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분법은 참으로 편리한 논법이다. 무엇보다, 명쾌하다는 것이 큰 장점이다. ‘둘 중 하나가 틀렸으면, 다른 하나는 옳다’는 논리를 성립시키는 것이다. 물론 이런 흑백논리가 전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다. 흰색과 검은색 사이에 무수한 색상들이 존재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흑백론에 흔히 현혹되곤 한다.
이런 틈새를 파고든 것이 또 다른 이분법적 논리이다. 즉, ‘둘 중 어느 하나가 완전히 옳은 것이 아니라면, 다른 하나도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라는 논리가 그것이다. 이런 논법은 ‘어느 하나가 존립할 수 있다면 대립적인 다른 하나도 존립할 수 있다’는 논리로 발전하기도 한다. 물론 이런 논법 역시 올바른 것은 아니다. 어느 하나는 존립할 수 있고 다른 하나는 존립할 수 없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또한 어느 하나가 완전히 옳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다른 하나가 옳다는 것을 보장하지도 않는다.
우리나라 좌파들이 내세우는 ‘경제에는 영미식도 있고 유럽식도 있다’는 논리도 그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이다. 이들은 “시장중심형 ‘영미식 경제’로 성공한 나라들이 있는 반면에, 사회통합형 ‘유럽식 경제’로 성공한 나라들도 있다”고 강변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것은 과학적인 좌파들이 내세울 논리는 결코 아니다. 현실과는 전혀 맞지 않는 논리이기 때문이다. 오늘은 이 문제를 따져보자.
소련의 붕괴 이후 심각한 지적 좌절을 맛봐야 했던 우리나라 좌파들은 무엇인가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그래서 찾아낸 것이 소위 ‘유럽식 사회민주주의’였다. 유럽 인민의 높은 생활수준이 사민주의의 결과인 것처럼 내세움으로써, 좌파의 존립당위성을 찾고자 했던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영미식 경제’와 ‘유럽식 경제’를 대비시키는 논법은 그 설득력을 더욱 키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분법적 논법은 심각한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 무엇보다 ‘영미식 경제’라는 것이 오랜 세월 존재해온 전형적인 형태는 결코 아니며 시간에 따라 변해왔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오히려, ‘유럽식’ 사민주의는 영국에서 처음 태어났다고 해야 한다. 세계대전이 끝난 뒤, 영국 노동당은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정치구호를 내세워 복지사회 건설을 추진했고 집권에도 성공했었다. 지금은 소위 ‘유럽식 사민주의’ 노선을 걷는 나라들조차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국유화 조치’들이 이때에 대대적으로 취해지기도 했었다. 미국의 사정 역시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이미 세계대공황 직후부터 뉴딜정책이 시행되었고, 세계대전 후에는 사회복지가 우선적인 정책적 고려 대상이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반면에, 지금 우리나라 좌파들이 ‘유럽식 경제’로 칭송하는 나라들은 당시에는 정반대의 정책을 펼쳤었다. 독일과 프랑스는 현재의 전형적인 ‘영미식 경제’의 정책을 펼쳤던 것이다. 심지어 사민당이 집권하고 있던 스웨덴도 마찬가지였었다. 특히, 노동자와 사용자가 힘을 합쳐 임금상승을 억제하여 산업경쟁력을 먼저 키웠고, 이를 통해 고용을 보장받으려 했던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그런데 왜 상황이 지금처럼 반전된 것일까? ‘사민주의’에 입각한 정책들이 경제를 장기침체에 빠져들게 했기 때문이다. 영국의 경우는 더욱 심각했다. 세계대전에서 더 결정적인 피해를 입었던 독일이나 프랑스에 비해, 성장률이 훨씬 낮아졌고 실업률도 높았으며 물가상승률까지 높아졌다. 1970년대 이후에는 사정이 더 나빠졌으며, 결국 1976년 말에는 외환위기를 겼어야 했다.
