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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당, 격정의 시대에서 소통의 시대로
영웅과 낭만, 그리고 패거리문화는 '시스템'으로 전환돼야
 
늦깍이   기사입력  2003/09/27 [12:33]

본문은 현재 급변하고 있는 한국 정치지형에서 새로운 정당의 이념형을 모색하는 작업의 일환입니다. 앞으로 4부에 걸쳐 한국 정치의 역사적 특성과 현재적 의의를 분석하고, 바람직한 정당구조의 형성을 위한 대안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참여와 의견을 기다립니다-편집자

1. 한국정치, 영웅의 시대가 저물다(지난호)
2. 한국사회, 낭만의 시대가 지다(이번호)
3. 한국, 격정의 시대 가고 소통의 시대 열리다(이하 다음호)
4. 신당은 WINDOWS 3.1이어야 한다


2. 한국사회, 낭만의 시대가 지다.
 
▲한국사회는 역시 정(情)이 지배하는 그야말로 정실(情實)사회, 그 영어표현이라고 해도 크게 무리가 따르지 않는 romantic society 였다.     ©인터넷이미지
영웅을 위해서 불가피한 관행으로 치부되었던 비합법적 또는 음성적 정치자금은 정치권을 한국사회의 부정비리 네트웍의 허브(hub) 이게 했다. 정치권에서 정점을 이룬 부정비리 네트웍은 한국사회를 종횡으로 엮어 왔다. 부정비리란, 법이 정해준 테두리를 벗어날 수 있게끔 특혜가 주고 받아지는 것이다. 특혜를 주고 받기 위해 뇌물, 직위로, 또는 혈연/지연 등을 매개로 해서 환심을 산다. 부정비리는 법과 제도라는 무생물적 굴레를 인간의 정 또는 배려가 극복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낭만적이기도 하다. 부정비리가 당연시되었던 한국 사회는 그런 점에서 낭만적 사회였다. 하룻밤 접대를 잘하면 계약이 체결되고, 혈연/지연/학연 등 그자체로는 아무런 경제적 관계가 아닌 정서적 연대관계임에도 쉽게 법체계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도 한국사회는 역시 정(情)이 지배하는 그야말로 정실(情實)사회, 그 영어표현이라고 해도 크게 무리가 따르지 않는 romantic society 였다.
 
패거리는 정실사회의 기본 세포다. 고향, 출신학교, 인척관계 등은 법을 넘어서는 특혜를 주고받는 좋은 매개이자 변명거리였다. 패거리 밖에 대해서는 가혹하면서, 패거리 안에서는 한없이 따뜻한 연민이 흐른다. 패거리는  패거리 밖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면서 밀고 끌어주며 성원들에 대한 공정한 평가를 가로막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성원들의 생산에 대한 기여분만큼 분배가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기여에 대한 올바른 평가는 공정한 사회의 기본을 이룬다.

그러나 패거리문화가 평가를 막아왔다. 어떤 평가라도 패거리문화 앞에서는 무력해져왔다. 민주주의를 위해 젊은 시절 투쟁에 헌신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 그리고 김영삼 전대통령도 이 패거리문화앞에서는 무력했다. 본의든 아니든, 자신들에게 헌신해온 많은 사람들은 권력의 단맛을 볼려고 버텼고 정권은 무력하게 그들에게 굴복했다. 이익과 권력은 그 패거리문화에 점령되었다. 그리고 그에 밀려난 다른 패거리가 울분의 칼을 갈게 했다. 중앙정치에서 확고하게 뿌리를 내린 패거리 문화는 사회 모든 미시 영역에 확고하게 자리잡는다. 사법부, 행정부 등 중앙권력기구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초중등학교/ 대학교에까지 패거리가 만연해 패거리가 제공한느 단물을 빨아 왔다. 패거리 문화의 가장 확장된 형태는, 수치스럽기 짝이 없는 정치권력의 지역분할이다. 여기서도 저기서도 지역소외론은 정치인들이 선호하는 판매품목이었다.
 
