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진보세력은 왜 선거에서 패배하는가’
프레임(frame)은 ‘틀’이라는 뜻으로 여러 의미가 있으나, 언론보도와 관련해 가장 많이 쓰이고 있다. 미국의 미디어 연구자인 토드 기틀린은 프레임 개념을 원용하여 매스미디어의 보도가 ‘프레임’에 갇혀 있으며, 바로 그러한 ‘프레임’ 자체가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갖는다고 주장했다. 기틀린은 ‘프레임’을 “상징 조작자가 상례적으로 언어적 또는 영상적 담화를 조직하는 근거로 삼는 인식, 해석, 제시, 선별, 강조, 배제 등의 지속적인 유형”이라고 정의했다.1)
그간 프레임은 주로 학계에서만 사용됐으나, 2006년 4월 미국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의 저서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미국 진보세력은 왜 선거에서 패배하는가』가 국내에 번역·출간돼 국회의원들이 가장 많이 읽은 책이 되는 등 세간의 주목을 받으면서 저널리즘에서도 널리 쓰이게 되었다. 레이코프는 “어떤 사람에게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고 말하면 그 사람은 코끼리를 떠올릴 것이다”라며 “상대편의 프레임을 단순히 부정하는 것은 단지 그 프레임을 강화할 뿐이다”라고 주장했다.2)
레이코프의 정의에 따르면, “프레임이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형성하는 정신적 구조물이다. 프레임은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 우리가 짜는 계획, 우리가 행동하는 방식, 그리고 우리 행동이 좋고 나쁜 결과를 결정한다. 정치에서 프레임은 사회 정책과 그 정책을 수행하고자 수립하는 제도를 형성한다. 프레임을 바꾸는 것은 이 모두를 바꾸는 것이다. 그러므로 프레임을 재구성하는 것이 바로 사회적 변화이다. 우리는 프레임을 직접 보거나 만질 수 없다. 프레임은 인지과학자들이 ‘인지적 무의식(congnitive unconscious)’이라고 부르는 것의 일부이다.”3)
‘진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레이코프가 제시한 구체적 사례를 감상해보자. “조지 W. 부시가 백악관에 입성한 바로 그날부터 백악관에서는 ‘세금 구제(tax relief)’라는 용어가 흘러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그렇습니다. 이 말은 그해 국정연설에서 여러 번 등장했고, 4년 뒤 선거 유세에서는 더욱 자주 등장하게 됩니다. …… ‘세금’이라는 말이 ‘구제’ 앞에 붙게 되면, 그 결과로 다음과 같은 은유가 탄생합니다. 세금은 고통이다. 그리고 그것을 없애주는 사람은 영웅이고, 그를 방해하는 자는 나쁜 놈이다. 이것이 바로 프레임입니다.”4)
부시는 “우리가 미국을 방어하고자 하는 데 부모 동의서를 받아 올 필요는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레이코프는 부시가 그냥 “동의를 구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대신 ‘부모 동의서’라는 표현을 씀으로써 ‘프레임 효과’를 노렸다고 보았다.
“여러분이 몇 살 때 마지막으로 부모 동의서를 받아 와야 했는지 한번 더듬어 보세요. 그리고 부모 동의서를 요구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요구받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 둘 사이가 어떤 관계인지 생각해 보세요. 이것은 여러분이 현대의 정치 담론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필히 던져야 할 질문들입니다.”5)
레이코프는 유권자들의 표심을 가르는 것은 진실이나 훌륭한 대안·정책 상세 목록들이 아니라 가치와 인간적 유대, 진정성, 신뢰, 정체성이라고 말했다.
