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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심판은 노무현 아닌 '盧 정권' 그 자체
[각골명심의 길거리칼럼] 먹물은 가고 진보는 '반신자유주의'로 뭉치자
 
각골명심   기사입력  2007/12/28 [17:56]
2007 대선이 막을 내린지 일주일 가량이 흘렀다. 진보진영, 개혁세력(과연 적합한 표현인지는 자못 의문이지만) 할 것없이 모두 총체적 실패로 귀결지어진 이번 대선의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들고 각 세력들의 물밑 움직임이 분주하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 정치세력들이 지금 국민들과 시대가 요구하는 대로 뼈를 깍는 환골탈태를 거쳐 이땅의 유의미한 견제세력으로 과연 살아남을 수 있느냐 일것이다.
 
우선 오랬동안 고질적 정파주의에 매몰되어 있던 민노당이 이번에야말로 그 견고한 틀을 깨고 진정 민중과 함께하는 진보정당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전진과 자주파의 '총선 불출마선언'과 '지도부 총사퇴'는 이런 면에서 일단 긍정적으로 보인다. 기득권의 포기 없는 환골탈태란 한낱 말장난에 지나지 않음을 우리는 그동안 한국정치사를 통해 무수히 보아왔기 때문이다.
 
먹물들, 고만좀 해!
 
하지만 지금 통합신당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참으로 가소롭기만 하다. 나는 비록 민노당의 정파주의가 다분히 문제가 많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한국정치의 주류라는 통합신당과 한나라당의 계파정치만큼 큰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들의 계파주의는 지난 구시대의 3김정치에 대한 답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차이점이 있다면, 과거 3김정치가 일인자를 중심으로 모든 권력과 세를 독식하는 체제였다면 지금의 계파정치는 고만고만한 몇개의 세가 분할되어 그 세의 크기에 따라 공천권과 권력을 나눠먹고 있다는 점이 차이라면 차이일 것이다.
 
나는 특히 통합신당이 열린당 이래로 서로 이질적인 몇개의 계파가 어정쩡한 동거생활을 하며 정치 본연의 임무 보다는 서로간의 보이지 않는 견제와 알력으로 자신들의 정치적 지향점과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는 변변한 개혁법안 하나 제대로 만들어 내지 못했다는 데에 이들의 본질적 한계와 근본적 문제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차라리 백화점은 한곳에서 이것저것 살 수 있는 편리함이라도 있지만 정치에서 백화점식 정당이란 이들의 구호대로 모두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아무도 대변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바로 잡탕정당의 극명한 한계인 것이다.
 
그러니 지금 누구의 잘못이 더 큰지, 누구를 추대하여 얼굴마담으로 내세울 것인지, 또 누가 불출마 할 것인지 등등을 가릴 계제가 전혀 아닐뿐더러 각 개인과 계파에 맞는 노선과 이념으로의 분화만이 환골탈태의 유일한 길인 것이다. 착각하지 마라. 국민이 심판한 것은 단지 노무현 대통령 하나가 아니라 바로 '노무현 정권' 그 자체다.
 
그러므로 단지 정권에 참여했던 각 계파별 일부 주류들에 한정한 심판이 아닌 엄연히 지난 5년간 여당으로 자리매김 했던 통합신당세력 전체에 내리는 사망선고라는 점을 깊이 자각해야만 할 것이다. 즉 그동안 단지 민주화 적자라는 도덕적 우월성만 내세워 입으로만 떠들고 실천이라고는 전혀 없는 공허한 언변과 화려한 말장난 속에 민중을 파탄지경으로 내몬 공언무시(空言無施), 곡학아세(曲學阿世)의 먹물정치들에 국민이 내린 엄중한 심판이란 말이다.
 
