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영남패권이데올로기의 수호자들은 누구인가
영남패권이데올로기는 비윤리,비합리,비효율,불공정의 총합
 
이경렬   기사입력  2003/10/24 [11:20]

1. 가치 체계
 
진실 은폐를 위한 개념의 왜곡

순진을 가장한 사람들은 한국 사회가 가진 망국적 병폐를 들 때 지역감정, 지역주의, 지역갈등 등을 꼽는다.  이들은 우리 민족의 역사나 외국의 예를 끌어 들이며, 지역감정은 애향심의 발로로서 인간의 건강한 정서이므로 지역주의라는 대결로만 번져가지 않으면 문제될 게 없다라느니, 지역주의도 인간의 삶에서 안정을 담보담기 위한 공동체의식의 연장이므로 지나치게 이기적이지 않은 선이라면 문제될 것이 없다느니, 지역갈등도 단지 각 지역간의 지배집단들이 벌이는 이권다툼의 확대해석일 뿐 각 지역 대중들간의 갈등은 아니라느니, 말을 돌리며 가장 핵심되는 문제를 애써 비켜간다.  위의 세 가지 개념은 모두 쌍방향, 즉 거의 대등한 <두 지역>간의 대립을 공통분모로 거느린다.  그런데 이런 현상들은 지구상 어느 땅 어느 고을을 가든 언제나 마땅히 마주칠 수밖에 없는 인간 사회의 원초적 모형이고 현실적 실체이다.  이들은 주장하기를, 고로 한국의 지역문제는 우려할 만 현상이 아니다라는 결론을 도출해낸다.  그 현상이 '보편적'이므로 곧 <정상적>인 범위 안에 있다라고 진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의 지역문제는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가치체계적으로 별 문제를 야기시키지 않으니 안심하라고 타이른다. 
 
그런데 이들이 언급하기를 가장 두려워하는 부분이 따로 있다.  바로 '지역패권주의'라는 개념이다. 지역패권주의는 위의 세 가지 개념과는 다르게 어느 두 지역간의 문제가 아니라는 관점에서 출발한다.  즉, 어느 <한 지역과 여타 전 지역>간의 문제라는 해석이다. 지역패권주의란 위의 세 가지 개념과는 판이한 시각으로 본 지역문제 접근법이다.  시각이 다른 것만이 아니라 이제야말로 실체의 중심을 정면으로 건드리는 작업이다.  더구나 '영남패권주의'라는 논제가 나오면 이들이 경기를 일으키고 마는데, 그 이유는 이 새로운 개념의 출현으로 말마암마, 이들은 자신들이 이제까지 꺼려하고 극구 기피해오며 순전히 남의 곁다리만을 대신 긁어왔었다는 참회론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영남패권주의에 대한 이들 학자군의 저항은 틀림없이 일반 대중의 그것보다 훨씬 거셀 것이다.
 
그럼, 영남패권주의가 위의 세 개념들보다 얼마나 명쾌하게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설명하는지를, 가치체계라는 프리즘을 통해 보기로 하자.
 
가치체계 파괴 : <공평> 개념의 부재

국가에서 시행하는 정치, 경제, 사회, 환경 등 모든 정책이 관행적으로 어느 한 지역민만을 지속적으로 '특별 우대'하여 왔으며, 사회 모든 분야--국가 시책의 유무를 떠나서 시민의 경제활동 환경등을 포함한 사회 전 분야--에 걸쳐 아예 '경쟁조건'이 그 특정 지역 출신자들에게 보다 우호적 방식으로 고착화되었고, 또 3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그 지역 출신자의 '독점적 지배력'에 의해 사회가 운영되어 왔다면 그 사회의 <가치체계>는 근본부터 부정의에 기초해 있을 것임이 틀림없다.  이런 편중의 현상은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거짓없는 실체이다.  영남패권주의로 인해 발생한 가치체계의 비틀림 중 가장 대표적인 것 하나가 <공평의 부재>라는 부정의이다.  거꾸로 말하면, 공평의 부재라는 우리의 가치체계가 영남패권이데올로기를 더욱 공고화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는 뜻이다.
 
