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우경화의 바로미터 :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2007년 4월 8일 치러진 일본 지방선거에서 일본의 대표적 극우 인사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 도지사가 3선에 성공했다. 일본 우경화의 바로미터로 여겨졌던 이시하라 신타로는 한때 이전 선거에서보다 낮은 지지율 때문에 3선 성공 여부가 불투명했지만, 51.5%의 지지율로 3선에 성공함으로써 일본의 우경화가 여전히 진행되고 있음을 증명했다. 이시하라 신타로는 일본의 대표적인 극우 정치인이며 ‘망언 제조기’로도 불린다. 그의 망언은 그 목록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고, 그 정도도 심하다 . “한일 합방은 조선인들의 총의로 이뤄졌다” “중국인들에게는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는 유전적 요소가 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은 1936년 히틀러의 베를린올림픽과 비슷하다. 보이콧해야 한다” “난징대학살은 중국인이 지어낸 거짓말” “도쿄에서는 불법 입국한 삼국인(三國人)이 흉악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 재난이 닥친다면 소요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 “프랑스어는 숫자를 셀 수 없는 언어로 국제어로서는 실격이다” “할머니는 문명이 가져온 것 중에서 가장 유해한 것. 여성이 생식능력을 잃고도 산다는 건 의미 없는 일이고 지구에 심각한 폐해를 초래한다” “북한 따위가 허튼짓을 하면 한방에 괴멸시키겠다” “현행 헌법을 수정 또는 파기해 대동아공영권을 구축해야 한다” 등 그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편협과 무지로 무장한 무시무시한 무기(武器)와 같다. 극우적인 면모를 뽐내듯 이시하라는 끊임없이 망언과 독설을 내뱉어왔다. 국내의 한 언론에서 그를 가리켜 ‘망언 전문가’로 지칭할 정도로 그는 무수히 많은 망언(?)을 생산해냈고, 한국과 중국으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하지만 그는 자기가 갈 길을 굳건히(?) 가고 있다. 일관성만큼은 칭찬해줘야 할까?
그러나 이런 망언을 쏟아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난 두 번의 도쿄 도지사 선거에서 당당히 승리했다. 지지율도 높았다. 취임한 지 3년째 되던 해인 2002년 4월 그는 여론조사에서 78%의 지지율을 기록했다. 그런 그가 3선을 앞두고 잠시 휘청거렸다. 2007년 2월 8일 『아사히신문』이 발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지지율은 53%로 떨어졌고, 지지하지 않는다는 응답도 35%에 달했다. 그렇게 낮은 지지율은 아니지만 역대 최저의 지지율임에는 틀림없다. 이시하라의 3선 도전에 경고등이 켜진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시하라는 그동안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됐던 지난 선거 때와는 다르게 자민당의 공천을 받아 3선 도전에 나섰고, 51.5%의 지지율을 얻어 3선에 성공했다.
70%를 웃돌던 이시하라의 지지율이 떨어진 것은 도지사 시절에 자행한 무절제한 공금 남용 때문이다. 그는 2001년 미국을 방문했을 때 하루 26만 엔(약 202만 원)짜리 스위트룸에 묵었고, 같은 해 자원보호와 관광진흥 목적으로 갈라파고스를 방문했을 때 쓴 돈은 206만 엔이었다. 또 자신의 넷째 아들 노부히로를 도쿄도 문화사업 외부위원으로 위촉하고 2003년 3월 거금의 해외 출장 경비를 지원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 노부히로 외부위원의 위촉 기간은 1개월에 불과했다. 이시하라는 최근 5년 동안 15차례의 해외 출장으로 2억 4350만 엔(약 19억 4000만 원)을 지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점을 보면 이시하라 신타로의 높은 지지율은 이해가 가지 않는 측면이 있다. 그는 공금 남용 사실이 밝혀지기 전에는, 특히 2005년 4월 『요미우리신문』의 여론조사 결과 차기 총리에 적합한 인물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비록 공금 남용으로 지지율이 떨어졌지만 53%의 지지율을 유지했다는 것, 그리고 3선에 성공했다는 것조차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 일본 정치의 현주소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이시하라 신타로는 1999년 도쿄 도지사 출마 당시부터 일본 우익화의 잣대 역할을 했다. 그의 등장은 일본 우익화를 알려주는 척도였으며, 그의 높은 지지율은 우익화가 가속화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무리 우익으로 치닫고 있는 일본이라지만, 이시하라의 국수주의적인 망언은 그렇다 쳐도 공금 남용까지 눈감아줄 수 있는 것인지는 의문이었으나 결과는 3선 성공으로 나타났다. 소설가, 영화감독, 그리고 정치인
이시하라 신타로는 앞서 말한 것처럼 일본의 대표적인 극우 인사다. 그는 작가, 영화배우, 감독 등 다양한 직업을 거쳤다. 1934년 태어난 이시하라 신타로는 대학 재학 중인 1955년 <태양의 계절>이라는 작품으로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했다. <태양의 계절>은 이듬해에 이시하라의 동생에 의해 영화화되었고 ‘태양족’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낼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한 평론가는 이시하라의 <태양의 계절>에 대해 “패전으로 주눅들어 있던 일본 남성들의 심리를 저토록 대담하게 자극할 줄 아는 이시하라의 감각은 천하일품”이라고 평했다.