“‘진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것은 진보주의자들이 믿는 흔한 속설이다. 만약 바깥 세계에서 벌어지는 사실들 모두를 대중의 눈앞에 보여준다면, 합리적인 사람들은 모두 올바른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헛된 희망이다. 인간의 두뇌는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프레임이다. 한 번 자리 잡은 프레임은 웬만해서는 내쫓기 힘들다.”6)
우리는 세상사를 다 이해하고 있다고 믿겠지만, 실은 우리 모두 사고 프레임(틀)에 갇혀 있는 포로들이다. 진정 자유롭고자 한다면, 자신이 빠져 있는 틀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의심해야 한다. 그러나 세상을 그렇게 피곤하게 살고 싶어 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냥 속 편하게 살고자 한다면, 자신이 진실을 안다는 오만은 버려야 한다. 그게 공정하지 않겠는가?
‘조중동 프레임’과 ‘5공 프레임’
자, 이제 프레임에 대한 이해를 끝냈으니, 한국의 ‘프레임 전쟁’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이 개념을 가장 왕성하게 썼던 세력은 노무현 정권이었다. 노 정권 입장에서 보수파의 비판은 비교적 격퇴하기가 쉬웠다. ‘수구 기득권세력의 발악’으로 일축하면 간단히 끝나는 일이었다. 문제는 대선에서 노무현에게 표를 던졌던 유권자들의 비판이었다. 이 비판에 대해 노 정권 사람들이 늘 모범답안으로 제시했던 게 바로 ‘조중동 프레임’이었다. 노 정권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조중동 프레임’에 갇혀 사실상 그들의 음모에 놀아나고 있다는 식의 대답이었다.
‘프레임’ 개념을 오·남용한 최악의 사례였다. 도무지 소통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몸에 좋은 보약을 들이밀어도 ‘조중동 프레임’이 생산해낸 독약이라고 주장할 정도로 정신 나간 사람들에겐 오직 ‘노무현 긍정’만이 유일한 진실이자 진리였을 뿐이다.
이게 노 정권 사람들만의 문제였을까? 그렇지 않다. 그건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개혁·진보세력의 오랜 습속이다. 레이코프가 말한 프레임은 보통사람들의 관점에 선 프레임이다. 즉, 보통사람들을 상대로 ‘장사’를 해야 할 정치인과 정치세력이 그들을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 개념이다. 그런데 바로 그런 보통사람을 무시하고 당위와 명분 중심의 프레임을 설정하고 밀어붙이면 필패하게 돼 있다. 그걸로도 모자라 자신들의 프레임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보통사람들에게 적(敵)의 프레임에 갇혔다는 식의 오만방자한 작태를 보이기 시작하면, 그거야말로 제 무덤 파는 꼴이다.
개혁·진보세력의 프레임 설정엔 뿌리가 없다. 즉, 보통사람들의 이해수준과 정서에 부합되는 프레임을 설정하는 게 아니라, 운동 프로페셔널들의 관점에서 프레임을 설정해놓고 대중은 따라오라는 식이다. 물론 과거에 그렇게 해서 성공을 거둔 경험이 있다. 바로 이게 문제다. 성공 경험이 실패의 이유가 되는 역설이다.
