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20년, 여러분은 20년 전, 전국을 물들일 정도로 염원했던 ‘민주화’를 이뤘다. 그 방법론으로 따진다면 ‘운동에 의한 민주화’이자 ‘엘리트에 의한 타협’이었다. 극과 극인 방법론이 만나 이뤄진 ‘민주화’를 맞이한 20년, 우리의 민주주의는 20년 전 민주화를 열망하던 그 때 말했던 한국의 민주주의였나. 서민과 노동자, 중산층이 잘 살 것이라는 민주주의, 독재정권의 모습을 되풀이하지 않는다고 했던 민주주의. 그렇게 말하던 운동권 주류 사람들이 제도 정치권으로 입성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말해 온 민주주의, 그들이 말한 민주주의가 이뤄질 것이라 염원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흘러 어느덧 민주화 20년을 맞은 2007년. 그 20년마저 며칠 남지 않았다. 한 해가 넘어가려하니 우리의 민주주의는 민주화란 이름으로 21년을 맞게 된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것인지 민주화 20년이라며 한 두 원로들이 말을 꺼내는 수준을 넘어선 대화가 없다. 우리가 그렇게 열망하고 갈망하던 민주주의는 국민들에게서 더 이상 이야기 소재로 올라오지 않는다. 밥 먹여준다더니... 민주화 20년, 민주화를 이루고 20년이 지난 지금. 그들이 말한 민주화하면 이뤄진다는 희망은 어디에도 없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노동자들을 인정하지 않는다. 결국 노동자들은 예전처럼 파업과 시위를 할 수 밖에 없는 극한의 상황으로 거리로 내몰리는 것이다. ‘노동 없는 민주주의’란 민주주의의 핵심이 빠진 우리의 일그러진 민주주의. 서민과 중산층을 먹여 살릴 거라던 ‘밥 먹여주는 민주주의’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그 자리엔 신자유주의란 이름이, 시장주의란 이름이 버티고 있다. 이 나라의 민주주의는 신자유주의와 시장주의를 외치는 세력에 의해 재벌과 특권층을 위한 무기력한 민주주의가 되어버렸다. 그 뿐만이 아니다. 약자와 소수자를 지켜준다던 민주주의는 국가보안법이란 이름으로, 약자와 소수자를 차별하는 여러 법들의 이름으로 그들을 낙인찍고 낙오자로 만들었다. 그것이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한국이란 나라에 있는 민주주의의 현실이다. 절망과 냉소의 민주주의 상당수의 서민과 노동자, 중산층은 우리의 민주주의에 ‘절망’하고 ‘냉소’에 젖어들어 있다. 민주주의를 외쳐본들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밥 먹여준다던 민주주의를 염원했지만 오히려 밥 먹기는 힘들어졌다. 민주화를 이끌었던 지금의 제도권 정치인들은 국민들에게 ‘불신감’ 1순위가 되었다. 민주세력임을 자임하는 사람들이 하는 정치는 오히려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 그리고 그들 중 일부는 엘리트 사이의 협약으로 ‘엘리트 속 합의로 귀결된 민주주의’를 한 장본인들도 있다. 물론 지금의 절차적 민주화도 소중한 자산이다. 그러나 제도권 사이 엘리트 간의 합의로 그친 미완의 우리 민주주의였다는 것이다. 민주개혁세력이라고 하는 이들이 정치권에서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무엇을 했는지 생각해보면 생각나는 건 하나도 없다. 오히려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한미FTA에 동의하고 그에 무시되었던 우리의 민주주의에 대해 언급한 적도 없다. 그리고 권위주의 세력의 유물인 한나라당과 같이 보수대연합을 하고 반민주 대 민주의 대결이 깨진지 오래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반민주 대 민주의 구도로 가져가려 한다. 그러나 오히려 민주세력이란 사람들이 더 반민주적이었다는 건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사람들에게는 공공연한 사실이다. 우리가 희망한 우정이 있는 민주주의는 우리가 20년 전 희망찬 내일로 여겼던 우정이 있는 민주주의는 지금 우리에게 신자유주의란 이름으로 ‘부에 대한 욕망’이 되었다.