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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보낸 편지, ‘왜 민주주의인가?’
[진단과 대응] Stanley Fish, 민주주의는 당신의 ‘생각’에 달려있다
 
안일규   기사입력  2008/01/18 [10:53]
‘문제는 민주주의야’…흘러간 옛 노래라고?

요즘 기자가 외치는 ‘문제는 민주주의야!’라는 목소리에 두 가지의 ‘반기’가 있다. 하나는, ‘문제는 경제야!’이며 다른 하나는 ‘문제는 투쟁이야!’라고 말한다. 시사IN의 표현대로 많은 사람들에게 기자는 ‘흘러간 옛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의 민주주의는 아직 멀고도 험난하다. 한국민주주의와 정당정치의 원로 최장집 교수는 ‘바보야, 문제는 민주주의야!’고 한다. 비단 우리만의 일은 아니다. 한국민주주의의 모태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의 자유민주주의 또한 ‘도마’위에 올라있다.

이 글에서 소개하는 Stanley Fish 교수의 ‘Why Democracy?’는 미국 전역에서 미국의 민주주의에 대해 논쟁을 했던 대표적인 글이다. 우리의 민주주의 모델이라 할 수 있는 미국의 민주주의는 본토에서 논쟁되고 있다. 그들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 최 교수의 ‘바보야! 문제는 민주주의야’는 ‘흘러간 옛 노래’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민주주의를 생각해보라

민주주의에 대해 Stanley Fish 교수의 뉴욕타임스 칼럼 ‘Why Democracy?’의 내용을 전하기 전에 민주주의에 대해 생각해보자는 의도로 질문을 몇 개 던진다. 질문은 한 지인이 기자에게 ‘Why Democracy?’를 보낸 메일 내용을 기초로 했음을 밝힌다.

1. 과연 민주주의는 좋은가?
2. 민주주의가 국민의 의사를 반영하는가?
3. 미국·한국에서 민주주의는 권력자가 막대한 부를 독점하는 ‘도둑정치’/조폭 선동정치와 무엇이 다른가?
4. 민주주의 대신 다른 정치제도와 비교해봤는가?
5. 토크빌은 미국의 민주주의를 만들고도 왜 왕당파였을까?
6. 소크라테스는 왜 민주주의를 싫어했을까?
7. 지금 미국의 민주주의는 최악의 위기다.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를 그대로 수용한 한국의 민주주의는?
8. 사람들의 선거에 대한 관심이 떨어지고 있다. 선거가 ‘민주주의의 꽃’인데 그럼 민주주의가 위기임을 말하는 건가?

아래부터 Stanley Fish 교수의 ‘Why Democracy?’ 전문이다. (원문에서 일부 수정했으며 문단별 제목은 기자가 붙였다)

‘왜 민주주의여야 하나’는 여러분의 몫

몇 주 전 BBC에서 민주주의에 관해 10개의 질문을 했다. 많은 사람 중 나는 "왜 민주주의여야 하나?"란 질문을 받은 유일한 사람이었다. 난 수많은 인터뷰 대상자 중 하나였는데 연속 프로그램의 타이틀은 "Why Democracy?"였다. 오늘(10월 7일)시작하여 - 10월 8일 - 제작자가 말하길 "세상에서 가장 큰 멀티미디어 이벤트가 될 것"이라 한다. 텔레비전, 라디오, 온라인으로 전파되어 200개 이상의 국가와 300만 명의 청중들이 예상된다고 한다. 이 의도는 토론을 자극하는 것과 "논란"에 초점이 맞춰져있다. 이를 위한 방법은 대규모 온라인 토론으로 '자극'시키는 것이다. (기자의 기획연재 ‘왜 민주주의인가’도 토론을 자극하는 것과 ‘논란’에 초점이 맞춰져있다. 독자 여러분의 논쟁을 기대한다)

나는 질문과 함께 내가 주고자하는 답으로 내 일이 끝났고, 나머지는 독자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나에게 주어진 부분의 몇 문제를 답과 함께 자세히 말했으며 초대된 몇 독자들에 의해 그들 자기 자신의 답이나 나의 논리에 대한 비판을 들었다.