미국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아서 록펠러 빌딩이나 콜럼비아 영화사 등이 세계대전의 패전국이었던 일본에 팔려나가는 비극을 맛봐야 했다. 그 반작용으로 나타난 것이 우리나라 좌파들이 말하는 소위 ‘영미식 경제’이다. 우리나라 좌파들이 무조건 적대시하는 대처리즘이나 레이거노믹스 등은 1980년대 이후에야 이렇게 등장했던 것이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독일이나 프랑스는 그와는 반대로 점차 사민주의에 기울어졌다. 그리고 그 결과는 영국과 미국이 경험했던 것과 비슷했다. 1980년대 이후 성장률은 상대적으로 낮아졌으며, ‘일자리 창출’이나 ‘일자리 나누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업률은 오히려 훨씬 높아졌던 것이다.
이제는 사민주의를 공식적으로 내세웠던 독일의 사민당이나 프랑스의 사회당도 변신을 꾀하고 있다. 복지와 재정을 축소하고 시장이 더 잘 기능할 수 있는 정책을 펴고 있다. 국가경제의 장기적인 정체가 이렇게 변신하지 않을 수 없도록 했던 것이다. 사실 이런 기류는 이미 오래 전부터 나타났었다. 1970년대에 영국식 복지사회를 본격적으로 흉내 냈던 네덜란드는 1980년대 후반부터 심각한 경제난에 시달려야 했고, 결국은 지금처럼 변신해야 했다. 또한 가장 강력한 사민주의를 내세웠던 스웨덴을 포함한 북유럽 나라들은 1990년대 초에 심각한 금융위기를 겼어야 했고, 이를 계기로 지금처럼 변신해야 했다.
마르크스의 최대의 공적이 무엇이던가? 사회주의를 과학화한 것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좌파는 모름지기 과학적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위와 같은 역사적 발전과정을 우리나라 좌파들은 왜 굳이 외면하려는 것일까? 나는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다. 이들은 과학적 사회주의자들이 결코 아니다. 현실적 사회주의자들도 아니다.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일 뿐이라고 해야 한다. 이미 화석화된 논리에 아직도 집착하는 그들이 무엇을 이룰 수 있겠는가?
다행히, 행정부에서는 이런 ‘꼴통 좌파’들이 차츰차츰 밀려나고 있다. 그러나 집권여당에서는 여전히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분배나 복지를 내세우지 않으면 정치적 입지를 마련하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극소수의 사민주의 숭배자들이 당내 분위기를 장악해버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대통령의 절대적인 정치적 신임을 바탕으로 권력투쟁에서 완벽하게 승리했기 때문이라고도 전한다. 참으로 우려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현실적 사회주의자도 아니고 과학적 사회주의자도 아닌, 화석화된 논리에 몰입해 있는 정치인들이 만변하는 현실에 어떻게 부응할 수 있겠는가?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좌파를 하더라도 유연해야 한다. 세상사에 시대흐름을 역류해서 좋을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념도 마찬가지다. 1960년대까지는 우파들이 이념의 중앙선을 넘어 좌측으로 이동했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에는 좌파들이 이념의 중앙선을 넘어 우측으로 이동했었다. 세월이 흐르면 이것이 또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다만, 지금은 좌파도 변해야 할 때라는 사실은 확실하다. 이념을 고집하는 좌파가 지배하는 나라들은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 있지만, 이념의 중앙선을 넘어 우측으로 간 좌파가 지배하는 나라들은 상대적으로 번영하고 있고, 인민들의 생활도 상대적으로 훨씬 더 윤택한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을 받아들이는 좌파가 진정한 의미의 과학적 좌파라고 할 수 있다. 과학은 현실을 떠나서는 존립할 수 없으므로.
* 필자는 <21세기경제학연구소>(
www.taeri.org) 소장이며, <대한민국 생존의 속도>(리더스북, 2005) 등 다수의 경제학 서적을 출간했습니다.
* 본문은 <대자보> '진보 논쟁'에 대한 필자의 세번째 기고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