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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개혁·진보세력은 여론투쟁에서 패배하는가?
[강준만의 세상이야기] 성찰의 실종, 뿌리 없는 ‘프레임 전쟁’의 비극
 
강준만   기사입력  2008/09/19 [15:32]
‘미국 진보세력은 왜 선거에서 패배하는가’

프레임(frame)은 ‘틀’이라는 뜻으로 여러 의미가 있으나, 언론보도와 관련해 가장 많이 쓰이고 있다. 미국의 미디어 연구자인 토드 기틀린은 프레임 개념을 원용하여 매스미디어의 보도가 ‘프레임’에 갇혀 있으며, 바로 그러한 ‘프레임’ 자체가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갖는다고 주장했다. 기틀린은 ‘프레임’을 “상징 조작자가 상례적으로 언어적 또는 영상적 담화를 조직하는 근거로 삼는 인식, 해석, 제시, 선별, 강조, 배제 등의 지속적인 유형”이라고 정의했다.1)

그간 프레임은 주로 학계에서만 사용됐으나, 2006년 4월 미국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의 저서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미국 진보세력은 왜 선거에서 패배하는가』가 국내에 번역·출간돼 국회의원들이 가장 많이 읽은 책이 되는 등 세간의 주목을 받으면서 저널리즘에서도 널리 쓰이게 되었다. 레이코프는 “어떤 사람에게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고 말하면 그 사람은 코끼리를 떠올릴 것이다”라며 “상대편의 프레임을 단순히 부정하는 것은 단지 그 프레임을 강화할 뿐이다”라고 주장했다.2)

레이코프의 정의에 따르면, “프레임이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형성하는 정신적 구조물이다. 프레임은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 우리가 짜는 계획, 우리가 행동하는 방식, 그리고 우리 행동이 좋고 나쁜 결과를 결정한다. 정치에서 프레임은 사회 정책과 그 정책을 수행하고자 수립하는 제도를 형성한다. 프레임을 바꾸는 것은 이 모두를 바꾸는 것이다. 그러므로 프레임을 재구성하는 것이 바로 사회적 변화이다. 우리는 프레임을 직접 보거나 만질 수 없다. 프레임은 인지과학자들이 ‘인지적 무의식(congnitive unconscious)’이라고 부르는 것의 일부이다.”3)

‘진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레이코프가 제시한 구체적 사례를 감상해보자. “조지 W. 부시가 백악관에 입성한 바로 그날부터 백악관에서는 ‘세금 구제(tax relief)’라는 용어가 흘러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그렇습니다. 이 말은 그해 국정연설에서 여러 번 등장했고, 4년 뒤 선거 유세에서는 더욱 자주 등장하게 됩니다. …… ‘세금’이라는 말이 ‘구제’ 앞에 붙게 되면, 그 결과로 다음과 같은 은유가 탄생합니다. 세금은 고통이다. 그리고 그것을 없애주는 사람은 영웅이고, 그를 방해하는 자는 나쁜 놈이다. 이것이 바로 프레임입니다.”4)

부시는 “우리가 미국을 방어하고자 하는 데 부모 동의서를 받아 올 필요는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레이코프는 부시가 그냥 “동의를 구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대신 ‘부모 동의서’라는 표현을 씀으로써 ‘프레임 효과’를 노렸다고 보았다.

“여러분이 몇 살 때 마지막으로 부모 동의서를 받아 와야 했는지 한번 더듬어 보세요. 그리고 부모 동의서를 요구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요구받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 둘 사이가 어떤 관계인지 생각해 보세요. 이것은 여러분이 현대의 정치 담론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필히 던져야 할 질문들입니다.”5)

레이코프는 유권자들의 표심을 가르는 것은 진실이나 훌륭한 대안·정책 상세 목록들이 아니라 가치와 인간적 유대, 진정성, 신뢰, 정체성이라고 말했다.

“‘진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것은 진보주의자들이 믿는 흔한 속설이다. 만약 바깥 세계에서 벌어지는 사실들 모두를 대중의 눈앞에 보여준다면, 합리적인 사람들은 모두 올바른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헛된 희망이다. 인간의 두뇌는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프레임이다. 한 번 자리 잡은 프레임은 웬만해서는 내쫓기 힘들다.”6)

우리는 세상사를 다 이해하고 있다고 믿겠지만, 실은 우리 모두 사고 프레임(틀)에 갇혀 있는 포로들이다. 진정 자유롭고자 한다면, 자신이 빠져 있는 틀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의심해야 한다. 그러나 세상을 그렇게 피곤하게 살고 싶어 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냥 속 편하게 살고자 한다면, 자신이 진실을 안다는 오만은 버려야 한다. 그게 공정하지 않겠는가?

‘조중동 프레임’과 ‘5공 프레임’

자, 이제 프레임에 대한 이해를 끝냈으니, 한국의 ‘프레임 전쟁’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이 개념을 가장 왕성하게 썼던 세력은 노무현 정권이었다. 노 정권 입장에서 보수파의 비판은 비교적 격퇴하기가 쉬웠다. ‘수구 기득권세력의 발악’으로 일축하면 간단히 끝나는 일이었다. 문제는 대선에서 노무현에게 표를 던졌던 유권자들의 비판이었다. 이 비판에 대해 노 정권 사람들이 늘 모범답안으로 제시했던 게 바로 ‘조중동 프레임’이었다. 노 정권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조중동 프레임’에 갇혀 사실상 그들의 음모에 놀아나고 있다는 식의 대답이었다.

‘프레임’ 개념을 오·남용한 최악의 사례였다. 도무지 소통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몸에 좋은 보약을 들이밀어도 ‘조중동 프레임’이 생산해낸 독약이라고 주장할 정도로 정신 나간 사람들에겐 오직 ‘노무현 긍정’만이 유일한 진실이자 진리였을 뿐이다.

