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이후 인간사회는 G.B 비코가 “신의 시대-영웅의 시대-인간의 시대”의 과정을 거쳐 발전한다는 사회발전단계설(社會發展段階說)을 제기한 이래, 이 학설은 여러 학자들을 거치면서 보다 세분화, 체계화 되어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공통적으로 ‘사회현상’을 ‘역사적 고찰’을 통해 그 발전단계들을 규명해 보려한 이러한 시도들이 과연 지금의 한층 복잡해지고 다양화한 현대사회에서 여전히 가능할 것이냐에 대해선 회의가 든다. 왜냐하면 각 나라마다 상이한 역사적, 사회적 경험의 과정들을 겪어오며 발전해온 것에 비추어 이 모두를 하나의 통일된 틀 속에 넣고 단계론으로서 집약, 정의해 내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한계점이 분명해 보이기 때문이다. 진보논쟁과 87체제의 종언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사회는 지금 이순간도 끊임없이 ‘進步’의 과정을(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거치며 발전하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만은 그 누구도 부정하기 어려울 것 같다. 해서 마르크스가 주장했던 ‘변증법적 사회발전단계설’ 중 그가 “시민사회는 최후의 계급적·적대적 관계를 스스로 지양(止揚)하고, 그 다음의 새로운 사회로 발전할 것”이란 전망에 기초해 최근 학자들을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는 ‘진보논쟁’과 이것이 향후 우리 사회발전에 어떤 긍정적 영향으로 작용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냐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한국사회 좌표는 어디에 있나 지금 한국사회의 좌표는 일찍이 마르크스가 주장했던 최후의 “계급적·적대적 관계”를 아직 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이념적 정체성에서 그러하며 역사에 대한 인식과 자본의 구조에서 그러하다. 이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각 개인의 정신에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이념적 정체성’일 것임으로 그에 대해서만 제한적으로 논지를 전개해 보고자 한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듯이 한국사회는 상대적으로 스스로의 이념적 정체성을 제대로 세울 시간과 경험이 매우 일천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김원웅 교수의 “우리사회에서는 그간 진보와 보수, 좌와 우에 대한 개념정의가 명확하게 논의되지 못한 채, 대체로 냉전형 이념구도 속에서 그 기준을 찾아 왔으며 진보와 보수의 논쟁이 우리 안에서 필연적으로 제기되고 논란이 되어 온 ‘가치체계를 중심’으로 발전해 온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기보다는, 외부로부터 주어진 조건과 이념 규정에 따라 ‘판결의 방식’으로 전개되어 온 측면이 있다.”란 시각은 매우 정확하고도 적절한 지적이 아닐 수 없다. 이런 관점에서 최근 최장집-조희연-손호철 교수 등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진보진영의 ‘진보담론’은 그동안 여러 환경적 요인에 의해 억압되어왔던 한국사회의 경직된 이념적 틀을 깨부수고 제대로 된 정체성 확립에 물꼬를 틀 수 있단 점에서 매우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제대로 된 정체성 확립’은 필연적으로 지금의 우리 정치를 ‘감성과 지역주의 정치’에서 ‘이성과 정책중심의 정치’로 진일보 할 수 있게 할 뿐 아니라 지금의 ‘계급적·적대적 사회갈등’을 넘어 마침내 상대를 인정하고 포용할 수 있는 ‘통합정치로의 이행’을 가능케 해 줄, 보다 진전된 사회로의 긍정적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보여 진다. (여기서 ‘통합’이란 ‘획일화’가 아니라 ‘정책연합적 통합’을 의미함)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단계로의 이행을 위해 우리는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며 여기에 요구되는 필요조건은 무엇일까. 민주-반민주를 폐기처분하라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가장 큰 전환적 ‘터닝 포인트’가 된 87년 이후 그 이전의 군사정부에 저항했던 민주인사들은 이제 본격적으로 나름대로의 자기 길을 찾아 분화의 과정에 접어들기 시작 한다. 특히 정치권에 입문한 인사들에 있어 그때의 ‘경력’은 하나의 ‘화려한 훈장’이자 ‘진보의 상징’처럼 여겨져 왔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그 연장선상에 바로 지금의 ‘노무현 정부’가 있다. 나는 그들이 과거 군사독재정부에 맞서 ‘25시’의 절망적 시간 속에서 치열하게 싸웠던 그 올곧은 정신에 대해서 폄하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그러나 그 이후 급격히 변화된 정치사회적 환경 속에서 그들 모두가 걸어온 길까지 여전한 지지를 보내줄 생각은 눈꼽만치도 없다. 왜냐하면 각자가 지녔던 신념의 무게에 비례해 수많은 변절이 일어났고 인식과 비인식과는 상관없이 세월의 변화만큼이나 급격한 보수화가 마치 페스트균처럼 퍼져나갔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세월의 변화를 거부하고 지닌 신념의 무게를 여전히 내려놓지 않고 올곧게 살아오신 분들께는 진심으로 머리가 숙여지 않을 수 없다. 