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급진적인 개혁정책을 펼쳐야 했다?지금 진보진영 내부에서는 노무현 정권의 평가를 둘러싸고 논쟁이 한창이다. 최장집(이하 직함 및 존칭 생략)이 참여정부의 실패를 강도 높게 비판하자, 백낙청이 반론을 제기했고, 조희연과 손호철은 다시 반론했으며, 그러자 노무현과 조기숙까지 여기에 가세하여 재반론을 제기했다. 그런데 그 내용들이 내 눈에는 가소롭기 짝이 없다.
무엇보다, 노무현은 참여정부가 실패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고, 조기숙은 심지어 “참여정부는 객관적으로 매우 성공”했다고 강변하기도 했다. 그러나 자신에 대한 평가는 자신이 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객관적인 평가는 제3자가 하는 것이며, 최종적으로는 국민이 한다(국민은 노무현 정권을 철저하게 외면했다).
가장 객관적이라고 할 경제지표를 보더라도, 노무현 정권은 무엇 하나 내세울 만한 것이 없다. 성장률은 우리 경제가 본격적인 도약을 시작한 이래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고, 빈부격차마저 과거 어느 정권 때보다 더 악화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부동산 투기광풍을 일으킴으로써 서민들의 박탈감과 생활고를 더욱 가중시켰다. 그렇다면 스스로 반성을 먼저 해야 했지만, 반성의 징후는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따라서 이 논쟁에서 내가 참여정부의 편을 들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진보진영의 대표적인 이론가들이라 할 위 학자들의 주장은 도저히 용납하기가 어렵다. 백낙청을 제외한 진보인사들은 한결같이 ‘현 정부의 실패는 사회경제적 개혁을 보다 급진적으로 추진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신자유주의 노선을 상쇄하는 적극적 정책을 펴지 못함으로써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소득분배를 가져오지 못했다”고도 주장한다. 즉,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이 소득격차와 양극화의 확대를 불렀다는 것이다. 이게 사실일까?
만약 그들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지금보다 훨씬 우파적인 혹은 노동 탄압적인 정책을 펼쳤던 과거의 독재정권 시대에는 빈부격차가 꾸준히 완화되었던, 그리고 양극화 현상이 지금처럼 심하지 않았던, 그래서 우리 국민 2/3 이상이 자신은 중산층이라고 믿었던 사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박정희 정권, 전두환 정권, 노태우 정권이 신자유주의를 반대하고 좌파적 개혁정책을 철저하게 추진하였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제발 우리나라 진보도 이제는 과학적인 진보로 변신해야 한다. 빈부격차 완화 또는 양극화 해소가 진보의 정책적 목표라면, 어떤 정책이 그걸 달성하게 하는지, 그리고 어떤 경우에 그게 악화되는지에 대한 과학적인 접근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과학적인 접근은 진보진영 어디에서도 찾아보기가 어렵다.
이미 여러 차례 언급한 바이지만, 빈부격차나 양극화는 경기가 안정적으로 장기간 호조를 보일 때에 완화되는 경향이 있다. 그 효과는 어떤 강력한 소득재분배정책보다 더 크다. 그 경우에는 고용이 증가하여 실업률이 계속 떨어짐으로써 임금상승률이 상대적으로 더 높아지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는 실업률이 완전고용에 가까울 정도로 충분히 낮아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지만, 우리나라 실업률은 세계에서 가장 낮은 편이다.
반면에, 경기가 급변하거나 그 변동의 진폭이 클 경우와 경기가 장기간 부진의 늪에 빠져들 경우에는 빈부격차와 양극화가 악화되곤 한다. 경기가 나빠지면 해고를 당해도 못사는 사람이 먼저 당하고, 사업이 망해도 영세업체부터 망하기 때문이다. 설령 경기가 일시적으로 호전되더라도 실업률이 높은 상태인지라 임금상승률은 상대적으로 낮을 수밖에 없고, 경기호전에 따른 소득의 증가분은 거의 모두 기업주 등에게 돌아가곤 한다. 중남미 각국의 빈부격차가 세계 최악의 수준인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아르헨티나는 빈부격차를 객관적으로 측정조차 할 수 없는 지경인데, 실업률이 30〜40%에 이르러서 하위계층은 소득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빈부격차 또는 양극화가 역사상 최악인 것도 노무현 정권의 정책이 충분히 좌파적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경기가 장기간 부진을 거듭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노무현 정권이 출범한 이래 단 한번도 성장률이 5%를 넘어본 적이 없다.