이게 노 정권 사람들만의 문제였을까? 그렇지 않다. 그건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개혁·진보세력의 오랜 습속이다. 레이코프가 말한 프레임은 보통사람들의 관점에 선 프레임이다. 즉, 보통사람들을 상대로 ‘장사’를 해야 할 정치인과 정치세력이 그들을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 개념이다. 그런데 바로 그런 보통사람을 무시하고 당위와 명분 중심의 프레임을 설정하고 밀어붙이면 필패하게 돼 있다. 그걸로도 모자라 자신들의 프레임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보통사람들에게 적(敵)의 프레임에 갇혔다는 식의 오만방자한 작태를 보이기 시작하면, 그거야말로 제 무덤 파는 꼴이다.

개혁·진보세력의 프레임 설정엔 뿌리가 없다. 즉, 보통사람들의 이해수준과 정서에 부합되는 프레임을 설정하는 게 아니라, 운동 프로페셔널들의 관점에서 프레임을 설정해놓고 대중은 따라오라는 식이다. 물론 과거에 그렇게 해서 성공을 거둔 경험이 있다. 바로 이게 문제다. 성공 경험이 실패의 이유가 되는 역설이다.

그 어떤 특별한 역사적 국면에선 ‘위에서 아래로’가 필요하거니와 바람직할 때도 있지만, 늘 그런 건 아니다. 운동 지도자들이 나서서 지금이 ‘특별한 역사적 국면’이라고 외친다고 해서 특별한 역사적 국면이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일부 개혁·진보세력은 ‘특별한 역사적 국면’을 만들기 위해 이명박 정권을 ‘5공’에 비유하고 있지만, 이게 과연 보통사람들의 피부에 가 닿을까? 아니 보통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그렇게 보아도 되는 걸까? 고종석의 말마따나, “정치공세에는 과장이 따르기 마련이라는 점을 감안해도, 이것은 위험한 언행”이 아닐까? 고종석은 “결과적으로, 현재의 ‘(상대적으로) 덜한 악’을 비판하기 위해 과거의 ‘절대악’을 두둔하는 짓이기 때문이다”라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이런 경박한 비유는 5공을 겪지 못한 젊은 유권자들의 정치적 상상력을 크게 왜곡한다. 5공 때라면 촛불집회 자체가 불가능했을 테고, 경찰이 굳이 KBS 건물 안으로 쳐들어갈 필요도 없었을 테다. 그 시절, 정치적 반대자에 대한 고문은 일상적이었고, 파업이나 시위는 제 삶의 큰 부분을 거는 모험이었다. 꼭 5월이 아니더라도, 젊은이들은 제 몸을 불사르거나 내던짐으로써 민주주의를 위한 싸움을 생명과 맞바꿨다. 집권 방식도 다르다. 수백 구의 시신을 짓밟으며 총으로 집권한 전두환과 달리, 이명박은 표로 집권했다. 지난해 12월 대한민국 유권자들이 아둔했든 약삭빨랐든, 이 정권은 전두환 정권과 달리 정통성을 지닌 정권이다. 이 정권을 두고 ‘5공으로의 회귀’니 하는 말을 입에 담는 이들은 5공을 역사적으로 복권시키고 있는 것이다. …… 이 정권은 분명히 5공 정권이 아니다. 그러나 이 정권은 노태우 정권까지 포함한 6공의 다섯 정권 가운데 가장 무엄하고 미련한 정권이다. 걱정이다.”7) 

왜 이명박을 히틀러에 비유하는가?

그렇다. 걱정이다. 그런데 그 걱정은 우선 ‘내 탓’부터 하고 들어가는 것이어야 한다. 그게 옳건 그르건 그래야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프레임도 보통사람들의 관점으로 이동시켜야 한다. 그러나 개혁·진보세력은 ‘5공’이나 ‘파시즘’ 프레임으로 대응하고 있다. 특히 ‘파시즘’ 담론은 대중을 암묵적 공범으로 넘어갈 수 있는 가능성을 전제하고 있어 정말 걱정된다. 이른바 ‘자기이행적 예언’을 위해 애쓰고 있다는 느낌마저 든다.

『한겨레21』 제725호(2008년 9월 1일) 표지를 보고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이명박이 히틀러와 나란히 서 있는 게 아닌가. 이 표지 기사는 ‘정권-사정기관-보수언론 총공격’이 ‘파시즘의 전주곡’이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 기사뿐이랴. 요즘 개혁·진보적 지식인들의 글에서 ‘파시즘’이라는 단어의 사용이 부쩍 늘었다.

개혁·진보 인사들은 이명박 정권을 ‘파시즘’이라는 프레임으로 이해하고 설명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그 프레임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건 두 번째 문제다. 이런 프레임엔 성찰이 없다는 게 문제다. 개혁·진보세력은 다 잘했는데, 난데없이 웬 ‘5공’ ‘파시즘’ 정권이 출현해 참을 수 없다는 건가? 그래서 5공 때의 ‘투쟁 프레임’만이 답이란 건가?

‘파시즘’이란 말을 쓰려면 오히려 그런 ‘투쟁 프레임’에 반대하는 최장집의 용법이 진실에  훨씬 더 가까운 게 아닐까? 최장집은 “현대 민주주의는 대의민주주의이며, 운동에 집중하느라 정당을 강화하는 데 무관심하면 반대편에서 파시즘을 불러들이는 우를 범할 수 있다”고 했다.8)

제발 성찰 좀 하고 살자. 왜 이명박 정권이 ‘5공’이고 ‘파시즘’인데도 그 반대편에 있는 민주당의 지지율은 추락하기만 하는가? 여론조사 기관인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의 8월 13일 기준 조사결과와 각 정당의 총선 당시 득표율을 견주어 보면, 한나라당은 각각 37%와 37.5%로 차이가 거의 없는 반면, 민주당은 25.2%에서 16.5%로 8%포인트나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9) 이걸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민주당은 어차피 똑같이 썩은 보수정당이므로 알 바 아니다”가 답인가? 민주당의 지지율이 크게 오르면 이명박 정권의 ‘5공’ ‘파시즘’ 행세에 브레이크가 걸릴 수도 있는데, 그렇게 무시해도 되는 걸까? 민주당과 개혁·진보세력이 아무리 다르다 하더라도 이명박 정권의 ‘5공’ ‘파시즘’ 행세와 관련해선, 비슷한 운명에 처해 있다고 보는 게 진실에 더 가까운 게 아닐까?