민주주의는 당신의 ‘생각’에 달려있어

"무엇이 민주주의를 가장 위협하는가?"와 "테러리즘(공포)이 민주주의를 파괴할 수 있는가?"란 두 질문은 서로 연관성이 있다. 답은 '당신이 민주주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렸다. 나는 "고상한 이념" 같은 낭만적인 정의를 싫어하는 대신 좀 구체적인 것이면 좋겠다. : 민주주의라는 것은 이미 주어진 정치적 및 이념적 목적에 매인 것이 아니라 어떤 목적이든 그 목적이 자유시민의 다수가 투표에 의해서 선택되어야 한다는 정부의 형태이다.

이는 민주주의가 이론상으로는 적어도 유일하게 정부의 형태를 취할 수 있음을 의미하며 고유한 주권양도와 균형에 심사숙고한다. 민주주의 선거는 승리자에게 민주적으로 보장을 하지 않는 경향이 있으며, 입법상의 과정에 대한 지배권을 얻는 데 있어 필요한 법률 통과를 힘들게 하거나 혹은 민권(civil rights)으로 무력화 하는 것이 항상 가능하다 - 표현의 자유와 이동의 자유의 속성으로 - 민주주의를 신탁체제와 군주체제로부터 구분한다.

Justice Oliver Wendell Holmes는 허약한 정부의 형식 중 하나로 승인의 범위를 넘어서 정부 자체가 바꿔야 하는 것으로 기록했는데 만약 시민이 자포자기하며 살길(go to hell in a basket, 경제 등이 갑자기 악화) 원한다면, 결국 그가 후회하는 결과를 놓게 될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때 스스로 민주주의에 대한 최대의 위협이 될 것이다.

공포는 민주주의에 어떤 영향을 미치나

테러리즘(공포)은 외부로부터의 필적할 위협을 제공한다. 그 위험은 그 테러범이 힘과 같은 것으로 민주주의를 쳐부수는 테러범에 저항하여 민주주의는 절차상의 보호 없이 지내게 된다(적법한 이유 없이, 검열과 은밀한 감시에 반대하여) 이것이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를 말한다. (다시 말해, 일부는 이미 이러한 일들이 오늘날에 일어나고 있다고 말한다) 만약 테러범들이 민주주의 안에까지 술책을 쓴다면 고용 전술로 그들을 구별할 수 없는, 그것은 어쩌면 무엇일지라도 싸움터에서 나오는 결과(결론)를 논해야 될지도 모른다.

당신은 정부에게 무엇을 원하나

"독재자가 언제나 좋은가?"와 "민주주의가 모두를 위한 것인가?" 두 질문 또한 연관되어있다. 이 질문은 독재자인지 어떤지는 당신은 정부에게 무엇을 공급받기 원하는 것인지를 묻는 이전의 질문에서 좋은 답이 되었다. 만일 당신이 개인적 자유에 관심이 더 많고 개인의 행동을 감시하는 경찰사회를 원하지 않는다면, 강력하고, 항구적이고, 사생활을 침범하는 권력은 별 매력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독재자가 좋은가 나쁜가 하는 질문은 정부가 당신에게 무엇을 해주는가하는 문제가 전제조건이 되어야 한다. 홉스의 말대로, 만약 안정과 안보가 당신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면, 이웃과 적으로 보호해줄 수 있는 강한 절대 권력을 옹호할지도 모른다.

민주주의는 그저 여러 선택 중 하나?

이와 같은 추론을 적용한 질문이 '민주주의가 모든 사람에게 다 좋은가'다. 그것은 민주주의가, 역사가 발전시킨 정부의 형태인가-아닌가 아니면 민주주의란 그저 여러 선택 중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하는가에 달렸다. (Francis Fukuyama의 논제-"역사의 끝") 만약 당신의 이전 견해, 당신이 당신의 적들이 드러낸 민주적인 생각에 좀 더 믿는다면, 좀 더 매력적인 것을 그들은 찾아낼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목적론으로 의심한다면, 당신은 민주주의의 전파 가능성에 회의적이 될 것이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남을 건지 아니면 떠날 건지 모른다, 귀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에 의존할 것이다.

주어진 민주주의에 대한 특권의 약간의 가치로 개인의 이동성, 개인의 기업정신, 관용, 세계 시민주의와 같은 가치를 준다는 전제하에서 다른 것(공동체, 이념적 동조, 문화의 안정성)은 뒤로 미루더라도 민주주의에 관한 매력은 어느 특정사회가 포용하는 가치에 따라서 다르다. 한 사례로 강한 종교에 근거한 사회는 민주주의가 유익한지는 모르나, 그들은 민주주의를 위해 싸워죽는 일은 없다.

