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학년 1학기’가 무섭다 지금은 ‘운동권 학생’이라는 말이 그리울 정도로, 운동권 학생은 희귀한 존재가 되었다. 1980년대 말, 그리고 1990년대 초까지도 대학에서 운동권은 큰 힘을 발휘했으니, 불과 십수 년 만에 엄청난 변화가 이루어진 셈이다. 그런 변화로 인해 이젠 옛날이야기가 되고 말았지만, 운동권 학생들을 옆에서 가까이 지켜보면서 느낀 게 하나 있다. 평소 알고 있던 점이긴 했지만, 실제로 겪는 맛은 매우 씁쓸했다.
“책을 ‘달랑’ 몇 권만 읽은 사람이 아예 책을 안 읽은 사람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 누구나 한번쯤 들어봤음 직한 말이지만, 이념이나 가치 지향적인 책의 경우엔 이 진술은 거의 진리에 가깝다는 게 내가 경험으로 깨달은 교훈이다.
가장 위험할 때가 언제인가? 1학년 1학기 때다. 2학기만 돼도 방학이 끼어 있어서 책을 좀 더 읽을 수 있다. 그런데 1학기 초에 선배들에게 이끌려 생전 보도 듣도 못하던 의식화 교육을 받게 되면 마치 새로운 진리의 세계에 인도된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흡수력이 놀라울 정도로 좋고 빠르다. 읽는 족족 불멸의 도그마가 된다. 다른 사람은 전혀 모르는 걸 자신만 안 듯한 착각 속에 빠지기도 한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만, 어찌 1학년 1학기뿐이랴. ‘1학년 1학기’는 상징적인 의미일 뿐이다. 학생에 따라선 졸업할 때까지도 1학년 1학기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 묘하게도 그런 학생들이 리더십을 행사하는 데에 유리했다. 원리에 충실한 정열이 누구보다 더 뜨겁기 때문이었을 게다.
운동권 학생들은 자신이 읽은 책을 내 말보다 훨씬 높게 평가했다. “나도 책을 쓴 사람이니 활자화된 글이라고 해서 너무 믿지는 말라”고 말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계급적으로 이미 교수는 극복의 대상으로 낙인찍혀 있는 듯했다. 지방대 운동권은 서울 따라가지 말고 좀 차별화된 의제를 설정해야 한다는 내 주장은 민족의 현실을 외면한 몹쓸 발언으로 간주되었다. 그 학생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대학에 들어와 페미니즘 의식화 교육에 푹 빠진 여학생의 경우도 비슷했다. 내 말은 내가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무조건적인 거부 대상이었다. 나는 그 여학생이 믿는 투쟁방식이 실패로 돌아간 사례들을 잘 알기에 성공에 근접할 수 있는 방식을 이야기했을 뿐인데도 말이다.
정말 죄송한 말씀이지만, 몇 년 전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운동권 대학생 3학년 수준’ 운운하는 말이 나왔을 때, 난 내심 ‘1학년 1학기’를 떠올린 적이 있다. 밤늦게 포장마차에서나 들을 수 있는, 극도로 단순화된 화끈 어법을 대통령이 구사하는 것에 대해 지지자들은 열광했지만, 나는 결코 그럴 수 없었다. 세상의 복잡성에 대한 인식을 ‘보수화’로만 간주하던 학생들의 ‘지속가능하지 않은 열정’이 기억으로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하긴 아버지들이 늘 자식에게 하는 말이 있다. “세상이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야.” 우리는 이 말의 ‘보수성’을 잘 안다. 그러나 이 경우의 보수성과 ‘열정의 성공적인 결과’를 위해 우리가 꼭 알아야 할 복잡성에 대한 이해가 어떻게 같은 성격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갑신정변의 주동자 중 한 명이었던 서재필의 경우처럼 실패한 후에 ‘민중의 무지몰각’을 탓하면 되는 건가?