우리 인간은 타인과 어울려 사는 사회성을 배워나가는 유아기 때부터 그렇게나 일찍, <공평(fairness), 공정>의 개념을 익히게 되어있다. 그것은 인간사회의 유지 발전을 지탱하는 가장 근본적 요소이자, 인간의 사회화(socialization) 과정에서 근간이 되는 개념이다.  유아기의 아이들이 싸우는 것을 보면--하물며 형제간에도--서로 공평한가의 문제를 최우선 관심으로 놓고 다투는 것을 볼 수 있다.  동물적 탐욕만이 아이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고 다행히도 그것을 제어하는 도구 또한 함께 가지고 있는 것이다.  공평에 대한 관심은 거의 인간의 본능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이 공평한가에 대한 '판단'은 아직 미숙할지언정 공평에 대한 '관심'은 본능적이라는 얘기다.  그 아이가 지금 적게 가졌다 하더라도 그에게, '너의 필요의 크기가 작아서, 혹은 다른 기회를 더 가진 대신으로, 아니면 자발적 양보와 미덕을 실천하기 위하여' 등등의 이유를 들어 공정이라는 개념을 설명해 줄 때 그는 울음을 그치고 환하게 웃을 것이며, 그가 나중 커가면서도 상대와 평화롭게 공존하는 방법을 배워나갈 것이다.
 
<공평>에의 이해는 인간의 이성을 실험하는 첫걸음이고 합리를 깨우치기 위한 기초정지작업이다.  이것은 윤리의 근본을 이룬다.  공평이란, 잠재적 경쟁자들에게 균등한 기회를 제공한다는 의지이다.  같은 능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똑같은 출발점을 보장한다는 규칙이다.  태생적/환경적 약자에게는 미래의 손실분을 일정 부분 미리 보상한다는 지혜이다.  이 가치는 건강한 사회를 유지시키는 초석이다. 이것은 인간이 인간과의 마찰을 최소화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인간다운 삶의 조건을 마련하기로 약속하며, 자유와 평등의 최대공약수를 실현하겠다는 '일반의지'로서, 인류의 평화애호적 삶의 방식을 지향하고 있다.  공평이라는 가치가 확고하게 정의되지 못했거나 어려서부터 실천되지 못하는 환경이라면 그 사회는 정의로운 사회로 나아갈 수가 없다.  아무리 선진 민주주의 국가의 좋은 제도를 들여와 심어놓더라도 그것을 운용하는 인간들에게 공평의 개념이 서있지 못하면, 그 사회는 가치 혼란, 끝없는 부패와 타협, 다툼, 불의가 득세할 것이며 결국 원시 야만에 멈춰 서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한국의 가치체계는 이 공평의 개념을 자라나는 어린아이들에게 제대로 가르쳐 줄 수가 없다.  공평 대신에, '때론 손해도 보고,  때론 이득도 챙기며, 부당할 지라도 참고 <사이좋게> 놀'으라고 가르친다.  그렇다고 양보를 가르치는 것도 아니다.  양보는 오히려 경계할 가치이다.  공평이 전제되지 않은 양보는 손해만 안기고 말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사이좋게 놀으라는 당부에는 아무런 이치가 서있지 않다. 사실상 (친하지 않은 아이에게는)'양보 하지 말라'는 요구를 말 속에 감추면서, 동시에 '사이좋게(화합)' 지내라고 기대하는 것 자체가 거짓이요 이율배반이다.  한국의 부모는 아이에게 자기 몫과 상대의 몫을 서로 인정하는 공평의 룰을 지키는 학습을 가르치지 않는다.   왜 그들은 아이에게 공평이 아닌 타협과 융화를 가르칠까?
 