거의 모든 전문가들이 민주당의 핵심적 문제로 ‘정체성’을 꼽고 있다. 그런데 나는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하겠다. 무슨 정체성? 정체성에 관한 의견 통일이 돼 있기라도 하단 말인가? 그 정체성 싸움은 노무현 정권 시절에도 내부적으로 박 터지게 싸워봤지만 답을 내리지 못한 게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제 와서 정체성이 문제라고 하면, 또 한 번 피 터지게 내부적으로 싸워보란 말밖에 더 되는가?

전문가들이 말하는 정체성은 주로 이념적 노선을 말하는 것으로 대중의 감각과 크게 동떨어져 있다. 뿌리 없는 프레임이다. 현 단계에서 대중에게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다. 정치인은 “국민 뜯어먹고 사는 사람들”이라는 이미지가 널리 유포돼 있는 상황에서 그들이 무슨 정체성을 내걸건 그건 ‘국민 뜯어먹기 위한 책략’일 뿐이라고 본다. 노선의 정체성이 아니라 정치인이라는 직업의 정체성이 핵심이다. 프레임 설정과 실천은 후자의 단계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한다.

‘성찰의 실종’이 문제의 근원이다

민주당은 물론 개혁·진보세력의 문제는 성찰의 실종이다. 생각해보자. 더도 말고 두 가지 문제만 살펴보자. 민영화 문제와 방송 문제다.

노무현 정권 시절 한 달이 멀다 하고 공기업 비리와 도덕적 해이 사건들이 무더기로 터져 나왔다. 그 다변(多辯)했던 노무현은 공기업 문제에 대해 쓴소리 한 번 한 적이 없다. 자기 측근 인사들이 낙하산 타고 다 한자리씩 차지한 ‘뒷마당’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개혁·진보세력 단체들은 시위는 관두고서라도 공기업을 그런 식으로 망가뜨리면 큰일 난다고 무슨 성명서 하나라도 발표한 적이 있었던가? 내심 쓴소릴 하고 싶어도 공기업 요직에 진출한 개혁·진보 선배들이 불편하게 생각할까봐 입 꾹 다물지 않았던가? 그런 세월을 5년간(아니 김대중 정권을 합해서 10년) 보내면서 일반대중은 공기업 하면 ‘흥청망청하면서 썩어빠진 철밥통’을 연상하게 됐다. 그들은 민영화를 반기지도 않지만, 공기업을 지켜야겠다는 뜻도 없는 상태다. 그런데 그간 침묵했던 개혁·진보세력이 이제 와서 민영화가 나라 망친다고 외쳐대면 누가 호응할까?

방송 문제는 어떤가? 진정 공정성·중립성이 개혁·진보세력의 신앙인가? 그렇다면 노무현 정권 때 그걸 지킬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했어야 했다. 개혁·진보세력이 좀 손해 보더라도 그렇게 했어야 했다. 운동권에서 뛰던 개혁·진보인사들이 대거 방송계 요직을 차지했을 때에 그러면 안 된다고 호통을 쳤어야 했다. 그러나 그땐 ‘개혁적인 방송’이 마음에 든다고 그걸 한껏 즐기다가 이제 보수파의 반격이 시작되니, ‘5공’ ‘파시즘’을 외치면 어쩌자는 건가?

지금 나는 대중의 눈높이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개혁·진보세력이 아무리 ‘5공’ ‘파시즘’을 외쳐대도, 대중이 볼 때엔 모든 게 양측의 ‘밥그릇 싸움’으로만 보일 뿐이다. 대중과 소통하지 못하는, 아니 소통할 수 없게 만든 ‘뿌리의 부재’가 문제의 원인이다.

‘5공’ ‘파시즘’ 담론은 김대중·노무현 정권 시절 보수파가 시도한 ‘좌파’ 담론의 복사판이다. 보수파가 그렇게 해서 성공을 했다고 보는 건가? 그래서 똑같아지기 경쟁을 하자는 건가? 그런 이전투구(泥田鬪狗)가 과연 누구에게 유리할까?

우리는 “민주화는 한판 승부가 아니다”라는 진리를 입으론 말하면서도 온몸으론 그 원리를 이해하지도 못하고, 그래서 실천에 옮기지도 않는다. 뿌리의 현장, 지역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지방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서울에서도 지역과 밀착해 작고 낮은 곳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명박 정권이 무시무시한 ‘5공’ ‘파시즘’을 밀어붙이는데 어느 세월에 그걸 할 수 있다고 그런 한가한 소리를 하느냐고? 바로 그게 조급증이 숙성시킨 ‘썩어빠진 생각’이다. 그렇게 할 때에 비로소 지지율에 변화가 오고 대중과 함께하는 운동이 가능해진다는 생각을 왜 못하는가? 오히려 작고 낮은 곳에서 일해본 적도 없고 그런 생각은 꿈에서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이실직고(以實直告)하는 게 옳지 않겠는가?

정태인이 진보정당의 과제로 풀뿌리정치를 강조하며 “중앙당의 상근자들이 지방에 내려가 지구당을 하나씩 꿰차고 해야 풀뿌리정치가 이뤄진다”고 말한 건 백번 옳다.10) 이젠 한판 크게 승부해보려는 바람의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

민주당도 마찬가지다. 지도부가 촛불시위 주도 혐의로 수배된 광우병 대책회의 관계자들이 농성 중인 서울 조계사를 찾아가 국회에 등원하게 된 데 대해 양해를 구하는 방식으론 영원히 지금과 같은 추락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당장 골프부터 때려치우고 풀뿌리와의 소통에 주력해보라. 언론보도용 쇼가 아니라 늘 일상적으로 하는 소통에 일로매진해보라. 그 과정에서 뿌리 있는 프레임 설정이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다.

