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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절 묵상 - 크리스마스, 오 거룩한 악몽
[정연복의 민중신학] 땅의 평화를 노래? 황제의 포고령들과 혼동해선 안돼
 
정연복   기사입력  2008/12/26 [23:16]
그리고 하늘에는 큰 표징이 나타났습니다. 한 여자가 태양을 입고 달을 밟고 별이 열 두 개 달린 월  계관을 머리에 쓰고 나타났습니다. 그 여자는 뱃속에 아이를 가졌으며 해산의 진통과 괴로움 때문에  울고 있었습니다. 또 다른 표징이 하늘에 나타났습니다. 이번에는 큰 붉은 용이 나타났는데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졌고 머리마다 왕관이 씌워져 있었습니다. 그 용은 자기 꼬리로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휩쓸어 땅으로 내던졌습니다. 그리고는 막 해산하려는 그 여자가 아기를 낳기만 하면 그 아기를 삼켜 버리려고 그 여자 앞에 지켜 서 있었습니다. 마침내 그 여자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아기는 장차 쇠지팡이로 만국을 다스릴 분이었습니다. 별안간 그 아기는 하나님과 그분의 옥좌가 있는 곳으로 들려 올라갔고, 그 여자는 광야로 도망을 쳤습니다. 그 곳은 하나님께서 천 이백 육십 일 동안 그 여자를 먹여 살리시려고 마련해 두신 곳이었습니다.
 
그때 하늘에서는 전쟁이 터졌습니다. 천사 미가엘이 자기 부하 천사들을 거느리고 그 용과 싸우게    된 것입니다. 그 용은 자기 부하들을 거느리고 맞서 싸웠지만 당해 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늘에는 그들이 발붙일 자리조차 없었습니다. 그 큰 용은 악마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세계를 속여서 어지럽히던 늙은 뱀인데, 이제 그 놈은 땅으로 떨어졌고 그 부하들도 함께 떨어졌습니다......
 
그 용은 자기가 땅에 떨어진 것을 깨닫자 그 사내아이를 낳은 여자를 쫓아갔습니다. 그러나 그 여자 는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가지고 있어서 광야에 있는 자기 처소로 날아가 거기에서 삼 년 반   동안 그 뱀의 공격을 받지 않고 먹고 살 수 있었습니다. 그 뱀은 그 여자의 뒤에서 입으로부터 강물처럼 물을 토해 내어 그 물로 여자를 휩쓸어 버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땅이 입을 벌려 용이 토해 낸 강물을 마시어 그 여자를 구해 냈습니다. 그러자 용은 그 여자에 대하여 화가 치밀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를 위해서 증언하는 일에 충성스러운 그 여자의 남은 자손들과 싸우려고 떠나가 바닷가에 섰습니다. (요한계시록 12:1-9, 13-17) 


약 30년 전, <가톨릭 노동자>(The Catholic Worker)라는 단체와 오랫동안 함께 일한 화가인 프리츠 아이첸베르크는 예수 탄생에 관한 훌륭하면서도 우리의 마음을 뒤흔드는 묘사를 담고 있는 판화가 실린 책을 출판했다. 판화의 전경에는 배내옷을 입은 한 아기가 건초더미 위에 누워 있다. 그리고 아기 주변에는 그 아기를 경배하는 당나귀와 암소가 기분 좋게 누워 있다. 마구간 위로 뻗쳐 있는 대들보들 사이로는 하늘에서 별 하나가 내려다보고 있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이 판화는 위안이 되고 전통적인 크리스마스 카드와 별 차이가 없다고 당신은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잠깐 기다려라. 아치 밑의 통로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판화의 가장자리에서도 거의 벗어나 있는 한 마을이 드러난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흔히 예상하듯이 유대 언덕의 중턱에 위치한 한 아늑한 마을이 아니라, 폭탄 세례를 받아 완전히 화염에 뒤덮인 도시다. 우리는 이 참혹한 도시의 모습이 거룩하고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잠자고 있는 그 아기에게로 온통 수렴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그림을 다시 보라. 건초더미 밑에는 한 군인의 헬멧이 감춰져 있다. 아기는 전쟁이 벌어지던 해에 태어났다. 폭력이 가까이 있다.
 
