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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경과 진중권, 진보적담론의 시선들
'이진경 훈고학'에 대한 변명과 우석훈식 훈고학 설정기준에 대한 반론
 
황진태   기사입력  2006/09/02 [19:36]
이진경에 대한 변명

우석훈은 본지 2005년 2월 7일자 '유전자조작 예찬하는 어떤 좌파이론가'라는 기사에서 한겨레에서 기획한 '인문의 창으로 본 과학의 풍경'에서 이진경과 황우석 박사의 대담을 문제 삼았다. 한겨레의 기획시리즈는 책으로 묶여서 올해 발간되었다. 우석훈이 생각하는 이진경에 대한 나름대로의 오해에 대한 변명으로 시작하자.

우석훈은 글에서 “유전자 변형에 대해서 새로운 과학의 발달이고, 새로운 시기로 넘어가는 변혁이라는 이진경의 주장에, 오히려 황우석 마저도 손사래를 칠 정도로 적극적으로 유전자 조작을 옹호하고, 나아가 극적인 인문학의 옹호를 받으며 앞으로 나가라는 선동에 대해서는 아찔함마저 느낀다”면서 이어서 다음과 같이 이진경의 발언을 인용한다. “유전자 변형은 이미 생물학의 경계를 넘어서기 시작한 건지도 모른다. <공각기동대>의 쿠사나기 소령 식으로 말해보자. 자, 어디로 갈까? 변이의 바다는 넓고도 광대해!” 

나는 이진경이 쿠사나기 소령의 명대사를 인용한 것에 대해서 좀 더 신중하지 못했음은 인정한다. 공각기동대 TV판을 보면 극중 인물들은 자신의 신체를 의체(사이보그)로 바꿀 것인 가에 대해서 상당히 철학적인 고민을 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극중 이야기이지만 가령 의체는 유산상속 자격이 박탈된다. 이진경이 공각기동대의 극장판 만을 보고서 이러한 고민이 담긴 시나리오의 이면을 모른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이겠지만 그렇다고 우석훈이 주장하듯 대담 내용 전반에서 이진경이 “황우석 마저도 손사래를 칠 정도로 적극적으로 유전자 조작을 옹호하고, 나아가 극적인 인문학의 옹호를 받으며 앞으로 나가라는 선동”했다는 과다해석은 과하다고 본다. 사실 대담에서 이진경은 이러한 과학기술만능주의에 대한 비판을 받을 것을 염두했는지 다음과 같이 전제했다. “물론 그 진화의 과정과 결과가 생물학자나 유전학자 들이 생각하는 방향으로 진행될 것이라고 생각할 순 없겠지만 말이다.”

우석훈의 이진경에 대한 과다해석에 대한 변명의 결정적 증거는 이번에 단행본으로 묶여 출판된 <인문학의 창으로 본 과학>에서 이진경은 덧붙이는 글에 드러난다.

“나는 생명 복제와 관련하여 가장 심각한 문제가 제기되어야 할 지점은 이와 관련되어 있다고 믿는다. 그것은 인간을 복제해도 되는가, 신의 권리를 침범해도 되는가 하는 신학적(!)문제가 아니라, 국민의 예산을 동원해 세포치료기술조차 실제로는 돈 많은 자들을 위해서만 사용될 수 있을 뿐이라는 것, 그것이 돼지나 동식물의 '생명'을 착취하여 거대한 잉여가치의 원천으로 만들고 말 거라는 것, 그 경우에 이제 생명체의 몸('고기!')만이 아니라 생명 자체가 이윤을 위해 착취되는 끔찍한 사태로 이어질 거라는 것과 결부되어 잇다. 생명 복제의 시대, 그것은 생명 자체가 이윤으로 다루어지고 생명력 자체가 착취되는 시대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잘 알다시피 코앞에 닥쳐왔다. 황우석 사건은 바로 이런 사실을 알려주고 일깨워주는 징후적 사건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인문학의 창으로 본 과학,190~191쪽)
 
생명복제 관련한 이진경의 문제인식이 이 정도 수준이라면 우석훈도 만족할 만한 답변이라 생각한다. 

이진경 훈고학과 진중권 훈고학의 차이는?

