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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신드롬’의 극복과 선진화의 길
[인물과 사상의 눈] 박정희 체계를 넘어서 진정한 선진화의 길 모색해야
 
홍성태   기사입력  2007/01/24 [11:03]
변절과 폭력의 일생
 
박정희는 1917년 11월 14일 경상북도 구미에서 태어났다. 1937년에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문경소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다가 1939년에 만주로 가서 1940년에 일제의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해서 1942년에 우등으로 졸업하고 그 부상으로 다시 동경의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해서 1944년에 일본 육군대신 상을 받는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할 때 박정희는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로 창씨개명했으나,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할 때는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로 다시 바꿨다. 완전히 일본인처럼 보이기 위해서였다. 일본 백과사전에도 박정희의 일본식 이름은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로 되어 있다.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우등생으로 졸업한 박정희는 일제의 육군 중위로서 만주 관동군에 배치되어 ‘천황폐하’에게 충성하다가 일제의 패망을 맞았다. 이로써 그의 입신도 끝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는 해방정국의 혼란 속에서 일제군 출신이 장악한 한국군의 장교로 변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사회주의자였던 셋째 형 박상희와 관련되어 남로당 군사부장으로 활동하다가 1948년의 ‘여순반란사건’에서 군대 내 남로당원들의 명단을 제공하는 대가로 석방되었다. 물론 여기에는 한국군을 장악한 일제군 출신 군인들의 도움이 컸다.
 
한국전쟁은 박정희에게 기사회생의 전기가 되었다. 다시 일제군 출신들의 도움을 받아 박정희는 한국군 장교가 될 수 있었으며, 더욱이 관동군 시절의 특기를 살려서 정보장교로 활동하게 되었다. 박정희는 계속 일제군 출신들의 도움을 받으며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1930년대 일제군의 쿠데타를 모방해서 1961년 5월 16일에 쿠데타를 일으키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천황폐하’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독립군을 토벌하는 데 진력했던 일제군 하위장교가 불과 44살의 젊은 나이에 한국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이 강퍅한 독재자는 강력한 폭치체제를 세웠다. 그는 어떤 비판이나 저항도 용납하지 않으려 했다. 그는 전쟁의 기억과 분단상황을 최대한 활용해서 자신에 대한 비판이나 저항을 ‘이적행위’로 몰아갔다. 많은 사람들이 투옥되고, 고문받고, 심지어 살해되었다. 이런 폭력의 이면에서 부패가 만연하게 되었다. 박정희가 최측근 부하였던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살해된 것은 상당히 역설적으로 보인다. 그만큼 박정희의 폭치체제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던 것이다. 박정희가 최후를 맞기 직전에 일어난 ‘부마항쟁’은 그 생생한 징후였다. 이로써 박정희의 최측근 부하조차 더 이상 박정희의 폭치체제를 유지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무서운 독재자는 여전히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우리가 더욱더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바로 이 위험한 사실일 것이다. 그 까닭은 무엇보다 이 위험한 사실을 이용해서 이 나라를 박정희 시대로 되돌리려는 박정희 독재의 기득권세력이 여전히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박정희 신화의 정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다시 ‘박정희 흉내내기’가 시작되었다. 일부 정치인들이 외모를 박정희처럼 꾸며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1997년 12월의 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인제가 박정희를 흉내냈던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자신의 외모가 박정희와 닮았다는 것을 최대한 활용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런 그의 시도는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나 2007년 12월의 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번에는 이명박이 박정희를 흉내내고 있다. 박정희를 닮은 이인제와 달리 박정희를 닮지 않은 이명박의 박정희 흉내내기는 과연 성공할 것인가?
 
박정희 흉내내기를 일종의 ‘코스프레(costume play)’로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코스프레’란 만화 주인공의 외모를 흉내내는 것을 뜻한다. 사람들은 이런 ‘유치한 짓’에서 커다란 만족감을 느끼기도 한다. ‘코스프레’는 만화가 아주 중요한 문화의 장르로 확립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이면서 또한 그 자체로 아주 즐거운 놀이이기도 하다. 그러나 박정희 흉내내기는 사실 전혀 그렇지 않다. 여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그것은 즐기기 위해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박정희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을 정치적으로 사유화하기 위해 흉내내는 것이다. 박정희 흉내내기는 심각한 정치적 계산의 산물로서 결코 즐거운 ‘유치한 짓’이 아니라 대단히 무서운 ‘유치한 짓’이다.
 