이것은 성서적으로 정확한 묘사다. 우리는 크리스마스 카드의 정적(靜的) 그림과 구유 속의 아기 예수상에 아주 익숙하다. 성육신에 관한 성서의 역동적 이미지들은 단조롭고 얼어붙은 것이 되었다. 크리스마스를 생각할 때 우리의 마음에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은 멋스럽고 목가적인 전원 풍경이다.
 
그렇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역사의 한 고요한 점, 하나의 중심, 그리고 시간의 한순간 속의 영원의 임재다. 그리고 구유 장면은, (적어도 대표를 선출하여) 불러모은 모든 피조물이 고개 숙여 경배하는 가운데, 그리스도가 이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고 있음을 썩 잘 드러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맹렬하게 소용돌이치는 이 세계의 중심에, 그리고 폭풍의 눈 아주 가까이 있는 하나의 고요한 점이다. 폭풍? 그렇다. 우주의 불길한 징조들, 역사의 권력자들, 정렬해서 이동하는 군대, 온갖 협박과 음모, 여행과 망명, 그리고 미친 듯이 날뛰는 정치적 폭력 따위가 바로 그 폭풍이다. 그런데 우리의 전통적인 구유 장면에서는 이런 것들이 그림의 가장자리 밖으로, 즉 우리의 시야와 마음 밖으로 떠밀린다.
 
요한계시록 12장은 크리스마스 절기에 공동으로 읽히지 않는다. 한 용이 무시무시한 협박들을 내뱉으며 추적하는 가운데, 비명을 지르며 한 아기를 출산하는 여인의 모습은 예수 탄생에 관한 성구들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때로 나는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최소한도, 우리의 크리스마스 본문에는 마태와 누가, 그리고 요한복음의 예수 탄생 이야기들이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이 구절이 무시되는 데는 여러 원인이 있을 것이다. 다방면에 걸친 유동적인 이미지들 때문에 불확실하고 심지어 무아경에 빠진 그릇된 설명에 종속되고 마는 요한계시록 전체에 대한 일반적인 주의가 그 한 가지 원인이다. (요한계시록을 이런 식으로 설명하는 태도가 우리에게 하나의 주의가 되도록 하자!) 더욱이, 우리가 앞으로 살펴보게 되듯이, 그것은 정치적으로 폭발성이 있고 결코 편안한 마음으로 읽을 수 없는, 그래서 정적이고 현상 유지적 해석들이 선호되는 장이다. 마지막으로, 대부분의 학자들은 요한계시록 12장의 뿌리를 보다 고대의 "이방" 신화들에서 찾거나 혹은 그것이 연대기적으로 어떤 미래의 사건 곧 "과거의" 성육신과의 관련을 배제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사건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 그것을 그리스도와의 관련 속에 읽기를 거절한다.
 
이 모든 것들 이외에도, 쟉크 엘룰의 주목할 만한 논제가 하나 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요한계시록의 단편들은 하나의 중심으로 수렴되는 거울처럼 구조상 내부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며, 그리고 이 중심 부분 곧 "핵심"(요한계시록 8:1-14:5)은 역사 속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아주 분명하게, 그러나 윤곽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삶, 그리고 업적을 감지한다....  다른 부분들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인물로 등장하는 데 반해, 여기에서는 그가 빠져 있는 듯하다. 따라서, 만일 이런 이중적 구조에 통일성과 일관성이 존재한다면, 예수는 여기에서 다른 방식으로 드러나고 있음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여기에서 그는 만군의 주, 교회의 머리, 역사의 주인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 됨을 박탈당한 하나님이며, 따라서 여기에서는 하나님에 관해 직접 말하는 게 더 이상 불가능하다."
 
이 해석에 따르면, 하나님은 익명으로, 즉 숨겨진 모습으로 피조물과 역사 속에 들어오기 위해 일체의 모험을 감행하셨다. 그리고 이러한 절대 권력의 포기, 이런 식의 겸손에 의해 우주적·세상적 권력들은 바울이 말하는 대로 전복되고 멸망한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로 권세와 세력의 천신들을 사로잡아 그 무장을 해제시키시고 그들을 구경거리로 삼아 끌고 개선의 행진을 하셨습니다"(골로새서 2:15). 그러나 성육신에 관한 요한계시록의 이 비유에서 본질적인 것은, 세상 권력자들은 그것을 냄새 맡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그것을 감지하고 격분하여 난폭해진다. 하나님이 스스로 택하신 무기력함 때문에, 그들은 얼마 동안은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고 자유롭게 행동한다. 그들에게는 광범위한 영토가 주어지는데, 이 영토 안에 대격변이 일어난다. 여인과 용이 함께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다.
 