패거리 문화는 개인에 대한 평가가 그가 속한 패거리에 영향받지 않을 때 해체된다. 소위 계파라는 것이 국회의원에 대한 평가에 영향을 끼치지 못해야만 한다. 패거리가, 국민의 국회의원 개인의 심판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면 그순간 패거리는 해체된다. 아무리 뛰어난 의정활동을 해도, 아무개 계파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도 낙선된다면, 그 순간 상식은 작동을 멈추고 패거리가 판친다. 정치권의 패거리 문화는 정치권만 비난 받을 일이 아니다. 국민들도 기여했다. 그리고 국민들도 자신이 얽힌 각 조직 또는 영역에서 패거리 문화에 물들어 있다. 패거리에 들기를 거부하면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이라고 따돌림한다. 이것을 뚫기 위해서는 사회의 각 미시적 영역에 제대로 된 평가 시스템이 작동해야 한다.

노무현은 '평가시스템'에 대해 노래를 부르고 다닌다. 청와대도 행정부도 제대로 평가하는 기준을 만들려고 한다. 자신에 대해 얼마나 충성했는지가 평가의 기준이 아니라 성과에 대한 기여를 잴 수 있는 객관적인 기준을 따로 둔다. 장관도 평가가 낮으면 어느정도 기간후에 교체한다고 한다. 장관이 미움받아 또는 정국전환을 위해 짤리는 시대가 아니라 인제 무능력해서 짤리는 시대가 왔다. 그렇게 짤린 장관이 전관예우를 받을 수도 없다. 이미 무능하다고 판정받아 갈곳도 없을 수도 있고, 그 판정을 받지 않기위해 기를 써야알 신임장관이 전임장관의 청탁이나 영향력을 들어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노무현이 말하는 평가시스템은 국정운영의 도구정도가 아니다. 패거리에 어영부영 묻혀 살아가는 개인들을 패거리로부터 분리시키는 한국패거리 문화 수술의 매스이다. 패거리에만 충성을 다하면 따뜻한 보호를 받을 수 있고, 보스의 총애를 받을 수 있고, 하룻밤의 환대로 사태를 돌릴 수 있는 사회는 낭만적 사회이다. 인제 한국사회에서 낭만적 영역은 갈수록 퇴조한다.

청와대와 정부의 직원들이 엄격한 평가의 잣대를 무서워하면, 그와 관계를 이루는 기업들이 낭만적인 방식으로 이익을 추구할 길이 막힌다. 마당발이고 정관계에 발이 넓고 술을 잘먹는 사람이라고 해서 스카웃되지도 않고 성장하지도 못한다. 이제 기업과 기업사이에서 또는 기업과 정부사이에서 비밀스런 정보와 로비자금을 들고서 암약해온 현대판 협객들이 숨쉴 공간은 없다. 기업이 협객들이 담당해온 비공식적인 커넥션에 의존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제품과 마케팅으로 승부할 수 밖에 없다. 완벽하게 제품을 기획하고 구매자의 취향을 꿰뚫는 사람이 좋은 평가를 받을 수 밖에 없다. 정계, 관계, 기업을 아우르는 온갖 종류의 끈은 무기력해진다.
 
올바른 평가를 받는다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에는 누구나 동의하겠지만, 그러나 그것은 한국사회의 낭만적인 미시 문화의 종언을 의미한다. 대학을 어디나왔느냐에 따라 삶의 질이 결정되지 않고 평생 평가가 따라다닌다면, 그것은 인생의 전 기간이 곧 대학입시기간임을 의미한다 (물론 그 결과 대학입시 부담은 상대적으로 줄 수는 있겠다).

친구들과 또는 잠재적 패거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면서 인간관계를 돈독히 하는 것은 시간낭비일 뿐이다. 자신의 평가에 정확히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주지 못하는 인간관계는 기회비용일 뿐이다. 인생의 매시기에 평가가 따르고 그리고 그 평가가 누적된다면 어떤 시기라도 방심해서는 안된다는 중압감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 평가가 남들도 객관적인 것이라고 받아들인다면, 일시의 이탈이나 방심이 인생에 치명적이게 된다, 그 시기에 남들은 나아가고 있기 때문에. 지금처럼 학벌이 안좋아서 차별을 받는다고 불평하던 때가 그리울 수도 있다. 평생에 걸친 평가 시스템보다는, 지금처럼 명문대학을 잘 들어가기 위해 이삼년 열심히 노력하는 게 오히려 지극히 쉽기 때문이다. 지금도 이미 나타나고 있지만, 가장이 경쟁에서 실패해 힘들어 할 때 의지할 따뜻한 가정도 없다. 사회에서의 실패는 가정의 실패로 직결된다.
 