더욱이 박정희는 강력한 독재자였다. 사람들의 기억이 어떻든지 간에 이런 역사적 사실 자체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민주주의를 존중하는 정치인이라면 누구라도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며, 여기서 나아가 사람들의 잘못된 기억을 바로잡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박정희 흉내내기는 우리의 민주화가 박정희로 대표되는 일제와 독재세력에게 포위되어 이루어진 ‘취약한 민주화’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중요한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민주화는 여전히 역사적 과제이다. 그리고 일부 민주개혁세력의 참담한 정치적 잘못 때문에 더욱더 그렇게 되고 말았다.
 
박정희 흉내내기는 박정희 신화가 널리 퍼져 있는 시대적 상황의 한 결과이다. 그런데 그것은 어떤 것인가? 쉽게 말해서 박정희는 ‘근대화의 아버지’라는 것이다. 박정희 시대에 한국 사회가 급변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1960-70년대를 지나며 한국 사회는 대단히 가난한 농업사회에서 상당히 부유한 공업사회로 변모했다. 박정희와 그 신도들은 오래전부터 박정희의 놀라운 지도력 덕분에 이런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고 선전해왔다. 그러나 박정희 시대에 이루어진 변화를 일방적으로 ‘발전’이라고 할 수도 없거니와 그것을 오로지 박정희의 ‘공’으로 선전하는 것은 그야말로 유치한 엉터리 신화를 쓰는 것일 뿐이다. 박정희 독재의 기득권세력은 이런 엉터리 신화를 내세워서 폭력과 부패로 획득한 기득권을 지키고자 한다.
 
엉터리 정치인들이 행세하고 있는 한국 정치가 잘 보여주듯이, 엉터리가 커다란 성공을 거둘 수도 있다. 박정희 신화도 그 좋은 예이다. 우리가 진정한 ‘선진화’를 이루고자 한다면, 이 엉터리 신화의 실체를 밝히는 노력을 강화해야 한다. 박정희 신화는 사실 이미 어느 정도 종교적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런 만큼 그 실체를 밝히고 문제를 바로잡는 것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이와 함께 박정희 신화를 ‘학문’의 이름으로 합리화하려는 시도도 강화되고 있다. 최근에 ‘교과서포럼’이라는 조직에서 발표한 ‘역사교과서’는 그 좋은 예이다. 이런 상황에서 박정희 신화의 형성과 효과를 밝히는 것은 대단히 절박한 정치적 과제가 되었다. 진리와 진실을 바로 세운다는 점에서는 더욱더 그렇다.
 
박정희 시대의 지배세력은 여전히 강력한 정치적, 경제적 세력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박정희 신화를 더욱 널리 퍼뜨려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강화하고자 한다. 그 궁극적 목표는 다시금 박정희 시대를 이루는 것이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억압하고 국민을 동원의 대상으로 만들어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최대한 강화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박정희 신화의 정치는 민주주의와 사회발전에 대한 근본적 위협의 성격을 갖는다.
 
박정희 체계의 문제
 
박정희 신화는 이미 ‘박정희 신드롬’을 낳고 있는 실정이다. ‘신드롬’이란 ‘인과관계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일련의 병적 징후’를 뜻한다. 그러므로 ‘박정희 신드롬’이란 ‘박정희의 인격과 능력을 무조건 찬양하는 병적 징후’를 뜻한다. 쉽게 말해서 ‘박정희 신드롬’은 하나의 사회적 병이다. 이 병은 한국 사회의 진정한 선진화를 위해 하루빨리 치유되지 않으면 안 된다. 왜 그런가?
 
첫째, 박정희의 인격은 결코 ‘찬양’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개인의 성공을 위해 배신과 변절을 거듭한 사람의 인격이 어떻게 ‘찬양’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이런 사람을 찬양하는 사회에서 윤리는 성립할 수 없다. 박정희는 사회의 윤리적 기초를 위협하는 위험한 인물이다. 둘째, 박정희는 폭력을 사용하는 데서 가장 탁월한 능력을 보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부하의 총을 맞고 62살의 나이로 죽기까지 무려 18년 동안 무소불위의 폭치체제를 운영했다. 박정희의 폭치는 이 나라를 법치를 믿지 않는 ‘이중 질서의 사회’로 만들었다. 이것은 법치를 믿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폭치를 따르는 문제적 사회이다. 박정희는 결코 ‘찬양’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인물이다.
 
