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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이 ‘이규태 한국학’ 즐겨읽었다고?
조선일보, ‘이규태 코너’ 혹평한 도올 김용옥이 ‘즐겨읽었다 고백’ 왜곡해
 
이창은   기사입력  2006/03/11 [19:16]
최근 새만금 시위로 언론의 주목을 받은 도올 김용옥 교수(아래 도올로 약칭함)에 관한 자료를 검색하다가 아주 희한한 기사를 검색하게 됐다.
 
얼마전 조선일보에 장장 6700여 회를 연재하다가 타계한 이규태(조선일보 전 고문) 씨 소개기사에 도올이 미국 유학중 ‘이규태의 한국학-이는 이규태씨의 조선일보 연재 이규태 코너를 지칭하는지, <한국인의 의식구조>를 지칭하는지 분명치 않으나 대체로 이규태의 글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임)을 즐겨읽었다고 고백했다는 기사다. 그것도 다음과 같은 제목으로 굵직하게 표시되어 있다.
 
이한수, 도올 김용옥도 미 유학중 "'이규태 한국학' 즐겨 읽었다" 고백(조선일보 2. 27일자)
 
▲조선일보 이한수 기자의 '이규태 코너' 소개기사, 도올 김용옥이 "이규태 한국학 즐겨읽었다 고백"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정반대이다.     © 조선일보 2월 27일자 PDF
이한수 기자의 이규태 소개기사는 이씨의 연재기사 ‘이규태 코너’의 시작과 그간 에피소드들을 장황하게 설명하면서 말미에 “도올 김용옥씨도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에서 미국 유학 중 ‘이규태 한국학’을 즐겨 읽었다고 고백한 것도 유명한 이야기다.”라며 끝을 맺었다. 즉, 도올 같은 석학(?)도 ‘이규태 코너’를 인정했다며 은근슬쩍 고인의 성가와 명예를 위해 도올의 평가를 갖다 부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도올의 1985년 1월(초판본) 민음사에서 출판된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를 보면 이한수 기자는 물론 고인이 된 이규태 씨 조차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혹평을 하고 있다. 과연 이한수 기자는 어떤 <동양학...>을 보고 그런 평가를 내렸는지(이후 개정판이 나왔다는 소리는 못들었다. 97년 통나무 출판사에서 재출간) 모르지만, 지금이라도 서점이든 도서관에 가서 도올의 <동양학...> 57쪽에서 61쪽에 언급된 이규태 관련 글들을 다시 한번 정독하길 바란다. 정독하고서도 과연 도올이 이규태를 상찬했는지 혹평했는지를 살펴보고 정정기사를 낼 수 있으면 내기 바란다.
 
도올의 <동양학...>은 82년 하버드대에서 학위를 받고 귀국 이후 고려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한국의 학문적 현실을 개탄하면서 도올이 그야말로 ‘한국학계에 고함’이라는 처절한 외침과 사명감으로 완성한 연구서이다. 도올은 이 책에서 한국의 학문적 주체성을 강조하면서, 그 첫 번째는 외국학문에 대한 ‘한국적 번역을 통해 이해’를 강조했으며, 당시만 해도 아무도 관심갖지 않았던 ‘번역’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제기했다. 당시 인문과학서 치고는 학계 뿐 아니라 일반인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쳐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한, 인문학의 새로운 성과로 도올의 명성을 확고히 뿌리내리게 한 그야말로 ‘학계의 파천황(破天荒)’이 된 책이었다.
 
도올은 이 책 제2장 “번역에 있어서의 공간과 시간” 도입부에서 이규태의 ‘韓國人의 意識構造’라는 책을 예로 들며 혹평을 가하기 시작한다. 먼저 ‘의식구조’ 같은 거창한 제목의 책은 60년대 일본의 ‘의식구조’ 시리즈 모방작이라며, 이 책의 한 부분인 ‘완세트 主義’에 나와 있는 이규태의 ‘의식구조’를 중심으로 분석을 가했다.
 
이 씨는 한국인이 무엇을 사도 세트로 장만한다면서 ‘한 세트가 아니면 상대를 안한다’며 의식구조를 꼬집었다. 그러면서 한국인은 차를 몰고가다 살짝 부닥쳐도 뛰어내려와 죽일놈 살릴놈 하고 아우성을 치면서 싸우지만, 미국인들은 차가 부닥쳐도 그냥 웃고 지나간다면서 이는 한국인이 “자동차를 한 세트로 고스란히 보존하려는 세트의식이 발동해서 그렇다”는 것이며, 미국인은 차가 부닥치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어 그냥 웃고 지나간다는 것이다.
 
