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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연'식 '동원 민주주의'의 허무함
[조희연에 반론] 진짜 문제는 '누가', '어떻게' 할 것이냐다
 
편집부   기사입력  2007/10/19 [19:38]
아래는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가 월간 <인물과 사상> 11월 호에 기고한 글 '한국 민주주의의 병목지점과 그 돌파구'에 대한 반론 성격의 글이다. 아래 글은 '참여민주주의와 생활정치연대(http://www.cjycjy.org/ )' Anybody 게시판에 익명의 한 누리꾼이 대자보에 게재된 조희연 교수의 상기 글을 보고서 쓴 반론 성격의 글이다. 비록 익명의 글이지만 글의 내용과 수준이 반론으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차원에서 해당 글을 전재한다. 아울러 누리꾼들의 다양한 평가와 토론을 기대한다-편집자 주.

조희연의 고의적인 최장집 '오독'과 강준만의 '오버'

조희연을 무시하는 게 아니다. 무지 존경한다. 그의 분석틀은 나의 분석틀이다. 그런데 노무현 정부 이후, 그의 진단에는 동의하나 결론은 어이가 없는 현상이 빚어진다.

<대자보>에 게재된 조희연 교수의 장황한 글을 대충 읽었다. 강준만 교수에게 반론한 것이지만 '한나라당도 집권할 수 있어야 민주주의'라는 최장집 교수의 발언을 트집잡아 손호철 교수와 벌인 진보논쟁 당시의 글과 다르지 않다.(이하 존칭 생략)

최장집-조희연-손호철을 놓고 이야기하자면, 가장 핀트가 어긋나 있는 사람이 손호철이다.

손호철은 계보가 다르다. 굳이 말하자면 손호철의 분석틀은 일관성이 결여돼 있다. 그래서 널뛰기가 심하고 가끔 견강부회가 섞이고 그러다 보니 논쟁에 그가 끼면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튈 때가 왕왕 있다. 지난번 진보논쟁도 그런 경우였다.

그래서 그때 손호철은 전혀 중요한 게 아니었고, 중요한 것은 조희연의 고의에 가까운 최장집 오독이었다. 진짜 오독을 해서 엉뚱한 결론이 나온건지 아니면 엉뚱한 결론을 위해 고의로 오독한 건지 모르겠지만, 어찌됐든 그의 결론은 엉뚱했고 강준만은 그 엉뚱한 결론을 지적한 것이다.

조희연의 주장을 핵심만 간추리면 결국 이런 것이다.

1. 한국 사회는 '민주적 계급사회화' 했다.
2. 진보는 힘이 부치는 가운데 보수의 의도가 관철되지만 평등주의적 대중의 존재로 인해 그 흐름이 일관된 것은 아니다.
3. 이를 타개할 대안은 '대중의 분노를 동원하여 사회를 급진화'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수행할 '급진적 대중 주체'가 시민운동, 노동운동 같은 진보적 사회운동에서 '출현'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조희연은 최장집은 '운동에 의한 진보를 포기하고 정당에 올인하라'고 말한다며 그것은 오류라고 주장한다. 나는 이것을 조희연의 오독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최장집은 '운동을 포기하라'거나 '운동이 덜 중요하다'고 말한 적이 없다. 다만 '운동이 미치는 효과는 제한적'이라고 했을 뿐이며 위기의 기원은 '운동없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정당없는 민주주의'에 있다고 했을 따름이다.


우선 조희연의 1번과 2번 진단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이 지금 어디 있나. '사회적 역 관계'를 판단할 지식이 없어도 가슴이 뜨거운 사람이면 감각적으로 느껴지는 문제 아닌가. 문제는 해법이다.

조희연의 3번 대안에서 주목할 단어는 '출현'이다. 나는 이 '출현'이라는 단어를 통해 한국사회에 대한 조희연의 인식이 '민주주의의 제도적 실천'을 강조하는 최장집의 것과 다르다는 것을 비로소 인지했다.

'출현'과 '제도'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 바로 '동원'인데, 이것들은 국가에 대한 '시민사회'의 개념에서 나오는 용어들이다.

우리의 경우 유신과 5공이 그랬던 것처럼 파쇼체제 하에서 국가는 전체주의적으로 전 사회를 통제하고 지휘한다. 그러니 이런 독재체제에서 국가에 대해 자율성을 갖는 시민사회란 존재할 수 없다.

그 대신 존재하는 사회는 독재권력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자기를 '방어'하면서 제한적으로 숨이나마 쉬는 '방어적 시민사회'다. 우리의 경우로 설명하면 교회의 선교모임 정도가 이런 경우였을 것이다.