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신자유주의에 종속되고 시장주의에 덧씌워지고 한 편으론 국가보안법에 눌려있다. 지금의 국민들이 외친 경제는 ‘부에 대한 욕망’과 ‘더 많은 돈벌이’ ‘더 많은 부’에 의한 것이다. 그건 국민들이 말하는 진정한 민생이 아니다. 지금 20년 전 우리가 희망한 우정이 있는 민주주의가 아닌 신자유주의 속 이기주의적 물질 경쟁주의에 의한 무한 경쟁주의로 가고 있는 것이다. 함께 잘사는 우리의 민주주의를 위하여 기자는 신자유주의에 무조건 반대하지 않는다. 그들의 말이 무조건 틀린 말은 아니다. 신자유주의가 내포하는 의미들을 보면 우리의 소중한 민주주의를 약화시키기 위한 공격에 치중되어있다. ‘밥 먹여주는’ 우리의 민주주의는 우리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란 것이 공공의 적이 되어 서민과 중산층, 노동자 지킴이 민주주의를 무력화시킨 것이다. 우리의 힘든 투쟁으로 얻은 민주주의가 얼마나 허약했기에 신자유주의란 외래종이 우정이 있는 민주주의를 공격한 것인가. 반신자유주의가 최선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 우리의 민주주의가 튼튼하지 못했기에, 허약했기에 우리의 민주주의는 신자유주의의 공격에 쉽게 무너졌다.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것은 신자유주의가 공격하는 요소를 키우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이며 기자가 우리의 서민과 중산층, 노동자 그리고 약자와 소수자를 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밥 먹여주는 민주주의’, ‘우정이 있는 민주주의’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자의 생각인 “대안이 있으면 대안과 같이 수용하겠다”와 달리 반신자유주의 노선을 구축하겠다면 기자의 생각과 같이 신자유주의가 집중 공격하는 ‘민주주의’를 대항마로 키울 필요가 있다. 최장집 교수가 말하듯 민주주의가 제대로 실현된다면 신자유주의와 같은 사익이 극대화되는 체제에서 공적 가치가 강조되는 시대적 환경으로 전환될 수밖에 없다. 우리의 민주주의가 제대로 세워진다면 반신자유주의를 하지 않더라도 민주주의란 이름으로 통제된 신자유주의, 시장주의가 될 것이다. 서민과 중산층, 노동자를 죽음으로 내모는 신자유주의의 독성은 민주주의란 이름으로 통제가능하다. 민주노동당 좌파 계열(사회주의 성향)은 이른바 최장집 교수와 같은 주장을 유럽의 ‘제 3의 길’이라며 비판한다. 기자도 유럽의 ‘제 3의 길’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 길로 갈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하게도 최장집 교수와 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신자유주의를 무분별하게 수용하고 유럽의 ‘제 3의 길’로 가자는 것이 아니다. 자질구레한 유시민의 ‘사회투자국가’적 논리가 아니다. 우리의 수호신 ‘민주주의’란 이름으로 신자유주의, 시장주의를 철저히 통제하고 민주적인 시장경제, 공정하고 따뜻한 시장경제로 가자는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가장 진보적이고 정확한 정답이다. 여러분의 민주주의, 필요합니다! 민주화 20년, 지금 ‘민주주의’는 여러분의 민주주의를 필요로 한다. 신자유주의란 이념의 인식에서 인간의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가치를 핵심으로 하는 것이 이념과 제도로 민주주의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려 한다. 우리의 밥을 먹여주겠다고, 우리의 우정을 지켜주겠다고 공약한 민주주의를 획득하기 위해 권위주의 독재세력과 싸워 힘겹게 얻어 낸 우리의 민주주의를, 우리가 ‘민주주의 지킴이’가 되어 지키고 지키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우리의, 만인의, 우리를 위한, 만인을 위한 민주주의’를 만들어야 한다. ‘우리의, 만인의, 우리를 위한, 만인을 위한 민주주의’는 최장집 교수가 제시했듯 민주주의의 절차적, 제도적 내용이 매우 협소한 범위에서 이뤄지고 국가 구조가 권위주의 정부와 달라진 것이 없으며 일반 대중의 정치적 역할이 약해지고 사회적, 경제적 민주주의가 이뤄지지 못한 것을 이루는 것이다. 