도올은 이규태 씨의 위와 글을 보고 “쓴 웃음을 지으며 그 책을 덮고 말았다”면서 미국은 보험제도가 다 되어 있고 변호사들이 나서기 때문에 싸울 일이 없으며, 누구나 개인적 교통수단인 자동차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문화적 차이는 간과하고 피상적으로 접근하고 있음을 비판했다. 아울러 도올은 “미국의 자동차는 한국에서 구두의 의미인데, 누가 자신의 구두를 밟으면 죽기 살기로 싸우겠느냐?”면서 이규태 씨의 의식구조에 대해 혹평을 내린 것이다.
 
물론 도올의 이같은 비판은 이규태의 ‘한국인의 의식구조’나 글쓰기를 비판하고자 함이 아닌 올바른 ‘번역’을 위해서는 ‘문자의 옮김이 아닌 의미의 옮김’이란 전제를 강조하기 위해 이규태 씨의 글을 인용했던 것이다.
 
또 도올은 이규태 씨가 과거 조선일보에 연재했던 ‘인맥’시리즈에 대해서도 본문 아닌 각주(의 주석)를 통해 혹평하고 있다.
 
도올은 자신이 유학을 떠나기 전 조선일보 연재물인 이 씨의 ‘인맥’시리즈가 다른 것은 몰라도 지역적으로 동서남북으로 찢어질 대로 찢어진데다 학벌, 족벌, 문벌, 파벌, 관벌 등으로 갈라질 대로 갈라진 사회를 드러내야 하겠냐며 비판했다. 또한 당시 중앙일보의 연재물인 ‘성씨의 고향’에 대해서도 비판을 잊지 않았다. 도올은 인맥이나 성씨 등 뿌리의 인식도 중요하지만, 편파주의로 빠져서는 안되며 언론과 저널리스트는 이 사회의 작폐를 부채질 해서는 안된다는 지적을 강하게 했다.
 
무려 다섯 쪽에 걸쳐 이규태의 의식구조를 비판한 도올은 더 이상 특유의 신랄한 공격을 하지 않았다. <동양학...>이 쓰여진 84년 전후로 볼 때 아마도 당시 도올의 눈에는 조선일보가 그리 주목할만한 신문으로 평가하지 않은 듯 하다. 80년대 초만 하더라도 박정희 정권과 싸워 광고탄압을 받은 석간의 동아일보가 압도적이었으며, 조간에는 한국일보의 발행부수가 조선일보 보다 더 많고 영향력도 높은 시기였다. 
 
▲한국 동양학의 입문서 역할을 한 도올 김용옥의 85년 저서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 본서에서 도올은 이규태 씨의 글을 직접 인용하며 혹평을 가했다.     © 민음사, 1985.
도올의 <동양학...>은 85년 출판됐고, 도올의 성가를 높힌 책이었다. 도올은 새만금 시위에서 노무현 대통령 폄하발언으로 논란을 빚기도 하는 등 항상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때문에 이한수 기자가 고인이 된 이규태 씨의 ‘이규태 코너’를 설명하면서 도올이 ‘이규태 한국학 즐겨읽었다’고 ‘고백’까지 했다면 당연히 도올의 평가 부분을 인터뷰를 하던 전화통화를 하던 이른바 ‘도올의 언급’을 직접 따와야 했다. 그런데 ‘고백’했다면서 제목에 다는 용기는 어디서 비롯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특히 이한수 기자는 2000년 3월부터 한국학중앙연구원(옛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과정에서 공부했고, 조선시대 정치에 관련된 논문 3편을 학술지에 발표한 바 있다고 자신을 소개한 만큼 다른 사람의 발언을 인용할 때는 출처와 근거를 밝혀야 했지만, 자신의 기사에는 이런 기준은 적용하지 않았다.

설사 도올의 ‘이규태 한국학’에 대한 평가가 1985년 이후 달라질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이한수 기자가 언급한 것은 <동양학...>이라고 적시한 만큼 그에 대한 근거가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이규태 씨의 글을 즐겨 읽었는지는 언급이 없다.
 