많은 사람들이 대인관계에서 정치 이야기를 금기시한다. ‘소통 불능’이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특정 정치세력과 정치인을 개입시키지 않은 채 각자 바라는 세상 위주로 정치에 대해 이야기하면 뜻이 통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는 점이다. 대단히 특별한 사람과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평소 학교에서건 그 어디에서건 정치에 대해 배우고 공부하지 않다가 특정 정치세력과 정치인을 지지하게 되면서부터 정치교육에 입문하게 된다. 당장 반론이 나올 것 같다. 정치에 대해 지겨울 정도로 많이 배우고 공부했다는 반론 말이다. 물론이다. 우리는 이론으론 많이 배우고 공부했다. 그러나 그 이론은 서구 민주주의 이론이다. 한국 실정엔 잘 들어맞지 않는 것들이 많다. ‘메이드 인 서양’ 이론을 너무 많이 알기 때문에 오히려 서구의 잣대로 한국을 보느라 한국 정치를 필요 이상으로 혐오하고 저주하는 부작용만 낳고 있다. 요컨대, 우리에겐 실사구시적 배움과 공부가 없거나 약했다는 것이다.
독일의 정치교육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우리 학문의 소명이다.”막스 베버(1864-1920)의 말이다. 베버는 독일 시민계층의 정치적 미성숙은 독일이 직면한 가장 큰 문제라고 확신하면서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한국의 시민계층은 당시의 독일 시민계층보다 훨씬 더 성숙한 사람들이지만, 지도자에 대한 과도한 기대에 대해서만큼은 우리가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게 있는 것 같다. 김덕영의 해설을 들어보기로 하자.
“비스마르크는 ‘눈곱만큼의 정치적 의지도 없는 국민’을 그의 유산으로 남겼다. 그리하여 독일 국민들은 위대한 정치가가 저 꼭대기에서 그들을 위해 어련히 알아서 정치를 할 것이라고 기대하게 되었다. ... 게다가 비스마르크는 ‘완전히 무기력한 의회’를 그의 정치적 유산으로 남겼다. 그리하여 독일의 의회는 아주 낮은 정신적 수준의 제도와 기관이 되어버렸다. 결론적으로 저 위대한 정치가 비스마르크는 베버가 보기에 아무런 정치적 전통도 남기지 않았던 것이다.”1) 베버는 정치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베버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일까? 독일연방정치교육원은 1952년 출범 초기부터 정파의 이해관계에서 독립해 학생·공무원·군인과 시민들에게 균형 잡힌 정치교육을 해왔다. 1976년에는 모든 정당의 합의 아래 ‘보이텔스 바하 합의’라는 3대 정치교육 원칙도 마련됐는데, 그것은
① 일방적 주입식 교육을 금지하고,
② 다양한 학문·정치의 논점을 제시해 학생·시민의 판단력을 높이며,
③ 피교육자의 관심사가 정책에 반영되도록 하는 것 등이었다.
2005년 9월 방한(訪韓)한 독일연방정치교육원 부원장 베른트 휘빙거는 “정치교육이 독일의 민주화와 통일의 원동력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1960년대 중반- 1970년대 초반 서독은 좌우 대립이 극심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시 극우와 극좌를 제재하기 위해 각 주 단위에서 ‘반(反)급진주의 조례’를 만들었습니다. 이를 어긴 극좌·극우세력은 공무원이 될 수 없었어요. 교사·교수 모두 공무원인 독일에서 이 조례의 파장은 컸습니다. 현직에 있던 공무원은 파면됐고, 신규 취업이 금지됐습니다. 반발도 컸지만 이런 조례가 용인될 수 있었던 것은 정치교육이란 민주적 의견수렴 과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2) 20여 년 전부터 독일의 정치교육을 한국에 소개해온 숭실대 정치학과 교수 전득주는 “한국은 대화와 토론 교육이 적어 흑백논리가 앞서고 있다”며 “독일의 정치교육을 벤치마킹해 제도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또 전득주는 “정치교육 불모지인 한국에서는 우선 초당적인 ‘민주시민교육원’(가칭)을 만드는 일이 시급하며, 나아가 ‘주민자치센터’ 같은 풀뿌리 민주주의 교육기관을 전국적으로 늘리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3)
독일을 정치 선진국으로 여겨 배워야 한다는 뜻으로 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민족을 대량 학살한 적이 없는 한국이 독일보다 훨씬 더 나은 나라가 아닌가? 다만 독일의 고민을 음미해보면서 우리에게도 ‘정치교육’이 필요하다는 데에 공감하는 것만으로 족하다.