그 어떤 특별한 역사적 국면에선 ‘위에서 아래로’가 필요하거니와 바람직할 때도 있지만, 늘 그런 건 아니다. 운동 지도자들이 나서서 지금이 ‘특별한 역사적 국면’이라고 외친다고 해서 특별한 역사적 국면이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일부 개혁·진보세력은 ‘특별한 역사적 국면’을 만들기 위해 이명박 정권을 ‘5공’에 비유하고 있지만, 이게 과연 보통사람들의 피부에 가 닿을까? 아니 보통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그렇게 보아도 되는 걸까? 고종석의 말마따나, “정치공세에는 과장이 따르기 마련이라는 점을 감안해도, 이것은 위험한 언행”이 아닐까? 고종석은 “결과적으로, 현재의 ‘(상대적으로) 덜한 악’을 비판하기 위해 과거의 ‘절대악’을 두둔하는 짓이기 때문이다”라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이런 경박한 비유는 5공을 겪지 못한 젊은 유권자들의 정치적 상상력을 크게 왜곡한다. 5공 때라면 촛불집회 자체가 불가능했을 테고, 경찰이 굳이 KBS 건물 안으로 쳐들어갈 필요도 없었을 테다. 그 시절, 정치적 반대자에 대한 고문은 일상적이었고, 파업이나 시위는 제 삶의 큰 부분을 거는 모험이었다. 꼭 5월이 아니더라도, 젊은이들은 제 몸을 불사르거나 내던짐으로써 민주주의를 위한 싸움을 생명과 맞바꿨다. 집권 방식도 다르다. 수백 구의 시신을 짓밟으며 총으로 집권한 전두환과 달리, 이명박은 표로 집권했다. 지난해 12월 대한민국 유권자들이 아둔했든 약삭빨랐든, 이 정권은 전두환 정권과 달리 정통성을 지닌 정권이다. 이 정권을 두고 ‘5공으로의 회귀’니 하는 말을 입에 담는 이들은 5공을 역사적으로 복권시키고 있는 것이다. …… 이 정권은 분명히 5공 정권이 아니다. 그러나 이 정권은 노태우 정권까지 포함한 6공의 다섯 정권 가운데 가장 무엄하고 미련한 정권이다. 걱정이다.”7)
왜 이명박을 히틀러에 비유하는가?
그렇다. 걱정이다. 그런데 그 걱정은 우선 ‘내 탓’부터 하고 들어가는 것이어야 한다. 그게 옳건 그르건 그래야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프레임도 보통사람들의 관점으로 이동시켜야 한다. 그러나 개혁·진보세력은 ‘5공’이나 ‘파시즘’ 프레임으로 대응하고 있다. 특히 ‘파시즘’ 담론은 대중을 암묵적 공범으로 넘어갈 수 있는 가능성을 전제하고 있어 정말 걱정된다. 이른바 ‘자기이행적 예언’을 위해 애쓰고 있다는 느낌마저 든다.
『한겨레21』 제725호(2008년 9월 1일) 표지를 보고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이명박이 히틀러와 나란히 서 있는 게 아닌가. 이 표지 기사는 ‘정권-사정기관-보수언론 총공격’이 ‘파시즘의 전주곡’이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 기사뿐이랴. 요즘 개혁·진보적 지식인들의 글에서 ‘파시즘’이라는 단어의 사용이 부쩍 늘었다.
개혁·진보 인사들은 이명박 정권을 ‘파시즘’이라는 프레임으로 이해하고 설명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그 프레임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건 두 번째 문제다. 이런 프레임엔 성찰이 없다는 게 문제다. 개혁·진보세력은 다 잘했는데, 난데없이 웬 ‘5공’ ‘파시즘’ 정권이 출현해 참을 수 없다는 건가? 그래서 5공 때의 ‘투쟁 프레임’만이 답이란 건가?
‘파시즘’이란 말을 쓰려면 오히려 그런 ‘투쟁 프레임’에 반대하는 최장집의 용법이 진실에 훨씬 더 가까운 게 아닐까? 최장집은 “현대 민주주의는 대의민주주의이며, 운동에 집중하느라 정당을 강화하는 데 무관심하면 반대편에서 파시즘을 불러들이는 우를 범할 수 있다”고 했다.8)
제발 성찰 좀 하고 살자. 왜 이명박 정권이 ‘5공’이고 ‘파시즘’인데도 그 반대편에 있는 민주당의 지지율은 추락하기만 하는가? 여론조사 기관인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의 8월 13일 기준 조사결과와 각 정당의 총선 당시 득표율을 견주어 보면, 한나라당은 각각 37%와 37.5%로 차이가 거의 없는 반면, 민주당은 25.2%에서 16.5%로 8%포인트나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9) 이걸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민주당은 어차피 똑같이 썩은 보수정당이므로 알 바 아니다”가 답인가? 민주당의 지지율이 크게 오르면 이명박 정권의 ‘5공’ ‘파시즘’ 행세에 브레이크가 걸릴 수도 있는데, 그렇게 무시해도 되는 걸까? 민주당과 개혁·진보세력이 아무리 다르다 하더라도 이명박 정권의 ‘5공’ ‘파시즘’ 행세와 관련해선, 비슷한 운명에 처해 있다고 보는 게 진실에 더 가까운 게 아닐까?
