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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gville', 연극과 공간 그리고 드라마
문제적 감독 라스폰트리에의 미국을 바라보는 시각
 
twins   기사입력  2003/09/27 [11:32]

연극적 공간의 권력

▲영화 '도그빌' 포스터     ©씨네서울
영화가 가지는 매력은 즉물적으로 사물과 공간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연극에서는 연극적 약속이라 부를 수 있는 암묵적인 합의의 여지가 존재한다. ‘이 것을 사과라 부르자’나 ‘여기가 바다라고 하자’라는 배우와 관객간의 약속은 눈에 보이지 않아도 이미 존재하는 사물/공간으로 받아들여진다.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은 이러한 연극의 성격을 영화로 끌어들여 획기적인 Story-telling, Story-showing의 방법을 만들어냈다. 8년 전 영화계를 술렁이게 했던 도그마 선언을 포기하게 만든 ‘연극성‘이 과연 내러티브가 생명인 영화 안에서 어떤 새로움으로 탄생하는가를 살펴보자.

영화의 첫장면은 옛날이야기를 하는 듯한 할아버지의 낮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시작된다.
미니어처같은 도그빌의 부감은 영화의 시점이 전지적이라는 것과 인물과 공간에 주목할 수 있도록 의도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관객은 신의 위치에서 동시에 일어나고 있는 여러 사건들을 ‘투명한 벽’을 통해 한번에 볼 수 있다. 분필로 그려진 도로, 장난감 같은 가구들은 관객으로 하여금 곧 연극적 무대를 연상케 한다. 칠판에 그려놓은 듯한 2차원의 마을은 사건이 진행될 수록 점차 3차원,4차원의 부피감을 갖는데 그 공간은 배우들의 연극적 움직임과 음향과, 인물을 강조하는 조명등 다분히 연극적 요소들로 구축된다. 예를 들어 문을 열고 닫는 상황에서는 마임과 같은 행동만이 존재하는데 실재하지 않는 문과, 문이 놓여진 것처럼 설정된 공간은 여닫는 ‘소리’가 동작에 더해짐으로 해서 연극성을 갖게된다. 불필요한 것을 배제한 최소한의 장치로써의 인물과 그 인물이 지배한 공간의 특성을 상징하는 대표적 사물들은 미니멀리즘적 공간으로써 불필요한 것을 제거해 상징적인 것들만 남아있다. 교회의 종과 탑, 벤의 트럭, 톰의 책상 은 인물과 특정한 공간의 성격을 단적으로 은유 한다.

연극적 장치로서 영화가 빌려온 가장 매력적인 설정은 '투명한 벽'이라는 대상이다. 연극적 약속에 의해 형성된 폐쇄적인 공간은 동시에 일어나는 여러 사건을 목격할 수 있는 전지적인 위치를 관객에게 제공한다. 인물들의 갈등이 생겨나고 진행되는 과정에서 관객은 두 가지의 관점이 공존함을 깨닫게 되는데 첫째는 인물들 사이의 실제적인 공간이다. 그들 사이에는 엘름스트릿 Elm st.의 느릅나무와 저마다의 집과 같은 개인적인 공간은 실재한다. 둘째는 관객의 관점이다. 관객은 톰과 그레이스가 대화하고 있는 장면 너머로 동시에 마을 사람들의 회의 장면을 목격 할 수 있다. 전지적으로 바라보는 관객의 시점 앞에 비밀스런 것과 자유로운 것은 없다. 등장인물들에게는 ‘개인공간’과 ‘친밀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문화인류학자 에드워드 티 홀(Edward T. Hall)에 따르면 인간은 누구도 들어놓지 않는 경계의 공간이 있는데 자신주위의 1~2m의 개인적 공간에 친밀함을 허락한 대상 이외의 사람들의 침범을 꺼린다는 것이다. 하지만 관객은 톰과 그레이스가 서로의 공간을 허락하는 장면을 클로즈업으로 목격한다. 관객의 전지적 시선 앞에 개인적이고 친밀한 공간은 없다. 점차 안전을 위협받으며 비밀이 보장되지 않는 위협적 공간일 뿐이다. 현실적이지 않은 공간은 폐쇄, 고립이라는 설정에 힘입어 동화로 표현되는 공간의 공포는 극대화된다. 그들의 공간은 우리에게 과연 친밀하고 개인적인 공간이 있는가를 묻는다.

공간이 표현하는 드라마

▲영화 '도그빌' 중 한장면     ©씨네서울
'무대'가 되는 곳은 록키산맥 끝자락의 가난하고 고립된 마을이다. 고립이라는 설정은 한계가 있는 장소설정으로 탄탄한 드라마를 자신하는 것이다. 제한된 장소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극적으로 집중력 있게 끌고 가려면 치밀한 계산에 의한 이야기 구조를 필요로 한다. <도그빌>은 형식상의 실험적 방법에도 불구하고 내용적으로는 전통 드라마를 고수한다. 주지하다시피 라스폰트리에 감독은 미국의 이중적이고 교만함을 고발하는 의미에서의 3부작을 기획했다. <도그빌>은 그 첫 번째 시작으로 미국이라는 공간과 미국인이라는 캐릭터들을 고발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미국을 대표하는 인물들로서 교묘하게 설정되어있다. 일반적인 부부, 장애인, 흑인, 육체노동자, 아버지와 아들등 매우 전형적인(Typical/Stereo type) 미국 사회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들의 성격은 전형적인 동시에 매우 구체적이다.