정당과 무관한 개혁·진보세력도 프레임을 독자적으로 설정하지 말고 뿌리와의 소통에 주력하면서 여론투쟁에서 이길 수 있는 프레임을 모색해야 한다. 무엇이 진실이건 “진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속설은 잊는 게 좋다.



[각주]

1) Todd Gitlin, The Whole World Is Watching: Mass Media in the Making and Unmaking of the New Left,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0, p.7
2) 죠지 레이코프․로크리지연구소, 나익주 옮김, 『프레임 전쟁: 보수에 맞서는 진보의 성공전략』, 창비, 2007, 65쪽.
3) 조지 레이코프, 유나영 옮김,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미국의 진보세력은 왜 선거에서 패배하는가』, 삼인, 2006, 17쪽.
4) 조지 레이코프, 유나영 옮김,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미국의 진보세력은 왜 선거에서 패배하는가』, 삼인, 2006, 24~25쪽.
5) 조지 레이코프, 유나영 옮김,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미국의 진보세력은 왜 선거에서 패배하는가』, 삼인, 2006, 26쪽.
6) 조지 레이코프, 유나영 옮김,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미국의 진보세력은 왜 선거에서 패배하는가』, 삼인, 2006, 141쪽.
7) 고종석, 「허물어지는 ‘영광의 20년’」, 『한국일보』, 2008년 8월 21일.
8) 이순혁, 「시민인권선언부터 개헌까지」, 『한겨레21』, 제719호(2008년 7월 22일), 32~33면.
9) 강희철, 「‘동력 잃은 민주’만 지지율 8%P 빠져」, 『한겨레』, 2008년 8월 23일.
10) 김종목·이지선·임지선, 「“시장만능 정치가 각자의 삶 위협한다는 자각”」, 『경향신문』, 2008년 6월 18일.


* 본문은 월간 <인물과 사상> 10월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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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8/09/19 [15:32]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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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실제로는 2008/12/24 [19:30] 수정 | 삭제
  • 진중권의 무식함을 폭로한다 (1)

    진중권에 필요한 건 겸손이 아니라 실력


    김휘영 / 문화평론가, bignews@bignews.co.kr 등록일: 2008-12-22 오후 10:59:27


    옛날 어느 마을 동굴에 거대한 지네 한 마리가 살았다. 이 지네는 해마다 처녀를 요구했는데, 그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마을에 그 지네의 횡포로 큰 재앙이 닥쳤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섣달그믐이면 처녀 한 명을 제비뽑기로 받쳤는데 그 해에도 한 처녀가 뽑혀 지네의 제물로 바쳐질 운명이었다. 처녀는 곧 제단에 바쳐졌고 무수히 많은 발이 달린 거대한 지네가 처녀 앞에 나타났다. 그런데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어디선가 두꺼비 한 마리가 나타나더니 지네와 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싸움을 계속하더니 결국 둘 다 죽고 말았다. 그 덕에 목숨을 구하게 된 처녀는 두꺼비 장례를 잘 치러 줬고 그 이후 더 이상 마을에 지네의 재앙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상이 라는 설화에 나온 서사구조다.

    이 설화를 영화 와 비교해서 분석해보자. 발이 숱하게 달린 지네는 악한 이무기인 부라퀴에, 처녀는 이든과 사라에 마지막에 지네를 죽이고 처녀를 구한 두꺼비는 선한 이무기 역할에 절묘하게 들어 맞는다. 이 설화를 소개한 의 저자는 현직 대구교대 교수인 이강엽 교수다. 그는 설화 속의 그 처녀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싸우든지 또는 야반도주라도 해야 하지 않았을까 라고 자문하고 있다.

    설화 속의 지네는 그의 요구를 듣지 않으면 한 동네를 끝장낼 만큼 대단한 존재이다. 즉 영화 의 부라퀴와 같은 존재다. 진중권의 표현대로라면 설화 속 처녀는 강력한 악(惡)인 지네에 대항해서 특별히 한 일이 없다. 이든과 사라 더러 하는 일 없이 도망만 다닌다고 지적했는데 이 설화에 나온 주인공은 그 도망조차도 하지 않는다. 사실 영화 속의 이든과 사라는 선한 이무기가 나타날 때 까지 여의주를 보존해야 하는 천명을 가진 사람들이었지 그 여의주로 적극적으로 무얼 어떻게 해야 하는 사명을 가진 존재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진중권은 도망만 다닌다고 표현했지만 그들의 도망은 단순한 회피가 아니라 선한 이무기가 올 때까지 여의주를 보존하는 매우 중요한 행위였고 세계를 암흑에 빠지는 불행을 막는 절체절명의 의미를 가진 행동이었음은 를 본 사람은 다 안다. 오히려 제대로 도망 다니지 못해서 부라퀴에게 여의주를 뺏긴다면 선한 이무기의 승천도 불가능하고 온 세상이 암흑의 세상으로 빠지는 것도 막을 수 없다. 오죽했으면 그들의 전신인 나린과 하람이 가장 극단적인 저항인 자살까지 감행했겠는가?

    지능이 좀 모자라는 진중권은 사라와 이든은 하는 일이 없이 도망만 다녔고 마지막에 선한 이무기가 나타나서 일거에(?) 해결했으니 데우스 엑스 마키나 구조이며 그래서 엉망진창이라고 혹평했다. 진중권의 지적대로라면 설화는 처녀가 그 도망조차도 안다니고 또 난데없이 두꺼비가 나타나서 지네를 해치우는 구조로 끝났으니 분명 데우스 엑스 마키나 구조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보통의 지능수준이기에 당연히 진중권의 수준을 벗어나 있는, 그래서 정상적인 사고구조를 가진 사람이면 이 지네장터 설화를 보고 데우스 엑스 마키나 구조라고 하지 않는다. 왜 그런지 이론적으로 딱 꼬집어 설명하는 사람들은 드물지라도 하여간 데우스 엑스 마키나 구조가 아니라는 것 쯤은 직감적으로 안다. 속의 그 처녀는 도망 다니는 일조차도 안했으니 영락없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 구조라고 해야 할텐데 왜 그럴까? 이를 이론적으로 풀어내는 일은 데우스 엑스 마키나 구조라고 할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이 무엇인가 하는 조금 깊은 차원에 관계되는 논증이다.