당파적 열정이 가로막는 정치교육 한국에서 평생교육 차원의 정치교육 이전에 더욱 문제가 되는 건 고등학교에서의 정치교육이다. 인간교육실현학부모연대 부회장 김장중은 2006년 5·31 지방선거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부실한 정치교육과 그에 따른 낮은 참여율, 그리고 감성적 정치의식에서도 원인을 찾고 싶다”고 했다. 그는 “고3인 딸아이는 선택 과목 중 ‘정치’가 제일 어렵다고 했다. 자신이 평소 접하는 ‘생활로서의 정치’가 아니라 정치학 이론을 공부하기 때문일 것이다”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과거 고교에서는 ‘정치경제’가 필수였지만, 대다수 젊은이는 제대로 된 정치교육을 받지 못하고 유권자가 된다. 중요한 권리가 부여되는데도 그 과정은 너무 허술하다. 이로 인해 발생하는 낮은 투표율과 민의 왜곡 등의 사회적 비용을 국민들이 톡톡히 물고 있는 셈이다. 성숙한 시민의식과 높은 정치 참여율 및 합리적 선택은 사회 유지와 국가 발전의 필수요소다. 이를 위해 정치교육이 필요하다. 특히 생활정치교육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선진국에서는 체계적으로 시민정치교육을 한다고 하지 않는가?”또 김장중은 “특히 지방선거는 미래 유권자인 아이들에게 정치교육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옆집 아저씨와 동네 아줌마가 후보로 나와 생활 주변을 소재로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재미도 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신들과 관계있는 공약 찾기, 부모님과 함께 투표장 가기, 선거관리위원회 자원봉사, 소감문 쓰기 등 다양한 교육 활동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번 선거를 전후해 학교에서 ‘계기 교육’을 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우리 생활과 직결된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탐구하는 살아 있는 교육을 통해 진정한 민주 시민을 육성해야 한다.”4) 아주 좋은 제안이다. 그런데 우리가 가장 먼저 고민해야 할 점은 선거를 전후해 학교에서 ‘계기 교육’을 할 수 없는 이유다. 이런 교육은 대학에서도 하기 어렵다. 왜 그런가? 이미 ‘편’이 나뉘어져 있기 때문이다. 너무 뜨거운 주제라는 뜻이다. 오히려 선거를 전후해선 정치교육을 피하고, 평소 일상적으로 접근하는 게 훨씬 더 좋은 방법일 것 같다.
예컨대, 정당의 기간당원제를 보자. 이 문제가 정치적 현안이 되었을 때 다루게 되면, 사람들은 자신이 지지하는 세력이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에 따라 판단을 내리게 된다. 생산적인 토론이 어려워지는 것이다. 오히려 이게 이슈가 되지 않을 때에 논의하는 게 좋다.
차분하게 접근하면, 정당의 기간당원제는 유럽에서나 가능할 뿐 한국엔 맞지 않는다는 게 곧 드러날 것이다. 한국인의 높은 연고집단 가입률 때문이다. 사람들의 시간·에너지․돈은 제한돼 있는데, 무슨 수로 그 모든 걸 다 할 수 있겠는가? 이건 충분히 논의해보면 누구나 다 동의할 수 있는 객관적 사실이다. 이런 동의의 기반에서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것이냐?”로 나아갈 때에 생산적인 결론이 도출될 수 있다.
이른바 ‘쏠림 현상’도 마찬가지다. 어느 나라건 그런 경향이 어느 정도는 있겠지만 한국처럼 심한 경우는 찾기 어렵다. 한국만의 독특한 사정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걸 정치교육의 연구대상이자 실천사항으로 삼자는 것이다. 나의 그런 문제의식이 잘 드러나 있기에 내가 <한국일보> 2006년 7월 19일자에 쓴 '쏠림의 정치'라는 칼럼을 여기에 소개한다.