미시적인 수준에서 엄격한 평가가 적용된다는 것은 한국사회가 그야먈로 전통사회의 특징인 낭만적 사회 (romantic 사회) 에서, 법을 비롯한 다양한 기준이 철저히 적용되는 제도화된사회 (codified society) 로 전환됨을 의미한다. 개인은 사회의 빈틈을 이용해서 이득을 볼것은 꿈꾸지 말아야 한다. 사회나 조직이 요구하는 바를 충실히 따라야만 사회로부터 적절한 평가가 주어지고 그에 따른 보상을 받게 된다. 코드(code)라는 말을 공교롭게도 일부신문과 정치인들이 노무현 대통령이 마치 패거리정치를 한다는 것을 빗대기 위해 사용하지만, 전혀 시대흐름을 좇아가지 못하는데 빚어지는 착시현상이다.

▲노무현 대통령    ©청와대
노무현이 자신만을 위한 코드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이미 한국사회가 새로운 코드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무현 자신도 그 코드를 독해하려고 애쓰고 뒤쳐지지 않을려고 할 뿐이다. 굳이 코드의 선후관계를 따진다면, 강금실이 노무현의 코드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노무현이 오히려 강금실의 코드를 따르고 있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과 검사들의 토론 장면을 기억해보자. 한 검사가 집요하게 노무현의 가족에게 금전적인 비리가 있는 것처럼 주장하자, 노무현은 그만 '이쯤되면 막 하자는 것이지요'라고 화내고 말았다. 반면 함께 있었던 강금실 장관은 시종일관,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노무현의 화는 이해할 수 있지만 새 시대의 코드를 제대로 따랐다고 할 수는 없다. 검사가 근거없는 사실로 명예를 훼손했다면 민사소송을 제기하면 될 뿐이다. 그렇지 않다면 검사가 뭐라고 떠들건, 그건 검사의 자유다.

이에 반해, 강금실 장관은 자신에 대해 상당히 모욕적일 수 있는, 예의에 어긋난 발언을 들으면서도 전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검사가 장관을 기분좋게 하거나 나쁘게 하거나 그것은 검사 개인의 태도일 뿐이다. 법이 정해준 테두리를 벗어난 무리를 일으켰다면 인사에 반영하면 된다. 이것이 제도화된 사회이다. 노무현대통령이 신문사들을 명예훼손으로 고발한 것도 정확하게 제도화된 사회의 규칙을 존중한 것이다. 새로운 사회가 요구하는 코드를 따르지 못하면 대통령일지라도 그만 코미디의 소재가 되는 세상이다. 노무현은 검사들과의 토론은 그만 코미디언들에게 밥벌이 소재를 제공했다.
 
제도화된 사회가 합리적인 분배기준을 제공할 수 있고 사회의 효율을 높이지만 그러나 그 과정은 불가피하게 경쟁이 극대화함을 의미한다. 패거리의 보호막은 없어지고 평생직장은 옛날 말이다. 고인 물은 썩는다는 말이 정작 자신의 위치와 직업을 향해 내리치는 비수가 된다. 대통령은 자신에게 대들었던 어떤 검사들에게도 불이익을 주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마찬가지로 그에게 충성하는 사람에게도 특별이익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기도 하다.

청와대와 장관을 필두로 하는 중앙정부의 고위직들에게서 패거리들의 네트웍을 해체하고, 상사/부하/동료등으로부터의 다양한 평가에 기반한 평가네트웍을 만들면, 무능력자가 설자리가 없다. 아마도 대드는 검사는 살아남을 지언정, 정상적으로 수사를 해서 성과를 못내는 검사는 자리가 없을 것이다 (최근의 강금실 법무장관의 검찰 인사에서 이는 확인되고 있다). 중앙정부의 상층에서 무능력이 허용되지 않으면, 정부조직의 하층과 지방정부에도 역시 무능력자는 퇴출된다. 유능한 평가를 받기위해서는 충성만 할 줄 아는 사람을 부하로 들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새로운 평가 네트웍은 네트웍의 성격상 온나라에 무섭게 확산되어서 기존의 패거리네트웍을 대치할 것이다.

