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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연 : 민중의 분노·위협이 대안인가?
[강준만의 세상 이야기] 동원정치 보다 개혁·진보 진영 성찰 우선하라
 
강준만   기사입력  2007/04/21 [01:30]
'한국적 마르크스주의?'
 
"독재에 대항하면서 투쟁하던 노동운동이 이제 '민주정부'하에서 투쟁해야 하는데, 이 새로운 조건하에서 한국을 포함하여 제3세계 신흥공업국의 노동운동의 과제 및 방향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나에게 물어야 할 질문이 아니라 당신이나 남한의 운동가들이 대답하여야 할 것이다. 한국의 노동운동이 신흥공업국 노동운동의 선봉에 있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남한 노동운동의 향방이 중요한 전범을 제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미국의 어느 대학 강연장에서 한국 교수와 세계적으로 유명한 외국 교수 사이에 오고 간 대화다. 그 한국 교수는 진보 사회학자인 성공회대 교수 조희연이다. 이 대화는 그에게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 그는 자신의 문제를 남에게 묻는 자신에 대해 성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요즘 우리 사회에 뿌리 깊은 지적 종속성을 어떻게 탈피하는가 하는 문제로 많이 고민한다. 언제까지 서구의 학자들의 이론이나 개념을 들여다가 한국에 적용하는 식의 행태를 반복할 것인가 하는 고민이다. 진보적 인사들 중 많은 경우 이러한 지적 종속성은 단지 보수적 지식인의 문제로만 생각한다. 그러나 성찰적으로 볼 때 보수적인 지식인은 말할 것도 없고 좌파와 진보적 지식인들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어 조희연은 한국의 진보파들이 만악의 근원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이른바 '신자유주의'의 용법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은 성찰적 자세를 보여주었다.
 
"현재와 같이 자본이 주도하는 지구화의 본질을 진보주의자라면 신자유주의라고 명명하는 것에 이의를 달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것은 현 시기 지구화 시대의 자본주의의 복잡한 현실을 분석하기 위한 출발 범주이지 종착 범주는 아니다. 많은 경우 신자유주의라는 말을 만병통치약으로 사용한다. 신자유주의라는 말을 '신자유주의 환원론'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한국적 특수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 속에서 다른 나라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서 길어 올리지 못한 새로운 통찰을 획득할 가능성을 없애버리게 된다."

그래서 조희연이 말하고자 하는 건 무엇인가?

"우리는 사실 '한국적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고민을 해본 적이 없다. 마르크스주의의 발전적 해석은 서구의 유수한 학자들에게만 있고, 우리는 그것의 충실한 번역자이자 모방자이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주의 훈고학자'가 된다. …… 나는 이 땅에서 마르크스주의라면 '한국적 마르크스주의'를, 진보주의자라면 '한국적 진보주의'를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특수한 경험 속에서 길어 올려지는, 보편적 성격을 갖는 한국적 마르크스주의, 한국적 진보주의, 한국적 자유주의, 한국적 보수주의를 고민해야 한다고 나는 믿고 있다."1)
 

신영복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대해

이렇게 성찰에 투철한 조희연이 신영복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대해 "이 책을 대면할 때면, 절망이 압도했을 법한 삶의 한계지점에서 인간이 이렇게 사색할 수 있구나 하는, 환희 어린 놀라움 같은 것을 느낀다"고 말한 건 당연한 일이겠다.

"책은 수상록 같은 것이 아니라, 엄혹한 역사적 중압에 개인이 응전하면서 길어낸 어떤 역사적 지혜 같은 것이다. 소재는 매일 반복되는 노동 속에서, 매일 마주 보는 감방 동료들과의 부대낌 속에서 마주하는 소소한 일상적 삶이다. 거기서 저자는 우리를 부끄럽게 하고, 무릎을 치게 하고, 때로는 빙그레 웃음 짓게 한다. 나는 요즘 '진보의 깊이'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있다. 독재와 반독재의 경계, 보수와 진보의 경계, 호남과 영남의 경계, 박정희와 반(反)박정희의 경계, 지식인과 대중의 경계를 넘어 울림을 갖는 진보의 깊이 말이다. 신영복의 깊은 사색에는 그런 경계들을 뛰어넘는 것들이 있다. '전환적 위기'를 겪는 한국 사회의 치열한 갈등을 보면서, 이 책을 다시 펼쳐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2)
 
