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 아래로’ ‘큰 것에서 작은 것으로’ 개혁 접근법에도 연역적 방식과 귀납적 방식이 있을 법하다.1) 개혁의 대명제를 세우고 위에서 아래로 각 사안에 적용하는 방식이 연역적 개혁이라면, 대중의 삶의 현장에서 발생하는 개별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면서 아래에서 위로 개혁 명제를 세우는 방식을 귀납적 개혁이라 할 수 있겠다.
연역적 개혁은 강력한 추진력을 확보할 수 있고 개혁 주체의 개혁성을 널리 홍보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반면, 이론이 현실에 적용되면서 나타날 수 있는 부작용을 간과하기 쉽고 개혁에 대한 반발·염증·불신을 초래할 수 있는 단점이 있다. 귀납적 개혁의 장단점은 그 반대로 생각하면 되겠다.
연역적 개혁은 ‘그랜드 플랜’을 설명해야 하므로 말을 앞세울 수밖에 없는 반면, 귀납적 개혁은 말할 필요가 없이 구체적인 성과를 보여주는 것만으로 족하다. 어느 방식이 더 낫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각 사회가 처해 있는 상황에 따라, 또 개혁을 주도하는 리더십의 스타일에 따라 각기 다른 효과를 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업무의 성격상 귀납 일변도일 수밖에 없는 기업 CEO 출신이 가장 유리하다고 볼 수 있겠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사람이 밥만으로 사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비전과 같은 큰 그림이 절실히 요청될 때가 있는 법이다.
그렇지만 갈수록 연역적 개혁을 하기가 어렵다. 이미 오래전 영국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이 내놓은 다음과 같은 주장이 그 이유를 시사해준다.
“정치 참여층이 점점 확대되고 이질화되면서 이성에의 호소도 점점 어려워진다. 논쟁의 출발점이 되는, 보편적으로 인정받는 가설들이 점점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러한 보편적인 가설들이 존재하지 않을 때 사람들은 자신의 직관에 의존하게 된다. 이질적인 집단들의 직관들은 당연히 서로 다를 것이므로 직관에의 의존은 결국 충돌과 힘의 정치로 이어지게 된다.”2) 구체적 각론에서 출발했더라면 폭넓은 지지를 얻을 수 있는 사안도 총론에서 거창하게 치고 나가는 바람에 필요 이상의 반발과 의혹을 불러일으킨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정권 입장에선 개혁 시도를 널리 알려야 지지자들을 규합할 수 있고, 선거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고, 역사에 족적을 남길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연역적 개혁을 선호하게 된다. 그래서 절대 다수가 동의할 수 있는 개혁마저 곧잘 정치투쟁으로 전락하는 현상도 벌어진다.
우리 주변을 잘 살펴보자. 크게 보아선 같은 길과 목표를 지향하는 사람들끼리 치열하게 싸운다. 적당히 싸우면 모르겠는데, 심지어 증오와 저주마저 마다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그 이유를 사람에서 찾으려는 시도는 옳지만 그것만으론 모자란 것 같다. 개혁 방법론에 주목해보자. 지금 우리는 ‘위에서 아래로’ ‘큰 것에서 작은 것으로’ 나아가는 ‘연역적 개혁’을 유일한 개혁법으로 받아들이고 있는데, 과연 여기에 문제는 없는가?
‘작은 민주주의’를 위하여 ‘위’와 ‘큰 것’에 눈독을 들이게 되면, 최선·최상의 개혁은 일단 권력을 갖는 것이라는 결론으로 빠질 수밖에 없다. 대통령 후보들이 양산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의 애국심과 선의를 의심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감사를 드려도 좋을 일이다. 문제는 전혀 다른 데에 있다. 권력 갖기가 쉬운가? 아니다. 매우 어렵다. 그러니 모든 역량은 권력을 갖는 데에만 소진된다. 그 와중에서 이전투구(泥田鬪狗)가 발생해 정치 혐오와 불신을 심화시킨다. 권력을 가진 후에도 또 다른 작은 권력투쟁들이 벌어지기 마련이다. 그건 ‘위’와 ‘큰 것’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연역적 개혁’의 숙명이다.
물론 ‘연역적 개혁’이 무조건 잘못됐다는 뜻은 아니다. ‘연역적 개혁’은 ‘아래에서 위로’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나아가는 ‘귀납적 개혁’과 병행될 때에 비로소 빛을 발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에겐 ‘귀납적 개혁’이 희소하다. 초강력 중앙집권 체제가 유발하는 ‘쏠림’과 ‘소용돌이’ 현상의 업보다.
그런 점에서 최근 여러 지식인들이 ‘작은 민주주의’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나선 건 매우 반가운 일이다. 논자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작은 민주주의’는 추상적인 거대담론에서 탈피해 구체적인 생활 현장을 중심으로 민주적 실천을 강조하는 민주주의 방법론이라 정의할 수 있겠다. ‘귀납적 개혁’과 상통하는 개념이다.