(이 교육 방식은 새삼스러운게 아니고 고래적부터 있어온 <융화와 화합>이란 덕목을 강조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으나, 그 둘은 어디까지나 공평이란 개념에 배반하는 개념이며, 또한 영남패권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사회 환경이 '공평'이란 개념을 그나마 고쳐쓰지 못할 정도로 아주 망가뜨려 버렸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타협과 화합'이라는 사회화과정의 기술은 삶을 이제 처음 배워나가는 어린이들에게 가르치는 가치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공평에 대한 개념이 확립될 무렵, 공정과 불공정의 관계를 잘 파악하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상위의 가치를 위하여 잠정적으로 양보하고 인내하기를 가르치는 것이다. 공평을 가르치지 않은 채 화합을 가르치는 것은 진정한 화합마저 가르치지 못하고 마는 오류이다.)
 
새로운 학습 : <불공평의 규칙>

왜냐하면 실제 기성 사회의 모습이 그렇기 때문이다.  공평에 대하여 진정으로 가르쳐 줬다간, 사회의 불공정이나 부정의와 부딪칠 때마다 아이가 끊임없이 질문해댈 것이며, 배워온 가치와 현실의 실체간에 놓여있는 간극에 대해 고통스러워 하고 결국 절망하고 말 일을 도처에서 만나리라 우려하기 때문이다.  영남패권주의 체제 안에서 상대적 기득권을 누리는 영남민도 그 자식에게 공평을 가르칠래야 제대로 가르칠 수가 없다.  제대로 가르쳤다간 그 아이가 자라서 영남과 타지역간에 놓인 불평등을 보고 스스로를 비판하다가 자기 몫도 못챙기는 빙충이가 되고 말 것이 우려되기 때문이다. 
 
비영남민도 자기 자식을 공평의 룰을 제대로 지키는 아이로 키울 수 없다.  세상은 불공평의 룰이 지배하는 곳이라는 것을 잘 아는지라, 아이가 원칙만을 따지다가 결국엔 사회 체제에 적응하지 못하고 낙오자나 반항아로 자라고 말 수 있다는 염려가 크기 때문이다. 그 아이가 사회의 체제에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 이단아로 만드는 것이, 부모나 선생의 입장에서는 결코 죄책감을 갖지 않을 보장이 없기 때문에 미리부터 공평의 개념보다는 화합을 가르치게 된다.  화합을 강조해야만 하는 부모들의 의식 속엔 현 사회체제와 관행, 문화에 대한 깊은 불신이 깃들어 있다. 
 
혹 그것의 개념을 제대로 가르친다 하더라도 대부분은 공평이란 개념을 '오직 가정 안에서만 통용되어야 할' 가치로서 한정하고 특별히 주의시킨다.  즉, 바깥 사회는 가족간의 관계와 다르다, 냉정하다, 정글의 법칙이 통용된다, 그러므로 그 불공정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어리석은 처세술이다 등등을 가르친다.  불공정을 만났을 때 대적하기 보다는 미리 타협의 길을 찾으라고 가르친다.  이 타협의 정신은 다음 무엇을 낳는가?  불공정의 조건에 분노하지 말고 감정을 조정하라고 가르친다.  머리를 활용하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불공정의 환경에 아예 친화적이 되기를 가르친다. 결국 불공정의 환경을 최대한 이용하는 방법을 가르친다.  그것을 화합과 융화라는 말로 포장한다.  불공정과 타협함으로써 불공정을 영속화시키고 마는 가치로서의 <화합과 융화>를 환영하는 것은, 대신 공평의 개념을 멀리 귀양보내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아이들이 싸우면 양편의  주장을 듣고 시시비비를 가려주려 하기보다는, 싸웠다는 즉 '화합'하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서 양편 모두를 나무라고 마는 것이다. 물론 속을 들여다보면, 양편 모두가 아니라 남의 자식만을 꾸짖고 마는 셈이다. 
 