    마땅히 지식인이라면 바로 이 의문에 해당하는 이유(reason)부분을 일반인들에게 명료하게 풀어낼 수 있어야 한다. 이런 부분을 일반인들이 알기 쉽게 규명해 낼 수 있는 사람들만이 인문학을 탐구할 수 있는 남다른 자질(資質)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누구나 느끼다시피 설화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 구조가 아니다. 표면적으로는 데우스 구조와 비슷한 듯 보이겠지만 전혀 아니다. 더구나 영화 속의 사라와 이든은 설화 속의 처녀보다 훨씬 많은 노력을 했으니 더욱 더 아닐 수 밖에 없다. 영화 를 두고 데우스 엑스 마키나 구조라고 말한 건 순전히 진중권의 무식함,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진중권의 낮은 지능지수 때문이다. 진중권이 챙피한 줄도 모르고 신문지상을 통해 말한 소위 데우스 엑스 마키나 사건은 진중권 스스로가 자신의 낮은 지적능력(IQ)을 만천하에 드러내고만 어처구니없는 자기 고백적 해프닝일 뿐이다.

    설화와 가 왜 데우스 엑스 마키나 구조가 아닌지를 알기 쉽게 논증해 보겠다. 여기서 필자가 하필이면 진중권의 지능지수(IQ)를 거론할 수 밖에 없는가 하면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는 용어를 접하고 그 내용의 윤곽을 아는 건 누구나 배움이나 학습으로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어떤 작품에 그걸 적용하여 규명하는 건 응용의 능력, 즉 상당한 지적(知的)능력이 요구되는 일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 수학 공식을 달달달 외우는 것과 그 외운 공식을 바르게 적용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전혀 다른 차원의 영역에 속하는 것임을 생각하면 된다. 외우는 건 노력으로 될 일이지만 문제해결능력은 지능지수와 밀접한 연관이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진중권이 재수하고 서울대 미학과에 입학했다고 알려져 있는 걸로 보아서, 아마도 필자와 같은 해에 학력고사를 치고 서울대에 입학했을 가능성이 높다. 필자는 그 당시 학력고사에서 언어영역(국어)에서 만점을 받았다. 특별히 국어를 좋아한 탓도 있었지만 학력고사와는 다르게 다소 애매한 문제도 많이 출제된다는 전국 모의고사에서도 수차례나 만점(滿點)을 받으면서 전국 수석을 차지한 적이 있다. 이런 까닭에 적어도 언어(한국어)로 구성된 텍스트의 해석이나 응용 능력에서 필자는 그 어느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않을 정도의 자부심을 갖고 있다. 이런 필자가 진중권이 쓴 글을 보고 내린 결론은 진중권은 일단 국어, 즉 언어영역에 대한 자질(資質)이 한참이나 딸리는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특히 개념 파악이나 응용에서 심각한 문제를 드러내고 있음을 너무나 많이 확인했는데 이를 일일이 다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다. 이에 대해 궁금한 사람들은 필자가 몇 년 전에 대자보에 쓴 칼럼인 '진중권의 박정희콤플렉스와 지적 사기'라는 글을 참고로 하기 바란다. 그 글을 보면 진중권이 얼마나 개념파악이 안되는 사람인 줄 파악할 수 있다. 사람들이 진중권의 글에 "비꼼은 있으되 내용은 없다" 또는 "치졸하고 저급한 비방은 있되 그 이유나 대안은 없다"고 간단하게 혹평하는 이유도 알 수 있다. 이런 일도 한결같이 진중권의 낮은 지능지수에서 필연적으로 나올 수 밖에 없음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건으로 자신의 지능수준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만 사건은 진중권으로서는 필연적인 결과지만 사실 이건 약과다. 진중권이 필자의 이 지적에 억울하다면 진중권이 쓴 어떤 책이라도 좋으니 무작위로 가져오면 당장 그 오류들을 대중 앞에 드러내 줄 용의가 있다 필자에겐 그게 어려운 일이 아니라 심심풀이 땅콩처럼 쉬운 일임을 먼저 밝혀둔다. 대신에 진중권은 자신에 대한 주제파악이 안돼서인지 아무데나 나대면서 온갖 문제를 일으키는 과대망상 증세는 충분히 갖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칼럼에서 좀 더 자세히 논하겠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성립조건 2가지

    어떤 서사물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 구조를 가졌다고 진단하려면 다음의 두 가지 요건이 필요하다. 아마 이 부분은 어느 책에서도 말해지지 않았을 수도 있는 필자의 독자적인 논증이다. 하지만 별로 어려운 내용이 아니므로 이 글을 읽는 순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신(해결사)의 비의존성

    어떤 서사물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적 구조라고 말하려면 첫째 미궁처럼 복잡한 구조에 빠진 극을 단번에 해결하기 위해 등장하는 해결사, 즉 신은 그 극 속의 등장인물들과 특별한 인연(karma)이나 연관성이 없어야 한다. 이것을 학문적 용어로 말하면 신(神)의 비의존성(independency)이다. 즉 돌쇠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전설의 고향 같은 설화에서 돌쇠가 봉착한 난관을 해결해 줄 해결사로 등장한 산신령이 있다 치자. 그런데 그 산신령이 과거 어느 시점에 돌쇠에게 큰 도움을 받아서 곤경을 헤쳐 나온 적이 있었는데, 그 산신령의 등장이 과거 돌쇠에게서 받았던 그 은혜나 빚을 갚기 위해서 등장했다면 이건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될 수 없다. 물론 돌쇠가 산신령을 도와주는 상황은 관객들이 알 수 있도록 스토리 속에 미리 명시되어져 있어야 한다. 지네 장터 설화가 데우스 엑스 마키나 구조가 아닌 이유는 바로 해결사로 등장한 그 뚜꺼비가 제물로 바쳐진 처녀와 특별한 연관이 있는 존재(creature)이기 때문이 그 첫째다. 그 뚜꺼비는 처녀가 제물로 받쳐진 동굴을 지나가다 우연히 들른 두꺼비가 아니다. 다 알다시피 처녀가 우연히 보게 된 뚜꺼비가 불쌍해서 밥찌꺼기를 주는 선행을 베풀었던 뚜꺼비라는 '특별한 관계(special relationship)'가 이미 설정되어 있던 존재였던 것이다.