'부동산 문제, 급진적 의제, 그리고 민주노동당'

그러나 조희연의 '신영복 읽기'가 투철한 것 같진 않다. 이론적으론 성찰이 투철한데 실천 전략에선 그렇지 않은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사실 이게 바로 성찰의 딜레마다. 이론 수준에선 어떤 성찰이건 가능한데, 막상 실천으로 들어가면 습속화된 생체 권력이 작동하는 문제 말이다.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기 위해 조희연이 쓴 「부동산 문제, 급진적 의제, 그리고 민주노동당」이라는 글을 보자.

"나는 요즘 왜 민노당이 부동산 문제에 대해서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가 하는 조바심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한나라당까지 '아파트 반값 공급'을 내걸었는데 말이다. …… 나는 여기서 예를 들면 '1가구 2주택 금지'와 같이 기존의 부동산 정책의 지평을 뛰어넘는 급진적 정책 제시와 관련 투쟁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만일 이러한 정책이 대세에 영향을 미치는 정책의제로 부상하게 되면 보수 세력은 '위헌 소지' 등 다양한 난리를 칠 것이다. 바로 여기서 정당으로서의 민주노동당에게 현존하는 '토지공개념'을 뛰어넘어 '주택과 토지의 공공성'을 한 단계 높은 정책으로 '가공'하는 정책 정당으로서의 역할이 주어지게 된다."3)

여기까진 얼마든지 동의할 수 있는데, 그 다음에 한 말은 과연 그것이 2007년의 한국 사회에 유효할까 하는 의아심을 떨치기 어렵다.

"나는 평소 '강남 사람들은 계급의식이 투철하고 강북 사람들은 계급의식이 없다'라고 말한다. 강북 사람의 계급의식의 부재에는 물론 반공의식, 반북의식, 분단의식, 친미의식이 작용한다. 강남 사람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많은 보수 신문들은 종부세에 대해서 세금폭탄이라고 하고, 선의의 중산층은 자신들을 세금폭탄의 피해자로 생각한다. 대중들은 그러한 보수 언론의 선전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나는 부유층들이 세금폭탄을 포함해 사회적 규제 장치를 '불가피하게' 수용할 수 있도록 하는 변수는 민중의 분노이고 위협이라고 생각한다."4)
 
분노·위협의 동원정치가 가능한가?

즉, 조희연은 민중의 분노와 위협을 동원정치의 동력으로 쓰자는 것이다. 그는 이런 주장을 최장집의 주장에 대한 반론에서도 역설했다. 그는 ▲참여정부의 무능함과 비개혁성 ▲참여정부의 파괴적 개혁의 결과 심화된 양극화 ▲보수의 저항과 비판 등 참여정부의 실패를 보여주는 현상 지적에는 최장집과 견해를 같이하면서도, "이는 참여정부뿐 아니라 최 교수와 나 자신, 민주진보 세력 일반의 한계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최 교수 주장처럼 제도정치로 갈등을 수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보수적 저항, 지구적인 거시적 제약을 돌파하는 사회적 힘 또는 비(非)제도정치적 힘을 형성하지 못해서 실패했다"는 것이다. 조희연은 "최 교수가 바라는 바와 같이 제도정치로 사회적 갈등이 수렴되지 않은 것은 제도정치에 대한 보수적 저항도 큰 요인"이라고 했다. 그는 "보수적 비판과 저항이 극에 달한 현 상황은 오히려 대중들을 분노케 해 제도정치와 사회의 괴리를 가져온다"며 "이 갈등에 의해 진정한 사회진보가 가능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5)