선동적인 기질이 있었다는 것인데, 이는 1989년에 모리타 아키오 소니 회장과 함께 집필해 내놓은 『선전포고 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을 통해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책에 대해 한 전문가는 “그(이시하라)가 미국에 대해서 NO라고 말한다는 것은 대부분의 보수적 일본인의 심리를 대변하고 있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라고 평했다. 대중의 심리를 정확하게 읽고 표현해내는 것은 이시하라의 강점으로 통한다. 그것은 1999년 도쿄 도지사 선거에서 재연되었다.
아쿠타가와상 수상 이후 이시하라는 소설가, 영화배우, 영화감독 등으로 활동하다가 1968년 전국구 참의원(자민당)으로 정계에 입문했고, 1972년에는 중의원이 되었다. 그는 자민당 내 파벌인 청풍회(靑風會)를 이끌기도 했다. 1975년 도쿄 도지사 선거에 나갔다가 근소한 표차로 낙선한 이시하라는 1976년 중의원 선거에서 재선된 뒤 1995년 정계 은퇴를 선언할 때까지 환경청 장관과 운수상 등을 지냈다. 그 사이 이시하라는 1989년 일본 극우 민족주의 세력의 미국에 대한 거부감을 담고 있는 『선전포고 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을 출간했다.
1995년 이시하라는 “일본은 거세된 환관과 같은 나라가 되어버렸다”라는 말을 남기고 돌연 정계를 은퇴했다. 그가 정계에 복귀한 것은 1999년 도쿄 도지사 선거에 출마하면서부터다. 그는 무소속으로 뒤늦게 선거에 참여해 당당히 승리했다. 당시 미 허드슨연구소에서는 “이번 도쿄 도지사 선거가 일본의 흐름을 읽는 시금석이 될 것”이며 “진보정당의 아성이던 도쿄에서 반미 강경파인 이시하라가 당선된다면 일본의 보수화가 본격화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그 예상은 적중했다. 그리고 『국민일보』의 김상온 논설위원은 이시하라의 재등장에 대해 “현재 일본 국민의 정서가 보수 우익화하고 있으며 이시하라가 이를 더욱 부추길 가능성이 커졌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라고 말했는데, 역시 그 예상도 적중했다. 일본 우경화의 선두에 서다
이시하라가 도쿄 도지사에 당선된 뒤 일본은 급격하게 우경화로 치달았으며 이시하라는 선두에 서서 이를 진두지휘했다. 국수주의적이고, 인종차별적인 발언과 함께 말이다. 당선 직후 그는 1937년의 난징대학살은 날조되었다고 말했으며, 중국을 태평양전쟁 당시 일제의 중국 침략과 관련된 용어인 지나(支那)라고 지칭해 중국 측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1년 후인 2000년 4월에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에 사는 외국인을 지칭하던 ‘제3국인’이라는 용어를 써가며 “3국인, 외국인의 흉악 범죄가 계속되고 있어 지진이 날 경우 소요가 예상된다”고 말했다. 이러한 인종차별적 발언은 성숙한 민주사회라면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이 발언 이후 도쿄도청에 접수된 전화, 팩스, 이메일 1028건 중에 626건(60.9%)이 이시하라의 발언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 지지에 힘을 얻어서일까? 이시하라는 『타임』지와의 인터뷰에서 외국인을 ‘3국인’으로 지칭한 것은 “외국인들의 흉악 범죄가 증가하고 있다는 것을 주민들에게 알림으로써 도쿄도를 더 잘 통치하기 위한 것이었다”라고 말했다. 더 나아가 “과거 일본이 전쟁에서 패하자 한국인과 대만 출신 중국인들이 일본인들을 폭행하고 강도짓을 했다. …… 3국인이라는 말은 당시에는 모욕적인 언사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우리가 그들을 두려워했다”는 역사 왜곡까지 일삼았다.