    속의 해결사로 등장한 선한 이무기도 이든과 사라와 아무런 인연도 없이 길가에서 스쳐 지나가는 정도의 가벼운 인연을 가진 관계가 아니다. 500년 전에 지네보다 더 흉폭한 부라퀴의 마수에서 세상을 구하고 선한 이무기의 승천을 위해서 목숨까지 버린 적이 있는 '아주 특별하고 끈끈한 인연이 설정된 관계'다. 게다가 선한 이무기가 승천을 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환생격인 사라와 이든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말하자면 운명적인 관계로 설정되어 있는(doomed) 존재가 선한 이무기다. 그리고 그런 운명은 영화 전반부에 무려 몇 번이나 관객들에게 명시적으로 표현되었다.

    능력의 초월성

    두 번째로 해결사로 무대에 등장하는 신은 등장인물들과 그 능력 측면에서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의 현격한 차이를 갖고 있어야 한다. 극의 복잡한 구조를 일거에 해결하기 위해 특별초빙한 신(神)이 처치해야 할 적(antagonist)과 싸우면서 오히려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지경에 처하거나 보는 사람들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아슬아슬한 투쟁을 해야 하는 구조라면 그것 자체로 데우스 엑스 마키나 라는 논리 자체를 허물어뜨리고 마는 모순(矛盾)을 초래하게 됨을 누구나 쉽게 알게 된다. 즉 그런 해결사는 데우스가 아니다. 그건 극을 구성하는 또 다른 등장인물의 역할(role)을 맡아 극의 완성을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전혀 다른 차원의 서사구조를 가진 극(劇)이 되고 만다.

    보통 데우스적 역할을 하는 해결사는 예를 들어 손가락 하나만 움직이는 등의 방식으로 도술을 부리거나 악한 존재와는 비교할 수 없이 강력한 권능(힘)으로 능히 상대를 제압하고 상황을 종료시키는 가히 초월적인 능력을 갖고 있다. 극의 말미에 나타난 신이 적과 싸우면서 힘겨워서 외려 낑낑대야하는 구조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 구조랄 수 없다. 설화 속의 해결사 두꺼비가 데우스 엑스 마키나 속의 데우스와 같은 존재가 될려면 뚜꺼비가 처리해야 할 상대가 거대하고 막강한 지네괴물이 아니라 기다랗게 뻗어나가는 단 한 번의 혓바닥 놀림으로도 해결되는 파리 정도여야 논리에 부합한다. 그런데 설화에 나오는 지네 괴물은 파리와는 전혀 다른 존재다. 두꺼비는 악의 존재인 지네를 손쉽게 해치우지 못한다. 오히려 자신의 목숨을 바칠 정도로 힘겨운 상대와 싸워야 하는 구조를 갖고 있다. 즉 이 두꺼비는 바로 앞에서 말했듯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 구조의 해결사가 아니라 이 설화가 주려는 주제의식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가진 또 다른 캐릭터일 뿐이라는 뜻이다. 이런 차이점을 명료하게 표현하지는 못하더라도 사람들은 직감적으로 모종의 이질감을 느끼기 때문에 설화에서 비록 주인공인 처녀가 아무 일도 없고 게다가 도망조차도 가지 않았고 결말에 두꺼비가 해결사로 나타나서 악의 존재인 지네를 해치우지만 데우스 엑스 마키나적 구조라고 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직감(直感)이야 말로 보통 천재들에게 발달했다고 하는 선험적 직관이라고 한다.

    논의를 좀 더 진행시켜 보자. 여기서 말한 주제의식은 무엇일까? 바로 권선징악이다. 서양의 캐럴 송에도 나오는 '우는 아이에게는 선물을 안 주고 말 잘 듣고 착한 아이들에게만 산타클로스가 선물을 준다'는 식의 권선징악적 주제는 동양뿐 아니라 서양에서도 널리 이용되는 서사구조인데 이 구조가 널리 이용되어 온 이유는 무엇일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기껏 수단적 차원에 불과한 데우스 엑스 마키나 보다 더 높은 차원으로 규정한 예술작품의 궁극적 목적인 감정순화 즉 카타르시스에 매우 유리한 구조이기 때문임과 관계가 깊다. 생각해 보라. 선행을 쌓은 자가 복을 받지 않고 오히려 더 비참해지고 또 악행을 저지른 자가 징벌을 받지 않고 오히려 복(福)을 받는 구조로 카타르시스라는 목적을 달성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누리꾼들에게 '서울대 나온 사람답지 않게도 학습능력이 모자란다고 평가받는 진중권'을 위해서 좀 더 자세히 강의해 줄까 한다. 그것도 진중권이 이해하기 쉽게 진중권 자신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적 결말을 맺는 구조로 예를 들었던 헤라클레스가 등장하는 경우로 설명하겠다. 물론 무료 강의다. 진중권이 예를 든 고대 연극에서 헤라클레스가 등장해서 일거에 해결하는 방식의 연극에서 진중권 학생이 간과하고 있는 점이 하나 있다. 그 연극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서 헤라클레스와 맞장을 뜰 상대가 있는가? 당연히 없다. 헤라클레스와 맞장을 뜨면서 엎치락뒤치락 할 정도의 악역이 존재해서, 그 복잡한 구조를 헤라클레스가 일거에 해결할 수 없다면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는 용어 자체의 존립근거가 와르르 무너져 버린다.