이와 관련, 정치학자 김만흠은 최장집이 정당과 의회를 무시한 비제도적인 정치동원 방식이 정치적 실패 요인이었다고 진단한 반면, 조희연은 오히려 제도정치 바깥의 사회적 힘을 동원하는 '진보적 민중주의' 전략을 구사하지 못한 것을 정치적 실패의 요인으로 보고 있다고 정리하면서, 다음과 같이 평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체제에서 집권 세력이 주도하는 제도 밖의 정치적 동원 전략은 위험할 뿐 아니라, 성공하기도 쉽지 않다. 또한 민주화 진영과 같은 편에서 정권에 대해 저항했던 시민운동 세력의 입지가 민주화 정권에서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 혁명적인 흑백 대결보다는 공존 모델로의 전환이 민주화 이후 한국 민주주의의 방향이다."6)

나는 김만흠의 주장에 동의한다. 물론 각자의 이념적 입지가 다를 것이기에 무엇이 옳다 그르다, 라고 말할 성격의 것은 아니다. 또한 조희연이 분노·위협의 동원정치에 대해 자세히 말하진 않았기 때문에 본격 논의하기 어려운 점도 있다. 경실련의 '아파트값 거품빼기 국민행동' 수준의 동원정치라거나 대통령이 선지자처럼 행세하면서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한미 FTA 저지를 위한 동원정치는 응당 지지할 만한 것이지만, 조희연의 동원정치론은 그 수준을 뛰어넘는 것으로 보인다.
 
도박은 노무현만으로 족하지 않나?

다만 조희연이 신영복의 '경계 뛰어넘기'에 호감을 표현한 이상, 분노·위협의 동원정치가 과연 그 정신에 충실한 거냐고 물을 수는 있겠다. 적어도 1987년 이후 해온 게 그거 아니었나? 그런데 아직도 모자라서 또다시 그걸 해야 하는가?

그러나 이런 질문은 조희연에게 큰 결례일 수 있다. 왜냐하면 그에겐 그런 수준의 문제 제기를 뛰어넘는 정교한 이론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론의 일부 전제는 문제 삼을 만하다. 그는 참여정부의 실패 요인으로 참여정부의 집권 주체들이 내세우는 '보수의 저항과 비판'을 수긍한다. 그런데 그가 대표적 사례로 내세우는 건 '사학법'이다. 사학법이 민심 이반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도 의문이지만, 이 사례를 매개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펴는 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든다.

"최 교수가 희망하는 바와 같이 제도정치로 사회적 갈등이 수렴되지 않은 것은, 역설적으로 바로 제도정치에 대한 이러한 보수적 저항을 중요 요인으로 한다. 참여정부가 제도정치 외부로 우회하고자 해서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라 ― 물론 전부는 아니지만 ― 바로 제도정치를 무력화시키는 보수적 저항에 의해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흥미로운 건 조희연이 "이러한 보수적인 사회적 저항은 일관되게 보수적인 효과만을 가져오고 있지 않다. 내 생각에는 긍정적인 효과도 가져오고 있다"고 본 것이다.

"즉, 우리 사회의 보수 세력은 중도자유주의 세력이 선도하고 있는 행정부 권력과 의회 권력을 사회적 저항을 통해서 무력화하는 방식을 통해서, 최 교수가 주목하는 제도정치와 사회(사회를 구성하는 대중들)의 괴리를 크게 만들었던 것이다."

조희연은 참여정부에 대해 꽤 비판적이지만, 이 주장은 참여정부 쪽에서 나온 것으로 봐도 무리가 없을 만큼 참여정부의 입장을 잘 대변해주고 있다. 제도정치와 사회의 괴리는 노무현이 큰 그림을 그리겠다며 의도적으로 추진한 일이었는데, 이게 웬 말인가? 보수적 저항은 부차적인 것이었다고 보는 게 옳지 않을까? 조희연은 노무현 지배하의 여당이 사실상 '식물 여당'이었다는 걸 인정하지 않는가? 예컨대, 김근태가 어떤 굴욕을 당했었는지 보지도 못했나? 최근의 탈당 사태는 추태 중의 추태지만 바로 그런 지배 방식에 대한 뒤늦은 반응이라는 것도 인정하지 않는가?