신은 권력자처럼 복종을 요구하나

또 다른 질문으로 "신은 민주적인가요?"라는 게 있다. 이건 쉬운 문제다. 신, Hobbes의 권력자처럼 신은 복종을 요구한다. 신을 숭배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개인적 욕구를 신에게 종속시켜야 한다. (아브라함/이삭 이야기는 하나의 공식이다)그의 법률은 민주주의에 대한 반증이다. 반면, 월터 위트만처럼 신은 분리된 존재가 아니고 우리의 마음속에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민주주의는 정부의 하나님이 선호하는 형태라고 결론짓는다.

나에게 온 질문 중 범주를 벗어난 질문이 하나 있었는데 그 질문은 "민주주의가 풍토를 바꿀 수 있습니까?"였다. 만일 바꿀 수 있다면, 이는 기술의 발전과 정부의 지침과 규제에 대응해서 개인이나 기업의 태도를 고치면 될 것으로 본다. 어떠한 정치체제도 일에 딱 맞는다든가 정의상 이행하는데 있어서 금지되는 일은 없다. 정치와 기술은 가변성이 있는 독자적인 영역이다.

남자가 더 민주적?

또 다른 질문은 덧에 걸리는 문제 같은데 "여자가 남자보다 더 민주적인가요?"란 질문이다. 이는 "남자가 여자보다 더 단호한가?"와 같다고 보면 된다. 서구진영(반쪽세계)에서는 곤욕스러운 대답이다. 이 생각의 본질은 옛날에는 성별로 인한 성격과 기질 차이로 보았지만 요즘에는 세대에 의한 성격과 기질 차이가 새로운 평가다. 최근에는 여성은 인과관계, 공감과 대화에 더 치중하고 남자는 혼자 서기(자립)를 선호하고 독자적인 경계를 설정하려고 한다. 그렇다면, 남자가 여자보다 더 민주적이 아니겠는가. 이유는 적어도 미국 민주주의에 있어서 민주주의라는 것은 사회공동체보다는 개인의 권리에 더 무게를 두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이중성과 문제 자체에 회의적이다.

자본? 종교? 우발상황!

나는 너무 막연하면서 야심적인 질문 하나를 찾았다. "누구 혹은 무엇이 세계의 규칙인가?" 자본? 미국의 소비문화? 종교적 열정? 나의 답은 "뜻하지 않게 생기는 우발상황"이 될 것 같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혹은 어떤 힘(권력)이 예측불허의 사건으로 인해 해체될지 전혀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다른 한 문제를 지나쳐왔는데 왜냐면 내가 그에 답하기엔 나이가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무엇이혁명의 시작인가?" 내 나이에 그런 일이 없을 것이다. 사태가 악화되면, 차라리 나는 숨어버리겠다.

유권자가 원하는 대통령은 없다?

마지막으로 나에게 던져진 질문은 "세계 대통령으로 어떤 사람이 뽑혀야 하나?"였다.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을 뽑을 것인지 알고 있다. 누군가는 현명하고, 학식 있고, 강하며, 용감하고, 인정 많으며, 권위가 있고, 부패하지 않으며, 영감을 주며, 유능한 그리고 잘 생긴 사람. 살아있거나 죽은 사람 중에도 그런 사람은 없다. 그래서 나는 Gregory Peck이 주인공인 소설영화 “Atticus Finch”(Harper Lee의 소설 To Kill a Mocking Bird)라면 만족한다. Morgan Freeman의 역도 괜찮다) / 기획연재 ‘민주주의’ 번역팀

* Stanley Fish 교수는?  
 
▲Stanley Fish 플로리다 국제대학 법학 교수     ©New York Times
- Davidson-Kahn의 저명한 대학 교수이자 마이애미 소재의 플로리다 국제대학의 법학 교수이다. 시카고 소재 일리노이 대학의 교양과목과 과학의 명예학장이며 켈리포니아 버클리대, 존스 홉킨스, 듀크 대에서 강의했었다. 저술활동으로 10권의 저서를 냈다.

* Stanley Fish 교수의 ‘Why Democracy?’는 2007년 10월 7일자 New York Times 칼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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