우석훈은 “이진경이라는 이름이 나에게도 또한 진한 애증의 관계이다”면서 “나야말로 사사방(사회구성체논쟁과 사회과학 방법론) 세대라고 하면 사사방 세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스무살에 사사방을 읽은 충격을 채 추스르지 못해서 결국 프랑스 유학길로 나서게 했다는 연이 있”다고 말했다. 진한 애증이 묻어서 일까? 노마디즘을 언급하기 시작한 이진경에 대해서 “훈고학 혹은 극단적 인문학의 레토릭의 폐쇄적 재생산이라는 느낌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탓할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는 80년대 사회구성체 논쟁의 한 축을 담당했던 치열한 이론가로서의 이진경에서 이제 자신이 좋아하는 (우석훈의 말을 빌리면) “훈고학 혹은 극단적 인문학의 레토릭의 폐쇄적 재생산”에 이젠 푹 빠져도 되지 않을 까 생각한다. 사실 NC논쟁에서 얻은 가명 '이진경'도 이름값으로 책을 더 팔 생각이 아니라면 완전히 본명 '박태호'로 돌아갔음 싶지만 말이다. (얼마 전 발간한 <시민과 세계> 하반기호에 실린 이진경이 기고한 '제국의 시대인가, 제국의 황혼인가 - 한미 FTA를 둘러싼 정세에 관하여'를 보면 아직 그는 노마디즘으로 완전히 탈주하지는 못한 듯싶다.)

나는 최근 그의 저서들이 '스스로' 한국사회를 설명한다고 보지는 않는다. 하지만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 <노마디즘>, <미래의 맑스주의>를 읽으면서 '이진경의 훈고학'에서 읽는 독자들은 그의 책속에서 나름대로 한국사회를 설명할 수 있는 상상력을 '뽑아갈 수'는 있다고 본다.

우석훈은 얼마 전 진중권의 절필 선언에 대해서 “어둠의 시대에 홀로이 등대지기 역할을 하고, 도대체 축구와 황우석 아니면 관심없는 이 대한민국에서 희망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하여간 그 희망 혹은 축복을 위해서 스스로 '광야의 외치는 사나이'의 역할을 했던 이 사나이가 그의 사적인 공간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선언을 보면서, 한 마디를 더 추가하고 싶다. 진중권의 인생에 축복”이라고 과찬했다.

'진중권의 훈고학'과 '이진경의 훈고학'의 차이는 무엇인가. 진중권이 돌아간다는 미학은 사실 얼마나 한국사회를 설명하고 도움이 될 것인가. 하지만 나를 포함해서 그의 미디어 미학에 대한 소스는 글을 쓰는데 유용한 상상력으로 작용한다. 어쨌든 우석훈이 진중권에 대한 과찬이 왜 이진경에 대해서는 그렇게 몰아세우는지 모르겠다. 혹시 그 애증 때문인가.

이러한 우석훈의 문제선상에서 본다면 아우또노미아(자율)를 주창하는 조정환도 아쉽다고 해야 할 것이다. 솔직히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게 아니라면 일반 독자들이 조정환의 저서를 독해하는 것은 벅찬 게 사실이다. 그렇다고 수배자 시절에 가명 '이원영'으로 돌아가서 한국사회에 도움이 되는 이론을 세우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조정환이 추구하는 학문의 난해함은 이진경의 훈고학처럼 나름대로의 존재이유가 있다. 사실 조정환을 필두로 한 <자율평론>에서 제기하고 있는 화두들은 KTX 여승무원 사건, 뉴라이트 운동, 한미FTA 등의 한국사회의 촉각적인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난해한 것은 여전하지만 말이다.

군사독재시절이라면 우리의 화두는 거대담론에 모두가 쏠리겠지만 민주화 이후의 한국사회에서는 군사독재시절에 학생운동권 내부의 가부장적, 군사사회적 습속에 대한 여성학자들의 통찰이 빛을 발하는 게 가능해졌다. 이들 여성학자들의 미시적 담론이 군사독재시절에는 활성화가 가능했을까. 지식인의 사회적 발언에 대한 책무를 인정하지만 이진경의 지적행보에 대해서 이렇게 '터치'하는 것이 옳은 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고 본다. 물론 뉴라이트 계열의 전향한 지식인들에 대한 비판은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요즘 강준만이 과거에 비해 그의 정치사회비평이 현저히 줄어들고 역사로 빠진 것에 대해서 비난할 수도 없으며, 진중권이 미학으로 돌아갔다고 아쉽기는 하지만 한국사회가 누구말 처럼 담론의 위기에 빠져들었다고 보지는 않는다. 강준만과 진중권의 글을 통해서 지적충격을 받았던 제2의, 제3의 강준만과 진중권이 활동하고 있지 않은가. 이는 강준만과 진중권이 딴데 한눈 팔 수 있는 '여유'이기도 하다. 상징적으로 우상타파의 본원적 텍스트인 리영희 전집이 출간됐다는 사실은 이러한 담론의 피드백이 한국사회에서 긍정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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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6/09/02 [19:36]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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