이어 조희연은 "개발독재하에서 국민들이 권력에 순치되도록 역할해온 미디어 보수가 민주화가 가져온 자율을 만끽하면서 권력에 대해서 국민들이 저항하도록 만들고 그 결과로 대중이 중도자유주의적 정치에 만족하지 않고 이반하도록 하는 것은 더 높은 수준의 민주화를 위해서는 긍정적인 것이다"라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사회 진보는 사회적 갈등을 수렴하고 완충하는 제도정치의 기능을 뛰어넘어 대중들이 분노하고 그래서 '제도정치와 사회가 괴리'될 때 나타난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최 교수가 이야기하는 제도정치로의 수렴은 사실 제도정치에 대한 대중들의 순응과 수용을 전제로 한다. 역설적으로 미디어 보수는 후술하는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와 결합된 민주정부의 개혁에 만족하지 않도록 (혹은 더욱 험악해진 현실에 분노하도록) 만드는 데 기여한 것이다. 중도자유주의적 정치와 정부에 대한 보수적 저항은 역설적으로 중도자유주의 정치의 실패를 가속화하고 있고 그 일부가 보수화로도 나타나고 있지만 더 큰 틀에서 보면 제도정치 일반과 사회가 더욱 괴리되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다(내가 최 교수와 의견을 달리하는 것도 이 지점이다). 한나라당이 집권해도 제도정치에 대한 대중의 이반을 치유하기 위해서 더 전향적 대책을 내놓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조성하고 있다."7)

조희연이 원하는 세상의 실현을 위해선 이 시나리오가 꼭 필요하겠지만, 다시금 전제에 문제가 있다. 조희연은 노 정권의 '보수 언론 결정론'까지 수용하진 않지만 노 정권에 대한 민심 이반엔 보수 언론이 결정적 기여를 했다고 보는 동시에 보수 언론 헤게모니의 지속은 대중의 분노를 촉발시킬 것이라고 보고 있다. 과연 그럴까? 아니 그렇게 된다 해도 그런 상황이 과연 조희연이 원하는 시나리오대로 발전해 나갈까? 이 문제로 아무리 논쟁을 한다 해도 답이 나오지는 않는 것이기에 조희연의 생각을 존중하는 수밖엔 없겠지만, 검증할 수 없는 추상적인 도상 작전으로 엄청난 위험 부담을 수반하는 모험이나 도박을 하는 건 노무현만으로 충분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강남·강북 이분법은 타당한가?

조희연이 기회 있을 때마다 역설하곤 하는 "강남 사람들은 계급의식이 투철하고 강북 사람들은 계급의식이 없다"는 가설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이 가설이 옳다면, 계급의식 없는 강북 사람들의 의식화를 위해 분노·위협의 동원정치가 꼭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나는 그 가설에 깔린 선의에 일리가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강남·강북 이분법으론 오늘날의 복잡한 상황을 포착하는 데에 명백한 한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잘못된 실천 지침을 이끌어내는 위험이 있다고 본다. 강남 사람 되길 싫어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강북 사람들은 계급의식이 없다기보다는 '강남화'를 지향하기 때문에 강북 계급의식을 가져야 할 필요성을 전혀 못 느끼고 있다고 보는 게 옳지 않을까?

이게 맞는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분노·위협의 동원정치가 아니라, 구체적인 정책을 차분하게 입안하고 실천해 나가는 게 아닐까? 노무현 정권처럼 말로만 뻥을 쳐 전혀 불필요한 반감과 저항을 창조해내면서 실천은 하지 못하는 '엉터리 포퓰리즘' 전략이 아니라, 모두를 껴안으면서 설득하는 '부드럽고 겸허한 헤게모니 전략'이 필요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여기서 '헤게모니'는 '수동적 동의'를 얻어내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강남 사람의 수동적 동의도 얻어내야지 그들을 적대시해선 안 된다는 뜻이다.)