이제 일부 사람들의 눈에는 여인 그 자체의 모습이 들어올 것이다. 이 여인은 그저 한 인간이 아니라 대문자로 표시되어야 할 여자다. 아마도 여기에서는 뱀(사탄)과의 태고의 그리고 종말론적 대결이 다시금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대결의 결과는 다른 대결들의 결과와는 전혀 딴판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 여인은 전체 인류를 상징하며 또 전체 인류와 일치한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여인이 무엇보다도, 그리고 바로 마리아라고 생각하기를 좋아한다. 그녀의 결단력 있는 성격, 하나님의 뜻에 대한 그녀의 전적인 동의, 그녀의 충실한 믿음의 의미 등, 마리아와 관련된 주요 사항들이 여기에 깊은 차원에서 기록되어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사건들에 질질 끌려 다니는 나약하고 온화한 어머니의 모습은 우리 눈에 전혀 들어오지 않는다. 그녀는 모든 치명적인 가능성들에 맞서 하나님의 소망에 자리잡는 아주 간단한 선택을 했다.
 
맥앨리스터(Liz McAlister)는 1983년 <그리피스 보습>(Griffiss Plowshares) 행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투옥되었다. 그녀는 전에도 이 구절을 묵상해 본 적이 있지만, 감옥에서 다시금 같은 구절을 놓고 묵상했다:
 
요한계시록의 여인은 용을 똑바로 쳐다봄으로써, 그리고 출산을 함으로써 희망을 간직했다. 그것을 똑바로 쳐다보라.... 죽음을 똑바로 쳐다보라. 그녀에게 위태로웠던 것은 그녀와 그녀의 아기의 생명이었다. 그리고 그 아기를 낳으면 주리라고 약속을 받았던 통치권이었다. 우리에게 위태로운 것은 우리의 생명과 모든 피조물이다.
 
마리아는 용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그 용의 비극적인 운명을 선언하는 노래를 부르는데, 이때 그녀는 임신한 몸이다. 누가복음 1장 46-55절에 기록되어 있는 이 노래에서 그녀는 이렇게 읊고 있다:
 
주님은 전능하신 팔을 펼치시어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요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 보내셨습니다.
주님은 약속하신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습니다.
우리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그 자비를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토록 베푸실 것입니다.
(51-55절)
 
▲     © CBS노컷뉴스
그녀는 흔히 "마리아의 노래"(Magnificat)로 불리는 이 노래를 또한 그 아기를 위한 일종의 자장가로 불렀을까? 만일 그렇다면, 아마도 그것은 어떤 더할 나위 없는 행복(누가 6:21, 25)의 씨앗으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이 노래와 이 노래에 대한 기억은 아주 오랜 것이다. 한나는 갓 태어난 아기인 아들 사무엘을 하나님께 바치며 한 노래를 읊었는데(사무엘상 2:1-10), 이 무렵 그 노래는 이미 닳고닳은 시편이었다. 마리아가 이 시편을 다시 읊을 때, 이스라엘의 희망이 그녀의 피 속에 흐른다. 그녀는 모든 사람을 대변하고 있다. 그녀가 곧 이스라엘이다.
 
요한계시록에서, 그 여인은 "별이 열 두 개 달린 월계관을 머리에 쓰고 나타난다"(12:1). 이 열 두 개의 별은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의미하는 게 아닐까? 성경과 특별히 요한계시록에서, 열 둘은 공동체를 의미하는 숫자다. 구원을 위해 울부짖고 출산을 하려고 몸부림치는 마리아, 즉 이스라엘이 여기 있다. 주님은 그녀의 울음을 들으신다. 하지만 용 또한 그녀의 울음소리를 듣는다. 용은 그녀를 삼킬 채비를 하고서 기다린다.
 