‘박정희 신드롬’은 결국 박정희 독재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촉구하는 사회적 병이다. 그런데 폭력은 박정희 독재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자 특징이지만, 또한 그것은 결코 단순히 폭력으로만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박정희 독재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선 독재를 올바로 이해해야 한다. 독재는 전근대적 ‘전제’와 달리 민주주의를 형식적으로 인정하면서 최고권력자의 비민주적 지배를 위해 폭력을 일상적으로 활용하는 폭치체제를 뜻한다. 따라서 독재는 형식적으로나마 민주주의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애초부터 깊은 모순을 안고 있다. 이런 독재의 하위유형으로서 박정희 독재는 크게 네 가지 국가기구를 통해 작동했다. 폭력기구, 감시기구, 개발기구, 의식기구가 그것이다.
 
폭력기구는 군대와 경찰로 대표된다. 박정희가 무엇보다 군대를 동원해서 권력을 장악했고 유지했다는 사실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다. 이 점에서 박정희 시대는 체포와 고문과 살해의 시대였다. 이와 함께 박정희는 강력한 감시기구를 만들었다. 중앙정보부는 그 단적인 예이지만 우리는 주민등록제의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박정희는 모든 국민에게 일련번호를 부여하고 지문을 채취해서 국가권력이 감시하도록 하는 세계 최악의 ‘국민등록제’를 만들었다. 박정희 독재는 무엇보다 폭력기구와 감시기구로 대표되는 국가폭력으로 이루어졌지만, 또한 그것은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어 원천적으로 결여된 국민의 지지를 얻고자 했다.
 
이를 위해 박정희 정권은 대규모 개발사업을 전담하는 각종 개발기구들을 설립했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살던 곳에서 쫓겨났으며 전국 곳곳에서 자연과 역사를 파괴하는 파괴적 개발이 끊임없이 펼쳐졌다. 그것은 또 다른 거대한 국가폭력이었다. 끝으로 박정희 독재는 강력한 의식기구의 작동을 통해 이루어졌다. 의식기구란 사람들의 의식을 장악하기 위한 활동을 전담하는 국가기구를 뜻한다. 박정희 독재는 교육과 언론을 강력히 통제해서 사람들의 의식을 장악하고자 했다. 박정희 신화는 무엇보다 이런 의식기구의 작동과 연관된 문화적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박정희 독재는 크게 세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첫째, 무엇보다 그것은 강력한 폭치체제였다. 따라서 심각한 국가폭력의 문제를 낳았다. 그것은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자유민주주의를 강력히 억압했다. 이 점에서 박정희 신도들이 ‘자유’를 내걸고 박정희를 찬양하는 것은 그야말로 엉터리가 아닐 수 없다. 박정희의 폭치에 힘없는 민중들만 희생당한 것은 아니었다.

서울대 법대의 최종길 교수 같은 ‘최상층’ 인사도 중앙정보부에서 잔인하게 살해되었다. 그리고 ‘정적’인 김대중을 일본에서 납치해서 암살하려 했으며, 장준하를 잔인하게 암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1975년 4월 9일에 박정희 독재가 이른바 ‘인혁당재건위 사건’의 주모자들을 사형에 처한 사건에 대해 국제법학자협회는 1975년 4월 9일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정하기도 했다.
 
둘째, 박정희 독재는 국민을 매수하는 부패정치를 펼칠 수밖에 없었으며, 나아가 지역주의의 강화를 통해 정치적 기반을 다지고자 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1971년의 제7대 대통령 선거였다. 당시 박정희는 자신의 약속을 어기고 헌법을 고쳐서 3선에 나섰다. 박정희는 중앙정보부를 이용하고 막대한 돈을 쏟아 붓고도 김대중 후보에 맞서서 승리를 자신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선거 전날 영남의 모든 거리에 ‘호남인이여 단결하라’는 벽보를 붙이는 방식으로 영남의 지역주의를 격렬히 자극하는 술책을 펼쳤다. 이렇게 힘들게 대통령에 ‘당선’된 박정희는 그 얼마 뒤인 1972년 10월 17일에 전격적으로 ‘유신’을 선포하고 사실상 ‘총통’이 되어서 폭치체제를 더욱더 강화했다.
 