아니 헤게모니 전략은 원래 조희연의 것이다. 그는 "참여정부뿐만 아니라 진보 진영 전체가 '정체성의 정치'에만 집중했지 '헤게모니의 정치'에 대한 고민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이른바 조중동에 대립하는 자신의 '정체성'을 주장하고 드러내는 것이 민주정부 통치 세력의 몫의 전부는 아니다"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떤 의미에서 조중동의 영향하에 있는 대중들, 심지어 조중동까지도 분화시켜 내면서 헤게모니적 구도 속에서 포용해내는 적극적인 전략도 필요했다고 생각한다. 행정수도 이전 문제, 검찰 개혁 추동, 전시작전권 환수 등 많은 이슈에서 더욱 헤게모니적인 전략과 실천이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박정희가 '조국 근대화'의 담론으로 진보 세력의 일부까지도 초기에 포섭했던 것을 생각한다면, 통치 세력으로서의 장점을 십분 활용하면서 보수 세력의 일부까지도 포괄해내는 적극적인 헤게모니 전략을 행사할 수도 있었다고 생각한다."8)

그렇다. 바로 그것이다. 그런 일을 '부드럽고 겸허하게' 하자는 게 내 뜻이다. 조희연은 헤게모니 전략은 노무현 정권이 써야 할 방법인 반면, 분노·위협의 동원정치는 다른 용도라고 생각하는 건가? 아니면 둘이 얼마든지 조화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 어느 쪽이건 둘이 충돌할 수 있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여주면 좋겠다.

나는 조희연이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아비투스(습속)에 의해 자꾸 큰 그림(거대 담론)만 그리려 드는 게 안타깝다. '귀납'을 배제한 '연역' 일변도라는 것이다. 그건 구체적인 각론 차원의 참여가 박탈된 세월이 너무 길었던 탓에 형성된 한국 진보 지식인의 체질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세상이 달라졌는데 언제까지 그래야만 하는 건지 답답하다는 것이다. 구체적 실천을 하나 멋지게 성공해놓고, 그 성과의 토양에서 출발하는 거대 담론을 생산하면 안 되는 걸까? 거대 이슈·거대 담론을 매개로 한 동원정치가 무조건 잘못됐다는 게 아니다. 그런 정치가 필요할 때도 있지만, 다른 방식의 정치가 숨쉴 구멍도 열어줘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개혁·진보 진영의 성찰이 우선이다

최근 조희연을 중심으로 치열하게 이뤄진 진보적 지식인들의 올 대선 관련 논쟁도 의제 설정 자체가 잘못됐다는 게 나의 솔직한 심정이다. 최장집의 발언 가운데엔 '거시' '미시'의 중간에 해당될 중요한 이야기들이 많았다. 그런데 그걸 재론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그저 정권을 한나라당에 넘겨주느냐 마느냐 하는 논쟁을 했으니, 이 어찌 안타까운 일이 아니랴. 이 논쟁의 불모성은 조희연의 주장에 대한 손호철 반론의 다음과 같은 대목에 의해서도 시사된다.

"조 교수는 내가 평소 존경하는 몇 안 되는 한국의 일류 사회과학자이다. 그 같은 수준의 학자가 이처럼 정치적으로 예민한 주제를 내가 '한나라당 집권이 불가피하다고 했다'느니, '민중이 더 심하게 고통을 받아야 한다는 식의 1980년대의 파국론을 연상시키고 그래서 한나라당 집권 촉진 운동을 벌여야 하는 것 아니냐는 오해의 소지까지 있는 주장을 하고 있다'느니 하는 식으로 과잉 단순화하고 왜곡하여 나를 세상의 웃음거리로 만든 것은 다소 의외이다. 그러나 조 교수 같은 수준의 학자에게 그렇게 보였다면, 그것은 내가 글을 제대로 쓰지 못해 나의 주장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고 그럼으로써 그 같은 오해를 자초한 것일 것이다."9)

아니다. 손호철은 자책할 필요 없다. 논쟁 의제 자체가 잘못됐기 때문에 그런 왜곡과 오해도 발생하는 것이다. 좀더 낮은 단계의 실용적이고 실천적인 의제로 내려와야 한다. 신자유주의를 다루려면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전혀 그렇지 않다. 내가 이 글의 첫 부분에 소개한 조희연의 신자유주의 관련 발언이 그걸 잘 말해준다.