용의 의미를 샅샅이 규명하기는 거의 어렵다고 해도, 용은 대단히 정치적인 동물이다. 용이 "일곱 머리와 열 뿔"(12:3)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 문제에 대한 하나의 실마리가 된다. 단지 괴상하고 무서운 모습에 불과한 게 아니라, 그것들은 여인이 쓴 월계관의 별들과 마찬가지로 상징들이다. 뿔은 권력에 대한 규범적 상징이다. (여기에서 나는 쟉크 엘룰의 견해를 따르고 있는데) 머리는 지도와 권위, 명령, 그리고 활동 중인 의식(意識)의 표시다. 그들은 모든 시간과 공간에 걸쳐 증식하며 또 허세를 부리는 절대 권력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다.
 
"일곱 머리와 열 뿔"에서, 주석가들은 보통 일곱 개의 언덕과 열 명의 황제가 명백히 로마를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뒤따르는 유명한 13장에서 로마 제국에 대한 유비가 확대된다. 그러나 다시금 우리는 이 역사적으로 특정한 언급이 엄격히 그 의미에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13장에서 분명히 드러나듯이, 그 무슨 주어진 상태에서 말 걸어지고 인식되는 것은 본질적으로 도피적 권력이다. 예레미야는 바빌론에서 게걸스럽게 삼키는 용의 모습을 보았고(예레미야 51:34), 또 에스겔은 나일강을 미끄러지듯이 나아가는 용을 이집트의 파라오로 보았다(에스겔 29:3, 32:2). 이들 각각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전형적인 제국의 권력들이다.
 
용은 권력들 배후의 권력, 권위들 내부의 권위, 그리고 파괴자, 분열자, 유혹자, 혼란케 하는 자, 고발자, 죽음 따위의 다양한 이름을 가진 도덕적 실재처럼 보인다.
 
여인은 그 용을 똑바로 쳐다본다. 그리고 아직 힘겨운 싸움이 남아 있기는 해도, 본질적으로 용은 이미 패배했다. 여인 앞에서, 성육신에 맞서, 용은 예수의 강림을 뒤틀리고 서투르게 모방하는 자세를 취한다. 용은 여인을 지켜본다. 용은 빈틈없이 깨어 있고, 몸을 잔뜩 웅크리고 공격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여인에게서 태어날 아기에게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대비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복음서의 예수 탄생 이야기들에서도 권력자들은 용과 마찬가지로 아기 예수를 공격적으로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누가의 예수 탄생 이야기에서, 아우구스토 황제는 정치적 감시를 하고 있다. 그 이야기는 "그 무렵에 로마 황제 아우구스토가 온 천하에 호구 조사령을 내렸다.... 그래서 사람들은 등록을 하러 저마다 본고장을 찾아 길을 떠나게 되었다"(누가 2:1, 3)는 진술로 시작된다. 이 진술만 놓고 본다면, 그 이야기를 둘러싼 사건들을 이끌고 있는 사람은 바로 아우구스토 황제인 듯하다.
 
황제의 말은 널리 공포되고, 이로써 역사가 만들어진다. "온 천하"의 사람들이 등록해야 하는데, 이 "온 천하"라는 말에는 누가복음 저자가 예수 탄생 이야기를 통해 독자들에게 전달하려는 전체적인 의도가 담겨 있다! 전체 인류가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된다. 모두 길을 떠나야 하고, 그 모두의 숫자가 헤아려져야 한다. 말할 필요도 없이 아우구스토는 "넘버 원"(Number One)이다. 이것이 제국의 일이다. 종종 주목되듯이, 사람들을 등록시키는 황제의 목적은 여러 가지였다. 그 목적은 로마 권력의 기초인 과세(課稅), 군인들 모집, 그리고 전체적인 인구 통제와 맞닿아 있다. 전체적인 인구 통제와 관련해서, 로마는 반란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은 종속 지역들의 신체 건강한 사람들의 소재와 숫자를 알기 원한다. 아마 황제는 누군가 힘센 자들이 자신의 왕위를 노리고 있다는 소문이 사람들 사이에 나돌고 있음을 알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불안에 떨며, 몸을 웅크리고 경계의 눈초리를 늦추지 않은 채로, 그리고 로마의 평화(Pax Romana)에 대한 가장 하찮은 위협이라도 가차없이 삼켜 버릴 태세로 왕위에 앉아 있다.
 