거의 모든 전문가들이 민주당의 핵심적 문제로 ‘정체성’을 꼽고 있다. 그런데 나는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하겠다. 무슨 정체성? 정체성에 관한 의견 통일이 돼 있기라도 하단 말인가? 그 정체성 싸움은 노무현 정권 시절에도 내부적으로 박 터지게 싸워봤지만 답을 내리지 못한 게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제 와서 정체성이 문제라고 하면, 또 한 번 피 터지게 내부적으로 싸워보란 말밖에 더 되는가?
전문가들이 말하는 정체성은 주로 이념적 노선을 말하는 것으로 대중의 감각과 크게 동떨어져 있다. 뿌리 없는 프레임이다. 현 단계에서 대중에게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다. 정치인은 “국민 뜯어먹고 사는 사람들”이라는 이미지가 널리 유포돼 있는 상황에서 그들이 무슨 정체성을 내걸건 그건 ‘국민 뜯어먹기 위한 책략’일 뿐이라고 본다. 노선의 정체성이 아니라 정치인이라는 직업의 정체성이 핵심이다. 프레임 설정과 실천은 후자의 단계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한다.
‘성찰의 실종’이 문제의 근원이다
민주당은 물론 개혁·진보세력의 문제는 성찰의 실종이다. 생각해보자. 더도 말고 두 가지 문제만 살펴보자. 민영화 문제와 방송 문제다.
노무현 정권 시절 한 달이 멀다 하고 공기업 비리와 도덕적 해이 사건들이 무더기로 터져 나왔다. 그 다변(多辯)했던 노무현은 공기업 문제에 대해 쓴소리 한 번 한 적이 없다. 자기 측근 인사들이 낙하산 타고 다 한자리씩 차지한 ‘뒷마당’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개혁·진보세력 단체들은 시위는 관두고서라도 공기업을 그런 식으로 망가뜨리면 큰일 난다고 무슨 성명서 하나라도 발표한 적이 있었던가? 내심 쓴소릴 하고 싶어도 공기업 요직에 진출한 개혁·진보 선배들이 불편하게 생각할까봐 입 꾹 다물지 않았던가? 그런 세월을 5년간(아니 김대중 정권을 합해서 10년) 보내면서 일반대중은 공기업 하면 ‘흥청망청하면서 썩어빠진 철밥통’을 연상하게 됐다. 그들은 민영화를 반기지도 않지만, 공기업을 지켜야겠다는 뜻도 없는 상태다. 그런데 그간 침묵했던 개혁·진보세력이 이제 와서 민영화가 나라 망친다고 외쳐대면 누가 호응할까?
방송 문제는 어떤가? 진정 공정성·중립성이 개혁·진보세력의 신앙인가? 그렇다면 노무현 정권 때 그걸 지킬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했어야 했다. 개혁·진보세력이 좀 손해 보더라도 그렇게 했어야 했다. 운동권에서 뛰던 개혁·진보인사들이 대거 방송계 요직을 차지했을 때에 그러면 안 된다고 호통을 쳤어야 했다. 그러나 그땐 ‘개혁적인 방송’이 마음에 든다고 그걸 한껏 즐기다가 이제 보수파의 반격이 시작되니, ‘5공’ ‘파시즘’을 외치면 어쩌자는 건가?
지금 나는 대중의 눈높이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개혁·진보세력이 아무리 ‘5공’ ‘파시즘’을 외쳐대도, 대중이 볼 때엔 모든 게 양측의 ‘밥그릇 싸움’으로만 보일 뿐이다. 대중과 소통하지 못하는, 아니 소통할 수 없게 만든 ‘뿌리의 부재’가 문제의 원인이다.