제발 더이상 진실을 호도하지 말기로 하자! 벌써 부터 김대중 전 대통령 등으로 부터 '한나라당 견제할 표달라는 호소를 해야한다.'는 소리가 들여온다. 참으로 염치없는 짓이다. 통합신당 사라지면 한국정치 사망이라도 한단 말인가.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파병연장반대'를 외치더니 선거 끝나니 슬며시 '찬성'으로 선회하는 모습이 바로 오늘날 통합신당, 당신들의 '일그러진 두얼굴', 거울에 비친 명징한 정체성이다!
 
진보, 다시 시작하자!
 
어떤이는 이번 대선의 결과를 놓고 '진보의 몰락'이라고 하지만 나는 이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말이 성립하려면 이번 대선이 최소한 정책이나 패러다임 차원에서 진보의 가치와 보수의 가치를 놓고 한판 승부를 겨룬 그런 싸움이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실 이번 대선은 BBK로 대표되는 부패스캔들을 놓고 구악과 신악이 격돌한 '먹고사니즘'의 싸움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나는 전부터 이 '먹고사니즘'이 정치의 본질이자 최고의 임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해 왔고 또 그렇게 믿는다. 그렇다면 이 '먹고사니즘'에 있어 진보적 가치란 무엇일까. 그것은 굳이 거창하고 현학적으로 표현할 필요없이 '모두가 고르게' 그리고 '함께'라는 공동체적 가치를 말함이며 이것으로서 기존 양적 성장론에만 치우쳐 온 보수적 가치와 뚜렷이 변별될뿐더러 더욱 분명한 대척점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바라볼 때 통합신당세력은 바로 여기에 실패한 세력이며 한나라당세력 또한 그래서 우리가 섣불리 희망을 가질 수 없는 까닭이다. 왜냐하면 그동안 한국정치의 주류로 자리메김 되어온 이들의 '먹고사니즘'에 대한 사상이란 다름아닌 '신자유주의 체제'를 의미하는 것이며, 고로 이명박 정부의 탄생이 의미하는 바는 이제 한국사회가 개발독재와 융합된 보다 급진적 신자유주의로 나아가겠다는 도발적 신호탄에 다름 아니다.
 
혹자는 지금 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의 영향을 받지 않는 나라가 있는가라며 '반신자유주의'가 시대착오적이라고까지 말한다. 참으로 우물안 개구리의 근시안적 눈이자 현실 호도의 시각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시각은 미국을 세계의 중심에 놓고, 미국이 곧 세계의 전부라고 보기때문일 것이다. 나는 모든 신자유주의가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 사회가 충분히 통제할 수 있는 신자유주의라면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가능한가.
 
이론적으로 영국에서 태동하여 미국에서 발아한 신자유주의는 남미와 구소련을 수마처럼 휩쓸고 지나간뒤 일본을 거쳐 마침내 한국과 아시아 지역에 상륙하기에 이른다. 김영삼 정부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김대중 정부에서 보다 체계화된 이 이론은 노무현 정부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대세가 되었다.
 
'글로벌리즘'이라는 거창한 모토를 가진 이 사상은 언제나 '선진화'와 '개방'이라는 달콤한 유혹을 가지고 정치사회적으로 보다 미숙한 후진국들에서 유독 기승을 부린다. 그것은 이 사상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 문제, 즉 경쟁과 효율을 빙자한 '적자생존'의 난폭성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인간'은 철저히 배제될 수밖에 없으며 공동체적 가치는 적자생존의 법칙앞에 한낱 무용지물이 되고마는 것이다.
 
정부는 자본이 요구하는 '시장의 자율'을 보장할 수 있는 한도에서의 최소화로서만 그 존재 의미를 가지며 정치는 독식의 논리를 보조하는 안전장치로 전락하고 복지와 사회안전망은 단연코 시장의 자율을 해치는 최대의 적으로 규정된다. 또한 노동은 '생산성'과 '이윤'이 극대화 하는 꼭지점에 도달하기 위한 한낮 도구에 지나지 않으며 그 자체로는 아무런 고유의 가치를 부여받지 못한다.
 
