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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패권주의는 '지배'의 '동적 메카니즘'
영남패권과 각 지역민의 입장 차이는 어떻게 구성되나
 
이경렬   기사입력  2003/09/24 [18:03]
영남패권주의에 대한 인식과 현실 감각이 무딘 사람들이라고 해서 적어도 3공 박정희 독재정권 이후 지속되어온 이 나라 안의 전분야에 걸친 영남 권력 독점적 현상을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이 말의 쓰임에 <거부감>을 나타내는 것은 이 용어가 도발적인 느낌을 줘 섬뜩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엔 겉으로 드러나는 거부감이라는 일차원적 감정만이 아니라, 영남의 지배권을 공히 인정하면서도 각자의 <입장 차이>로 생기는 <세가지 유형의 복합심리>가 있다. 
 
▲많은 이들이 영남패권주의라는 용어에 거부감이라는 일차원적 감정을 느끼고 그뿐만이 아니라, 각자의 <입장 차이>로 생기는 <세가지 유형의 복합심리>가 있다./  사진설명: 신화에 나오는 헤카테   ©인터넷이미지
영남인으로서는 '우리들의 심기를 건드렸다간 도리어 그 쪽에 해가 미칠지 모른다'라는 으름장, 비호영남인으로서는 '이들의 심기를 건드려서는 실익은 커녕 호남의 고립과 사회적 혼란만 초래할 것이므로 제3자로서는 개입을 자제하고 관망하는 게 났다'라는 기회주의적 자기 실익 챙기기, 그리고 호남인으로서는 전 사회로부터의 고립 가능성이라는 위의 <패배주의적 사고>와 함께, '사회적 분란의 빌미 야기로 말미암아 제3자인 비호영남인들에게 피해를 주기 싫다'라는 <배려>의 마음이 깔려 있다.
 
<패권>의 의미 규정

이렇게 영남패권주의 거론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감추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문제점은, 이들이 패권에 대해 단순히 <늘 과욕을 부린다, 나보다 우세한 파워를 향유한다, 그래서 봐주기는 좀 꼴사납다> 정도의 매우 나이브한 인식 차원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모두 문제의 핵심을 놓치고 있다.
 
<패권>의 요체는 바로, 패권세력이 <타자의 몫을 빼앗아간다>에 있다. 어떤 지배세력(dominant  power)이 스스로의 능력이 우세한 이유로 나보다 더 많은 양을 소유할 뿐, 나의 몫을 향해 곁눈질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저 우위와 우세의 <상태>만을 말할 뿐이다. 그러나 패권(predominant influence over others ; hegemony)이란 능력이 우세한 상태만이 아니라, 현재 가진 물리적 힘의 우위를 내세우는 집단이 그것을 협박의 무기로 삼아 타자의 몫을 부당하게 강탈, 탈취해가는 <조건>을 핵심 개념으로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영남패권주의>의 핵심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은 영남의 우위라는 <정적  현상>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지배하므로써 그 지역의 몫을 강제로 빼앗는다는 <동적 매카니즘>을 일컫고 있다.
 
(여기에서 패권주의 용어에 대한 논란을 정리하는 뜻에서 말한다면, 영남부족주의, 영남지상주의, 영남중심주의 등등은 위에서 논한  패권주의의 핵심 요소인 강제적 <탈취>라는 의미를 함축하지 못하므로 모두 부적절한 어휘라 하겠다.)
 
이 조그만 인식의 차이('우위의 상태'와 '탈취의 조건' 사이의 차이)가 현실에서는 엄청난 사회 현상의 결정력을 보유하고 있었음을 확인키로 한다.
 