땅의 평화를 노래하고 경축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압제적인 로마의 평화가 아니다. 영광이 드러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한때 로마가 누렸던 영광이 아니다. 말씀이 살아 임재할 것이다. 하지만 그 말씀을 황제의 거만한 포고령들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비천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영광과 평화가 인식될 것이다. 하지만 당분간 그것들은 권력자들의 날카로운 시선과 지배에서 슬그머니 빠져나가게 될 것이다.
 
마태복음에서, 그 용의 경계하는 눈초리는 꼭두각시 왕인 헤롯에 의해 유지된다. 그는 로마의 대리인이다. 그는 이 세상의 모든 권력을 대표한다. 그 아기가 태어난다는 소문을 듣고, "헤롯왕이 당황한 것은 물론 예루살렘이 온통 술렁거렸다"(마태 2:3)는 사실을 기억하라. 헤롯이 지체없이 취한 행동은 역사가들이 그에 대해 우리에게 말해 주는 것과 전적으로 일치한다. 그는 군사적인 냉혹함과 정치적인 예민함, 그리고 반대 인물들과 자신의 왕위를 위협할지도 모르는 정적(政敵)들을 하나하나 암살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권력을 강화했다. 그는 도처에 정보원들과 비밀 경찰을 두고 있었다. 그의 아들 가운데 셋이, 아내들 가운데 하나가, 그리고 그의 측근 충고자들 가운데 꽤 많은 사람이 그에게 충성을 바치지 않는다는 의심을 사서 살해되었다.
 
메시아가 탄생하리라는 예상에 대한 그의 반응은 지금까지 그가 취해왔던 방식과 아주 흡사하다. 또 하나의 음모를 꾸미는 것, 또 하나의 암살 계획을 세우는 것이 바로 그렇다. 그는 "동방에서 온 박사들을 몰래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정확히 알아보고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가서 그 아기를 잘 찾아보시오. 나도 가서 경배할 터이니 찾거든 알려 주시오' 라고 부탁했지만"(마태 2:7-8), 이것은 악명 높은 거짓 희망이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축한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이 역시 냉소적이었다. 그가 성전을 재건축한 진짜 의도는 도시 경제를 견고히 하고, 또 그의 혼합적인 혈통을 늘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았던 유대인들 사이에 자신의 명성을 쌓아 자기 선전 활동을 수행하려는 것이었으며, 이런 그의 의도는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이 두 경우 모두에서, 그의 진정한 관심사는 예배가 아니었다. 공공연한 거짓말, 개인적 편리함, 그리고 겉치레 따위의 거짓 예배가 그의 마음에 도사리고 있었다.
 
마태의 예수 탄생 이야기가 주제로 삼고 있는 질문은 이것이다: 현인들 곧 동방 박사들은 비록 부지불식간에라도 헤롯의 음모에 말려들게 될 것인가? 그들은 그 자리에서 헤롯의 첩보원이 될 것인가? 그들은 아기들의 이름과 주소와 신체적 특징들을 갖고 돌아올 것인가? 그들은 자신들이 말려들고 있는 살인적인 공모를 이해하게 될 것인가?
 
현인들의 지혜는 그들이 진정한 왕을 예배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진정한 예배의 뒷면에는 거짓에 대한 예리한 분별력이 있다. 그들은 영혼 깊은 곳에서 헤롯의 거짓말을 분별하는데, 꿈은 바로 이 영혼 깊은 곳에서 나온다. 아마 그들은 뭔가를 삼켜 버리기 위해 몸을 잔뜩 움츠리고 있는 용을 꿈꾸고 있을 것이다.
 
▲     © CBS노컷뉴스

바로 이 지점에서 그들은 한 가지 선택을 하게 된다. 그들이 헤롯의 부탁을 거역하고 다른 길로 돌아가는 것은 별로 대수롭지 않은 게 결코 아니다. 그들은 낯선 외국인이며 손님이다. 그들은 허가를 받아 여행하며, 그들의 여권에는 헤롯의 각인이 찍혀 있다. 살인을 꾸미고 있는 왕에게 맞서는 일이란 곧 그의 격분을 불러일으킬 모험을 감행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왕에게 협조하지 않는다. 그들의 이런 불순종의 행위로 말미암아 그 아기가 보호를 받는다.
 