이런 언사에 대해 2000년 4월 19일자 『경향신문』 사설은 “외국의 일개 지자체 단체장의 정신착란적 망언에 일일이 대응할 가치가 있을지조차 의문이다. ‘광견(狂犬)의 허성(虛聲)’ 정도로 치부해버리면 그만”이라면서 일본의 우경화 움직임에 우려를 표했다. 그러나 이시하라의 망언은 이후에도 계속됐고, 그에 대한 일본 국민들의 지지도도 추락할 줄 몰랐다. 심지어는 이시하라가 군국주의적 행보를 보일 때도 그의 지지도는 떨어지지 않았다.
2003년 도쿄도 교육위원회는 이시하라의 방침에 따라 ‘교사는 국기를 향해 일어서서 국가를 불러야 한다’는 지침을 제정했고, 이에 따르지 않는 교사 243명을 징계했다. 이에 대해 2004년 12월 도쿄 도립학교 교사 등 109명이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 도지사를 고발했다. 교사들은 “학생을 기립시켜 기미가요를 제창토록 하지 않으면 ‘징계하겠다’고 협박하고 이에 응하지 않은 교직원을 실제로 징계한 것은 형사 범죄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교사 징계는 계속되고 있다. “히틀러가 되고 싶다”
이시하라는 일본의 평화헌법 또한 부정할 수 있다는 망언을 하기도 했다. 나라의 녹을 먹는 국가관리로서는 부적절한 말이 아닐 수 없다. 그는 공산당 소속의 한 도의회 의원이 “지사직을 계속하려면 이제까지 (헌법을 부정해온) 발언을 철회하고 헌법 준수 의무를 다해야 할 것 아니냐”고 말하자, 이시하라는 “경우에 따라 (헌법을) 준수하지 않겠다”면서 “나는 한다면 목숨을 걸고 한다. 당연한 일이 아니냐”라고 말했다. 도지사가 헌법을 준수하지 않겠다고 한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 그런데도 이시하라의 지지율은 고공행진을 계속했다.
2005년 4월 3일 이시하라는 후지TV의 대담 프로그램에 출연해 노무현 대통령의 대일 비판에 “대통령 자신의 인기를 회복하기 위해 이런 일을 하는 것은 눈앞의 이익만 생각한 것으로 정치가로서는 3류 수법”이라고 비난했다. 이에 대해 이해찬 국무총리는 “이시하라 지사는 그런 발언을 상습적으로 하는 극우파로 품격도 많이 떨어지는 사람”이라며 “이시하라 지사의 발언은 자기를 위해 하는 발언이어서 정부가 일일이 대응하는 게 적절치 않다”고 말했다. 또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은 “누구라도 국내 정치에 대해 지적할 수 있지만 일본 극우 세력이 (우리 정치에 대해) 발언하는 것은 옳지 않고 적절하지도 않다”면서 “우리 정치를 3류라고 한 이시하라의 지적은 4류, 5류의 망언”이라고 비판했다.
이 같은 이시하라의 망언 행렬은 그에 대한 일본 국민의 지지에서 기인한다. 2003년 4월 재선에 성공했을 때 “앞으로는 지금까지 했던 것보다 더 과격해지겠다”고 말했던 것은 그에 대한 압도적인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히틀러가 되고 싶다”는 발언에 대해서도 일본 국민들은 그에 대한 지지를 거두지 않았다. 그리고 불안한 성적표를 들고 도전한 3선에 성공함으로써 이시하라는 일본 우경화의 바로미터임을, 그리고 일본 우경화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여실히 보여줬다.
한편 이시하라가 제작한 영화가 2007년 5월 일본에서 개봉된다. 영화 제목은 <널 위해 죽으러 간다>로 가미카제를 소재로 한 영화다. 로이터통신은 이 영화의 개봉 소식을 전하며 “이로써 지난 수년간 이 영화를 재정적으로 후원한 74세의 극우주의 정치가 이시하라 신타로의 꿈이 실현됐다”고 보도했다. 이시하라 신타로는 이 영화의 팸플릿에 “격동의 시대를 산 일본인들의 아름다웠던 모습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고 밝혔다.
이 영화는 2차대전 당시 가미카제 대원들이 훈련을 받았던 남규슈 가고시마시 지란(知覽)에서 식당을 운영했던 도리하마 토메라는 여성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영화 개봉 소식을 전하는 로이터통신은 “1992년 도리하마가 사망하자 이시하라 지사는 도리하마의 죽음을 국가가 기려야 한다고 건의했지만 이는 묵살됐다”며 “이것이 이시하라가 그녀를 기리는 영화 제작에 더욱 매진하게 만들었다”고 제작 배경을 전하고 있다. 영화 제작 배경부터 내용까지, 정말 이시하라 신타로답다.
* 본문은 월간 <인물과사상> 5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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