<비호영남>이 갖는 개념 인식에서의 혼란

호남인 집단이나 비호영남 집단은 이제까지 커다란 착각 속에 지내온 셈이다.  특히 비호영남인들을 일차적 희생양이 호남인이라는 이유로 상대적으로 적게 깎여 나간 자신의 몫을 두고, 그만 안도하고 자족하는 자기 기만 속에 안주해왔다.  즉, 부당하게 소외당해 왔던 것은 일차적으로 호남이었으니 비호영남은 이제 자신이 과연 영남에 이은 <두번 째 우세> 지역으로서 가해자의 입장에 서는지, 호남에 이은 <두번 째 순번의 피해자>인지에 대한 자문을 하며 혼란을 맛보는 거다.  이 인식의 혼동의 원인은 바로, '영남이 패권을 가졌으므로 영남 외의 <모든> 지역은 공히 피해자일 수 밖에 없다'는 방정식에 대한 명확한 개념 정립이 없음에 기인하는 것이다.  '패권이란 뺏음(빼앗김)이다'라는 개념이 없는 경우, 어이없게도 자신의 지역이 두번 째 <우세> 지역으로서 굳이 피해 당사자가 아닐거라는 편의적 설정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 비영호남인의 정치공학적 위치 선정은 꼭 위에서 말한 개념 이해 부족에 의한 것이라고만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개념상의 혼란에 안주한다는 것이 사실은 그들 당사자가 스스로 불러들인, 강자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오는 계산적이고 기회주의적 처신의 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 위치 설정의 메카니즘은 다음과 같다.
 
'두번 째 우세'라 자임하는 것은, 영남으로 하여금 비호영남 스스로가 호남이라는 피해 당사자와 같은편에 서는 것이 아님을 인정해달라는 호소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두번 째 순위의 피해자가 됨을 영남을 향해 안정하게 되면 그것은 곧 호남과 같은 정서를 나눔으로 보일 것이므로 패권자인 영남과는 무척 불편한 관계가 이뤄지고 말 일이다.
 
그리고 '두번 째 피해 당사자'라는 위치 선정은 이번엔 호남인을 염두에 둔 이름이 된다.  '두번 째 우세'라는 정체성은 당연히 호남에게는 비우호적 감정을 유발시킬 일이다.  그래서 영남을 향해서 견지했던 정체성이 호남을 향해서는 이들의 아픔에 동참하는 '두번 째 피해 당사자'로서의 정체성을 끌어오는 것이다.  이것이 일부 비영호남인의 순수한 인간적 면모가 아니라  호남과 영남 모두에게 비호남인 전체의 기회주의적 속성의 표현으로 다가오고 말 것임은 또한 어쩔 수 없다.
 
이렇게 비호영남이 갖는 서로 대립될 법한 두가지 상반된 위치 선정을 하는 것을 같은 사람(집단)이 상황에 따라 표리부동하게 오락가락  처신하는 방식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보다는 비호영남 지역민 내의 일정한  집단은 내내 '두번 째 우세'임을, 그리고 또 다른 집단은 변하지 않은 정체성으로서 '두번 째 순번의 피해자'임을 계속 견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비호영남 내에는 뚜렷이 구분되는 이 두 그룹이 병존하고 있으나  우리 눈에는 자기 정체성을 편리에 따라 수시로  뒤바꾸는 사람들만이 있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여기에선 선의의 비호영남인마저 기회주의적 처신을 하는 비호영남인들에게 가려 함께 매도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비호영남인 중에 '두번 째 우세'로서 스스로를 자리 매김하는 사람들이 결정적으로 많은 것이 사실인데, 이 현실은 사실상 영남패권주의의 공포스런 위력과 또 그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대부분의 비호영남인들의 뇌리마저 지배하고 있는가를 증언하고 마는 것이다.  즉, 비호영남인들의 '스스로 알아서 기기'가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음이다.
 
이와같이, 비호영남은 <패권>의 의미가 <뺏음/빼앗김>이라는 개념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그저 <우위/우세>의 상태라고 오해함으로써 자신의  <피해자>로서의 위치를 깨닫지 못하고 산다.  그러나 그들의 인식 부족을 불러들인 심리를 한풀 벗겨보면 <두번 째의 우위> 라는 정체성 규정과 <두번 째 순위의 피해자>라는 정체성 선정 사이에서 맛보는 곤혹스러움을 희석시키기 위해, 그 개념상의 혼란을 스스로 불러들여 안주하기를 선택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미묘한 과정은 결국 패권세력인 영남에 대한 눈치 보기에서 나온 처세술로서 우리 사회의 영남패권이데올로기가 비호영남인에게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비호영남 일반>에 대한 호남의 태도