    그렇게 되면 아리스토텔레스가 광분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처음부터 없지 않는가? 놀랍게도 헤라클레스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가 일거에 해결할 수 없는 막강한 상대들이 줄줄이 등장하는 스토리 구조가 있다. 바로 헤라클레스가 신이 되기 위한 과제를 그린 12가지 공역(노역)을 그 내용으로 하는 신화(神話)인데 이것 또한 당연히 데우스 엑스 마키나 구조가 아니다. 이 신화들은 헤라클레스가 주연이 되는 서사구조이지 이를 보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데우스 엑스 마키나 구조라는 바보들은 없다. 혹시 진중권은 그럴 가능성이 있을지 모른다. 진중권은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본질적 속성이 뭔지도 모르고 있는 까닭에 그걸 판단할 능력자체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지상에서 난리를 일으키는 악한 이무기를 하늘에 있는 옥황상제가 내려와서 가볍게 응징하고 사라와 이든을 구해주고 끝내는 구조라면 데우스 엑스 마키나 구조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울 수 있다. 문두에 밝힌 설화와 영화 는 결코 데우스 엑스 마키나 구조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필자가 밝힌 해결사(神)의 비의존성 조건과 능력의 초월성 조건 중 어느 한 가지도 만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일 진중권이 이 논증에 이의 있다면 그 반 예를 들어 필자를 깨우쳐 주기를 요구한다. 아마 이 과정에서 독자들은 또 한번 진중권의 지능수준을 명백하게 확인하게 되는 기회를 갖게 될 것이 분명하다.

    만일 이 가 영화화된다면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어떤 대목일까? 당연히 지네와 뚜꺼비 간의 치열한 싸움이 될 것이다. CG 등 최첨단의 영상 기술력도 이 대목에 가장 신경을 쓰서 활용해야 한다. 따라서 해결사 헤라클레스가 등장하자마자 싱겁게 끝나버리는 구조가 될 수 없다. 영화 의 마지막 대목의 부라퀴와 선한 이무기의 전 세계의 운명을 건 건곤일척의 승부처럼 오히려 최고의 하이라이트 장면으로 부각될 수 밖에 없다.

    영화 속의 두꺼비, 즉 해결사라 할 수 있는 선한 이무기도 그랬다. 그는 아직 절대적 존재인 용(龍)이 되지 못한 미완(未完)의 존재였기에 미합중국의 초현대식 무기와 군대로도 어쩌지 못할 정도로 강력한 존재인 부라퀴를 손쉽게 처치하지 못한다. 오히려 부라퀴와 싸우면서 목숨을 잃을 것 같은 패배 직전의 위기에 까지 몰린다. 게다가 해결사인 선한 이무기는 사라의 도움을 받아야만 진정한 용이 되어 하늘로 승천할 수 있는 존재다. 이는 진중권이 말한 극중에 해결사로 등장한 헤라클레스가 자신이 구해주러 온 처녀가 가진 구슬(여의주)을 얻어야만 신이 되어 올림푸스 산에 올라갈 수 있다는 설정과 같다. 이 경우 어느 누구도 이를 두고 헤라클레스에 의한 데우스 엑스 마키나적 구조라고 하지 않는다. 그가 정말 백치(idiot)가 아니라면. 이런 구조라면 헤라클레스 자신의 12가지 공역을 다룬 신화적 구조처럼 전혀 다른 서사구조로 자리매김할 뿐이다.

    게다가 마을 처녀의 도움을 받아 비로소 올림푸스 산으로 갈 수 있게 된 헤라클레스가 고마워서 다시 돌아와서 눈물까지 흘리는 구조를 보고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IQ(지능지수)가 과연 세 자리를 넘어서는 사람인지 의심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시중에 진중권의 아이큐에 대한 논란이 생기는 건 결코 이상한 현상이 아니다.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진중권의 싸가지

    진중권의 글이나 말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진중권의 태도를 문제 삼고 있지만 사실 진짜 문제는 진중권의 무식함과 지능에 있다. 진중권이 진짜로 똑똑한 사람이라면 그까짓 것 진중권의 비매너나 싸가지 없는 태도 정도는 지식인의 지적 오만 정도이겠거니 하고 충분히 참아 줄 수 있다. 하지만 진중권의 낮은 지능지수로 인해 엉터리 논리나 틀린 말을 마구잡이로 쏟아낼 때, 더군다나 그런 주제에 다른 사람들을 보고 " 너희들은 이런 것도 몰라?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어쩌구 저쩌구.... 하는 식의 중권의 황당한 발언을 들어야 하는 진중권보다 똑똑한 사람들은 정말 어이가 없어서 벌어진 입이 안 다물어진다. 정말 "어디서 저렇게 무식하고 황당한 인간이 생겨났을꼬? 항간에 떠도는 진중권의 아이큐가 두 자리라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군!" 이게 대한민국 진중권에 대한 지식인들의 태도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적어도 내 주위에 있는 서울대 동문들이 진중권을 보고 "아이큐 두자리" 라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 없을 정도다. 이런 말하긴 좀 그렇지만 서울대가 낳은 대 망신 케이스로 생각한다는 사람도 있다. 학벌지상주의가 얼마나 큰 폐해를 끼치고 있는지 대한민국 사람들이 진중권을 보면 잘 알 것이라고 생각한다. 진중권의 불행은 그런 지적 수준으로 미학을 하겠다고 덤빈 일에 있다. 사실 미학과가 소위 말하는 비인기 학과라서 법정대나 필자가 전공한 경제학부보다 커트라인 자체는 낮지만 실제로는 경제학부나 법학계열을 전공하는 사람들보다 아이큐가 더 높은 사람들이 파고들어야 하는 학문이다. 인문학 계열이 거의 다 그렇지만 특별히 미학은 언어에 대한 미묘한 감각까지도 타고 나야 유리한 학문이다.

