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안법 개폐 논의가 여야간의 힘겨루기로 진흙탕에 빠져들고 있다는 식의 진단은, 노대통령의 국가보안법 폐지 발언이 나온 이후 수구신문들이 보인 일관된 논조였다. 처음에야 이런 발언은 국가보안법 논쟁을 정치권의 정쟁으로 매도하여 결국 죽도 밥도 안되게 하려는 수구세력의 악의라고 의심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논의가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둘 사이의 ‘더티한 싸움’으로 변질되는 기류는 분명 잡히고 있다. 9월 16일 문화방송 <백분토론>에서 두 정당의 패널들이 주고받은 입씨름을 보면, 보수정치권의 손에 악법 개폐 논의가 장악될 경우 일어날 수 있는 폐해가 잘 드러난다. 토론에서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은 당연히 국가보안법 폐지냐 부분 개정이냐 하는 잣대로 마주보고 앉는다. 한나라당이 줄곧 물고 늘어진 건 국가보안법을 없앨 경우 생길지 모르는 법의 공백이었다. 그러면 열린우리당의 주자로 나온 최재천 의원은, 국가보안법을 당장 폐지해도 현행 형법으로도 반국가적인 행위를 충분히 처벌할 수 있다고 역설한다.
이 중 최 의원과 한나라당측과 나란히 앉은 이승환 변호사가 벌인 공방은 한쪽 귀로 흘려듣기에는 아까운 것이었다. 점입가경인 이들의 논쟁을 기억을 더듬어 옮겨본다. -이승환: 몇몇 사람이 모여 인공기 들고 만세를 부른다고 칩시다. 국가보안법이 없어도 현행 형법으로 처벌이 가능하다는 말씀입니까? -최재천: 당연히 가능합니다. 형법에 ‘소요’와 ‘내란’죄가 있다는 것 모르십니까? -이승환: ‘내란’은 폭동 같은 사태를 일으켜야 해당되고, 사람이 많이 모이면 모를까 몇 명 모인 것 가지고는 ‘소요’라 하기도 힘들지요. -최재천: 모르시는 말씀이에요. 인공기를 들고 모인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의 의도가 무엇이겠습니까? 장차 폭동이나 소요를 일으킬 마음을 가지고 모인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당연히 형법의 내란예비음모죄를 적용하여 처벌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승환: 허허, 그렇게 말하면 죄형법정주의에 어긋나지요. 어디 그렇게 추측해서 처벌할 수야 있나요? 토론 내내 이동복을 비롯한 상대 패널들의 공격을 숨도 쉬지 않고 맞받아치던 최재천 의원은 여기서 밑천을 드러냈다. 우습게도 이 부분만큼은 수구 인사의 논지가 백 번 옳았다. 명백하고 구체적인 행위가 아니면 처벌할 수 없다는 근대법의 정신에 비춘다면 ‘예비음모’ 운운은 가당찮은 발언이다. 국가보안법 폐지를 반대하는 자의 입에서 죄형법정주의라는 말이 나올 수 있고, 반면에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는 이의 논지는 죄형법정주의를 부정하는 데 기대고 있으니 이런 아이러니도 없을 것이다. 한쪽이 국가보안법을 존속시킨 논리를 들어 국가보안법 철폐를 말하면, 다른 쪽은 국가보안법을 철폐하는 논리로 국가보안법 철폐를 반대하는 주장을 펴는 희극을 연출한 셈이다. 어떡하든 상대방과의 논쟁에서 이기고 보려 하니, 국가보안법을 결사보위하려는 쪽은 국가보안법이 근대 법치주의에 어긋나는 악법임을 실토하고 있고, 형법으로 국가보안법을 대체하자는 이는 정작 그 형법이 국가보안법 못지 않은 악법임을 자인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낳는 것이다. 지금의 형법이 국가보안법을 충분히 대체할 수 있다고 하는 최 의원의 주장은, 열린우리당의 당론과는 다른 점이 있다. 그러나 뱀이 제 꼬리 물어뜯는 식의 자가당착에 빠진데다 근대 법정신도 제대로 학습하지 못한 최 의원에게서 열린우리당의 행보를 읽어낸다 하여 무리는 아닐 것이다.
실제로 대체입법이나 형법 보완으로 가닥을 잡은 것하며, 북한을 준적국으로 규정하려는 열린우리당의 움직임은 매우 우려스럽다. 벌써부터 지쳤는지 속도 조절을 하겠다는 발언도 집권당내에서 나온다. 문제의 원인은 국가보안법이 있어도 별로 불편할 것 같지 않은 노무현 정권에게 희대의 악법의 생사여탈권이 장악되다시피 한 데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국가보안법 완전 폐지라는 진보진영의 열망을 담아 정부를 압박하고 담론을 주도해야 할 민주노동당은 오히려 지금의 정국 구도에서 뒤로 밀려난 인상이 역력하다. 집권자가 발빠르게 국가보안법 폐지 움직임을 주도하는 동안 민주노동당은 기동성 있게 무엇을 했는지 잡히는 것이 없다. 텔레비전 토론에서도 자리를 얻지 못할 만큼 민주노동당은 제3당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있다. 국가보안법 때문에 제약을 받는 것으로 치자면 민주노동당이 열린우리당에 비교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다른 어느 지역보다 민주노동당 지지율이 높은 창원 지역에서는 최근 터진 시의원의 금품수수 사실로 정당의 신뢰도가 곤두박질치고 있다. 거대 정당들끼리 어물쩍 타협하여 악법이 생명을 연장 받거나 새끼 악법이 다시 태어나는 일이 없도록 민주노동당이 역할을 다할지 지켜볼 것이다. / 편집위원 * 필자는 문학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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