반면, 호남인들은 정치 경제적인 물적 토대에서의 빼앗김은 물론 사회문화적인 차별까지를 노골적으로 받아온 관계로, 그 깊은 상처로 인한 패배주의의 그림자가 가슴에 드리워졌을 거라는 유력한 유추를 허용하더라도,  저항의 화살이 오직 영남에게만 향할 뿐 비호영남에 대해서는 어떤  형태의 태도를 설정하겠다는 것인지  그 개념이 아직 모호하다. 그들은 비호영남인들과 마찬가지로, 패권주의로 인한 피해가 오직 자기네 호남 지역만일 뿐, 알고 보면 비호영남인도 자신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처지에 함께 놓여 있었다는 사실에는 미처 인식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패권 개념에 대한 인식의 오류가 발생시킨 현상이 드러나고 있다. 패권의 주체는 분명 딴 지역이 아닌 영남임을 잘 알고 있되 그 피해가 오직 호남 자신에게만 미친다고 믿는것은 분명히 패권에 대한 인식의 오류다. 그것은 당연히 패권 주체가 아닌 <모든> 지역의 '빼앗김'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본질을 갖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유로 호남인의 심리 기저에는 자신들의 영남패권주의에의 저항이 사회 갈등의 첨예한 표면화와 그 증폭으로 결국 나타나고 말 것이므로 이 혼란은 필히, 가해와 피해 지역을 벗어난 '중립지대' (그들의 착각에 의한 인식) 에 있는 <비호영남인>에게 본의 아닌 피해를 입힐 것이란 우려를 포함하며, 따라서 그들에 대한 깊은 배려가 드리워져 있는 것이다. 피해자 처지가 아니라고 생각되는 비호영남인에게, 자신이 당해왔던 영남의 패권적 행위를 닮은 공세적 저항을 취함으로 인하여 그들에게 본의 아닌 폐를 끼친다고 여기면서 그간 참고 자제해왔다면, 그것은 대단한  인류애의 발로로서 칭찬받을 일이다. 하지만 비호영남인들과 마찬가지로 호남인도 여기서 똑같은 개념 인식에의 오류를 범해왔던 허물을 인정해야 한다.  그것은 (나중에 논하겠지만) 미필적 고의에 의해 비호영남인과의 불신과 불화를 알게 모르게 키워오게 된 이유가 된다. 
 
영남패권주의에 대한 <비호영남>의 대응 자세

다시 돌아가서 비호영남인군(群)의 영남패권주의에 대한 대응 방식을 좀 더 살펴보자.  설사 비호영남인 중에 영남패권세력에 의한 자신들의 피수탈적 처지를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던 그룹이 있었다 할지라도 어차피 호남인에 비해서는 그 피해의 강도가 훨씬 약할 것이므로, 스스로 호남인에 앞서서 문제 제기나 저항을 결단할 동기 부여는 충분히 갖지 못했으리라고 본다.  게다가 이들 선각자적 소수에게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사회적 압력으로 작용하는 것은, 그들 <내부>에 떠다니는 호남에 대한 <은근한> 혐오와 경원의 정서이다.  여기에서 <은근함>이란, 약자를 호위하는 제스처 때문에 그만 강자로부터 자신이 한통속이라 점찍히고 말것에 대한 두려움을, 선행적으로 말소시키고자 하는 간접 표현이 되는데, 그것은 사실상 약자가 선택하는 애처로운 정서이기도 하다. 약자가 또 다른 약자를 미워함으로써 강자로부터의 추궁을 면하겠다는 처신인 것이다.
 
그러나 그 정서가 애처로운 표현일 망정 일단 집단적인 현상이 될 때는 역시 <차별>이란 본질을 벗어날 수 없다. 이러한 비호영남의 집단적 정서로부터 한 비호영남인이 개인적으로 탈퇴하겠다는 것은, 그 자신과 끈끈한 인간관계를 맺고 있는 가장 가까운 친지들이 항용 견지하는 무의식과의 결별이고, 그것은 곧 그들 친지들과 공유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코드를 내던지므로써 인간적, 개인적 유대와 교류까지를  모두 포기하겠다는 사회적 자해 행위가 되고 마는 것이다. 자신의 사회적 자산을 다 내다버리는 이러한 실익없는 어드벤처에 목을 맬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므로 소수의 깨인 비호영남인들 능력만으로는 다수가 지지하는 호남에의 혐오 정서를 뒤엎을 수 없게 되어 있다.
 