그결과는 능력있는 자의 기쁨으로 무능력한 자의 슬픔으로 귀결될 것이다.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한, 심하게 얘기하면 살아남기 위한 노력은 처절할 것이다. 상사는 자신에게서 그리고 자신은 부하들에게서 노동효율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온갖 궁리를 다할 것이다. 노동시간은 짧아질 지언정, 노동 강도는 세진다. 과거 동구 공산권 국가들은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의 물질적 풍요를 바라보며 천국을 꿈꿨다. 그러나 그들이 몸소 부딛친 강도높은 서구의 노동조건은 상상해보지 못한 수준이었다. 노무현이 장관들에게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적어도 2년은 장관직을 수행케할 것이라고 공언했고 아직까지 지켜지고 있다. 그는 적어도 2년이라는 기간이 주어져야 제대로 된 평가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일반적으로 타당한 견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비록 그 2년 동안은 부당한 간섭을 안하고 넉넉하게 지켜보겠지만, 평가받는 사람은 항상 긴장될 것이다.

이번엔 평가에 대해 정말 변명할 여지가 없다. 평가가 주는 팽팽한 긴장은 우리 사회 곳곳에 퍼져나갈 것이다. 이미 일부기업들에는 그러한 긴장이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으례 일정시기마다 상위 몇 퍼센트에 들지 못한다면 스스로 알아서 나가는 것을 당연히 받아들인다. 그러한 냉정한 평가에 대해, 자기가 특권 패거리에 들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변명하는 사람도 점점 없는 듯하다. 능력이 짧은 것을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일 뿐이다. 
 
신당은 제도화된 사회가 정치권으로 확장되는 중대한 계기이다. 청와대와 행정부를 대통령이 바꾸는 것은 가능하지만, 대통령이 민의에 의해 선출되는 국회의원들을 통제할 수는 없다. 대통령이 바뀌는 것은 우연일 수도 요행일 수도 또는 일각의 주장처럼 국민의 오판일 수도 있다. 대통령이 기껏 개혁을 해놓아도 다음 대통려이 뒤집을 수도 있다. 국회가 뒷받침되지 못한 김대중의 남북화해정책은 언제나 불안했다. 노무현의 성격만으로도, 언론보도가 악의적인 것만으로도 노무현을 둘러싼 불안을 설명할 수 없다.

본질적인 불안은 시스템을 상징하는 국회가 노무현과 따로 놀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통령만으로 한국사회가 바뀐다고 안심하지 못한다. 대통령을 잘뽑은 것만으로는 아직 불안하다. 대통령도 그 혼자 낡은 정치구도에서는 괴롭다. 듬직한 정치적 파트너 없으니까, 엄청 부지런히 뛰어야하고, 기껏 동분서주해도 의회가 딴지 걸면 다 헛물이다. 의회로부터 물먹는 대통령이 행정부에서 권위가 서기도 어렵다. 의욕을 복돋는데도 한계가 있다. 오랫동안 연구해서 기껏 좋은 법안을 발의해도 의회가 간단히 기각해버리면 허망하다. 그래서 개혁 자체가 제도화되는 것은 대통령 됨됨이라는 우연적 요소가 아니라, 국회라는 민의의 집결체에 달려있는 것이다.

어쩌다가 잘난 대통령을 하나 뽑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우연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많은 국회의원들 대부분을 제대로 뽑는다는 것은 확률적으로 불가능하다. 대선 결과만 보면, 노무현은 영남에서 또 떨어졌다. 국회가 바로 서는 것, 그것이 개혁의 제도화의 요체이다. 국회가 자리를 잡으면 그것은 누구도 돌이킬 수 없다. 제대로 된 국회를 구성할 수 있는 국민들의 관심과 식견이 곧 시스템이다. 한번 제대로 뽑기 시작해보면, 구태로 돌아갈 수 없다. 노무현이 퇴장하더라도 개혁은 계속된다. 예리한 국민들의 선출이 특별한 우연이 아닌 당연으로 받아들여진다면, 높아진 국민들의 눈높이에 맞춰서 제대로 된 선량들이 도전한다. 국회가 훨씬 더 경쟁력을 갖는 것이다. 신당은 적어도 공급의 측면에서 혁신적인 계기이다. 국회의원들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를 가로막아온 그래서 오랫동안 정치를 낙후켜온 지역구도라는 안락한 당선보루를 받차고 나왔다. 그들 스스로 패거리문화를 해체하자고 나섰다.