쏠림의 정치 한국 정치가 불안정한 근본 원인을 헌법에서 찾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개헌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그들의 주장을 잘 들어보면 꽤 설득력이 있긴 한데,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 학자건 정치인이건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배경을 살펴보면 대부분 법학 아니면 정치학 전공자들이다. 그들은 법과 정치 이외의 다른 변수들을 고려하지 않는 것 같다. 개헌을 해서 얼마나 달라질진 모르겠지만, 불안정성은 한국 정치의 반영구적 속성일 수 있다는 데에도 관심을 기울여보는 게 좋겠다.민주주의는 한국을 모델로 해서 생겨난 게 아니다. 한국은 민주주의 수입국이다. 한국 특유의 ‘쏠림’ 현상은 민주주의 원조 국가들에선 나타나지 않은 것이어서 애초에 고려의 대상이 되질 않았다. 이 쏠림은 선거 관련 법과 제도를 바꾼다고 해서 사라질 수 있는 게 아니다. ‘서울 1극 구조’와 이에 따른 미디어 구조가 주요 원인이다. 과잉 도시화로 인한 초밀집 주거구조도 가세하고 있다. 이를 바꾸는 건 전면적인 국가 개조 작업이어서 한다 해도 수십 년 이상의 세월이 요구된다.혹자는 한국인에겐 ‘우우 몰려다니는’ 부화뇌동 근성이 강하다고 비판하지만, 어느 나라 사람이건 한국과 같은 사회구조하에서 살게 되면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이유야 어찌됐건 우우 몰려다니며 잦은 쏠림을 낳는 한국의 여론형성 구조는 민주주의 제도와 법의 취지를 압도하는 결과를 낳기 마련이다.한국 정치의 불안정성은 시대적 상황에 따라선 ‘역동성’으로 불리기도 했다는 걸 상기할 필요가 있다. 즉, 그게 늘 나쁘기만 했던 건 아니었기에 국민적 문제의식이 형성된 것도 아니다. 한국형 쏠림을 바꿔보려는 시도는 ‘시장 논리’에 반한다는 몰매를 맞기 일쑤다. 한국형 ‘시장 논리’의 핵심은 쏠림인데, 그게 마치 자유로운 경쟁을 고무하는 ‘시장 논리’인 양 오해되고 있으니, 쏠림과 싸우기도 쉽지 않다. 어느 음식점이 좋다 하면 우우 몰려가 줄을 서서라도 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한국인들 특유의 행태는 사회의 전 국면을 지배하고 있다. 대학입시에서부터 부동산 문제에 이르기까지 번번이 정책이 실패하는 이유는 정책 구상자들이 그런 행태에 대한 고려를 소홀히 하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이는 행정고시 시험과목의 문제이기도 하다.가장 어리석은 일은 쏠림 현상을 이념적인 틀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쪽으로 쏠리면 진보의 승리요, 저쪽으로 쏠리면 보수의 승리라는 식으로 해석하면 크게 실수하는 거다. 그간 한국 선거판에서 나타난 쏠림은 단 한 번도 예외 없이 ‘반감(反感)의 쏠림’이었다. 이쪽에 대한 반감으로 덜 반감을 느끼는 저쪽으로 쏠리는 것이지, 저쪽이 좋아서 그런 게 아니다. 그럼에도 승리한 쪽은 늘 미쳐 돌아가곤 했다. 자기들의 승리에 아전인수 격 의미 부여를 해대면서 국민적 반감을 사기에 좋을 일들만 골라서 하는 묘한 짓을 수없이 반복하곤 했다.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그게 바로 ‘권력의 사유화’ 현상 때문이다. 우리는 사유화라고 하면 곧장 권력을 이용해 부를 축적하는 부정부패를 연상하지만, 그건 옛날이야기다. 아무리 뜻이 좋다 하더라도 의사결정과 권력행사의 전 과정을 일단의 ‘코드 집단’이 독점해 마음대로 주물럭거리는 게 사유화의 본질이다. 권력감정은 재물욕보다 더 무서운 것이다. 그런 사유화에서 삶의 의미와 보람을 찾을 경우 국민적 반감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게 돼 있다.그러나 역시 필요한 건 균형 감각이다. 앞으로 언론이 다른 나라, 특히 선진국 정치의 어두운 면을 많이 소개하는 게 좋겠다. 한국 정치에 아무리 많은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그렇게 혼자서만 저주받을 만큼 나쁜 건 아니라는 걸 아는 것도 국민 정신건강을 위해 필요한 일이라 믿기 때문이다. 박정희를 넘어서 위 주장이 꼭 옳다고 말할 생각은 없다. 반론이 있으면 답하겠지만, 반론은 보질 못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어느 정치학 교과서에건 위와 같은 논의는 없다는 점이다. 서양 이론만 가르쳐선 정치교육에 도움이 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방해가 될 수도 있다. 반드시 한국적 특수성을 연구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한국적 정치학’ 교과서는 아직 쓰이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치학자들의 능력이 모자라서 그런 게 아니다. 박정희가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말로 ‘한국적’을 완전히 버려놓았기 때문에, 우리는 세계 보편적인 민주주의를 해야 한다는 강박의 포로가 돼 있다. 한국 실정에 들어맞는가 하는 건 별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무조건적 당위로 여겨지는 분위기다. 이제 제발 박정희를 넘어서 한국적 특수성에 대해 생각해봐도 괜찮을 때가 되지 않았는가?