도덕강의를 취미 삼는 톰은 어느 날 우연히 총소리를 듣고 그레이스를 만난다. 마을사람들은 톰의‘수용의 미덕’을 못마땅해하지만 딱히 거부하지도 않는다. 마을회의 결과 그레이스는 2주간의 시험기간을 얻게된다. 사람들은 경계하지만 선량하고 호기심어린 눈으로 그레이스를 대한다. 결함, 약점을 지닌 인물들 모두는 항상 조용하게 말하고 오만함과 탐욕을 감추고 있다. 그레이스는 점차 모두의 어느 한 곳을 채워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레이스는 기꺼이 톰에게 항상 지는 빌의 머리가 되고 장님 잭의 눈이 되며 벤의 엄마, 베라의 친구, 마사의 죄책감이 된다. 이제 마을 사람 모두에게는 그레이스를 소유해야하는 저마다의 이기적 이유가 있다. 제목이 암시하듯 야만과 야성이 인간성을 내쫒는 그 곳에서 그레이스는 상징적 복선으로써 창녀 로라의 침대를 선물 받는다. 이제 사람들에게 그레이스를 향한 감사의 시선은 없다. 경찰이 붙이고 가는 포스터가 바뀔수록 마을사람들은 더욱 잔인해지고 그레이스는 그들의 요구에 수동적으로 응한다. 목사가 없는 교구가 상장하듯 도덕적 잣대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그레이스를 숨겨주는 것에 상응하는 보답, 답례를 요구하는 마을사람들은 그들을 위협하는 갱들과 다르지 않다. 다만 다르다면 어린아이의 잔임함을 가졋기에 더욱 잔인하게 느껴진다. 베라의 아들이 ‘13일의 금요일’의 살인마 제이슨과 같은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억지스런 상황의 연속에서 요구하는 사람도 응하는 그레이스도 모두다 조용하고 절제된 움직임을 보여준다. 마을사람들의 조용함은 강제이고 그레이스의 침묵은 무기력함이다. 베라의 남편 척에게 강간을 당한 그레이스는 오히려 유혹했다는 누명을 쓰고 화가 난 베라는 마을과 화합의 상징이며 고통을 참아냈던 상징인 7개의 인형을 부숴 버린다. 그레이스는 마침내 탈출을 감행하지만 실패한 그녀는 더욱 가혹한 형벌을 받는다. 사람들은 구원자 이름인 모세의 사슬을 대신 목에 걸어놓는다. 그레이스를 사랑하는 톰조차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자 적으로 돌아서 그녀를 밀고한다.

▲영화 '도그빌'중 한장면     ©씨네서울
사건이 진행되는 내내 인물들 모두는 매우 억압된 듯한 연기를 보여준다. 그들은 결코 큰소리로 말하지 않으며 감정의 표현이 밖으로 향하지 않고 내부로 타들어 간다. 그래서 코로 눈으로 귀로 흘러내린다. 분노할 상황에서 잦아드는 것은 은밀한 공포감을 더욱 조장한다. 공포와 연민을 통한 카타르시스는 이유 없는 폭력적 상황의 연속이나 아무런 죄가 없는 주인공이 마주친 현실을 관조하는 데에 있다. 이것이 관객으로서 우리가 가진 오만함이다. 영화에서 연극적 공간이 궁극으로 표현하는 주제는 전체적으로 ‘오만함’에 관한 것이다. 나아가 권력이나 선량함, 선과 악, 환경과 본성들이 어떻게 이중적으로 자리하는 가에 대한 것이다. 그레이스를 찾아온 갱단의 두목이 그녀의 아버지임이 밝혀지고 둘은 오만함에 대한 논쟁을 한다. “넌 동정하기 때문에 심판하지 않는 거야. 개에겐 채찍이 약인 거다. 넌 사람들을 너무 쉽게 용서 하고있어. 이 것이 네가 오만한 이유다.” 개의 본능을 따랐으니 용서 해야한다는 다소 ‘예수’적인 말에 대한 아버지의 대답이다. 인간의 나약한 본성은 곰팡이같이 조건을 만족시키는 상황에서 생겨난다. 악을 경험한사람은 더한 것을 뱉어내리라는 것을 깨달은 그레이스 도그빌의 추함을 멸한다.

개판을 우아하게-Grace- 보여주는 <도그빌> 은 말하고자 하는 바와 말하는 형식의 일치를 이뤄낸 작품이다. 무엇을/어떻게 말하는가에서 후자 쪽에 새로운 시선을 선사한다. 그리고 고답적인 주제를 무엇이 일어날 것이며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공간적 통찰이 치밀한 작품이다. 같은 주제의 '아메리칸뷰티'가 보여주는 매끈하고 가식적인 아이러니보다 한번도 가본적 없다는 미국을 통찰하는 감독의 천재스러움이 유쾌할 뿐이다.

ps.문제적감독 라스폰트리에의 행보는 계속된다. 쭈-욱
미국_기회의 땅3부작 중의 첫 작품으로 주인공 니컬키드먼은' 만델레이'(2004), 위싱턴 등 2,3부작에도 출연할 예정이다.

* 본문은 본지와 기사제휴 협약을 맺은 문화연대에서 발행한 주간문화정책뉴스레터 '문화사회' http://culture.jinbo.net/ 에서 제공한 것입니다.
* 필자는 문화사회 편집위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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