더불어 변절과 세월의 변화에 맞춰 보수화된 인사들 모두를 여기서 싸잡아 비난하고 싶지도 않다. 그것 역시 각자의 선택이고 개인의 신념이었을 테니 말이다. 문제는 지금 이들 중 누구도 자신의 변절에 대하여, 그리고 보수화된 자신의 변화에 대하여 스스로 인정하려하지 않고 있다는 데에 있다. 아니 단지 불인(不認)에 그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정체성을 꼭꼭 숨기며 객관적으로 보아서 정책과 사고에서 전혀 맞지 않는 ‘진보’니 ‘보수’니 하는 우스꽝스러운 옷들을 겹겹이 껴입고는 끊임없이 국민들을 호도하고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는 데서 보다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왜냐하면 국민들도 지지하는 정치인의 변화에 따라 함께 ‘진보’가 됐다 ‘보수’가 됐다 혹은 ‘중도’가 됐다 하면서 우왕좌왕 전혀 갈피를 못 잡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게 무슨 코메디 같이 웃기고 자빠뜨리는 일이란 말인가. 제대로 된 진보/보수의 양날개로 상식사회로 나가자 ‘자유시장주의’가 ‘진보’의 깃발을 버젓이 내걸고 ‘냉전파시스트’가 ‘보수’의 명패를 선점해 꿰차고 있는, 이 포복절도할 극심한 아이러니 속에 놓여있는 한국정치사회에서 도대체 올바른 정체성 확립이란 사실상 불가능해왔다는 사실을 이제 모두가 인정해야 한다. 이러한 구조 하에서 ‘정책중심의 정치’고 ‘지역주의 타파’고 ‘국민통합’이란 말들은 백번·천번 외쳐봐야 한낱 공허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이젠 모두가 뼈져리게 인식해야만 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이념의 정체성 확립’이 곧 지난 세기 냉전구도 속에서 강제로 주입되어져 집단중독의 형태로 나타났던 이른바 ‘이념의 노예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이제는 각자가 서있는 위치에서 자신들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서 돌아보고 인정할건 인정해야 한다. 국민들도 이제 이들 정치경극배우들의 코메디에 마냥 웃고 냉소만할 것이 아니라 이들 스스로 제자리를 찾아 갈 수 있도록 이들의 정책과 행동을 냉정하게 판단하고 제대로 된 결정을 내려줘야 한다. 그것이 새로운 사회로의 이행을 위한 최소한의 국민으로서의 양심과 올바른 책무가 아닌가 한다. 모든 살아있는 생물체는 각자가 제자리를 찾아 자기 자리를 지킬 때 비로소 그 본래의 굳건한 뿌리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다. 또한 진보고 보수고 그것이 지닌 본래의 가치는 상호 존중되어져야 마땅할 가치이지 배척과 대립, 혹은 우월성의 가치가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왜냐하면 그 모두 각 개인이 지닌 신념의 총체에 다름 아닐뿐더러 공히 한 사회를 지탱하고 발전시키는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자양분이기 때문이다. 즉 상보적 가치로서 서로 작용할 때 비로소 가장 안정된 사회로의 지속성 있는 발전이 가능해 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이쯤에서 구시대의 유물이 된 낡아빠진 ‘87년 체제의 종언’과 ‘민주-반민주의 틀’을 과감히 폐기해 버리자. 그리고 제대로 된 각자의 ‘이념적 정체성’의 토대위에서 보다 공정하게 선의의 경쟁을 해 보자. 우리 자신이 스스로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믿는다면 ‘민주’가 더 이상 정치인들의 정치적 기득권의 상징물로서 매우 수치스럽게 이용당하고 있는 현실을 단호히 거부할 줄 아는 용기가 바로 진정한 민주시민의 덕목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결론적으로 ‘87년의 종언과 민주-반민주의 틀을 폐기한다.’는 의미는 마르크스가 주장했으나 그것이 도대체 어떤 사회인지를 미처 밝히지 못하고 단지 ‘그 다음의 새로운 사회’라 명명했던 사회, 즉 지금 우리의 ‘계급적·적대적 관계로서의 사회’를 넘어 보다 발전된 ‘새로운 사회’로의 이행을 위한 또 다른 중요한 ‘터닝 포인트’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는 곧 더 이상 ‘민주’라는 말이 ‘진보’와 동의어로 쓰이지 않고 각각의 고유한 의미로의 환원을 의미하며 지금 수구냉전세력이 애용하는 오도된 ‘민주’ 역시 비로소 반성과 사죄의 의미를 담고 제자리를 찾아 갈 수 있도록 하자는 것에 다름 아니다. 다시 말해 ‘말의 선점’에서 오는 국민혼란을 결정적으로 종식시킬 때가 왔다는 것이다. 이 종식의 토대위에 향후 이루어지는 모든 정치적 판단과 결정은 기존의 ‘혈연·학연·지연·지역’이 아닌 오로지 ‘정책과 가치’ 그리고 그것이 담고 있는 ‘Vision’에 보다 초점이 맞춰지도록 ‘정신의 혁명’을 이루자는 것이다. 이는 비로소 지금의 ‘몰상식의 사회’를 넘어 마침내 ‘상식의 사회’를 구현해 낼 지름길임을 확신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역할에 대한 책임의식이 지금 진보진영을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는 ‘진보담론’에서 우선적 의제로 채택되어 좀 더 활발하게 논의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제발 우스꽝스러운 경극은 이쯤에서 끝내자, 정치인들이여, 한국사회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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