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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금메달 하나가 은메달 백 개보다 낫다?
[시론]우리 사회의 금메달에 목숨걸기, 이대로 좋은가?
 
류상태   기사입력  2008/08/11 [11:29]
스포츠 경기에서 일등과 이등의 차이는 그야말로 간발의 차이다. 하지만 순위를 정할 때는 백 명의 이등보다 단 한 명의 일등이 우선순위를 점한다. 올림픽에서 순위를 정하는 방식이 이렇다.

한 반에 35명인 학급이 학년별로 열개 학급, 전체 30학급인 어느 고등학교에서 씨름경기를 했다고 가정해 보자. 2학년 5반에서는 일등을 차지한 학생이 한 명, 나머지 34명은 모두 10등 이하의 성적을 얻었다. 2학년 6반은 열 명이 2등을, 스무 명은 3등을 했다. 좀 극단적인 예를 들었지만 이 경우 올림픽에서 순위를 정하는 방식으로 계산하면, 2학년 5반은 금메달 하나, 2학년 6반은 은메달 열 개, 동메달 스무 개로 2학년 5반이 순위에서 앞서게 된다.

독자들은 이런 방식이 합리적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가? 순위를 꼭 정해야 한다면, 이보다 더 합리적으로 순위를 정할 수 있는 방식은 없을까? 금, 은, 동메달은 선수 개인의 영예로 수여하더라도 국가별 순위를 매길 때는 점수제를 채택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다.

예를 들면, 금메달은 5점, 은메달은 4점, 동메달은 3점, 이런 식으로 계산하자는 것이다. 또한 4위 이하는 아예 무득점으로 할 것이 아니라 4위를 차지한 사람이나 팀에게도 2점, 5위에게도 1점을 부여하여 종합체점제 방식으로 순위를 정하는 것이다. 위에 든 예에서 이런 방식으로 순위를 정하면 2학년 5반은 5점, 2학년 6반은 100점 이상이 된다. 어느 쪽이 더 합리적일까?

독자들 가운데 이미 눈치 챈 분들도 많겠지만,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얘기는 올림픽 순위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다. 불합리하기 짝이 없는 이런 방식이, 최후의 승리자에게 모든 영광을 몰아주는 자본주의 체제와 매우 닮아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재미있는(?) 현상은, 자본주의의 본고장인 서구 제국와 그 사생아인 미국에서는 그런 식의 엉터리 순위에 그다지 큰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점이다. 오히려 뒤늦게 자본주의 체제에 빠져 허우적대는 우리나라에서 오로지 금 하나하나에 그토록 목을 걸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사격에서 첫 메달을 따낸 진종오 선수에 대한 언론의 시각과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명확하게 드러난다. 진종오 선수는 지난 올림픽과 이번 올림픽에서 거푸 은메달을 따냈다. 부침이 있을 수 있겠지만, 세계 정상권의 실력을 지난 4년 동안 유지하지 않고는 거두기 힘든 빼어난 성적이다. 하지만 진종오의 올림픽 은메달 획득 소식은 빠르게 잊혀지고 말았다. 최민호를 필두로 연이어 날아온 박태환과 여자양궁의 금메달 소식에 가려진 것이다.

오늘 아침 인터넷에 들어가 보니, 누군가 이런 글을 올려 엄청난 조회 수를 기록했다고 한다. “올림픽 축구 대표팀을 위해 관을 짜서 보내주자.” 우리 축구 대표팀이 이탈리아에게 3:0으로 진 직후에 올려진 글이다.

혹 이렇게 말하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다. “뭐 그렇게 골치 아프게 사냐? 피곤하게... 그냥 즐겨...” 당신의 즐거움을 방해했다면 미안하다. 하지만 나에게는 당신처럼 그냥 즐길 수 없는 뼈아픈 경험이 있다.

내가 중고등학교에서 근무하는 20년 동안, 나는 내가 시무했던 학교와 교회에서 세 명의 제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통한 일을 겪었다. 첫 번째 아이는 고입 연합고사라는 제도가 시행되던 1980년대에 시험에서 떨어진 중3 여학생이었다. 두 번째 아이는 전교를 주먹으로 재패했던 중3 남학생이었다. 지존으로 군림하던 그 아이는 도전자에게 진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세 번째 아이의 사고는 학교가 아니라 교회에서 발생했다. 반에서 5등 안에 들던 그 아이는 아무리 노력해도 일이등으로 올라가지 않는 성적을 비관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당시 고등학교 일학년 여학생이었다.

‘오로지 금메달’에 대한 우리 사회의 목숨걸기는 올림픽만의 얘기가 아니다. 우리 사회 도처에 너무 깊이 배어있는 ‘잘난 놈에게 몰아주기’의 극단적 투영이라는 점에서 허탈감을 감추지 못하겠다. 더욱 슬픈 것은, 지난 서울시 교육감 선거에서 이런 ‘잘난 놈에게 몰아주기’식 교육관에 빠진 사람이 당선됐다는 점이다.

주님, 가르쳐 주십시오. 당신이 만든 세상이 잘난 놈만 살고 못난 놈은 다 죽어야 하는 그런 세상입니까? 당신을 믿는다는 대통령, 평생에 걸쳐 당신을 증거하다 죽겠다는 목사들의 상당 수가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몸부림치는 이 현상을 도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입니까?
류상태 선생은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이후 20여 년을 목회자, 종교교사로 사역했지만, 2004년 ‘대광고 강의석군 사건’ 이후 교단에 목사직을 반납하였고, 현재는 종교작가로 활동하면서 ‘기독교의식개혁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교양으로 읽는 세계종교] [소설 콘스탄티누스] [신의 눈물] [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 [당신들의 예수]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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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8/08/11 [11:29]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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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자 2008/08/17 [09:55] 수정 | 삭제
  • 저도 올림픽에 점수제를 도입했으면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같은 생각을 하시는 분이 계셨네요 ㅎ 저도 그렇긴 하지만... 선수가 은메달을 따면 대실망을 하는 관중의 태도나 은메달에 "그쳤다"라고 표현하는 언론도 문제입니다.
  • 123 2008/08/12 [00:26] 수정 | 삭제
  • 가족들에게 죄를 지었다고 울먹이는 유도 선수, 참 안돼보이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