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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합리적 감성에 기대는 아마추어 진보세력
[정문순 칼럼] 집권세력과 보수세력에 무시당하는 진보세력은 반성해야
 
정문순   기사입력  2006/05/06 [11:28]
'제2의 경술국치, 내선일체가 따로 있나, 미국 식민지….' 민주노총 정책토론회 자료집에서 한미자유무역협정(FTA)을 빗댄 격양된 표현들이다. 몇 쪽 더 넘겨보니 '의병 운동'을 벌이자는 말까지 나온다.

한미 FTA를 미국이 한국의 주권을 넘보려는 침략행위 쯤으로 보는 건 진보진영 일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목소리들이다.

비단 FTA뿐만이 아니다. 어떤 대미 정책을 들이밀어도 진보진영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반응은 한 가지다. 진보진영에 따르면 미국과의 모든 대외 관계는 한국의 주권이 바람 앞의 등불 신세로 전락하느냐 마느냐가 달린 문제이다.

대통령이 백악관 주인 앞에서 무례한 언사를 듣는 것도 나라 전체가 분노할 일이었다. 미국뿐만이 아니다. 독도 문제 때도 식민지 논리는 단골로 등장하며, 최근에는 중국도 기꺼이 제국에 합류시키려는 움직임이 있다.

진보진영 일각의 사고체계는 정교하고 과학적인 인식이 아니라 한국인들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뼈아픈 콤플렉스에 불과하다. 한국인들이 자국에 대해 스스로 갖기 쉬운, 강대국이 호시탐탐 엿보는 약한 나라라는 인식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 있지 않은 것이다. 식민지 역사를 경험한 한국인의 감성을 자극하는 데는 나라를 다시 빼앗길지 모른다는 위기의식만큼 적절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콤플렉스에 불과한 사고 틀

그러나 강대국 대 약소국의 대립으로 세상을 바라보자고 호소하는 건 진보진영만이 아니라 그들이 각을 세우고 있는 정부나 보수 세력도 마찬가지다. 나라가 넘어간다는 걱정은 진보 진영만 하고 있는 건 아니다. 나라가 약하니 남한테 안 먹히려면 힘을 길러야 한다는 생각은, 미국이 하라면 죽는시늉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정부도 똑같이 하고 있다.

다만 진보진영이 맞장을 뜨자는 데 반해 정부는 겁없이 대들면 얻어터지기만 할 뿐이라는 식이다. FTA 협상에서 망해가는 농촌을 내어주고 반도체 등 돈 되는 것을 건지자는 것이 다를 뿐이다.

진보진영의 사고 틀이 한국인들의 비합리적인 감성에 기대고 있다는 건 서글프다. 나라의 주권을 빼앗길 수 있다는 위기의식, 남들이 넘보지 못하는 힘센 나라에 살고 싶다는 국민들의 욕망을 건드리는 것에 불과하다면 그건 진보도 무엇도 아니다. 정부와 똑같은 논리를 가지고 정부와 싸우는 것이 통하리라 기대한다면 순진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FTA 협상으로 미국 전체가 이득을 보는 것도, 한국민 전체가 피해를 보는 것도 아니다. 기득권자들과 민중의 이해관계가 분명히 다르다. 도시 중산층에게 농민들이 쌀농사를 포기하는 건 전혀 절박한 문제가 아니라는 점은 쉽게 망각되고 있다.

세계화를 국가 간의 대결 문제로 보는 한 국경을 넘어선 세계 시민들의 접촉은 꿈꾸기조차 힘들다.

알맹이 없다면 선거결과 뻔해

보수 세력은,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데 경술국치 운운하여 100여 년 전의 세상을 보는 눈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이들에게 조금도 긴장을 느끼지 않는다. 집회에서 농민들이 차례로 목숨을 잃어도 집권 세력이 눈 하나 깜짝 하지 않을 수 있는 것도 진보세력의 무능과 구태의연함 때문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집권세력이나 진보세력이 똑같이 알맹이가 없다면 다가올 선거 결과는 어쩌면 투표함을 뜯어보지 않아도 뻔하다. 기득권자들이 서민을 위하기는커녕 오히려 갉아먹는 정치를 해도 표를 잃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일은 아니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하층민들은 세상이 뒤집어질 수 있다는 기대를 쉽게 품지 않을 만큼 냉정한 사람들이다. 꿈에라도 바꾸고 싶어하는 것이 진보세력의 소원처럼 세상 전부가 아니라 자신의 처지에 국한되는 사람들에게 어설픈 진보정당의 존재는 환영받기 어렵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진보세력은 오죽하면 내세울 것이 없어 기껏해야 이미지로, 색깔로 정치를 하겠다는 빈털터리 정치꾼들에게 분개해야 마땅하다. 정치를 한판몰이 흥행이나 이벤트로 격하시키는 자들은 정치를 모욕하는 자들에게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의 역량으로 그럴 만한 자격이 되는지 의문이다./문학평론가

* 본문은 '언론개혁을 바라는 시민들이 힘을 모아 만든 신문' 경남도민일보 http://www.dominilbo.co.kr  2006년 5월 5일자에도 실렸습니다.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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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6/05/06 [11:28]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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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쎄요 2006/05/06 [19:10] 수정 | 삭제
  • 역사의 식민지 경험을 반추하는 대중의 감정은 반드시 '어떤 과학적인' 진보에 의해 거세되어야 할 비합리적인 콤플렉스와 같은 어떤 것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그런 인식에는 반복된 역사의 집합적 성찰이 녹아있다고 생각하면, 과연 너무 역시 '대중추종적이고 감성적인' 믿음에 불과한 것이기만 할까요?

    물론 윗글이 '얄팍한 이미지 정치'에 대한 환멸을 표현한 것이라면 이해가 안 가는 바는 아니지만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