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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풍스러운 집도 남루해 가는 시골마을의 향기
[남도기행7] 전남 나주 동강면 한 시골의 풍경과 영산강의 오염
 
김철관   기사입력  2010/08/15 [20:40]
▲ 마현부락 골목     ©
강진에서 영암, 함평을 거쳐 나주에 도착했다. 4대강 사업 찬반으로 떠들썩한 남도의 영산강은 나주, 함평, 무안, 목표 등과 밀접한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 특히 나주시 동강면 운산리와 함평군 학교면 곡창리는 영산강을 두고 다리(동강대교)로 연결돼 있었다.
 
영산강과 지근거리에 있는 나주시 동강면으로 진입했다. 옛날 추억을 간직하면서 다 쓰러져간 ‘동강주조장’은 아직 간판만이 주조장임을 알리고 있었다. 이곳 운산리에서 생활했던 많은 옛 사람들이 주조장 막걸리를 마시면서 농사를 지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폐가가 된 주조장의 현재 모습이 씁쓸하게 다가왔다.
 
이곳은 함께 갔던 친구의 고향(동강면 운산리 마현 부락)이기도 했다. 친구는 6.25때 많은 사람이 이곳에서 죽임을 당했다고도 했다. 실제 어렸을 때, 저녁이면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에 바짝 얼 때도 많았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 시골공동 재산 감나무가 이어졌다.     ©
 
살고 있는 동네와 15리 정도 떨어진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녔는데 차비를 써버리고 이곳 주조장으로부터 집에까지 걸어 집으로 향한 길이 무시무시하게 무서웠다고도 했다. 동강주조장을 지나 가파른 오르막길이 나왔는데 ‘쑥국재’라는 고개였다.
 
바로 지나자 양계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이 길 주변에서 6.25 전쟁 때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공산당을 ‘인공’으로 부르고 있었다. 의미는 ‘인민공화국’을 의미한 듯하지만  왜 이렇게 불렀는지는 아는 사람은 없었다.

오솔길을 따라 논과 밭이 이어졌고, 산인지 숲인지 모르는 조그만 산들이 녹음을 뽐냈다. 산과 논과 밭을 이어 동네까지 이어진 전봇대 전기줄에는 새들이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전기줄 아래 황량한 들판에는 나락의 풍작을 기원하면서 삽을 들고 물길을 여는 농부의 모습이 어린 시절 시골생활을 회상하게 했다.

▲ 과거 고풍스러운 집이었지만 남루한 집이 된 시골 한옥     ©

소꿉장난을 하면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던 친구의 고향 동네(마현 부락) 입구에 들어서자, 원두막에서 모기장을 쳐놓고 낮잠을 즐기는 한 아주머니의 모습이 정겹게 보였다. 낮잠을 자는 사람에게 부채를 부쳐주는 모습은 시골의 따뜻한 정이 살아 있음을 느끼게 했다.
 
동네 호호마다 쳐 있는 울타리는 굵은 벽돌로 막아 자신의 집 임을 표시했고, 그 울타리를 타고 생존한 호박 넝쿨에 열린 애호박은 자연의 질긴 생명력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골목길 옆 나무에 열린 탱자, 무화과, 감, 포도, 청도복숭아 등 유실수가 자꾸 눈에 들어왔다.
 
동네 길목에서 동네 밖으로 줄지어 심어있는 감나무는 주민 공동재산으로 수확해, 수입금은 주민들이 공동으로 쓸 수 있는 잔치, 마을 길 수리 등에 쓰고 있었다. 동네는 검정기와와 파란색 페인트칠을 한 지붕, 그리고 하우스 등이 잘 어우러져 있었다.

▲ 대문의 포도송이 눈길     ©

활짝 열려 있는 아치형 집 대문 위 종이에 싸여 주렁주렁 열린 포도가 먹음직스럽게 다가왔다. 그 집 앞마당에 하우스가 있었고 하우스 옆 멍석에는 빨간 고추를 말리고 있었다. 그 옆에 줄지어 있는 화분에 심은 푸른 화초가 이목을 집중시켰다.
 