특수성을 강조하는 것에 대한 학자들의 반감은 공감할 수 있는 근거가 꽤 있기는 하지만, 역지사지(易地思之)를 해볼 걸 권하고 싶다. 왜 이론은 서구적 보편성을 추구하면서, 학내에서 학생과의 관계는 한국적 특수성을 주장하는가? 문화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그게 왜 정치에 대한 이해와 연구엔 적용되지 않는가?
좀 솔직해지자. 사실 이 문제는 보수 논객 복거일이 잘 지적한 바 있다. 복거일은 학문의 종속을 ‘주변부 경제학’의 관점에서 고찰했다. 그는 “중심부와 주변부 사이엔 아주 가파른 ‘지식의 물매(Gradient of Knowledge)’가 있다. 그래서 중심부의 지식들은 거세게 주변부로 몰려온다. 그런 상황에선 창조적 작업이 무척 어렵다”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게다가 그런 사정은 주변부 사회가 자신의 준거 틀을 지니는 것을 막는다. 자연히 주변부 사회는 사물에 대해서 독자적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중심부에 먼저 조회하고 그곳의 기준을 얻어서 평가한다. 어쩌다 창조적 작업이 나오더라도 선뜻 인정받지 못한다. 그것을 평가할 만한 사람들이 적은데다가 평가자들도 평가에 필요한 정보들을 얻기가 워낙 어렵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평가자들은 자신의 무지가 드러나는 것을 겁내게 되어, 처음 보는 작업들을 아예 외면하거나 비현실적으로 높은 수준을 평가기준으로 내놓는다. 우리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한 창조적 작업이 외국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경우가 흔한 것은 그런 사정 때문이다.”5) 복거일이 ‘지식의 물매’를 극복하기 위해 애를 쓰자는 것인지, 아니면 체념하자는 것인지, 그건 확실치 않지만, 학계에서의 ‘서바이벌 게임’이나 ‘인정 투쟁’이 가급적 보편주의로 나갈 걸 요구하는 건 분명하다. 한국 정치를 분석하면서도 분석의 틀은 서구의 것을 가져다 쓰는 게 보수·진보를 막론하고 일반화돼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제18대 총선 결과에 대한 분석에서도 나는 그런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유권자들이 ‘욕망’에 투항했다고 보는 분석에 나는 결코 동의할 수 없었다. 나는 고명하신 학자들의 주장에서, 당파성의 마력은 지식수준을 초월해 작동하는 법이라는 원리만 새삼 깨우쳤을 뿐이다. 이걸 설명하려면 복잡하니, 내가 <한국일보> 2008년 4월 23일자에 쓴 "유권자는 ‘욕망’에 투항했나?"라는 제목의 칼럼을 소개하는 것으로 대신하면서 이 글을 끝맺고자 한다.
유권자는 ‘욕망’에 투항했나? 제18대 총선 결과를 ‘욕망의 정치’로 보는 주장이 많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특히 수도권의 표심을 뉴타운을 비롯한 개발주의 기대심리와 연결시켜 그렇게 보는 것 같은데, 재미있는 건 주로 이번 선거 결과에 실망한 사람들이 그런 분석을 내놓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주장은 타당한가? 물론 타당하다. 그렇지만 하나 마나 한 말이다. 언제 ‘욕망의 정치’가 아닌 적이 있었던가? 이전엔 ‘이타성의 정치’였단 말인가? 그걸 모르고 하는 말 같지는 않다. 그 어느 때보다 더 그런 성향이 두드러졌다는 뜻으로 하는 말일 게다.