영남패권주의에 대한 <영남>의 대응 자세

영남인들이 영남패권주의 논의>을 대하는 입장이란 뭔가?  감정상으로는 극심한 혐오요, 정신적으로는 <피해의식>이다. 즉, 실제 피해의 크기에 비해 스스로 느끼고 받아들이는 피해의 양이 워낙 커서 그 사실이 못내 불공정한 처사로 보이고, 자신의 힘만으로는 그 불공정을 되돌릴 수 없다는 무력감에 괴로워한다는 병리적 현상이다.  이것은 망상의 일종이다.  영남인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이 수 십년에 걸쳐 이 사회의 패권카르텔을 형성해왔다는 점을 잘 인식, 인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립적 개인>으로서의 자신만은 그 수혜대상 범위로부터 늘 바깥에 머물러왔다고 강변한다.  이런 주장을 그대로 따를 경우, 논리적으로는 모든이가 모든 타자를 향해 그들의 책임을 묻는 양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형식상의 가정일 뿐, 어차피 논리를 결한 그들 당사자의 면책 노력은 결국 이기심의 극적인 발현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일단 자신과는 직접 연관이 없어보이는 극소수 권력층에게 그 화살을 돌린다.  일단 그것으로 일부 변명이 되지만 그러나 그것만으로 명쾌히 설명되어질 것이 아님은 스스로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영남인이 다음에 선택하는 전략은 대별하여 두 가지인데 (영남패권이 정당하여 하등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우기는 초극단의 예는 논의에서 제외함) 하나는 방어적 형태로서 앞에서 언급한 <피해의식>의 표현이고 또 하나는 공격적  형태로서 <으름장 놓기>이다.  첫번 째는 영남의 패권으로 이득을 챙긴 집단이 결코 영남인 일반 만이 아니고 <타 지역>의 중상류 계층도 그 일원이므로 그들에 비한 자신의 수혜량은 오히려 약소하여  자기가 부당한 추궁을 받고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러한 범주의 영남인은 자연, 스스로 발견한 방어기제의 유용성에 흠족해하고 아예 심취해버리고 만다. (이것은 자기 변론이 아예 믿음으로 전이한 상태를 보인다.)
 
다시 말해, 자신의 믿음을 스스로 강화하기 위해 그 기제에 대한 지나친 신뢰를 부여하는 나머지, 종내엔 그것을 실제 믿어버리고 현실로 체화시킨다는 것이다. 이 결과가 가져오는 것은 피해 의식의 자가 발전이다. 이 피해 의식이 있는 한 일단 면책의 사유가 되므로 그는 상상 속에서 꾸며진(fabricated) 분노를 증폭시키려는 병리적 행위를 스스로 그만두지 못한다. 이것이 초기에는 면책을 위한 합리화로써 시작했으나, 그 합리화 작업이 호남은 물론 비호영남으로부터 정당하지 못한 것으로 계속적인 의심을 받게 되자, 결국 방식을 퇴행적으로 이행시키고 마는 것이 <으름짱 놓기>라는 형태다.
 
두번 째의 '으름짱 놓기'는 말 그대로, 상대로부터의 추궁을 <공격적>으로 방어해내는 방식이다. 이 형식에서 지적되어야 할 것은 개인적인 차원이 아닌 <집단>적인 형태에서의 특징이다. 개인 차원에서는 사실 별 실효성이 없다. 일 개인은 그 사람의 전 인격으로 판정되므로 영남인이라고 해서 타지역인에 비해 우세한 사회적 조건(힘)을 모두 갖추고 있을리 만무하다. 그러므로 영남인 일 개인이 이러한 방식으로는 타자에 비해 언제나 우위에 설 수 없으므로 자기를 방어해내지 못한다. 그러나 집단적으로는 결정적 효과를 보는 전술이다.  이것이야 말로 한 사회를 재갈물릴 수 있는 섬뜩한 파워요, 그 자체로서 패권의 상징이다.  (그러나 이 방식이 노출하는 약점은 얼마든지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영남패권주의의 해법 편에서 논할 것임) 
 
