적으로 독일계가 북군을 지지 한다는 틀을 벗어나서 주인공 제이크는 남부에서 자랐다는 이유만으로 남부를 지지하고 있다. 또한 흑인도 당연히 북부를 지지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서 흑인 홀트는 백인과의 ‘의리’로 인하여 남부를 지지하고 있다.” 

이는 게티스버그에서 남북부간의 각 진영에서 각기 다른 토론을 들어봄으로써 관객에게 균형 잡힌 역사를 파악하는 할 수 있는 ‘배려’를 제공해 주듯이 남북전쟁에 대해서 라이드 위드 더 데블의 등장인물의 ‘캐릭터’를 통해서도 이러한 ‘배려’를 제공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다양한 시각의 제공 또한 역사영화를 보는 중요한 이유가 될 것이다.    
 
제3세계에서는 다른 영화보기가 필요하다
 
▲라이드 위드 더 데블의 한장면     ©씨네서울
역사영화라는 장르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 시청각을 통하여 관객이 쉽게 스크린을 빨아들일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영화는 교육적 측면에서도 반드시 유용하다고 본다. 하지만 역사영화라는 레테르를 붙였다고 하여 영화의 스토리를 맹목적으로 진실로서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이러한 주의해야 할 예로 여기서 언급한 게티스버그 전투장면을 들어보자. 이 영화에서는 “북부와 남부 양측 군대에 임대하여 싸운 흑인이 전혀 없으며 상대방측 군대에 의해 피해를 본 민간인이 누락되었다.”  이는 영화에서 뿐만 아니라 오늘날 미디어를 통하여 시청하게 되는 CNN의 이라크 전쟁 LIVE방송에서 자국 군인의 희생은 보도하더라도 의도적으로 민간인의 희생은 배제하는 행태에서 시청자의 이라크 전쟁의 전체적인 조망을 미디어가 막고 있다는 점을 통하여 또 하나의 미디어인 영화 또한 게티스버그의 예처럼 역사적 사실을 왜곡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하나. 이들 제 1세계의 역사영화를 통해서 제 3세계 관객들이 이들 영화가 만들어진 제 1세계 관객과 똑같이 느끼고 감정의 배설물을 쏟아낸다는 것은 ‘사치’가 아닌가 하는 생각해본다. 예를 들어 영화 007 시리즈에서 주인공 본드의 악당들을 처치하는 모습을 흠모하는 관객이 되기보다는 그 본드가 소탕하는 악당이 사실은 미제국주의에 의하여 짓눌린 우리와 같은 제3세계인 중동인이였다는 것을 비판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필터로 걸러 보기는커녕 오히려 이들 제1세계 영화를 통해서 우리 관객들이 더 배워야 할 점도 있다.
 
남북전쟁은 내전이었다. 그렇다면 한국전쟁은?
 
바로 게티스버그에서 로버트 리 장군에 대한 묘사다. 보통 패장에 대해서는 승자의 입장에서 가혹할 정도로 폄하 되어 묘사된다. 그러나 로버트 리 장군은 자신의 잘못된 전략에 의한 엄청난 패배에도 불구하고 승리자인 체임벌린 못지않게 비중 있게 화면을 차지하고 있다. 로버트 리가 비록 패배했으나 병사들에게 자신의 잘못을 크게 시인하자 다시 전투를 하자며 전의를 불태우는 병사들을 보건 데. 이는 결국 남북전쟁은 ‘내전’이었다는 측면에서 남부군은 비록 적이었지만 ‘내전’이란 정치적 상황에서 즉, ‘다른 나라’와의 전쟁이 아니었기에 로버트 리 장군은 승리자 못지않은 훌륭한 지휘관으로 묘사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로버트 리에 대한 묘사는 한국의 경우는 어떠한가? 한국전쟁을 예로 들어보자. 한국전쟁은 엄연한 내전이었다. 해방 직후 여운형 선생의 조선인민공화국을 부정하고 분해한 미군정과 여기에 빌붙은 친일친미세력에 의하여 세워진 5.10선거에 의해서 건국된 대한민국은 보수인 김구선생조차도 역사적 정당성이 불구임을 주장하며 불복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남한에 비하여 완벽한 일제청산과 자주적 역사행로를 이행하고자 한 북한으로서는 한반도 분단을 저지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내전’의 성격으로 발발한 한국전쟁이 침략자, 미국의 개입으로 인하여 국제전으로 확산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휴전 상태하에서 한국인의 반공교육은 북한을 주적으로 간주하며 통일의 길은 요원하다. 왜 일제에 대항하여 싸웠던 김일성에 대해서는 로버트 리처럼 묘사할 수 없는 것인가? 미제앞잡이 구실을 했던 이승만은 ‘국부’로 지칭하면서 말이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 분명 제3세계 관객은 특히, 한국의 경우 제1세계 헐리우드 영화라도 배워야 할 건 배워야 한다.  
이렇게 기자의 부실한 영화평을 백날 읽어봐야 소용없다. 신프로도 아니고 단돈 300원이면 소개한 영화 두 편중 하나는 골라서 볼 수 있다. 지금 당장 비디오 샵으로 가서 영화를 보고서 독자 각자가 이글 이상의 사고의 나래를 폈음한다./사회부 기자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03/11/19 [00:51]   ⓒ 대자보
 
  • 도배방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