‘작은 민주주의’를 실천하기 위해선 반드시 넘어야 할 고개가 하나 있다. 그건 ‘작은 민주주의’를 ‘탈(脫)정치화’로 생각하는 오해다. 이 오해는 뿌리가 깊고 널리 만연돼 있어 교정이 쉽지 않다. 우리의 파란만장한 근현대사 때문이다.
예컨대, 독재정권 아래에선 개인과 가족의 안전은 ‘정치’로부터 멀어질수록 보장되었다. ‘위’에서 그 어떤 ‘큰 것’이 나쁘게 저질러진다 해도 나만 내 생활영역에서 착하게 살면 그만이라는 식의 사고방식이 집단적으로 강요된 세월이 매우 길었다.
바로 그런 역사적 상처로 인해 정치에 무관심한 건 민주 시민으로서의 자질이 결여된 것처럼 보이는 결과를 낳았다. 그런데 정치에 무관심한 것이 과연 ‘탈정치화’인가? 그렇지 않다. 그건 정치를 ‘위’와 ‘큰 것’ 중심으로 생각하는 발상의 산물이다. 쇼핑 행위마저 대형할인점으로 갈 것인지 재래시장으로 갈 것인지를 결정해야 하는 정치적 행위가 아닌가.
‘탈정치화’를 어떻게 정의하건, 현 한국 사회에서 정작 우려해야 할 것은 ‘탈정치화’가 아니라 ‘과잉 정치화’다. 자신의 생활 현장에선 아무런 실천도 하지 않으면서 중앙 정치에 모든 관심과 노력을 집중시켜 증오와 저주도 불사하는 싸움을 생활화하는 게 훨씬 더 위험하다.
전국 방방곡곡이 중앙 정치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드는 건 필요했거나 바람직했던 시절이 있긴 했지만, 이제 더 이상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중앙 정치를 외면하자는 것도 아니다. ‘큰 민주주의’와 ‘작은 민주주의’를 양자택일의 개념으로 볼 게 아니라 둘을 동시에 실천하는 방향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위’와 ‘큰 것’이 모든 걸 지배한다는 결정론은 타당하긴 하되 반쪽짜리 진실이다. 그건 모든 이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순간 증발해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언론부터 정치의 개념을 재해석해 ‘큰 민주주의’ 못지않게 ‘작은 민주주의’에 신경을 쓰면 좋겠다.
‘사람’과 ‘방법론’이 결합해 나타나는 문제도 있다. 모진 세월을 겪으면서 전투성을 키워온 이른바 ‘386세대’의 경우가 그런 경우가 아닐까 싶다. 박명림은 “386세대가 너무 사회과학적 상상력에 빠져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사회과학은 인간을 수단으로 보는 측면이 있다. 일종의 오만이다. 사회과학적 차원이 아니라 인간을 목적으로 보는 인문적이고 사회적인 상상력이 필요하다. 경쟁과 연대가 공존하는 상상력이 필요한 시점이다”라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학생운동의 독서 행태를 조사해본 적이 있는데, 정말 달랐다. 1970년대 세대는 인문적 상상력을 소중히 여겼고, 소설을 많이 읽었다. 1980년대엔 강령이나 지침으로서의 독서가 주종을 이뤘다. 게다가 이 세대는 정치적 실패를 겪어본 적이 없다. 6월항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민주정부를 성립시켰고, 또 386이 정권을 장악하기까지 했다. 말하자면 정권 집행 세력이 전혀 실패의 경험이 없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성찰의 시간이 없었다. 이들이 주도한 한국 민주주의는 탈지성화, 탈인문화와 같이 갔다.”3)
박명림이 지적한 ‘탈지성화, 탈인문화’는 강령과 지침에 의존하는 동시에 그 실행을 직관에 의존하는 연역적 운동의 본질일 수 있다. 아무리 선의일망정 ‘위’와 ‘큰 것’을 중시하는 사고는 인간을 수단으로 보기에 ‘차이’와 ‘다름’에 대해 폭력적 대응을 할 수 있다.