그러다가 이런저런 계기를 거치며, 특히 독재권력이 권력유지 차원에서 유화책을 쓰면서 제한적인 자율화 조치를 할 때, 권력에 저항의식을 갖는 시민사회가 '출현'하게 되는데 이런 시민사회를 '출현적 시민사회'라고 한다.

그리고 이들 '출현적 시민사회'가 힘을 모아서 사회 정의 실현을 외치며 독재권력의 폭압성을 폭로하여 대중의 분노를 '동원'하는 '동원적 시민사회'로 발전하면, 이제 민주항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항쟁의 결과 독재권력이 후퇴하여 민주화를 수용하면 이제 독재체제가 '개방'되는 민주화 이행이 시작되는데, 이와 함께 '동원적 시민사회'는 탈동원 과정을 거쳐 민주화된 제도 안으로 들어가게 되고, 국가에 자율성을 갖는 '제도적 시민사회'로 제도화된다.

'87년 체제'는 대중적 항쟁으로 때려부술 수 없다

자 이제 판단해 볼 문제다. 요즘 유행하는 '87 체제'는 대중적 항쟁으로 때려부순 유신과 5공체제 처럼 체제 바깥에서 때려부술 수 있는 그런 성질인가 아닌가?

내 얘기는 '87 체제'의 한계를 극복하지 말자는 얘기가 아니라, 제 아무리 문제가 많아도 민주화 이전인 유신이나 5공과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위의 '용어'들과 연결하면 제 아무리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가 '후루꾸 민주사회'라고 하더라도 어찌됐든 민주화 이행을 겪으면서 제도화된 사회다.

조희연은 지금 이 제도화된 사회가 보수화되었으니 이를 다시 급진화할 대중 주체가 '출현'하여 '출현적 시민사회'를 형성하고 대중의 분노를 동원하는 '동원적 시민사회'로 발전하여 '운동'으로 진보시키자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나의 판단은 조희연이 둘 중 하나의 주장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첫째 시계추를 되돌리자는 것이거나 아니면
둘째 '87 체제'가 체제 바깥에 '출현'한 급진적 대중주체가 체제 자체를 부정하고 '운동'을 통해 다시 제도화 과정을 거칠 수 있는 체제라거나...

아마도 조희연이 거꾸로 가자는 것은 아닐테니 후자의 인식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는 이해한다. 나의 판단이 틀린 것이 아니라면 바로 이 대목에서 인식이 다르다는 것이다.

어떤 계기로 인해서 한국 사회에 일종의 '반체제 운동'이 다시 활성화 될 수는 있다. 이를테면 '반신자유주의 운동' 같은 것 말이다. 문제는 그 중간과정이 아니라 결말이다.

어떤 형태의 운동이든 우리의 경험상 결국 누가 잡든 누군가 정권을 잡아서 결판을 내는 것으로 결말이 나는 것 아닌가? 지난 20년 동안 우리가 이걸 해본 거 아닌가. 반신자유주의 운동의 결과 신자유주의가 극복되려면 결국 반신자유주의 정치세력이 정권을 잡아서 신자유주의를 극복하는 정책을 펴야 한다는 소리다.

'정당없는 민주주의'의 허무함

이게 '결말'이 맞다면, 이제 현 상황에 대입해서 정리해보자. 문제를 해결할 정치세력이 지금 있나? 없다. 없다는 건 무슨 소린가? 제아무리 '출현'하고 '동원'해서 사회를 급진화해봐야 '결말'이 안난다는 얘기다.

상황이 이런데 '동원'이 되겠는가? 문제를 해결해 줄 세력이 안보이는데 대중이 목숨걸고 운동에 나서겠냐는 얘기다. 그래서 '출현'도 쉽지 않다. 운동권은 바본가? 결말이 안보이는데 '출현'하게...

그래서, 나의 얘기는 어떤 경로를 밟든 결국 다시 제도화되는 과정을 거쳐서 해결할 수밖에 없다면 '정당없는 민주주의'가 허무했듯이 '정당없는 반신자유주의' 또한 허무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이것은 운동 우선이냐 정당 우선이냐가 아니다. 내가 직접 들은 최장집의 얘기는 변증법적으로 포괄하라는 것이었다. 즉 운동과 정당이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함께 능동적으로 활성화되어야 한다는 얘기다. (누군가 민노당이 있지 않냐고 하신다면 그분께는 딱히 반론할 것은 없고 민노당을 수권세력으로 만드시기 바란다는 말씀만 드린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후루꾸' 민주주의라도, 이미 제도화 과정을 거친 이상 다시 '동원적 시민사회'로 회귀하기는 어렵다. 이상하게 제도화 됐지만 어찌됐든 제도화된 이 공간 안에서 해결해야 한다.

