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과 ‘은행’
‘가난’과 ‘은행’ 간의 거리는 가까울 것 같으면서도 멀다. 가난한 사람이 돈을 필요로 하는 것은 당연하고, 은행이 돈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대출을 해주는 것도 당연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 은행은 먼 존재다. 은행에서 돈을 빌려본 사람은 알 것이다. 신용대출을 위해서는 담보가 필요하거나 꾸준한 수입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절차도 복잡할 뿐더러 갖춰야 할 자격 요건도 까다롭다. 요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대출을 받기 힘들다. 대출이 어려운 사람들은 ‘사채’라 불리는 고리대금업자들에게 손을 벌릴 수밖에 없지만 이자율이 높기 때문에 가난의 악순환은 계속되게 마련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가’라 불리는 방글라데시의 무하마드 유누스 그라민은행(Grameen Bank) 총재는 ‘가난’과 ‘은행’ 간의 거리를 좁혀 빈곤 퇴치에 앞장섰다는 공로로 그가 세운 그라민은행과 함께 2006년 노벨평화상을 공동 수상했다. 그는 담보가 없어 신용대출을 받지 못하는 극빈자를 위한 은행을 설립해 ‘마이크로크레디트(microcredit)’, 즉 무담보 소액신용대출 운동을 벌였다. 1983년 그라민은행이 출범한 이후 약 660만 명의 빈민이 대출을 받았고, 그중 58%가 가난에서 벗어났다. 극빈자이기 때문에 원금 상환이 거의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을 비웃기라도 하듯 원금 상환율은 99%에 이른다.
앞서 말한 것처럼 ‘가난’과 ‘은행’ 간의 거리는 멀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가’란 말은 상식적으로 생각해봤을 때 모순을 갖고 있다. 은행가는 수익을 창출해야 하기 때문에 아무런 담보 없이 은행 자금을 대출해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르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가는 존재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하마드 유누스는 모순을 내포하고 있는 ‘가난’과 ‘은행’을 연결시키는 실험을 성공시켰다. 신용대출은 인권이다
“가난한 사람이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일을 열심히 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빈곤층에게는 담보가 없다는 이유로 대출을 해주지 않는 사회적 제도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태어난다. 우리는 이러한 가능성이 실현될 수 있는 기회를 모든 사람에게 제공해야 한다. 따라서 ‘신용대출’은 ‘인권’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무하마드 유누스는 신용대출이 인권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난을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게 인권 개념과 부합된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그가 가난을 보는 관점에서 기인한다. 그는, 가난이 개인의 태만과 무지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 때문에 발생한다고 본다. 가난의 악순환을 가능케 하는 구조를 깨뜨리지 않는 한 가난은 극복될 수 없다는 것이다. 유누스는 “빈곤은 본인들 잘못 때문이 아닙니다. …… 다만 제도와 정책이 그들을 구원하는 쪽으로 맞춰져 있지 않은 것이 문제죠”라고 말한다.
1970년대 중반부터 ‘가난’이란 화두와 맞서 싸워온 무하마드 유누스는 사실 가난과는 거리가 멀었다. 1940년 방글라데시 치타공의 귀금속 세공업을 하는 집안에서 태어난 무하마드 유누스는 1960년 방글라데시 다카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했다. 1969년에 밴더빌트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1972년 귀국한 그는 치타공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하게 된다. 평생 ‘가난’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 것 같은 그가 ‘가난’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7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방글라데시 곳곳에는 사상 최대의 홍수로 기아에 허덕이다 죽음을 맞은 아사자(餓死者)의 시체가 즐비했다. 그 처참한 광경 앞에서 유누스는 그가 이제껏 공부해온 경제학이 “내 주변의 삶과는 동떨어졌다”는 것을 깨닫고, 굶어 죽어가는 극빈자들의 삶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게 된다. ‘가난’과 맞서다
그해 그는 인근의 조브라 마을 주민들의 삶을 관찰한다. 하루 종일 대나무 제품을 만들어도 입에 풀칠은커녕 고리대금업자에게 돈을 몽땅 갖다 바쳐야 되는 마을 빈민들의 생활은 처참했다. 가난이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유누스는 마을 주민 40여 명에게 무상으로 856타카(27달러)를 빌려주고 능력이 될 때 갚도록 했다. 이것이 마이크로크레디트의 출발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무담보 신용대출은 1976년 유누스가 은행에서 1만 타카(약 240달러)를 빌려 ‘그라민 프로젝트’라 명명된 소액대출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본격화된다. 이 운동으로 1979년에 이르러서는 500가구가 절대빈곤에서 탈출할 수 있었고 이 성과에 놀란 방글라데시 정부와 중앙은행이 유누스를 돕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83년 유누스는 그라민 은행을 법인으로 설립하고 마이크로크레디트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 그라민은행은 대출금을 상환받을 수 없을 것이라는 세간의 예측과는 반대로 1983년과 1991년, 1992년을 제외하고는 계속 흑자를 기록했다. 그리고 그라민은행의 마이크로크레디트 운동은 세계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그라민은행의 성공은 대출과 관련한 몇 가지 원칙 때문에 가능했다. 우선 유누스는 융자 대상을 여성에 주로 한정했다. 남성보다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높다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또 융자를 개인 명의로 해주되 반드시 5인 그룹이 공동으로 책임지게 했다. 서로에 대한 신뢰와 책임감을 높이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리고 반드시 대출이라는 형식을 취했다. “자선은 빈곤층의 의타심만 키워 오히려 빈곤을 고착화하는 결과를 초래함으로써 근본적으로 빈곤을 퇴치하는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라민은행의 성공과 확산으로 많은 빈민들이 절대빈곤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유누스는 이런 공로로 막사이사이상(1984), 세계식량상(1994), 서울평화상(2006), 노벨평화상(2006)을 받았고, 유엔은 2005년을 ‘마이크로크레디트의 해’로 정하기도 했다.
2006년 노벨평화상 수상을 계기로 그는 방글라데시의 지도자로 떠올랐다. 마침 방글라데시 정국은 혼란스러웠다. 여당인 방글라데시민족주의당(BNP)과 야당인 아와미연맹의 대립으로 2007년 1월 치를 예정이던 총선이 연기되고, 유혈사태까지 발생했다. 그러자 무하마드 유누스는 2007년 2월 “나는 우리의 정치 문화가 국가를 어디로 이끌었는지, 국가의 미래 가능성을 어떻게 파괴했는지 목도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나는 국가를 돌보는 임무에 투신해야겠다고 진심으로 느낀다”며 정계 진출을 선언했다. 그리고 2월 20일 신당 ‘시민의 힘(나가리크 샤크티)’를 창당하고 정치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유누스의 정계 진출은 처음부터 삐걱거리고 있다. 방글라데시 시민사회 지도자들이 적극적인 지지를 하지 않고 있고, 기존 정치 세력도 그의 정치 참여를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2007년 3월 현재 방글라데시 민족주의당은 유누스를 가리켜 “비이슬람 고리대금업자”라고 비난했고 아와이연맹도 “대중은 유누스를 지도자라기보다는 방글라데시의 양심으로 여긴다”며 그의 정계 진출에 부정적인 시각을 보이고 있다. * 본문은 <인물과사상> 2007년 5월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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