‘내부고발’과 ‘서울 하늘 바라보기’ 절대 다수가 동의할 수 있는 개혁마저 곧잘 정치투쟁으로 전락하는 현상의 귀결로 나타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내부 고발’에 대한 보수적 대응이다. 바람직한 ‘내부 고발’ 문화가 정착되면, 이후 개혁의 상당 부분은 저절로 이루어지게 돼 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개혁을 정권 홍보의 도구로만 생각하는 발상이 ‘내부 고발’ 문화를 정착시키기는커녕 오히려 그걸 억누르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1996년 4월 당시 감사원 감사담당관으로서 효산 콘도 비리 의혹을 제기했던 현준희 사례가 그걸 잘 말해준다. 감사원에서 파면돼 11년째 법정투쟁을 벌여온 그는 2006년 2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터뷰를 하면서 아쉬운 점이 있었습니다. 기자들은 항상 고생담을 강조하는데 나는 그거 싫거든요. 사실 그게 독약이라 봅니다. 언론 입장에서야 관심 끌 수 있는 소재니까 그러겠지만 결국 독자들이 봤을 때는 ‘내부고발 하면 저렇게 작살나는구나’ 생각할 테니까요. 동정심만 자극하지 말고 사실을 좀 추적해 주십시오.”4) 그러나 한국에서 내부고발 하면 패가망신한다는 건 상식으로 통용되고 있음을 어찌 부인할 수 있으랴. 최근 한 내부 고발자는 “만약 누가 내부고발 문제로 고민하고 있다면 절대 하지 말라고 말리고 싶습니다”라고 억울함을 토로했다. 누가 감히 내부고발을 해보라고 격려할 수 있겠는가?
정권이 영광을 독식하고 자기 세력을 키워나갈 수 있는 걸 전제로 한 개혁만 하겠다면 갈등과 분란만 일으키다가 시간 다 보내기 십상이다. 아래에서 위로,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구체에서 추상으로 나아가는 개혁도 병행해야 한다. 각종 민원을 귀찮게만 생각하지 말고 적극 대응해 행정의 불합리한 면을 고쳐 나가는 기회로 활용하고, 우선 당장 내부고발을 개혁 의제로 삼아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지방의 문제에도 눈을 돌릴 때가 되었다. 지방에서 연역적 개혁의 알파요 오메가는 무조건 ‘서울 하늘 바라보기’이기 때문이다. 서울은 ‘위’인 동시에 ‘큰 것’인지라 지방민들도 그걸 당연하게 생각한다.
지방선거에서 후보들 사이에 가장 많이 크게 외쳐지는 구호는 “나 서울에 줄 있다”다. 후보들이 모두 짱짱한 줄을 갖고 있을 경우 자신을 차별화할 수 있는 구호는 “나 당선되면 서울 가서 살겠다”이다. 즉, 그 정도로 중앙 요로에 로비를 열심히 해서 예산 많이 따오고 기업 유치 많이 하겠다는 뜻이다.
현실이 그런 이상 그걸 잘못됐다고 말할 순 없을망정, 그 누적적 효과의 폐해는 실로 엄청나다. 지방정치는 영원히 중앙정치의 인질 노릇을 하는 데다 지역에서 스스로 하는 법을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지방의 인재 육성 정책도 한결같이 ‘서울 하늘 바라보기’다. 많은 지역들이 수백억 원의 돈을 들여가며 서울에 학숙을 지어 자기 지역의 똑똑한 학생들을 서울로 유학시키려고 안달을 한다. 서울대 같은 명문대에 학생을 많이 보내는 고교엔 특별 지원금을 주는 지역들도 많다.
지방 대학들도 비슷한 자세를 취한다. 좋은 일자리가 서울에 몰려 있기 때문에 우수한 인재일수록 서울에 가서 취직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고 그걸 장려하는 게 상식으로 통용되고 있다. 즉, 지방의 모든 사람들이 고급 인재 유출을 지역 발전 전략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이론적 근거는 연역적 개혁론이다.
‘나눔의 야망’을 위하여 연역적 개혁론에 심취해 있는 대선 후보 인사들의 면면을 볼 때마다 그 어떤 안타까움 같은 게 느껴진다. 일부는 대통령이라는 야망만 품지 않았더라면 모든 이들로부터 존경을 누리면서 우리 사회의 개혁을 위해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인데, 야망이 그들의 모습을 다소 우스꽝스럽게 만든 건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야망의 가장 큰 문제는 야망을 위해 희생해야 할 게 너무 많다는 데에 있다. 자신만 희생하면 모르겠는데 자신의 공적 위치까지 희생을 시키니 그게 문제다. 자신의 위치에서 마땅히 해야 할 말과 일도 야망의 정치를 위한 이해득실 차원에서 억누른다. 변신도 마다하지 않는다. 야망이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런 계산과 변신을 하기 때문에 나라 전체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도 막을 길이 없다. 나중에 물이 다 엎질러진 다음에 떠들어봐야 무슨 소용인가.
어떤 인물이 대통령이 되느냐 하는 건 매우 중요하지만, 대통령 권력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다가 대통령 임기 말에 이르러 이성을 회복하는 기존 문화를 바꾸는 게 훨씬 더 중요한 게 아닐까? 그게 진정한 의미의 시스템 구축이 아닐까? 대통령마다 각기 다른 시스템으로 이 나라를 개조하려 든다면 그거야말로 엉망진창으로 가는 길이 아닐까?