이야기가 너무 나간 것 같다. 사실 분노·위협의 동원정치는 노 정권 내부에서 과잉이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노무현 스스로 그 선두에 서서 '시민혁명'을 선동하기도 했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노 정권을 '자폐정권'으로 만든 것 이외에 무슨 성과가 있었나. 노 정권 바깥에서 길어 올릴 분노·위협의 동원정치는 다를까? 동원정치의 가장 강력한 주체라 할 노동운동은 어떤가? 국민적, 아니 민중의 신뢰를 받고 있는가? 노동계 내부의 정규직·비정규직 갈등은 공존의 틀에서 해소될 조짐이나 보이는가?

개혁·진보 진영 내부에서조차 서로 생각이 다를 때에 합리적으로 소통하는 문화가 형성돼 있지 않은 상황에서 조희연이 원하는 동원정치가 가능할까? 그는 대중을 분노케 하자고 그러지만, 노 정권에 환멸을 느낀 대중이 보수적 저항에 압도적 지지를 보내고 있는 상황에서 무엇으로 그들의 분노를 끌어낼 수 있단 말인가? 설사 그 일이 가능하다 한들 성공할 수 있을까? 개혁·진보 진영 내부의 매서울 정도로 아픈 성찰이 충분하게 선행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이왕 신영복에게 배울 게 있다고 천명한 이상, 이 문제를 놓고 신영복과 의논해보는 게 좋겠다.

사실 이 글을 쓴 이유는 조희연이 진보 지식인들 중에선 가장 현실 감각과 성찰성이 뛰어난 지식인이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또 진보정당에도 실천적인 고언을 자주 할 정도로 조직·집단문화에 매몰되지 않는 왕성한 문제의식과 탐구력을 갖췄다고 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결정적인 이유는 조희연이 신영복의 '경계 뛰어넘기'에 긍정적인 태도를 취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내겐 조금 모자란 듯 보인 성찰과 관련해 한 말씀드리게 된 것에 대해 너그러운 이해가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각주]
1) 조희연, 「한국적 마르크스주의?」, 『주간 진보정치』(민주노동당 기관지), 2007년 1월 8일, 15면.
2) 조희연, 「책읽기 365/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경향신문』, 2007년 2월 8일, 1면.
3) 조희연, 「부동산 문제, 급진적 의제, 그리고 민주노동당」, 『주간 진보정치』(민주노동당 기관지), 제301호(2006년 12월 4일), 15면.
4) 조희연, 「부동산 문제, 급진적 의제, 그리고 민주노동당」, 『주간 진보정치』, 제301호(2006년 12월 4일), 15면.
5) 손제민, 「"참여정부 실패에 대한 대안 최장집 교수 진단 문제 있다": 조희연 교수 인터넷매체서 실명비판」, 『경향신문』, 2007년 1월 26일, 21면.
6) 김만흠, 「흑백 대결보다는 공존 모델 모색해야」, 『한겨레』, 2007년 2월 22일, 27면.
7) 조희연, 「'지적'의 올바름과 '진단'의 오류 [최장집 교수 비판①] '헤게모니의 정치'와 '진보적 민중주의'」, 『레디앙』, 2007년 1월 25일.
8) 조희연, 「'지적'의 올바름과 '진단'의 오류 [최장집 교수 비판①] '헤게모니의 정치'와 '진보적 민중주의'」, 『레디앙』, 2007년 1월 25일.

9) 손호철, 「몇 가지 오해와 몇 가지 반론 [조희연 교수 비판]: 반신자유주의와 반수구, 무엇이 패배주의인가」, 『레디앙』, 2007년 2월 12일.

* 본문은 월간 <인물과 사상>(www.inmul.co.kr) 2007년 5월호에 게재된 기사이며, 출판사의 허락하에 전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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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7/04/21 [01:30]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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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산 2007/04/21 [08:55] 수정 | 삭제
  • 혹시 스스로 진보진영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닌가?
    예전에 스스로 말한 대로 그냥 입 다물고 찌그러져 있는 게 좋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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