셋째, 박정희 독재는 국가폭력과 지역주의라는 심각한 문제를 낳았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투기사회와 토건국가로 악화된 개발주의의 문제도 낳았다. 박정희는 원천적으로 결여된 정치적 정당성을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보완하고자 했다. 냉전을 배경으로 한 미국의 적극적 지원은 이를 위한 대단히 좋은 조건이 되었다. 박정희는 경부고속도로와 소양강댐으로 대표되는 대대적 개발을 통해 경제성장을 추구했다. 이를 위해 강력한 국가폭력을 활용했으며, 투기까지도 적극적으로 조장했다. 실로 개발과 투기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기형국가’의 문제는 박정희 독재의 중요한 사회적 결과이다. 이것을 방치하는 것은 결국 박정희 독재를 방치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무엇보다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박정희 독재가 여전히 과거의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박정희는 이미 오래전에 죽었지만, 그의 정치적 영향력은 여전히 강력하고, 더욱이 우리는 여전히 그가 만든 사회체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한나라당이나 조선중앙동아 같은 곳뿐만 아니라 정부기구, 경제구조, 투기사회, 토건국가, 심지어 우리의 생활방식이나 사고방식 안에서도 여전히 시퍼렇게 살아 있는 박정희를 볼 수 있다. 박정희 독재의 문제는 오랜 시간에 걸쳐 박정희가 이룩한 사회체계, 곧 ‘박정희 체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제대로 해결될 수 없다.
 
진정한 선진화의 길
 
박정희 신도들은 박정희 독재의 결과로 우리가 잘살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박정희 시대를 지나며 한국이 놀라운 경제성장을 이룬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박정희 독재의 ‘덕’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공부하고 노동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박정희 독재는 경제성장을 질적으로 왜곡하고 그에 따른 사회발전을 가로막아서 한국을 결국 ‘기형국가’로 만들었다. 요컨대 박정희의 쿠데타는 민주적 산업화의 길을 봉쇄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이른바 산업화세력과 민주화세력에 관한 수구보수세력의 구분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켰던 때에 산업화는 당연한 시대적 과제였다. 당시에 진정으로 대립했던 것은 민주적 산업화와 독재적 산업화였다. 박정희는 권력욕에 사로잡혀서 폭력으로 민주적 산업화를 봉쇄하고 독재적 산업화를 추구했던 것이다. 박정희 독재의 지배세력인 수구보수세력은 단순한 산업화세력이 아니라 일제의 지배에 뿌리를 두고 있는 독재적 산업화세력이다. 이들은 여전히 막강한 힘을 보유하고 이 나라를 박정희 시대로 되돌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명확히 이해해야 한다.
 
박정희 독재의 폭력과 부패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한국은 엄청난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와 함께 박정희 독재는 ‘기형국가’의 사회적 실체인 박정희 체계를 만들었다. 민주화는 단순히 정권의 형성과 운영의 민주화에 그치지 않고 박정희 체계의 민주화로 이어졌어야 했다. 민주적 산업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부패와 투기의 문제를 철저히 해결하며, 자연과 역사의 파괴를 당연시하는 풍조를 완전히 일소해야 했다. 이것은 그 자체로 거대한 역사적 과제이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시작된 민주화로 이 과제는 극히 부분적으로만 이루어졌을 뿐이다. 이제 우리는 더욱더 적극적으로 이 과제를 추구해야 한다.
 
박정희 독재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흔히 ‘선진화’라는 말조차 거부하는 태도를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박정희 독재에 의해 그 내용이 심하게 왜곡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나은 상태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선진화’라는 말 자체를 거부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올바른 내용을 제시해서 사회적으로 구현하는 것이다.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서 한국의 문제는 무엇보다 경제력에 걸맞지 않은 삶의 질에서 찾을 수 있다. 이제 우리는 복지를 크게 확충해서 세계 10위권의 경제력에 걸맞은 복지국가를 이루어야 한다. 박정희 체계는 과거에도 나쁜 것이었으나, 지금은 더욱더 나쁜 것이 되었다.
 
서구의 복지국가는 우리의 구체적인 모범이다. 박정희 신도들은 서구의 복지국가가 실패한 것처럼 선전하고 있다. 그러나 적지 않은 변화가 있기는 했어도 서구의 복지국가는 여전히 건재하다. 우리는 박정희 체계를 넘어서 복지국가로 나아가야 한다. 여기서 한국은 특히 극심한 자연파괴를 통해 경제성장을 이루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당연히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복지국가를 추구해야 한다. 우리는 생태복지국가를 이루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가 어떻게 해서 현재와 같은 거대한 경제력을 이루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도 깊이 성찰해야 할 것이다.
 
* 필자는 상지대 사회학 교수입니다.
* 본문은 월간 <인물과 사상> 2007년 2월호에 게재된 기사이며, 출판사의 허락하에 전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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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7/01/24 [11:03]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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