비호영남에 의한 대리전-그 추악한 부도덕

그러나 '으름짱 놓기'가 꼭 바로 눈 앞에서 협박 공갈을 치는 노골성을 보이는 것만은 아니다.  거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는 것은  강자로서의 체신을 잃는 손해를 감수해야 하며 자칫, 사실상 부실한 속마음을 다 내비치고 말 수 있는 위험한 전술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외면적으로는 관심없다는 듯 짐짓 딴청을 부린다. 대신 그들에 부역하는 비호영남에게 압력을 넣으며 뒤로는 면밀히 사태를 주시한다. 이 때는 오히려 영남의 의중을 미리 읽는 일부 비호영남이 앞에 나서서 극렬히 공박하는 경향이 있는데, 영남이 직접 나서기에는 약자인 호남을 또 다시 핍박하는 것으로 보일 것같아 꺼려지는 일이지만, 이들 비호영남으로서는 외형상의 명분을 얻어 매우 떳떳하며 공정한  입장에 선 것으로 위장하므로써 자신만의 실익을 남몰래 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의 '실익'이란 심리적 안정이란 부분을 포함한다.)
 
이것이야말로 그들의 주구로서의 커밍아웃이 되는 것인데, 이들은 단순히 영남에 대해 충성 시위의 기회로 삼는 것만이 아니고, 실제 현실에서 영남패권이데올로기 아래 짜여진 기득권을 일반 영남인보다 훨씬 더 많이 누려왔으며 그만큼 현실적 예상 손실이 크게 걸린 집단이기 때문이다.  강자인 영남을 호위하기 위해서 역사적으로 피해자임이 분명한 호남에 공세적이라는 것은, 그들이 영남패권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수혜를 받는 집단이다라는 설명을 빼고 결코 가능할 리  없다. 즉, 으름짱 놓기는 영남이 구축하고 관리하는 구조 아래 비호영남이 대리해주는 형식의  공격적 대응인 셈이다. 
 
영남으로서는 이러한 충성어린 영남패권 부역자 비호영남인이 자신의 비도덕성에 운무를 피워올려 패악성을 은폐해주는 전위대 역할을 대신해준다는 게 매우 든든한 것이다.  이렇게 비호영남인에 의한 대리전이란, 외피만으로 보기엔 자발적이지만 실상을 보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영남의 패권에 의해 <강요>되는, 그러나 공동(영남과 비호영남간)의 이익을 추구하겠다는 의미에서 양자가 비열한 야합을 하고 있는 추악한 비도덕을 과시한다.  이렇게 가해 주체 세력이 장막 뒤로 몸을 숨기고 패권에 아부하는 제2종 시민들이 대리전을 치르므로써 피아구분이 확연치 않은 시기가 계속될 때가 반영남패권주의 세력에게는 커다란 시련이 된다.
 
영남 주류는 매우 괘씸하다는 심기를 가눈 채 팔짱을 끼고 느긋한 교만의 시선으로 영남패권주의와 그 이데올로기 논의를 깔아보고 있다.  발끈한 심정의 관심 표명 자체가 그만 사회의 이목을 끌 수 있음을  앎으로 태연히 돌아앉아 짐짓 딴청을 피운다. 그러나 순수하고 치기어린 열혈 영남인은 결국 나름대로의 분통을 자제치 못하고, 외형상 자발적이나 내면상으로는 강요를 받는 비호영남인들과 야합하여 공세적 방어 전술을 구사할 것이다.  이와 같은 양상이, 지금으로부터 앞으로 얼마의 기간 동안 영남패권주의 사회적 논의 확산 과정이 겪는(그리고 겪을) 단계라고 말할 수 있다.  (논의는 후속 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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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3/09/24 [18:03]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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