즉 노동은 이윤을 위한 수단으로 대폭 '평가절하' 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시장의 자율'이 의미하는 바는 결코 공정한 '시장의 룰'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가진자', 즉 '자본의 율법'을 말하며 다수의 빈자들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무조건적 '복종'과 동의어로서 사용된다. 해서 극단의 양극화는 필연적 결과물이며 이기주의는 신자유주의의 유일한 적자로 인정된다.
 
이 대목에서 신자유주의자들에게 묻고 싶다. 도대체 미국을 제외한 나라에서 신자유주의가 성공한 사례가 있는가.. 국내의 재정적자부담을 감당하지 못해 전략적으로 대외로 눈을 돌려 '전쟁불사'와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온갖 '경제적 수탈'을 일삼고 있는 미국적 성공이 과연 진정한 성공의 의미일 수 있겠는가.. 5천만이 넘는 국민이 공공성이 파괴된 냉혹한 신자유주의 체제하에서 변변한 의료서비스 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고 소외되어 있는 오늘날 미국적 현실이 과연 우리의 미래가 되어도 좋은가..
 
혹자는 '반신자유주의'가 그저 대안없는 발목잡기라고 비하한다. 나는 도대체 그 '대안'이란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되묻고 싶다. 담장이 무너졌으면 쌓는 것이 대안이고 가족이 해체됐으면 다시 가족을 꾸리는 것이 대안이며 공동체가 무너졌으면 복구하는 것이 바로 대안이다. 가치가 무너졌으면 세우는게 대안이고 인간과 노동이 파괴됐으면 자본에 저항해 이를 바로잡는 것이 곧 대안이다. 헌데 대세론을 앞세워 엄연히 벌어지고 있는 현실을 호도하고 강자의 논리앞에 지레 저항을 포기하고 복종하는 정신이야 말로 바로 대안부재의 구태적 보수성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말이다.
 
우리는 지금도 -그것이 어느 국가든- 군사적 패권주의에 대해 우려와 비난을 멈추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난 세기들을 통하여 인류를 파멸로 몰고간 무서운 재앙이라는 소중한 경험의 산물이기에 그렇다. 그러나 정작 지금 우리앞에 벌어지고 있는 '자본의 패권주의'에 대해서는 오히려 저항보다는 무심한 침묵과 비굴한 동조를 보낸다. 나는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사회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문제이며 그렇기에 이땅의 진보가 반드시 새롭게 무장해야할 가장 큰 이유라고 믿는다.
 
이제 이땅의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가장 큰 기준과 시대정신은 마땅히 우리 안에 벌어지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모순에 저항하는 '반신자유주의'가 되어야 할 것이다. 고로 다가올 총선에서 '한미FTA 문제'는 향후 한국 진보정치를 가늠해 볼 수 있는 하나의 중요한 시험대로서 모두에게 인식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진보는 이제 책상머리 먹물들의 합창을 여기서 그만 그치고 어느새 우리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하고 있는 모든 신자유주의적 폐해에 대하여 몸소 민중속으로 뛰어들어 고통을 함께 나누고 이해를 구하며 저항하는 실천적 행동으로 나설때다. 나와 내 후손이 살 세상은 저절로 바뀌는게 아니라 오직 나의 행동과 실천으로서 바.꿔.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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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7/12/28 [17:56]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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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애편지 2007/12/28 [21:35] 수정 | 삭제
  • 엄밀하게 따지면 미국도 신자유주의로 피해를 많이 봤습니다. 복지를 악화시키고 재정적자를 늘려 그 부담을 일반 서민에게 부담시키고 금융활성화를 통해 주기적으로 금융공황을 일으켰습니다. 만약 플라자 합의때 일본의 역할이 없었으면 90년대 호황도 없다는게 제 생각입니다.
    늘 건필 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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