‘5공’ ‘파시즘’ 담론은 김대중·노무현 정권 시절 보수파가 시도한 ‘좌파’ 담론의 복사판이다. 보수파가 그렇게 해서 성공을 했다고 보는 건가? 그래서 똑같아지기 경쟁을 하자는 건가? 그런 이전투구(泥田鬪狗)가 과연 누구에게 유리할까?
우리는 “민주화는 한판 승부가 아니다”라는 진리를 입으론 말하면서도 온몸으론 그 원리를 이해하지도 못하고, 그래서 실천에 옮기지도 않는다. 뿌리의 현장, 지역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지방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서울에서도 지역과 밀착해 작고 낮은 곳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명박 정권이 무시무시한 ‘5공’ ‘파시즘’을 밀어붙이는데 어느 세월에 그걸 할 수 있다고 그런 한가한 소리를 하느냐고? 바로 그게 조급증이 숙성시킨 ‘썩어빠진 생각’이다. 그렇게 할 때에 비로소 지지율에 변화가 오고 대중과 함께하는 운동이 가능해진다는 생각을 왜 못하는가? 오히려 작고 낮은 곳에서 일해본 적도 없고 그런 생각은 꿈에서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이실직고(以實直告)하는 게 옳지 않겠는가?
정태인이 진보정당의 과제로 풀뿌리정치를 강조하며 “중앙당의 상근자들이 지방에 내려가 지구당을 하나씩 꿰차고 해야 풀뿌리정치가 이뤄진다”고 말한 건 백번 옳다.10) 이젠 한판 크게 승부해보려는 바람의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
민주당도 마찬가지다. 지도부가 촛불시위 주도 혐의로 수배된 광우병 대책회의 관계자들이 농성 중인 서울 조계사를 찾아가 국회에 등원하게 된 데 대해 양해를 구하는 방식으론 영원히 지금과 같은 추락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당장 골프부터 때려치우고 풀뿌리와의 소통에 주력해보라. 언론보도용 쇼가 아니라 늘 일상적으로 하는 소통에 일로매진해보라. 그 과정에서 뿌리 있는 프레임 설정이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다.
정당과 무관한 개혁·진보세력도 프레임을 독자적으로 설정하지 말고 뿌리와의 소통에 주력하면서 여론투쟁에서 이길 수 있는 프레임을 모색해야 한다. 무엇이 진실이건 “진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속설은 잊는 게 좋다.
[각주]
1) Todd Gitlin, The Whole World Is Watching: Mass Media in the Making and Unmaking of the New Left,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0, p.7 2) 죠지 레이코프․로크리지연구소, 나익주 옮김, 『프레임 전쟁: 보수에 맞서는 진보의 성공전략』, 창비, 2007, 65쪽. 3) 조지 레이코프, 유나영 옮김,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미국의 진보세력은 왜 선거에서 패배하는가』, 삼인, 2006, 17쪽. 4) 조지 레이코프, 유나영 옮김,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미국의 진보세력은 왜 선거에서 패배하는가』, 삼인, 2006, 24~25쪽. 5) 조지 레이코프, 유나영 옮김,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미국의 진보세력은 왜 선거에서 패배하는가』, 삼인, 2006, 26쪽. 6) 조지 레이코프, 유나영 옮김,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미국의 진보세력은 왜 선거에서 패배하는가』, 삼인, 2006, 141쪽. 7) 고종석, 「허물어지는 ‘영광의 20년’」, 『한국일보』, 2008년 8월 21일. 8) 이순혁, 「시민인권선언부터 개헌까지」, 『한겨레21』, 제719호(2008년 7월 22일), 32~33면. 9) 강희철, 「‘동력 잃은 민주’만 지지율 8%P 빠져」, 『한겨레』, 2008년 8월 23일. 10) 김종목·이지선·임지선, 「“시장만능 정치가 각자의 삶 위협한다는 자각”」, 『경향신문』, 2008년 6월 18일.
* 본문은 월간 <인물과 사상> 10월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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