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의선은 철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경제입니다." 남한에서 출발한 철도가 북한과 러시아를 통과해 유럽과 연결되는 청사진을 홍보하는 한 공익광고의 문구이다. 한때 온 국민이 우리의 소원이라고 노래했던 통일의 가치마저 '경제'의 눈치를 봐야 하는 시대를 우리는 지금 살고 있다. 경제의 위력 앞에 무장해제 당한 것은 통일의 대의만은 아니다. 2007년 대선 역시 후보들에 대한 도덕성 시비가 불거졌지만 정작 경제라는 두 글자 앞에서는 위력을 잃고 말았다. 그러나 이번 대선이 정말 경제 문제를 진지하게 따졌던 선거였을까? 후보들이 산업 현장을 방문해 노동자들의 어깨를 다독이고, 국밥집 할머니의 손을 잡아주며, 정책보다는 구호에 가까운 공약을 내거는 것 이상으로 경제 문제가 진중하게 다루어졌을까? 하지만 그 판단은 미루기로 하자. 적어도 먹고사는 문제가 이번 선거의 주요 관심사였던 것은 틀림없었으니 말이다. 참여정부에 대한 세간의 인심을 반영하며 먹고사는 문제는 다른 명분이나 구호를 압도해 버렸다. 범여권의 후보가 유세 기간 중 국민들의 상처가 이렇게 깊을 줄은 몰랐다고 토로한 것처럼... 아무튼 이러한 민심은 새로 출범하는 정부가 풀어야 할 짐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소위 '개혁세력'으로 불리던 정치 집단에는 근본적인 성찰을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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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6월항쟁 이후 20여 년. 이젠 과거 민주화 개혁세력에 대한 냉엄한 평가가 필요하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자료사진 | 개혁 세력은 과거 독재에 항거했던 민주 세력이라는 이력만으로도 도덕적 정당성을 지닌다고 자임해 왔다. 국민을 '대중'이라 부르며 이들을 이끌어야 한다는 엘리트 의식으로 충만해 있었다. 상대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한 집단이라는 너무나 당연한 전제 앞에서 내부 비판은 종종 금기가 되었다. 민심 이반의 원인을 스스로에게서 찾기보다는 상대방에서 찾는 일도 잦았다. 새로운 비전 대신 상대방의 과거에 대한 비방에서 편하게 정치적인 동력을 찾는 일도 많았다. 권력의 달콤한 과실을 나누는 것도 자신의 지난 이력에 대한 당연한 보상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이제는 민주주의를 싸워서 쟁취한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것으로 알고 있는 세대가 늘고 있다. 그들은 6월항쟁과 같은 민주화 투쟁을 길거리가 아니라 역사책에서 만나는 세대이다. 좁은 취직문을 걱정해야 하는 세대에게 지금의 정치 엘리트 역시 기득권 세력이다. 이들 엘리트들은 내실 있는 정책을 계발하기보다는 종종 정치공학이나 정치투쟁에 골몰하는 경우가 많았다. 다수의 386들은 사회 곳곳에서 이미 기득권을 행사하고 있다. 직업학교가 된 대학에선 스스로를 보수주의자로 자평하는 학생들이 오늘도 취직 시험 준비로 여념이 없다. 한국노총은 이번 대선에서 아예 한나라당 후보를 지지하기도 했다. 사람들의 생각도 더 다양해지고 복잡해졌다.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라는 물결도 개혁 세력이 취할 수 있는 운신의 폭을 좁히고 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묻고 있다. 참여정부가 한나라당과 무엇이 달랐느냐고. 그런 점에서 이번 대선은 개혁 세력의 정체성에 심각한 질문을 던진 선거이기도 하다. 그 질문의 초점은 과거의 정당성에 대한 궁금함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미래를 불안하게 생각하고 있다. * 글쓴이는 월간 <인물과 사상> 편집장입니다. * 본문은 월간 <인물과사상> 2008년 1월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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