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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의 대공습 앞에 맑스주의를 생각한다
[기자의 눈] FTA 쓰나미 앞두고 토대의 선차성은 유효, 상상력 필요해
 
황진태   기사입력  2006/06/15 [17:42]
월드컵을 이용한 철도공사의 가시적인 고객사랑
 
지난 한국과 토고의 경기 직후, 다음날 아침 공중파 티비에서는 일제히 한국의 승리를 반복보도하면서 KTX의 승객들이 열차 내에서 경기를 시청하며 열띤 응원을 하는 모습을 담아내어 KTX의 세심한 고객사랑을 보여주었다. 하긴 전국방방곡곡 금강산에서 울릉도, 마라도까지 온 국민의 응원모습을 담아내려는 방송사의 눈물겨운 노력을 기자처럼 비판적으로 냉소적으로 대꾸하는 것이 반드시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잔치에 찬물을 끼얹는 이러한 글들로 인해서 공중파 방송이 그나마 월드컵에 올인한 보도행태에 조금이나마 자정하는 모습으로 바뀌어 -시청자에게 알려주려는 소식에 있어서 ‘뉴스’와 ‘일반뉴스’의 차이가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일반뉴스”를 강조하여 말하면서 보도내용에 정작 KTX 여승무원의 파업과 단식에 대해서는 입을 싹 닫았다. 철도공사는 자사의 직원에 대한 사랑은 보여주지 못할망정 월드컵으로 쏠린 대중의 시선을 적극 이용, 부추기며 가식적인 고객사랑을 펼치고 있을 따름이다.
 
진보보수를 가리지 않는 내공의 급수, 그 우물 안 개구리들
 
여기서 먹물티를 내는 것도 우습지만 <대자보>에 글쓰기 시작한 5년 전 부터 그 개개인의 면면은 다르지만 어쩌다 진보진영의 학자들을 만나서 한결 같이 듣는 얘기가 상대적으로 어린 기자의 나이에 비춰 내가 마르크스를 얘기를 하면 자본론은 몇번이나 읽었는가부터 시작해서 독어판 MEW(Marx Engels Werke) ‘맑스 엥겔스 전집’을 읽어야한다느니, 어떤 이의 번역본은 번역이 엉망이라며 독일어로 직접 보는 게 낫다느니(그러면 본인이 직접 번역하든가), 내가 대학생시절에는 3,4학년이면 독어판으로 읽는 것은 기본인데 요즘 대학생들은 공산당 선언 영문본도 못 읽더라. 등등 짜증나는 말들을 들려줬다.
 
그들이 이 시대의 대학생을 비판하기에 앞서서 오늘날 대학생들이 독일어로 된 자본론이나 영문으로된 공산당선언조차 안 읽게 된 이유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해봤는지 묻고 싶다. (그렇다고 한겨레조차도 안 읽는 대학생들의 무식함마저 변호해주자는 것은 아니다) 과연 이 바닥에서 학문적 내공이라는 게 존재하는지도 의문이나 오늘날 정보화 사회에서 (번역으로 생계비를 버는 게 아니라면) 나 같은 필부들까지 그 좁은 시장에 동참하여 번역하고 있을 시간과 여유는 없다. 차라리 좀 어설픈 번역본이라도 쓸만한 지식을 뽑아내어 글쓰기에 거름으로 사용하는 게 이 사회를 위해서도 훨씬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이론에서 구석으로 처박힌 노동자들은 대체 어디 있는가?
 
말이 옆길로 샜는데 이렇게 어줍잖은 기자를 가르치려드시는 소위 진보적인 학자분들 중에는 정보화 사회의 충격 속에서 더 이상 맑스의 사적유물론, 노동철학이 다루던 착취와 소외-물화이론, 이윤률 하락의 법칙이 이 시대에선 설명될 수 없다고 선언하고, 하버마스의 오해처럼 정보화 사회의 발달 속에서 토대의 선차성은 사라지게 될 거라는데 동의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서술에 있어서 눈여겨봐야 할 점은 한결같이 정보화 사회 속에서 기존에 존재하던 맑스의 착취와 소외이론의 주인공이었던 ‘고전적인 노동자’들은 그저 ‘주변부’ 단역으로 빠진다고 기술할 뿐이다. 정보화 사회의 속도가 얼마나 광속으로 치달을지는 예측불허다. 그래서 기존에 정보기술이 계속 발달하더라도 당분간은 이윤률 하락 법칙은 유용하다고 주장하던 학자들이 최근 입장을 선회하기도 했지만 그런데 문제는 왜 그 주변부로 빠진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그 어떤 입장도 설명도 없냐는 말이다. 학문적 능력의 부족함인가. 체계에 대한 암묵적 순응인가.
 
토대에 대한 끊임없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곧 다가오는 ‘FTA 쓰나미’로 인해 노동의 비정규직화, 주변화는 더욱 강도 높게 진행될 것은 명약관화다. 과연 맑스의 이론은 그의 생물학적 죽음을 곧 좇아갈 것인가? (자본론을 공부한 지 8년째지만 내가 1년차 보다 얼마나 아는 지도 의문이지만 십년, 이십년을 더 공부한 사람에 비해서 나를 하급수라고 보는 그 기준은 과연 누가 만들었는가.) 나는 아직 그의 이론에 묘비명을 쓰고 싶지 않다. 기자의 어줍잖은 소견으로는 맑스와 엥겔스가 다른 사회현상에 대한 분석에서 보여준 날카로운 변증법적 시각이 결여되고, 경제결정론적 중심이라는 치명적 결손이 담겨 있는 사적유물론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토대에 대한 선차성을 긍정하는 것은 필요하다고 본다.
 
토대(Grund)를 상실한 사회과학적 상상력은 끝없는 경쟁신화를 생산하는 신자유주의의 나락(Abgrund)으로 떨어질 뿐이다. 이러한 발칙한 상상력의 사례로 최근 이진경의 신선한 맑스 독해는 두고두고 씹고 되새김질 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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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6/06/15 [17:42]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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