이때 현재의 제도화 수준을 '자본이 제한적으로 정치공간을 열어준 단계' 즉 자본에 대한 '출현적 시민사회'가 '출현'할 수 있는 단계로 해석한다면 그것까지 아니라고 말할 생각은 없다.

설령 그렇다하더라도 결말은 출현 -> 동원 -> 개방 -> 탈동원 -> 제도화라면 그 급진적 대중주체는 운동에서만 나와서도 안되고 나올수도 없다. 정당이 함께 가야 한다는 게 나의 결론이고 내가 아는 최장집의 얘기다.

'해결사'가 없는 상황에서 대중을 데모에 동원하여 사회를 급진화 하자는 것은 공허한 소리다. 한미FTA 반대집회에 대중이 동원되던가? 이회창이 대통령이었고 노무현이 야당당수였다면 6월항쟁 재현됐다. 그러나 노무현이 대통령이고 '해결사'가 없으니 대중이 동원이 안되는 것이다.

조희연의 현실 착각, 범여권은 해결사가 될 수 없다

6월항쟁이 왜 가능했는가? 솔직히 말해서 김대중, 김영삼이 있으니까 가능했다. 그때는 그들이 정권을 잡으면 새로운 세상이 올 것이라는 확신 혹은 환상이 있었지 않나. 즉 해결사가 있었으니 동원이 된 것이다. 그건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바로 이 대목에서 조희연이 오해받는 것이다. 여전히 범여권을 '해결사'로 생각하는거 아니냐고... 물론 조희연은 '노무현과 가혹한 단절'을 말한다. 그러나 혹여 그것이 '노무현만 빼고 나머지 범여권이 다시'는 아닌가?

일찍이 최장집은 '노무현 정권은 민주세력이 아니다'라고 정리하면서 노무현 정권 바깥, 즉 시민사회의 민주세력은 노무현 정권과 단절하라고 말했다. 여기서 노무현 정권이란 현 상황에서 범여권이지 노무현 한 사람이나 친노세력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눈 뒤집고 찾아보아도 조희연이 말하는 것처럼 중도자유주의세력-통합신당에 현단계의 사회경제적 문제들을 노무현의 신보수노선이 아니라 신진보노선으로 풀고자 노력하는 사람은 없다. 근데 웬 통합신당 타령이냐는 것이다. 대체 누구? 김근태? 천정배? 386?

혹시 무슨 토론회나 술자리 방담에서 조희연을 만나 그들 중 누군가 말로 떠들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건 그냥 말이고 그 방향으로 조직화하고 세력화할 의지를 가진 국회의원 나리는 그 당에 없다. 없으니 저따위 당을 만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솔직히 권고한다. 어떤 정치세력이 해결사로 존재하는 것으로 가정하고 운동을 통한 진보를 말하는 것이라면 '민노당'을 밀어주는게 양심적이라고 본다.

그러나 민노당이 대안이 아니라고 판단되면, 대안정당 창출을 촉구해야 옳지 통합신당 안에 그런 세력이 있다고 우기는 건 곤란하다. 있다면 구체적으로 이름을 거명하라는 것이다. 김근태? 천정배? 386? 아니면 혹여 문국현? 유시민? 이해찬?


학자들, 현실정치 너무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너무 단순화하고 그 결과 내부를 들여다보는 대신 그냥 일반화시켜 얼버무린다. 흔히들 '주체의 문제'를 거론하면서도(정치인들이 무능하고 부패하고 어쩌고 저쩌고) 정작 학자들 자신이 그 주체들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데서 정치문제를 말할 때 오류가 나온다고 나는 생각한다.

한 밤중에 잠이 안와서 별 시덥잖은 소리를 끄적였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여전히 조희연을 좋아한다. 그냥 의견 차이가 있어서 그의 말은 걸러서 듣는 것 뿐이다. 쓸데 없는 짓을 하는 것 같아 중간에 지워버릴까 했는데 쓴게 아까워 그냥 남겨둔다.

혹여 재미도 없는 이 귀신 씨나락 까먹는 글을 끝까지 읽으셨다면 감사드리며 그냥 이런 헛소리도 있구나 참조만 하셨으면 한다. 나는 학자가 아니다. 학자는 조희연이다. 그래서 내가 조희연을 오독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조희연의 결론보다 최장집의 결론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차이라면 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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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7/10/19 [19:38]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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