공정에 대한 이해와 그것을 생활에서 실습하지 못하는 한국인들은, 어려서나 어른이 되어서나 구별없이 선과 악에 대한 판별력이 떨어진다.  판별력이 떨어진다는 말은 타협의 개연성을 그만큼 크게 가진다는 뜻이다. 그 타협이란 것이 한국 사회에서는 '적당한'이란 의미로 얼버무려져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고 상대와 화합 융화하는 것이 더없는 미덕으로 칭송받는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이러한 개념을 가진 사회는 부정과 부패의 온상이 된다.  그 무엇의 제도를 갖다놓아도 공평이라는 개념이 바로 서있지 못하면 그것은 바로 타협으로 빠지지 않을 수 없고 정실의 개입, 그리고 다시 화합과 융화, 그리고 의리라는 변명으로 포장되지 않을 수 없다.
 
영남패권이데올로기는 공평이란 가치 개념을 뿌리로부터 죽여버린 지배체제이다.  왜냐하면, 불공평을 자연스러움 자체로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공평은 국외로 강제 추방되었다.  영남패권이데올로기는 영남출신이라는 요소 하나만으로 그들이 기득권을 쉽게 누릴 수 있도록 <불공정 경쟁 조건>을 짜놓은 체제이며, 또한 그 체제가 잘못된 것이라는 비판력조차 말살해버리는 새로운 가치체계까지를 생산해낸 <이데올로기>이다.  
 
2. 사회 체제
 
불공평의 규칙 : 계층의 상향 이동 차단   

영남패권주의의 체제는, 상류와 중산층 이상만이 (영남민은 타지역인에 비하여 같은 소속 계층 안에서 상대적 우위를 누리지만) 기득권을 지속적으로 누리도록 짜여진 현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그대로 투영되어 이 시간에도 살아 숨쉰다. 영남패권주이데올로기는 이 체제를 만들었고 지금도 계속 그것을 창달 심화시키고 있다. 이 체제 아래서 하층민이 상부로 이동하는 기회부여는 매우 제한적이다. 
 
한국인이 계층 이동을 하는 유일한 통로는 학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중산층 비영남인과 기층민 영남인간의 경제사회적 우열은 당연히 존재한다.)  고등학교 출신과 대학교 출신의 봉급차가  지극히 엄격하다.  그 사람의 능력과 연계없이 학벌 자체로서 봉급수준이 결정되고 만다.  그 봉급차는 재벌기업들이 시행하는  명문대 출신자에 대한 우대 채용 관행과 임금체계 적용에서 강화되었다.  2003년 현재 100대 기업의 70%를 장악하고 있는 영남인 소유 대기업은 소위 명문대 출신을 싹쓸이 하고 그 중에서도 영남출신을 선택적으로 임원에 승진시킨다.  패권의식으로 무장된 재벌기업은 일반 기업과의 차등으로 인한 서열상 우위를 점하기 위해 자사의 대졸 출신 사원에게 일반 기업 사원의 봉급보다 월등한 액수를 지급한다.  우수한 인력을 확보하여 훈련시켜 유능한 사원으로 만들겠다는 기획이 아니라, 경쟁 기업에서 그 인력을 가져가지 못하게 하므로써 우위를 점하려는 채용 전략으로 신입 때부터 높은 봉급을 약속하게 된다.  따라서 대졸 출신 대기업 사원의 임금 수준은 일반 기업체 사원의 그것과는 비교가 안되는 것이다. 
 
