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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 휘날리고 윤밴의 ‘애국가’면 또 어떤가?
[쟁점] 월드컵 열기 속 시민사회 의식이 문제, ‘87년 체제위기’ 측정해야
 
황진태   기사입력  2006/05/22 [14:46]
이 글은 5월 26일치 <한겨레> '왜냐면'에 목원대 문윤수 교수가 기고한 '상업예술과 애국심의 잘못된 만남'에 대한 반론과 보론이다.

지난 한일 월드컵에서 시민들은 대표적인 국가 상징 중 하나인 태극기로 갖가지 다양한 디자인의 옷과 장신구를 만들었다. 그러한 파격적인 시도는 그동안 국경일에나 접했던 태극기의 엄숙주의를 깨고서 태극기를 좀 더 시민들에게 친숙한 상징으로의 전환을 체험케 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강당이나 운동장보다 길거리에서 누구나 쉽고 친근하게 부를 수 있는 애국가를 기대해도 되지 않을까.

다음으로 문 교수는 "어떤 형식, 어떤 방법으로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국가'에 상업성이 침투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며 "어떤 형식, 어떤 방법으로든"이라는 강한 수사를 구사하고 있는데, 이는 다른 의견마저 차단시킬 여지가 있다.

가령 최근 진보진영에서는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의 친일논란과 관련하여 애국가 교체 논쟁이 한창인데 이러한 애국가에 상업성이 침투해서는 안 된다는 '성역 만들기'가 자칫 과거에는 생각할 수도 없었던 애국가 교체라는 시민사회의 발칙한 상상력과 비판마저 봉쇄시킬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문 교수가 지적한 애국가와 상업성의 결합은 "찜찜한 결합"이며, 시민정신으로 저지해야 하는 것에 동의한다. 그러나 문 교수가 말했듯이 "이런 상업광고주 개입은 불가피"하다면 이러한 모순을 안고서 시민사회에 최대한 긍정적인 방향과 활력을 도출하는 데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기자가 애국심과 상술의 "찜찜한 결합"보다 더욱 우려하는 점은 지난 한일 월드컵 열기가 이후 미군 장갑차 사건으로 인한 촛불시위로 이어졌다는 사회학적 분석이 과연 이번 월드컵 시즌에도 적용될 수 있는가하는 회의감 때문이다. 즉, 상업성의 모순을 안고서라도 월드컵의 열기를 시민사회의 중요한 쟁점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가 말이다.

진작부터 타오른 이번 독일 월드컵의 열기 속에서 시민들은 내전을 방불케 한 대추리 사태와 FTA에 대해서는 매정하리만치 싸늘하게 눈을 감고 있다. 시민사회는 언제부턴가 26돌을 맞은 5·18 광주민주화항쟁 기념식처럼 '끝나버린 내전'으로 다시는 우리에게 오지 않을 '기념식'으로만 기억하며 현재진행형인 내전을 인식하고 있지 못한다는 점, 나는 이러한 역사적 무감각이야말로 두렵다. 

애국가에 대한 '쿨'한 사고는 필요하다. 관건은 이러한 '쿨'한 사고를 사회 모순을 해결하는 자양분으로 정초시키는가 혹은 한바탕의 축제로만 배설하는 가다. 이는 근래 불거진 '87년 체제의 위기'를 측정하는 척도이기도 하다.   
 
한겨레 [왜냐면] '상업예술과 애국심의 잘못된 만남' 전문

문윤수 목원대 광고홍보언론학과 교수  
 
전 세계적으로 응원 현장에서 자기나라 '국가'를 다른 방식으로 부르거나 아예 상업적인 목적으로 개사, 편곡하는 유례는 없다.

국제 스포츠행사가 치러질 때 가장 호들갑을 떠는 것이 바로 상업광고다. 요즘 대중매체를 볼라치면 다가올 월드컵을 찬양하기 위해 어느 곳이든 광기를 뿜어내듯 요란하다. 그런데 그 광기에서 특이한 점은 업종이 상이함에도 모두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애국심'이다. 그간 애국심에 무심했던 대중을 기업광고에 동참시키고 구매행위로 연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혹자는 국제행사가 경제적으로 잘 치러지기 위해서는 이런 상업광고주 개입은 불가피하다고 한다. 그러나 그 개입은 '소비자' 참여가 아닌 '시민' 참여라면 불가피할 이유가 없다. 애국심과 상술의 찜찜한 결합이라면 '시민정신'으로 저지하는 것이 옳다.

얼마 전 가수 윤도현 씨가 '애국가'를 월드컵 응원용으로 편곡해 대중에게 공개했다. 이는 현재 한 이동통신사에서 상업적으로 쓰이고 있다. 윤 씨의 의도가 아니더라도 그의 애국가는 상업적 수단에 사용된 셈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런 현상에 별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거나 친근하게 받아들인다. 전 세계적으로 응원 현장에서 자기나라 '국가'를 다른 방식으로 부르거나 아예 상업적인 목적으로 개사, 편곡하는 유례는 없다. 더욱이 이를 애국심이라 착각하는 경우도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국제행사에서 부를 우리 애국가를 시대에 뒤떨어진 멜로디라거나 응원 열기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고쳐 부르고 있다.

몇 년 전 미스코리아 출신 탤런트 이승연 씨는 '군대 위안부 할머니들의 아픔을 전 세계에 고발하고자' 누드 화보집을 내기로 발표했다. 사람들의 반응은 찬반양론으로 뜨거웠지만 비판적 반응이 압도적이었다. 어찌 할머니들의 아픔을 상업적으로 이용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씨는 같은 상업예술인인 윤 씨처럼 자신의 능력껏 애국심을 발휘하려다가 결국 큰 봉변을 당했다. 차이가 뭘까? 필자는 상업적 수단으로 봐서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본다. 오히려 이씨가 자신의 방식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사죄한 눈물이 사심 없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승연 씨는 한동안 방송에 얼씬도 못한 반면, 윤도현 씨는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대중적 열기를 돋워주겠다는 명분으로 '애국가'를 서구 유행의 카니발적 음악 장르로 변형해 불러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가? 어떤 형식, 어떤 방법으로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국가'에 상업성이 침투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태극기가 성조기보다 꽉 찬 느낌이 없다고 별을 그려넣거나 일장기처럼 깔끔치 못하다고 '건곤감리'를 뺄 수는 없다. 그런데 한낱 상업적 목적으로 이상하게 바뀐 애국가에 우리는 왜 아무도 문제삼지 않는 걸까? 우리 국민들의 사고가 언제부터 이렇게 '쿨'했는가? 오히려 정말 '쿨'하게 굴러가야 할 우리 사회의 과제들이 반목으로 지체되고 있는 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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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6/05/22 [14:46]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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