유권자가 자신의 계급적 이익에 충실한 투표를 했다면, 그건 반겨야 할 일 아닌가? 그러나 ‘욕망의 정치’를 말하는 이들은 환영보다는 개탄과 우려 일변도다. 그래서 앞뒤가 안 맞는 말을 하기도 한다. 원하는 만큼 이익이 돌아가진 않을 것이라며, ‘욕망의 정치’가 헛된 기대라는 걸 지적하는 게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욕망의 정치’가 아니라 ‘착각의 정치’라고 말해야 하지 않나? 그들이 굳이 ‘욕망’이라는 말을 쓰는 건, ‘욕망’은 늘 ‘착각’을 수반할 정도로 이성을 마비시킨다는 전제를 깔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욕망’을 너무 호락호락하게 보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이들이 갖고 있는 또 하나의 전제는 ‘욕망’을 철저히 물질 위주로만 보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전에는 잠자고 있던 욕망이 이번 총선을 통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는 식이다. 독선과 오만으로 똘똘 뭉친 ‘인정 욕망’도 좀 더 잘살고 싶어 하는 ‘물질 욕망’ 이상으로 끈적끈적한 게 아닐까?
다 좋은 뜻으로 하는 말이라 믿지만, 이번 총선 결과를 그렇게 분석해버리고 나면 남는 게 없다. 굳이 찾자면 두 가지뿐이다. ‘욕망’을 정면 공격하거나 ‘욕망’에 편승하는 것뿐이다. ‘우리의 잘못’은 없으며, 모든 건 ‘그들의 욕망’ 때문이라는 결론이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욕망의 정치’보다는 이렇게 ‘배움이 없는 정치’가 더 문제가 되는 건 아닐까?
‘인정 욕망’과 ‘물질 욕망’은 분리돼 있는 게 아니다. 남들의 인정을 받을 수 있을 만한 공적 위치에 서게 되면 ‘억대 연봉’은 자연스럽게 굴러 들어온다. ‘욕망의 정치’라곤 하지만, 뉴타운에 열광한 유권자들이 많았다 하더라도 그들이 꿈꾸는 건 ‘억대’에 불과하다. 왜 전자(前者)는 물질에 무관심한 척하면서 ‘억대’를 챙기는 반면, 후자(後者)는 ‘욕망의 화신’인 양 손가락질을 받으면서 실현되지 않을 수도 있는 ‘억대’를 꿈꿔야 하는가? 이건 좀 불공정하지 않은가?
전 정권, 전 여당 인사들 중엔 억대 연봉을 고스란히 저축한 이들이 많다. 그래도 남의 돈 안 먹었다고 청렴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들은 그렇게 칭찬 받으면서 자기 욕망은 채워놓고 ‘욕망의 정치’에 반대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물론 제스처가 아니라 진심이었을 수도 있지만, 출세한 사람과 출세하지 못한 사람 사이의 간극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지금 한국 정치는 유권자의 입장에서 볼 때엔 좌우(左右)의 싸움도 아니고, 진보-보수의 싸움도 아니다. 출세한 사람과 출세하지 못한 사람들 사이의 싸움일 뿐이다. 다선 의원이 낙선한 지역의 유권자들에게 물어보라. 어디에서건 “그만하면 많이 해먹었잖아!”라는 말을 쉽게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유권자들은 정치가 국민을 뜯어먹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유권자들이 욕망에 투항했다고 보는 건 그 자체로선 타당할망정 차원이 전혀 맞지 않는 분석이다. 정치 자체가 쓰레기통에 처박힐 때, 유권자에게 남은 선택은 아예 투표를 외면하거나 정당들을 돌아가면서 난타하는 응징뿐이다. 괜한 욕망을 탓하기보다는 ‘욕망의 공정거래’에 힘을 쓰는 게 더 좋지 않을까?
[각주]
1) 김덕영, 『막스 베버, 이 사람을 보라: 학문과 지식은 세계를 어떻게 바꾸는가?』, 인물과사상사, 2008, 134~135쪽.
2) 배영대, 「“이념 배제한 정치교육이 독일 통일 앞당겨”」, 『중앙일보』, 2005년 9월 9일, 27면.
3) 배영대, 「“이념 배제한 정치교육이 독일 통일 앞당겨”」, 『중앙일보』, 2005년 9월 9일, 27면; 유재식, 「“통일 후 독일이 가장 신경 쓴 건 민주시민 만들기 위한 정치교육”: 한·독 시민교육 세미나」, 『중앙일보』, 2005년 10월 12일, 29면.
4) 김장중, 「실생활과 거리 먼 고교 정치교육」, 『동아일보』, 2006년 6월 8일, 29면.
5) 복거일, 「주변부의 경제학」, 좌승희 외, 『한국경제를 읽는 7가지 코드』, 굿인포메이션, 2005, 48~52쪽.
* 본문은 월간 <인물과사상> 2008년 6월호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