그리고 이제는 국회의원 한사람으로서 국민들의 평가를 받겠다고 나섰다. 그들의 정당 역시 오직 국민들에 평가받을 뿐이다. 그 평가의 내용은 영웅에 대한 충성이 아닌 국민들에 대한 충성이다. 육탄공격의 볼거리는 더이상 국민들을 즐겁게 하지 못한다. 오로지 그들의 정책의 질과 양의 총합만이 그들이 국민들에게 내밀 성적표이다. 한국의 정치에는 최고권력자의 의지만이 있어왔다. 그들이 주관적으로 국민들의 요구를 헤아려서 시혜를 베풀었다. 이제 국민들은 더이상 시혜의 대상이기를 원치 않는다. 그들의 의견을 대변할 당당한 대의기구를 원한다. 신당은 먼저 국민들의 시대적 요구를 자각했다. 신당을 필두로 국회가 진정한 대의기구가 된다면, 개혁은 국민들의 일상 프로그램이 된다. 개혁은 권력자의 의지가 아닌 국민들의 총의가 반영된 제도가 되는 것이다.
 
제도화된 사회 (codified society)는 따뜻하다고도 할 수 있고 또 차갑다고도 할 수 있는 사회이다. 권력자에게 부당한 사유로 미움을 받았다고 사회에서 배제되지 않기 때문에 따뜻한 사회이지만, 제도 또는 코드를 벗어난 행동에 대해서 정확한 평가와 심사가 이루어져 항상 조심스럽다는 점에서 차가운 사회이다. 자신의 언행이 거칠었을 때, 상대방으로부터 직접 응징을 받는다면 차라리 개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제도화된 사회에서 상대방은 여전히 웃음을 잃지 않을지라도, 그를 엄정히 평가하고 있을 것이다.

대통령과 지지자들 그리고 국회의원당선자와 지지자들이 선거과정과 이후에 여전히 서로 수평적으로 존중한다는 점에서 제도화된 사회는 따뜻하다고 할 수 있다. 권력이 평등한 인간관계를 뒤집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치인과 지지자들이 회포를 풀고 인간적인 정을 나무며 의기투합할 시간도 돈도 이유도 없다는 점에서 차갑기도 하다. 유시민 의원은 일부정치인들이 대통령이 안만나준다고 불평하는 것에 대해 비판하면서, 대통령과 지지자 또는 정치인과 유권자 사이는 "냉랭해야 한다" 고 언급한 적이 있다. 자신은 별로 대통령을 만날 필요도 못느끼고, 자신 역시 자원봉사자들을 다 만나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노무현이나 유시민의 지지자들이 그와 인간관계차원에서 의기투합해 선거운동을 한 것이 아니다. 다만, 노무현이나 유시민을 통해, 서로의 공약수를 발견하고 그들을 통해 자신들의 정치적 지향을 표현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렇게 선거운동을 해서 당선까지 됬으면 그것으로, 따뜻하게 표현하면, 서로 고마와하는 것이다; 차갑게 표현하면,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서로를 잘 활용한 것이다.  권력자가 많은 정치자금을 굴리면서 이런저런 금전적 지원이나 선물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romantic 사회가 따뜻한 면이 있다. 유시민과 노무현이 밤새 술잔을 기울이는 모습을 상상해보면 참 아름답기도 하다. 조그만 기업하는 사람들도 서로 선물로 인사치례를 한다는 점에서 한국사회는 따뜻하다.

그러나 제도화된 사회에서는 그럴 수 있는 돈도 없고 있다고 해도 제도의 감시망에 잡혀버린다. 유시민이 편지로 '냉랭하게' 선물을 대신했던 것처럼, 정치인과 정치인, 그리고 정치인과 유권자의 관계는 냉랭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제도화된 사회는 비록 미시적인 측면에서 차가운 면은 있을지라도 사회 총량으로서의 따뜻함은 증대된다. 패거리들이 부당하게 가로막은 자원의 효율적 이용을 통해 사회의 생산성이 증대된다. 또한 패거리들이 부당하게 전유해온 특권이익을 해체해서 보다 많은 사회성원들이 보다 높아진 최소생활기준을 누리도록 해, 사회적 약자들도 보다 인간적인 삶을 누리게 할 수 있다. 그래도 미시적인 사회에서 한국사회가 따뜻함을 잃을까 걱정을 하는 사람들도 있을 텐데, 너무 걱정하지는 마라고 위로하고 싶다. 정실주의가 사라지는 것일 뿐이다. 문화에의 DNA코드라고 할 수 있는 우리의 정(情)이 그리 쉽게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정실주의가 탈색된 정은 한국사회를 아름답고 따뜻하게 할 것이다. 아마도 언젠가는 한국도 외국인들로부터 이민가서 살고 싶은 나라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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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3/09/27 [12:33]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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