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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진중권 사태?, '정부비판 교수' 탄압 논란
한국연구재단, '심사 1위' 중앙대 독일연구소 최종탈락…"명백한 정치보복"
 
이석주   기사입력  2009/11/19 [11:30]
교육과학기술부 산하 '한국연구재단'(NRF)이 최근 정부 보조금이 지원되는 연구지원사업 선정과정에서, 심사평과 결과 '압도적 1위'를 차지한 대학연구소의 사업 신청을 석연찮은 이유로 최종 탈락시킨 사실이 드러나 파문이 일고 있다.

특히 연구소 소속 6명의 교수 중 5명이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인 지난 6월3일 이명박 정부의 국정기조 전환을 촉구하는 교수 시국선언에 이름을 올렸다는 점에서, 양심적 지식인에 대한 '정치탄압' 논란으로 까지 확산되고 있다.

심사결과 1위 연구소, 최종 심사에서 탈락…이유도 근거도 없는 탈락 이유

앞서 중앙대학교 독일연구소는 '2009년 인문한국지원사업(HK)' 중 해외지역 연구 소형분야에 과제를 제출, 1단계 전공심사와 2단계 면담심사 결과 85.32점이라는 평가를 받아 1위를 차지했으나, 한국연구재단의 최종선정 과정에서 탈락했다.

'국가 기초연구지원 시스템의 선진화'를 목적으로 지난 6월26일 출범한 한국연구재단(이사장 박찬모)은 교과부(장관 안병만) 산하 한국과학재단과 한국학술진흥재단, 국제과학기술협력재단이 하나로 통합된 연구관리전문 국가기관이다.
 
▲ 한국연구재단은 탈락 사유에 대해 '제3세계 연구'와 '단일국가 연구'라는 석연찮은 이유를 대고 있다.     © 한국연구재단

정부의 인문사회분야 학술연구지원사업에서 1위로 올라온 과제가 탈락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는 게 연구소 측의 설명이며, 연구소가 제출한 과제는 해당분야에 전문지식을 갖춘 교수들이 일주일간 합숙하며 산출해 낸 '결과물'인 것으로 알려졌다.

연구소 측에 따르면, 한국연구재단은 과제 탈락 이유에 대해 "(연구내용이) 제3세계를 우대했다", "단일국가 연구"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연구소는 그러나 이같은 탈락 사유가 정부의 학술연구지원사업 심사원칙에 위배될 뿐 아니라, 사업 전에 공지돼 모든 신청기관이 사업계획서를 작성할 때 기준으로 삼은 <2009년 인문한국지원사업 신청요강>의 내용과도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한국연구재단이 사전에 공개한 '신청요강'에 따르면, 해외지역연구분야의 대상은 '세계 각 지역 및 국가 전반'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이 중 우대 대상과 관련해선 '기선정 연구소가 연구대상으로 삼고 있지 않은 지역'과 '제3세계'로 명시돼 있다.

연구소는 18일 각 언론사에 배포한 자료를 통해 "(총 3단계로 이뤄지는 심사절차에서) 1, 2단계 심사결과 1위를 차지한 과제를 관리기관이 (3차에서) 임의로 탈락시킨 것은 학문의 자율성과 심사의 공정성을 훼손하는 심각한 월권행위"라고 비판했다.

연구소는 재단이 밝힌 '제3세계' 이유와 관련해서도, "2009년 HK사업 해외지역연구 분야에 선정된 4개의 연구과제 중 엄격한 의미에서 제3세계 국가나 지역을 연구대상으로 삼은 것은 없다"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단 측에서 계속 제3세계를 운운하는 것은 억지 주장을 정당화하려는 견강부회에 불과하다"고 성토했다.

재단이 주장하는 '제3세계'란 냉전시대에 제1세계인 서방 국가와 제2세계인 사회주의권 국가와 달리 냉전체제에서 중립을 지킨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의 국가들을 뜻하지만, 이번에 선정된 연구과제 중 여기에 포함되는 것은 전무하다는 주장이다.

이들은 또 독일이라는 '단일국가'를 연구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배제했다는 한국연구재단 측 논리 역시 재단 스스로 만든 원칙을 부정하는 자가당착의 논리라고 주장했다.