야망은 개인적으로도 불행을 가져올 가능성이 높다. 영원히 만족을 모르기 때문이다. 죽는 날까지 자신의 경쟁자들을 이겨야만 만족할 수 있다. 경쟁자는 끊임없이 양산되기 때문에 그건 확률적으로 도박이다. 야망을 가진 사람들이 도박사의 심성으로 세상을 살아간다는 건 놀랍기보다는 당연한 일이다.
한국은 국가적 차원에서 ‘야망 중독증’에 빠진 나라다. 그 힘으로 세계에서 가장 빠른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그래서 우리에겐 야망에 대한 성찰의 문화가 없다. 오히려 야망을 갖고 질주해야 그 근처에라도 갈 수 있다는 셈법이 만연해 있다.
물론 그 셈법은 매력적이긴 하다. 오래전 러셀이 주장했듯이, “청년에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기대하라. 그러면 얻게 될 것이다. 이것이 교훈이다. 더 적게 기대하면, 정말 당신이 기대하는 정도만 얻게 되기 쉽다.”5)
이런 수준의 야망엔 동의할 수 있겠지만, 문제는 본말의 전도다. 자신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기 위한 야망이 아니라 피폐하기 만들기 위한 야망이 우리 사회 구석구석을 지배하고 있다. 좁은 국토와 높은 인구 밀도 때문일까? 아파트·자동차·집무실은 크고 넓을수록 좋고 담론은 거대할수록 좋다. 작은 일들을 소홀히 하고 거대담론을 좋아하는 건 우리의 유전자에 각인돼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목표가 거대해지는 만큼 행복은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목표는 늘 가변적이다. 행복은 이웃과의 비교에 달려 있다는 이른바 ‘이웃 효과’가 일상적 삶의 전 국면을 지배하고 있다. 한국인 모두가 불행으로 달려가는 열차를 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한국은 사회문화적 동질성과 거주 밀집성으로 인해 이웃을 의식하지 않고선 단 한시도 살 수 없는 묘한 시스템을 갖고 있는 나라다. 이웃과의 비교는 처절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필사적이다. 물질적으로 잘살게 될수록 행복해지는 게 아니라 자신보다 더 잘사는 사람을 이웃으로 두게 되는 결과만 초래해 불행해지는 역설마저 가능해진다.
우리는 미국으로부터 탐욕을 동력으로 삼는 자본주의를 수입하는 데엔 성공했지만, 야망을 채운 뒤에 야망의 산물을 봉사와 기부로 사회에 환원하는 건 수입하지 않았다. 봉사와 기부는 이념의 영역이 아니다. 이념 투쟁을 하는 것도 소중한 일이겠지만, 이념을 초월해 그런 문화를 솔선수범해 실천하는 것도 소중한 일이 아닐까?
역대 민주정권들을 거치면서 우리가 확인하게 된 건 정권들의 주체가 ‘봉사’와 ‘헌신’보다는 개인적인 야망을 앞세웠다는 사실이다. 그 야망 덕분에 역사의 진보가 이루어진 점도 있겠지만, 탐욕과 불신의 문화를 키운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이젠 젊은이들에게 야망을 버리라고 말할 때가 된 것 같다. 아니 야망의 정의를 다시 내려줘야 할 것 같다. 언론부터 높은 뉴스 가치를 부여하는 성공 모델을 재평가하면 좋겠다. 기존 야망의 위계질서에 따라 뉴스 가치를 결정하는 건 저널리즘의 타락이다. 기존 야망의 굴레에서 탈출하는 언론의 모습을 보고 싶다. ‘탐욕의 야망’도 있지만, ‘나눔의 야망’이란 것도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하지 않겠는가. 기쁨과 보람의 새로운 방식을 찾으려는 시도가 사회적으로 왕성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각주]
1) 이 글은 『한국일보』, 2006년 3월 8일, 2007년 7월 11일, 2007년 7월 18일자 칼럼을 발전시킨 것이다.
2) 버트런드 러셀, 송은경 옮김, 『게으름에 대한 찬양』, 사회평론, 1997, 140~141쪽.
3) 박명림·김명인, 「‘경쟁’의 짝꿍 ‘연대’ 살려내야 민주주의 완성/ 알맹이는 ‘성찰하는 행동’으로 채워야: 박명림-김명인 교수 대담」, 『한겨레』, 2007년 1월 1일, 20~21면.
4) 강국진,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 바란다”: 내부고발 이후 11년째 법정 투쟁하는 현준희씨」, 『시민의 신문』, 2006년 2월 20일, 8면.
5) 버트런드 러셀, 송은경 옮김, 『인간과 그밖의 것들』, 오늘의책, 2005, 93쪽.
* 본문은 월간 <인물과 사상>(www.inmul.co.kr) 2007년 9월호에 게재된 기사이며, 출판사의 허락하에 전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