근무 연한이 길어짐에 따라 대졸 사원간에도 능력과 직무에 관계없이 자동적으로 봉급차를 둬야한다.  이것은 이의 제기 영역 밖에 있는 관행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영남패권 이데올로기의 권위주의라는 가치체계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기업의 관행은 역시 권위주의 이념체계에 어울리는 하부 체제를 형성하게 되어있다.  대기업에서 관행을 만들었으므로 일반 기업에서는 그 체제를 그대로 모방한다.  대기업에서 상하의 관계를 유별했으므로 일반기업에서도 고졸 출신과 대졸 출신의 확연한 차등을 두지 않으면 안된다.  자신들이 대기업들로부터 차별되었으므로 아래 계층에 있는 고졸 출신을 차별해야만 그 만큼의 심리적 보상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임금체제는 경영학적 마인드와 전혀 관계없이 사회의 가치체계에 의해서 절로 규정되고 마는 것이다.  그 권위주의 가치체계의 원류는 영남패권이데올로기이다.  이렇게 영남민이라 할지라도  어디까지나 그가 속한 일정한 카테고리 안에서의 어드벤티지를 누릴 뿐, 학벌이라는 장벽마저 뛰어넘을 순 절대 없을 만큼 영남패권이데올로기는 종적 횡적으로 불공정 경쟁을 강제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고졸 출신과 대졸 출신의 봉급 차이가 크게 벌어진 사회 시스템에서는 그 사람의 능력과 노력에 의해 계층 이동을 할 기회가 매우 제한돼 있다.  더구나 고졸 이하의 학력을 가진 자가 그 자녀를 명문 대학에 보내 졸업시키고 그 아이가 부모가 가진 낮은 경제적 조건을 다 만회하면서 중산층 이상으로 성공할 수 있는 확률은 대단히 희소한 것이다.  영남패권 이념체계에 의해 구성되어진 대한민국 사회는 계층 이동을 쉬 용납하지 않고 서민과 기층민을 항구적으로 억압할 수밖에 없다.  이 체제는 불공정 경쟁이라는 규칙을 정식 규칙으로 채용한 시스템이다. 
 
불공평의 항구화 기제

우리는 이러한 비생산적 시스템이 자본주의 발전 도상에서 어쩔 수 없이 마주칠 수 밖에 없는 부정적 부산물이라며 그 의미를 애써 왜소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 시스템이 개혁의 대상이라는 점에는 일체 반론없이 동의하다가도 그것이 영남패권 이념체계의 산물이라고 논증할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은 손사레를 치며 부인하거나 아예 펄쩍 뛰고만다.  그만큼 영남패권주의의 가치관이 이 사회 구성원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그들은 그 시스템이 영남패권이 아닌 어떠한 문화코드가 됐건 한국의 가치체계와 관련을 지어 설명을 시도한 적조차 없다.) 

이 사회는 공평이란 개념을 잃어버렸다.  공평을 되돌려주겠다고 해도 그것을 되찾는 시도 자체가 불경죄를 짓는 듯하여 불안하고 먼저 권력의 눈치를 살펴야만 하게 되었다.  아니, 회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자발적으로 내팽개친다.  불공평임을 알면서도 그것을 바로 세워놓으려는 결단을 하기 위해선, 또 다른 불이익을 당할 각오를 마음으로 다져야 한다는 선(先)과정이 고통스러워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차라리 불공평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가장하는 것이 신상에 이로운 것이다.  이러한 사회심리적 결정 과정이, 다시금 영남패권 이념체제가 선호하는 <불공평의 경쟁 규칙>을 항구화하고 마는 메카니즘이다.  
  
▲박정희 전대통령과 전두환 전대통령     ©대자보
영남패권이데올로기는 영남이라는 지역만이 아닌 <전 한국>의 정신이요 가치체계이며 사회체제이고 문화사조이다.  영남패권이데올로기는 기득권 수구적이요 냉전이데올로기적이다.  영남패권이데올로기는 또한, 겨우 영남민과 영남출신 군사 정권(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그리고 허울 좋은 영남의 김영삼 문민정부, 기만배신의 노무현 신영남패권 정부만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끝나는 게  아니다. 