'신청요강'에 따르면, 해외지역연구의 지원분야는 '세계 각 지역 및 국가'이며, 특히 "단일국가는 소형으로 신청"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실제로 올해 예비 선정된 4개 연구소 중에서도 3개 연구소가 단일국가를 연구대상으로 삼은 것으로 전해졌다.

한국연구재단의 진짜 이유는?…"양심적 학자에 대한 정치보복 신호탄"

연구소 측은 이러한 종합적 판단을 바탕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진짜 속셈'이 '정부 비판 학자 길들이기'에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가장 엄정하고 객관적이어야 할 학문영역에서 조차 '정치권력'이 자의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여기엔, 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는 김누리 중앙대 교수(독어독문학과)와 일부 교수들의 '과거 행보'가 탈락 배경으로 작용했을 것이란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이들은 지난 6월 이명박 정부를 강력 성토하며 발표한 시국선언문에 이름을 올렸다.

특히 김 교수의 경우, '민주화를위한 전국교수협의회' 소속으로 당시 교수 시국선언을 '주도'했으며, 지난 8월 진중권 전 중앙대 겸임교수가 재임용에서 탈락할 당시에는 학교 측을 향해 강도높은 비판을 가한 바 있다.
 
▲ 김누리 교수 등이 포함된 중앙대 교수 63명은 지난 6월 이명박 정부의 국정기조 전환 등을 촉구하며 시국선언을 발표한 바 있다. (사진은 지난 6월 서울대 교수 120여명의 시국선언 발표 기자회견 모습)     © CBS노컷뉴스

이와 관련, 김 교수와 연구소 측은 18일 서울 흑석동 중앙대학교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이번 사태는 비판적 지식인들을 조직적으로 고사시키려는 정치적 의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났다는 점에서 학문세계에 대한 정권의 선전포고"라고 맹성토했다.

이들은 "금번 사태를 묵과할 경우 정부에 대한 지식인의 비판적 목소리가 크게 위축될 것이다. 학자와 지식인의 자기검열이 심화될 것"이라며 "이 땅의 양심적 학자와 비판적 지식인에 대한 정치보복의 신호탄이 되지 않을까 심히 우려스럽다"고 주장했다.

향후 연구소는 교수들과 교수단체, 시민사회단체들과 함께 합법적인 모든 수단을 동원해 한국연구재단의 정치적 편향성과 부도덕성을 지적, 부당한 선정결과를 바로잡기 위한 법적, 정치적 투쟁을 전개해나간다는 계획이다.

이들은 "우리의 투쟁은 단순히 한 연구소의 존립 문제를 넘어, 우리 시대 지식인의 양심을 지켜내고 이 땅의 학문 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학계, 정치권도 맹성토…"명백한 정치탄압, 결코 좌시 않을 것"

지난 6월 시국선언에 동참했던 중앙대학교 시국선언 63명의 교수들도 이날 성명을 내고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졌다"며 "연구소 부당 탈락사태는 양심적 지식인과 비판적 학자를 길들이려는 명백한 정치 탄압"이라고 맹성토했다.

이들은 "정부의 연구지원금을 총괄하는 주무기관으로서 가장 공정해야 할 한국연구재단의 도덕성이 이 정도라니 실로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며 "현 정부와 산하기관이 합작해 민주주의의 근본인 법치를 짓밟고 학문의 존엄성을 훼손시킨 사건"이라고 개탄했다.
   
이들은 "독일의 나치정권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지식인의 침묵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교훈을 깊이 자각하는 우리는 결코 침묵하지 않을 것"이라고 표명했다.

정치권에서도 이번 사태를 명백한 정치 탄압으로 규정했다. 진보신당 김종철 대변은 18일 브리핑에서 "결국 정부지원금을 무기로 하여 비판학자들을 길들이겠다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다분하다"고 꼬집었다.

김 대변인은 "이명박 정부 들어 비판적인 학자와 언론인, 지식인들이 계속해서 자리를 잃어왔다. 한국연구재단의 석연찮은 행태 역시 이명박 정부가 보이고 있는 비판세력 억압하기의 일환이라면 국민들은 결코 이 문제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대자보>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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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9/11/19 [11:30]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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