요한계시록에서, 아기는 절박한 죽음의 위기로부터 갑작스럽게, "신의 도우심으로 기적적으로"(deus ex machina) 구출된다. 또 여인은 한 독수리에 의해 들어올려져 해를 면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의 임재는,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에서 제 길을 나아가는 수단인 인간의 분별력과 양심과 충실성의 행동들에 대해 말하는 진실로 또 하나의 방법인가? 신의 섭리는 커다란 결과들을 낳는 것으로 귀결되는 인간의 사소한 선택들에 의존해서 역사를 헤쳐 나가는가?
 
"헤롯은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몹시 노하였다"(마태 2:16)는 것을 기억하자. 그는 새로운 생각을 갖고 있다. 그는 다시금 살인을 획책하고 있다. 그는 인류의 몸을 습격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을 습격한다. 그는 보다 순종적인 군인들을 보내 "박사들에게 알아본 때를 대중하여 베들레헴과 그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여 버렸다"(마태 2:16). 이 구절의 핵심은 예수가 고난에서 면제된다는 사실이 아니다. 진실로 예수는 갓 태어난 아기이면서도 벌써 한 사람의 난민이며 망명자다. 마태의 이 구절의 요점은 정반대다. 즉 예수가 그들의 운명을 나눠 갖게 되리라는 것이다. 예수가 태어날 때, 헤롯의 권력은 고삐가 풀려 있으며 그 권력의 정체가 적나라하게 노출되어 있다. 그는 용을, 즉 죽음을 따르고 예배한다. 결국 주님은 그 권력의 날카로운 이빨 속으로 걸어 들어가실 것이다.
 
어느 모로 보나 그것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짝처럼 보인다. 한 여인과 한 마리의 용, 한 아기와 이 세상의 왕들, 완전한 어리석음의 한 메시아와 죽음의 권력이라니! 그러나 하나님이 성육신 가운데 택하신 것은 바로 그런 방법이었다. 하나님은 권력 없음의 권력에 의지하여 모든 모험을 감행하신다. 우리가 그것을 보는 눈과 그것을 따를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가 크리스마스의 주제다.
 
요한계시록 12장에서, 그 여인과 그 용이 하나의 위대한 표징으로 나타난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표징은 희랍어로 세메이온(semeion)이다. 늙은 예언자 시므온이 마리아에게 "이 아기는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뜨리기도 하고 일으키기도 할 분이십니다. 이 아기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sign)이 되어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반대자들의 숨은 생각을 드러나게 할 것입니다"(누가 2:34-35)라고 선언할 때, 그가 사용한 단어가 바로 세메이온이다. 그리고 천사가 목자들에게 "너희는 한 갓난아이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것을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바로 그분을 알아보는 표(sign)다"(누가 2:12)라고 말할 때도 같은 단어가 사용된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요한복음 서문에서는 주장한다. 그분은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해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다(요한 1:10). 그분이 자기 나라에 오셨지만, 사람들은 그분을 알아보지도 맞아주지도 않았다(요한 1:11).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분을 알아보고 맞아들였다. 크리스마스는 그 표징들을 보는 것, 이 세상 속에서의 하나님의 임재를 알아보고 식별하는 것과 관련된다.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성육신의 신학자인 윌리엄 스트링펠로우는 이렇게 적고 있다:
 
"표징들을 식별하는 것은 평범한 사건들 속에서 비범한 것을 이해하는 것, 타락의 시대 속에서  구원의 모험담을 지각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 그것은 일상적인 사건들에 담겨 있는 묵시적이고 종말론적인 의미를 해석할 수 있는 능력, 남들은 진보의 성공만을 발견하는 곳에서 죽음의 징조들을 볼 수 있는 능력, 이로써 동시에 남들은 혼란이나 절망에 빠져드는 곳에서 희망의 징후들을 바라볼 수 있는 능력과 관계가 있다. 표징들을 식별한다는 것은 눈부신 증거들을 추구하거나 기적을 기다리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모든 피조물 안에 거하셔서 일반 역사를 변화시키시며, 그러면서도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 속의 죽음의 끈질긴 생명력에 대해 철저하게 현실주의적 태도를 잃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민감성을 의미한다."
 
주님, 이 크리스마스 시즌에 그리고 우리 삶의 모든 여정에서 이러한 이해에 다다를 수 있도록, 우리에게 그 마음을 허락하소서. 
* 연세대학교 영문과와 감리교 신학대학 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으로 있다. 민중신학적 글쓰기에 관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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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8/12/26 [23:16]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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