자칭 ‘1등 신문’이라고 자부하는 조선일보가 ‘이슈메이커’인 도올의 이름을 빌려서까지 ‘이규태 코너’를 띄울려고 했지만, 사실과는 정반대였다. 고인이 된 이규태 씨는 이 사실을 알았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못내 궁금하다.
 
고인에겐 관대한 것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공통된 정서이지만, 정말 ‘이규태 코너’는 한마디 안할 수 없다.
 
83년 3월 1일부터 2월 25일 임종 직전까지 22년 11개월 간 6700여 회를 연재한 ‘이규태 코너’는 어찌보면 한국 민속사에 대한 백과사전식 인용이자 언급이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지적했듯이 피상적 이해와 현상에 대한 견강부회식 글쓰기, ‘쓴 내용 쓰고 또 쓰고’ 평가를 면할 수 없다. 특히 한국 민속에 대한 평가는 과거 일본 사학자들이 한국사를 왜곡하기 위해 식민사관용으로 발굴한 내용과 상당히 겹치는 평가를 벗어나기 어렵다.
 
무엇보다 고인이 연재를 시작한 83년은, 이른바 조선일보가 광주항쟁을 피로 물들여 집권한 신군부 세력과 긴밀한 공조를 과시하면서 영향력을 키워 가던 시기였으며, 친정부 어용신문의 성격이 강해지던 시기였다. 어찌보면 이규태 씨는 그런 조선일보에 충실한 것 이외에는 평가할만한 것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래도 전반적인 신문산업의 위기속에 날로 영향력이 감퇴되는 그 시점에 조선일보와 ‘인연’이 끊어진 것이 행운이라면 고인에게 덕담이 될는지...  
 
조선일보식 왜곡과 오독을 피하기 위해 이한수 기자의 추모기사를 옮겨 싣는다.

이한수, 도올 김용옥도 미 유학중 "'이규태 한국학' 즐겨 읽었다" 고백(조선일보 2. 27일자)
 
1983년 독립선언의 산실 태화관(명월관 지점) 이야기로 첫 회를 시작한 ‘이규태 코너’는 23년간 6700여 회를 이어오며 숱한 화제를 낳았다. “어디서 그런 소재를 찾느냐”, “살벌하고 딱딱한 시사 기사 속에서 유일하게 인간적인 기사”라는 격려는 물론 ‘코너’를 꼼꼼히 읽고 잘못을 지적하는 독자들의 질책도 줄을 이었다. 하지만 격려든 질책이든 독자들은 모두 ‘코너’에 대한 깊은 애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영화 ‘여정(旅情)’의 주인공 캐서린 헵번을 오드리 헵번으로 잘못 썼다가 닷새 동안 무려 100여 통의 전화를 받기도 했다. 또 외설적인 고유명사를 가진 조개 이름을 그대로 썼다가 “학생들의 정서를 해쳤다”는 이유로 언론중재위원회에 피소되기도 했다. 미로의 비너스 이야기를 쓰면서 가슴이며 허리 치수를 썼는데 10여 년 뒤 다른 소재로 비너스 이야기를 썼더니 예전 것과 치수가 다르다는 전화가 걸려오기도 했다. 이 같은 열혈 독자들 덕분에 ‘코너’는 “고마운 감시망이 삼엄하게 둘러싸인 계엄(戒嚴) 속의 코너”가 될 수 있었다.
 
‘코너’는 ‘이규태 한국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특히 한국의 ‘씨받이 문화’는 그가 처음으로 세상에 알린 것이다. ‘씨받이 부인’(1984년 2월 9일자)은 1971년 그가 직접 취재한 대리모 할머니 기사를 바탕으로 쓴 것인데 ‘씨받이’라는 잊혀진 한국의 민속문화를 알리는 계기가 됐다. ‘씨받이’는 임권택 감독의 영화로 만들어져 1987년 베니스영화제에서 주연배우 강수연은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그의 ‘코너’는 미국 대학 교재에 실리기도 했다. 한국을 중심으로 한 북방 문화권의 온돌문화에 대한 이야기(1989년 5월28일자)와 탈권위적이고 평화지향의 성격을 지닌 우리나라 신발 ‘고무신’(1995년 4월23일자)은 2003년 미국 하와이대 한국어교재에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로 전재됐다.
 
도올 김용옥씨도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에서 미국 유학 중 ‘이규태 한국학’을 즐겨 읽었다고 고백한 것도 유명한 이야기다. / 이한수기자 hs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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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6/03/11 [19:16]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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