영남패권이데올로기는 그 사람의 영남출신 여부와 전혀 상관없이 아무 지역 출신이더라도, 그가 {예컨대 정치 권력층, 정부 관료, 행정부 고위층, 사법부 종사자(특히 변호사), 전체 공무원, 재벌, 대기업 임원, 기업가, (한)의사, 경제적 기득권층, 은행과 금융기관 임원, 정당인, 언론사(신문사, 방송사, 유수잡지사) 사주, 편집진, 기자군, 방송국 임원, 드라마피디, 시사교양연예피디, 작가(소설, 드라마, 교양물) 대중음악인, 고수입 연예인, 고전음악 영화 연극 공연 미술 등 단체의 리더그룹, 시민단체 리더그룹, 노동계 리더그룹, 기독교 신교와 구교 지도부, 신부, 목사, 각 종파 원로, 사학재단 이사진, 모든 대학교수군, 사회과학, 자연과학, 테크날로지 등의 연구직 종사자, 초중고교 임원과 보직교사 등} 현재 대한민국 사회 체제를 견고히 떠받들고 있는, 즉 서민과 기층민을 제외한 사람으로서 이 사회의 안정과 질서 유지에 실질적 리더 혹은 오피니언 리더로서 일반 서민보다 더 큰 기여를 하고 있다고 공히 인정받고 있다면, 그 사람들 개개인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 지위로 말미암아 이 영남이데올로기 체제 속에서 그만큼 덕을 봐왔던 자이며, 영남패권이데올로기란 체제가 대한민국에서 원할하게 작동하도록 '부지런히' 기여해온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영남패권 이데올로기의 수호자들이었으며, 이들이 개인의 행복 추구 과정에서 흘린 땀과 노고로 인하여, 대한민국의 역사와 사회 질서는 이만큼 일그러져왔던 것이며, 몰가치의 아노미 세상이 되었으며, 서민과 기층민들은 평등권을 저당잡히고 희망을 잃은 채 억압의 틀아래서 고통을 받으며 살게 되었던 것이다. 이들이 감당해야 할 책임은 그만큼 크다.  이들 중 특히 종교계 지도자, 교수, 학자, 언론인, 등 지식인이 추궁당해야할 책임의 몫은 너무나 크다.  왜냐하면 이들이 영남패권 이데올로기의 패악을 고발하지 않고 오히려 그 가치체계를 충실히 이행하므로써 개인적으로 혜택을 누렸을 뿐만 아니라 그 체제를 돌이킬 수 없을만치 강고한 구조로 만드는데 첨병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그 개인이 영남패권 정치권에 부단히 저항해왔고 영남패권이 어질러논 사회 질서에 혐오감을 안고 살고 있다손 치더라도, 그가 실질적으로는 영남패권이데올로기의 융성에 한 삽 부조해온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면 하물며, 직접적으로 그 체제를 옹위해오고 있는 영남기득권층의 패역에의 기여도는 자심하다 아니할 수 없겠다.  
 
이렇듯 제 영남민은 자신들의 이해와 기득권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타지역민을 희생시키고  올라섰지만, 이들 영남민 서민과 기층민보다 한층 더 영민한 타 지역의 엘리트 그룹은 이 영남패권이데올로기라는 체제 속에서 영남민 일반 보다 더 우세한 지위를 누리고, 실질적으로는 영남의 서민과 기층민을 억압하는 위치, 즉 영남패권이데올로기라는 질서의 한 축을 떠받치는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남이데올로기란 영남의 패권을 지향하므로, 그 영남패권주의에 기생하기로 마음먹고 발빠르게 움직인 자는 자신의 출신지역과 아무 상관없이 영남패권주의에 자신의 정체성을 굴복시켜 영남기득권과 동일하게 행동함으로써 그 체제가 제공하는 혜택을 똑같이 나워갖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들은 영남패권의 이념체계의 견고화에 공헌하게 된다.
 