    진중권 보고 좀 겸손해져라고 주문하는 분들도 더러 있는 모양인데 이 분들도 뭔가 크게 잘못 짚고 있다. 진중권은 아직까지 겸손할 자격을 못 갖춘 사람이다. 겸손이란 뭔가 특정한 능력을 갖춘 사람들만이 비로소 가질 수 있는 특권인데 지능 자체가 낮은 진중권이 어떻게 겸손할 자격을 가진 사람인가? 피겨요정 김연아나 박태환 선수처럼 특별한 능력을 갖춘 사람이 겸손할 수 있는 자격을 비로소 갖추게 되는 것이지 등위권에도 못드는 선수에게 겸손하라고 요구한다면 진짜로 황당한 개그가 되고 만다. 진중권은 차후에라도 겸손할 자격을 가질 수 있도록 일단 공부부터 한참 더 해야 할 사람에 불과하다.( 세상 일이 노력만으로 해결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여태까지 드러난 진중권의 내적한계 즉 지능수준으로 볼 때, 진중권이 그럴 자격을 갖출 가능성은 거의 절망적이다)

    이를 모르고 진중권의 싸가지를 문제 삼거나 겸손 운운하는 건 진중권의 술수에 말려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진중권에게 다른 사람들이 참고로 할 만한 실력이 있고 거기에다가 겸손까지 갖추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현 상태의 진중권에게 필요한 건 실력을 갖추는 일이지 겸손이 아니다. 겸손은 실력을 갖추고 나서야 비로소 갖추던지 말든지 할 사항이다. 거듭 밝혀왔지만 진중권 현상의 출발점은 그 근원이 진중권의 무식함에 있는 것이지 태도나 싸가지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다. 진중권이 워낙 터무니없이 비매너를 일삼고 싸가지 없이 굴어서 그 부분만이 특별히 대중 앞에 부각되는 바람에 더 근원적 문제인 그의 무식함이 그 뒤로 숨겨져 조명을 못 받아 왔을 뿐이다. 사실 태도나 싸가지가 비위에 거슬려도 진중권이 하는 말이 옳고 바르다면 쓴 약이 몸에 좋다는 말처럼 충분히 들어 줄 용의가 있다. 한데 진중권의 경우 정말 어처구니 없이 무식한 말을 하면서 자신이 하는 말이 몸에 좋은 쓴 말이라고 우겨대고 있으니 정말 개그다. 개그로 쳐도 너무나 뻔뻔한 개그다. 정확하게 말하면 진중권이 내뱉는 말들은 쓴 맛을 가진 약이 아니라 악취를 풍기는 쓰레기와 진배없다. 혹시 진중권이 과대망상증 환자가 아닌지 의심이 될 지경이다. 무식과 기침은 숨기고 싶어도 숨길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진중권의 경우 앞으로도 계속해서 무식하고 황당한 개그로 우리를 한껏 웃겨 줄 것이다. / 김휘영(문화평론가) -(다음 호에 계속)


  • 사진첩 2008/09/21 [16:12] 수정 | 삭제
  • 다음 호에는 그 과정이랄까 그 당시의 일련의 흐름에 적극동의했던 원죄(?)에 대해서 상기하는 글을 쓰면 독자로서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


    유시민은 자신의 때가 올 때 사용하기위해 지지자들을 풀어주지않고 묶어두고있고 지지자들은 그간 들인 돈, 시간, 인맥이 아까워 새로운 모색은 엄두도 못내고 유시민 입만 쳐다보고 있는듯.


    좌파신자유주의 떠들때도 있었건만 이제와선 신자유주의가 문제라고 제 버릇 개 못 주고 밀짚모자 쓰고 다변하는 그 분과 그 분 아방궁 주변 정원관리 해 주러 몰려다니는 시민들에 대한 분석도 한번 싣는다면 재밌을듯..

    이 번 호의 비판글은 동의는 백번천번 되는데 좀 더 구체적이었으면 좋았을뻔.
    예를들어, 지난 정권에서 입 다문 진보참칭세력을 콕 찍어 준다면 언젠가 정권이 바뀌었을때 그 팀에서 보은차원에서 한자리 차지하는 거 조금이라도 방지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 Garry 2008/09/19 [17:53] 수정 | 삭제
  • 현실주의자인 김대중은 김대중 지지자나 노무현 지지자나 이제 민주당 한배로 가야한다고 했지요. 그러나 정책을 중심으로 보는 나의 눈에는 현재 민주당은 두개로 쪼개져야 합니다. 김대중의 중도우파와 노무현의 얼치기 좌파로. 그런데 이미 합리적 새력이라할 만한 인사가 민주당에 안보이네요. 전멸했지요. 그러니 아무리 이명박이 개판을 쳐도 민주당 지지는 안돌아옵니다. 노무현 탓이고, 노무현의 정체성을 애초에 모르고 사기에 속아 남어가 검증없이 띄운 강준만에게도 원죄가 있죠.
  • 촌평 2008/09/19 [17:33] 수정 | 삭제
  • "지방에 내려가 풀뿌리정치에 전념하라"는데
    무엇이 풀뿌리정치인지 구체적제시가 없다.
    정치인이 지역에 내려가면 첫 일정이 지역토호들과의 접견이다.
    그네들은 오로지 자기 지역의 집값에 젤 관심이 많다.
    사실 이명박이 대통령이된 것도
    자기지역 집값좀 올려달라는 대중들의 염원이 반영된 결과이다.
    강남집값의 반만큼이라도 올려달라는 소망말이다.
    지역민들의 정체가 이러할진대 그들을 붙잡고
    무슨 풀뿌리 타령을 하겠는가. 씨알도 안멕히는 허튼 수작에 불과하다.
    강준만은 말이 많다. 이것 저것 줏어모아
    개중엔 훌륭한 비유도 있고 기발한 아이디어도 있는데
    늘 결론부분이 허약하다.
    하기야 이런 문제가 어디 강준만뿐의 문제이랴.
    전업글쟁이나 유사전업글쟁이의 속성상
    우선 많이 뱉아놓고 많이 아는 척해야 파리 떼가 끓는 걸 어찌하랴.
    그러기에 그들은 부지런히 독서하고
    그 책의 참의미를 소화하기도 전에
    우선 읽은대로 뱉아놓기 바쁘다.
    자기를 기다리는 독자들을 실망시키기 싫어서다.
    그러나 강준만은 참 부지런한 사람이다.
    그가 학자보다는 장사를 했다면 더 성공할 수 있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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