만약 노무현 정권이 ‘좀 더 급진적인 좌파정책’을 펼쳤더라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노무현 정권은 역대 어느 정권보다 훨씬 더 좌파적인 정책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처럼 빈부격차와 양극화가 심화되었으며 국민들은 못살겠다고 아우성인데 말이다. 혹시라도 더 좌파적인 정책을 펼쳤더라면 빈부격차와 양극화는 더 심화되는 결과를 빚지는 않았을까?
물론 그건 아니다. 좌파적인 경제정책으로도 국민의 경제생활을 더 윤택하게 한 나라들도 제법 있다. 열린우리당보다 훨씬 좌파적인 영국의 노동당은 블레어 총리를 내세워, 양극화를 심화시키기만 했던 ‘영국 병’에서 완벽하게 벗어났음은 물론이고, 집권 이래 10여년 넘게 초장기 호황을 누리고 있다. 그리고 노무현 정권의 정강정책보다 훨씬 더 좌파적인 정책을 많이 담았던 미국의 클린턴 정권도 자본주의 역사상 가장 긴 기간의 경기팽창 국면을 연출했다. 또한 노무현 대통령보다 훨씬 좌파적인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은 외환위기에 자주 노출되는 등 국제적인 문제아였던 브라질 경제를 완벽하게 회생시켰다.
그럼 이런 정권들은 어떻게 경제번영을 불렀을까? 이 정권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좌파적인 정책, 즉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와 기회균등의 정책은 유지하되, 개방화(세계화)와 규제완화와 민영화(시장경제) 등 신자유주의 정책을 철저하게 추진했다는 데에 있다. 즉, 신자유주의와 진보는 서로 배척하는 개념이 결코 아니었던 셈이다. 얼마든지 서로 양립시킬 수가 있다. 아니, 이 둘을 양립시키면 사회안정과 경제번영을 동시에 누릴 수 있다.
진보라면 마땅히 과학적이어야 한다. 과학적인 진보가 되기 위해서는 현실에 보다 밀착해야 한다. 반복하거니와,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과 베트남 등이 어떻게 경제번영과 경제도약의 기틀을 다졌는지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나라들은 개방과 규제완화와 민영화 등의 개혁을 통해서, 즉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추진함으로써 사회주의의 경제적 성공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제발 베네수엘라의 차베스만 볼 것이 아니라, 쿠바의 카스트로도 봐야 한다. 카스트로는 한 때 좌파의 영웅이었지만, 1990년대 초반에는 국민들이 드럼통 하나에 의존하여 망망대해를 건너(살아날 확률이 1%에도 미치지 못했다) 미국으로 탈출해야 했던 경제적 참상을 연출했었지 않은가 말이다. 제발 우리나라 진보도 거듭 태어나야 한다. 그래야 진보의 앞날이 밝아질 수 있고, 또한 국가와 민족의 장래도 좀 더 밝아질 수가 있다. 진보가 과학적으로 변해야 보수도 진짜 보수로 변할 수 있겠기에 말이다. 민주세력이 더 이상 분열되지 않을 수 있겠기에 말이다. 진보도 국가경제 경영에 있어서 유능해질 수 있겠기에 말이다.
* 필자는 <21세기경제학연구소>(
www.taeri.org) 소장이며, <대한민국 생존의 속도>(리더스북, 2005) 등 다수의 경제학 서적을 출간했습니다.
* 본문은 <대자보> '진보 논쟁'에 대한 필자의 두번째 기고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