영남패권주의는 영남의 패권을 지향할망정 그것은 어디까지나 타지역의 지분을 빼앗는 방식을 취한다는 것이지, 그것만으로써 영남 서민과 기층민에게 마저 타지역의 중산층 이상의 생활 수준을 보장해주는 체제가 아니다. 영남민 서민은 타지역의 서민에 대한 비교 우위를 누릴 뿐 타지역의 중산층과는 절대 대등해질 수가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영남패권주의라는 대한민국의 사회체제는 기득권을 가진자가 계속 기득권을 대물림하게 되어있고 서민과 기층민은 아무리 그들이 영남이라 하여도 여전히, 냉정하게도 그들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 상승을 원천적으로 방해하고 차단하는 체제라는 사실이다. 영남 서민이 영남패권 체제 아래 중산층 이상의 기득권층으로부터 차별받는다면 호남의 서민은 영남 서민이 받는 몫 위에다가 영남 서민과 기층민을 포함한 모든 영남민으로부터 받는 사회 문화적 차별과 억압까지를 받는 이중 삼중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다.  타지역의 서민도 호남민보다는 약하지만 영남 서민들 보다는 더한 이중의 차별 속에서 살고 있다.
 
결론 : 영남패권주의 가치체계의 본질

한 사회를 건강하게 유지시키는 근본 뿌리로서, 사회 구성원들이 합의하고 공유하는 '가치체계' 속에 <공평>의 개념을 첨부터 제외시켜야 하는 사회,  자식에게 공평에 대해 가르치기를 기피해야 하는 사회, 공평과 공정의 인식을 현실 생활에서 멀리하며 살수록 성공의 길이 쉽게 열리는 사회는 죽어가는 사회다. 불공정의 경쟁 환경이 권위주의라는 이념에 의해 호위받으며 너무도 당연히 받아들여지는 사회는 속으로 썩어가는 사회다. 이 문화는 영남패권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내었다. 불공정 경쟁이 어엿한 경쟁의 규칙으로서 불평없이 용인되는 가치 기준은 영남패권주의 체제가 찍어낸 주물이다.  이러한 사회 체제 아래에서는, 가진 자는 가진 것을 더욱 축적해내고 못가진 자는 있는 것마저도 계속적으로 탈취당하면서 살 수 밖에 없다.  계층의 상향 이동의 기회는 엄격히 제한된다. 뿐만 아니라 영남지역으로부터 가해지는 차별과 억압에 의해 호남을 비롯한 비호영남 서민과 기층민은 이중의 고통 속에 신음하며 산다.  영남패권주의의 가치체계는 이토록 비인간적인 삶을 모든 사회 구성원에게 강요한다.
 
그 가치체계는 비합리, 불공정, 비효율, 반인륜의 총합이다.   삼십 수 년전, 군사 독재 박정희를 따르고 지지함으로써 자신들의 경제적 이득과 사회적 지위로 보상받겠다던 영남대중의 패권주의 사고가 이 땅의 모든 가치체계를 파멸적으로 훼손시키고 급기야는 그것을 제손으로 만들어온 영남민에게조차 억압하는 기이한 괴물로 되돌려 받고 있는 것이다.  아직까지 이것은 호남인, 그 중에서도 호남기층민에게 가장 가혹하게 작용하고 있으며, 전 호남민과 비호영남민에게 공히 패권의 찌꺼기를 안기는 한편, 영남 서민과 기층민에게도 역시 큰 고통을 지우고 있다.  이 시스템의 타파는 계급/계층적 접근으로 절대 해결할 수 없다.  계급적 불평등은 겉으로 표현된 현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 비인간적 시스템은 영남패권 가치체계가 갖는 비인간성, 비효율성, 비합리성 등을 영남을 비롯한 전 대중들에게 부단히 이해시키는 대대적 시민운동을 통하여 깨뜨려 나갈 수 밖에 없다. 
 
(영남패권이데올로기 논의는 계속됩니다.)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03/10/24 [11:20]   ⓒ 대자보
 
  • 도배방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