민중적 내용을 갖지 못한 민주주의, 우리 민주주의의 현실이다. 이것은 민주주의라 할 수 없다. 민주사회란 이 나라에서 민중적 내용을 갖지 못한 민주주의는 민중의 눈과 귀, 입을 틀어막았다. 여러분의 민주주의, 여러분만이 만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민주주의를 만드는 것은 우리의 민주주의를 소중히 아끼고 우리의 민주주의를 만들고 발전시키기 위한 조그마한 노력, 민주주의를 우리의 생활 속에 녹이는 것부터 시작된다. 우리의 민주주의 모델이라 할 수 있는 미국식 민주주의에 대해 미국인들은 최근 자신들의 민주주의에 대해 수많은 논쟁을 한다. 우리는? 민주화 20년이란 의미있는 올해가 다가도록 민주주의에 대한 논쟁은 정치학자란 사람들의 말싸움이었다. 자신들의 민주주의에 대해 힘든 투쟁을 거쳐 얻은 20년의 민주화에서 중간 점검조차 하지 않는 당신은 민주시민의 자격조차 없다. 우리의 민주주의가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바꿔야하는가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하지 않는다면 지금의 민주세력이란 사람들이 거짓된 민주세력으로 변질되고 최대의 위기를 맞은 지금을 뛰어넘어 또다시 과거의 권위주의가 도래할 수 있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우리가 지키고 가꿔나가야 할 가문의 유산이다. 우리의 민주주의에 스스로 ‘회의감’에 빠지고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느냐’를 연발하는 게 아니라 무엇이 잘못되었기에 우리가 기대했던 민주주의가 아닌 우리에게 화살을 겨눈 민주주의가 되었는지를 점검하고 어떻게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민주주의를 만들지, 서민과 중산층, 노동자, 약자와 소수자를 위한 민주주의를 만들 것인지 이야기할 때이다. '왜 민주주의인가(Why Democracy?)' 기자가 던지고 싶은 말, ‘왜 민주주의인가?’이다. 과연 누가 기자의 질문에 제대로 답할 수 있는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태반이다. 민주주의는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길 정도로 가벼운 소재가 아니다. 정말 ‘당연한 것’이라면 우리의 민주주의 모델이라는 미국에서 ‘자신들의 민주주의’에 대해 논쟁을 벌이는 건 매우 불필요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민주주의를 이야기하는데 있어 두 가지의 시선으로 접근하고자 한다. 첫째는, 미국 유명 정치학자 Stanley Fish의 뉴욕 타임스 칼럼(10월 7일) 'Why Democracy?'의 칼럼 내용과 그에 댓글을 달은 정치학자, 변호사 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달은 미국의 민주주의에 대한 진단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직접적인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최장집 교수가 말하는 한국의 민주주의를 통해 얼마나 재벌과 특권층에 충실한 민주주의였는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얼마나 우리의 민주주의가 허약한지 보여줄 것입니다. 몇 인터넷언론에 동시 연재를 타진했던 기자의 ‘왜 민주주의인가?’는 <대자보>에서만 연재될 정도로 언론들이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내용이지만 무엇보다도 우리의 민주주의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덧붙이는 말] 독자 여러분들의 우리의 민주주의에 대해 열띤 논쟁을 벌여주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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