동네 앞 들판은 나락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동네 골목을 들어서자 대나무가 산들거렸고, 봉숭아와 맥문동도 피어 있었다. 골목길 맨 마지막 집이 친구의 고향집이었다. 한지로 바른 문짝이 집 사방에 여러 개(30여개)가 노출됐고. 어림 잡아 방이 10여개 안팎 존재했던 것으로 짐작됐다.
 
 집의 크기와 마당을 보니 과거 고풍스러운 집이었음을 단박에 눈치 챌 수 있었다. 과거 형체는 그대로 살아 있지만 초췌하고 남루한 집의 모습에서 아쉬움이 느껴졌다.

▲ 마현 부락 풍경     ©

하지만 무슨 연유인지 몰라도 가세가 기울어 졌다면서 기억을 지우려는 친구의 모습이 안쓰럽게 다가왔다. 고인이 된 친구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마당에 유실수가 많았었다. 하지만 고인이 된 이후 관리할 사람이 없어 유실수가 거의 없어졌다. 지금까지 몸이 불편한 홀어머니가 집을 지키고 있었다. 친구는 마당에 유실수가 많아 어릴 적 친구들과 학교를 가면서도 따 먹고 갔다고도 했다.
 
당시 집과 밭에는 포도, 감, 무화과 등 유실수가 많아 어머니의 시골 별칭이 ‘유실댁(유실떡)’으로 지금까지도 통하고 있었다. 친구 어머니가 쪄놓은 옥수수를 받아 맛을 보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입맛을 돌게 했다.
 
지금도 집 주변은 한두 그루 단감나무, 무화과나무, 탱자나무 등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를 보면서 과거 이들의 부유한 삶을 떠오르게 했다. 집 사방을 가만히 둘러보니 문짝이 많고, 마루와 토방, 넓은 마당, 아래 사랑방 등으로 보와 상당히 부자였다는 사실을 직시할 수 있었다. 현재 수리도 하지 못하고 옹색한 집으로 변하고 있는 안타까움이 마음을 저밀게 했다.

▲ 영산강에서본 마현 부락     ©

친구집을 나와 고인이 된 친구 아버지가 농사를 지으면서 인근 강에서 나룻배를 타고 고기를 잡았던 그 흔적을 찾아 나섰다. 바로 함평과 가까운 영산강 상류였다. 그곳으로 급히 발길을 옮겼다. 영산강에서도 고향 동네(동강면 운산리 마현 부락)가 보였다. 동네 운치가 아주 좋았다. 영락없이 논과 밭, 뒷동산이 어우러진 전통 시골 부락이었다.
 
동네에서 논길을 가로질러 이곳 영산강까지와 나룻배 고기잡이를 해, 처자식을 먹여 살렸던 고인(친구 아버지)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고인이 일본어도 유창하게 했고, 당시 기타를 잘 쳤다는 전언을 들으니 멋진 풍류객 같은 느낌이 마음 속에 자리했다.

친구는 영산강이 밀물일 때 친구들과 영산강 물놀이, 낚시, 조개잡이, 토하(새우)잡이, 수영 등 어릴 적 기억들이 자꾸 떠오른다고 말했다. 당시 영산강 하류에 수문이 설치되지 않아 바다와 강물이 공존하고 있었다. 하지만  80년 초 영산강 하류(하구, 목포 쪽) 간척지 수문 공사로 밀물과 썰물 현상은 사라졌고 물이 흐르지 않아 영산강 상류 오염의 주범이 됐다.

▲ 영산강 노을     ©

이곳 영산강을 끼고 나주와 함평을 잇는 동강대교가 존재했다. 동강대교를 넘으면 행정도시가 바뀌게 된 셈이었다. 노을 진 동강대교의 주변 모습은 강과 하늘과 산이 어우러져 장관이었지만 영산강의 물은 울고 있는 듯했다. 친구는 "과거 조개를 잡고, 수영을 하던 청정한 영산강이 떠오른다"면서 "현재 오염이 돼 고기도 잡히지 않은 영산강의 모습이 너무 안타깝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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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0/08/15 [20:40]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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