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나리의 초록세상 만들기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노무현 진정성과 전두환 진정성의 사이에서
[비나리의 초록공명] 진정성이 성립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은 일관성
 
우석훈   기사입력  2007/02/21 [10:23]
작년에 <인물과 사상>에 기고했던 글인데, 이젠 꽤 지나서 공개해도 괜찮을 것 같아서...
 
진정성이라는 해괴망칙한 용어가 가지고 있는 문제가 뭔지에 대해서 한참 고민하던 시절, 내가 왜 이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가라는 생각을 정리하면서 썼던 글이다.
 
1. 오, 이오덕 선생님!

이오덕이라는 분이 계시다. 소파 방정환 선생 이후로 최고로 훌륭하신 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전두환 정권 때 학교운영에 대한 간섭이 너무 심하다고 결국 퇴직하신 어느 초등학교 선생님 정도로만 알고 있다가, 교육철학가이시며 또한 한글운동을 오래 하셨던 선생님의 글을 최근에 읽으면서 나는 어쩌면 너무 오래 전에 했어야 할 반성을 뒤늦게 하게 되었다.

“울면서 하는 숙제”에 나온 백미터 달리기 얘기는 충격적이었다. 70년대, 유신경제의 한 가운데에서 우리가 드디어 ‘돈을 번다는 것’ 그리고 시장에서 ‘경쟁한다는 것’에 대해서 눈뜨기 시작한 바로 그 시절의 일이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아이들에게 100미터 달리기를 시키고, 친구를 이겨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은 너무 잔인한 일이고, 그래서 아이들에게 손잡고 달리기를 먼저 가르쳐야 한다는 이오덕 선생님의 가르침은 도대체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의 문제점이 무엇인가 정말 처음부터 근본부터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나는 부끄러웠다.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반에 쓰신 글들은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와 똑같다. 요즘 사람들은 출판기념회 같은 것을 하는데, 자기 책을 팔겠다고 생각하는 데다가 더 잘 팔리라고 출판기념회를 하는 것이 얼마나 염치없고 부끄러운 일인가를 힐책하는 대목에서, 나는 순전히 별 볼일 없는 작가라서 출판기념회를 하지 않은 것이지만 앞으로도 절대로 이런 ‘염치없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얼굴까지 붉어지면서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내가 써놓은 부끄러운 글들을 살펴보았는데, 글을 못 쓰기도 할 뿐더러 덕지덕지 붙어있는 영어와 불어 그리고 때때로 남아있는 일본식 표현들을 보면서, 얼마나 내가 무식하고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사람인가에 대해서 그야말로 통한의 장탄식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리산의 생태시인으로 유명해진 이원규 시인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이오덕 선생님이 살아계실 때 자신이 한자를 쓰지 않고 한글로 시를 쓰는 사람이라서 칭찬해주셨다고 기뻐하는 것을 보면서, 아마 살아서 이오덕 선생님을 만났다면 민망해서 고개를 들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말이 지금 위기는 위기이다. 가끔 나는 ‘1세대’라는 표현을 쓰는데, 건국을 하면서 정말로 뭔가 잘 해보고 싶었던 사람들을 이렇게 1세대라고 부른다. 이오덕 선생님은 분명 1세대에 속하신 분인데, 1세대가 사라지고 난 다음에 우리나라에 위기가 온 것이 아닌가라고 가끔 생각한다. ‘바른 우리말’의 위기는 분명 1세대 이후에 심각해졌는데, 지금 우리말의 아름다움과 고운 표현에 대해서 생각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은 것 같다. 한글운동 하시는 분들은 교육인적자원부를 ‘영어학원’이라고 부르고, 교육부장관을 ‘영어학원 원장’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다.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우리나라의 교육부는 사실 영어학원 혹은 영어학원 총본부에 다름 아니다. 미국 유학 갔다 오시고 영어 잘 하시는 분들이 대개 이 영어학원 원장을 하시니까 이해가 안 가는 일은 아니다.

그냥 생태경제학 용어로 하자면 원래의 우리말은 문법 정리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다가 해방 이후 나라를 세우면서 1세대들이 몸을 던져서 문법과 표준말 체계를 만든 것인데, 점차적으로 공해가 늘면서 우리말이 쓰레기통처럼 되어간다고 표현할 수 있다. ‘엔트로피’라고 부를 수 있는 무질서도가 늘어난 셈이다. 그리고 식자들의 말일수록 오염이 심한데, 나 역시 심하게 오염된 글을 쓰는 사람이라서 이오덕 선생님을 생각하면 부끄럽기 짝이 없다. 

2. 개념어

표준어는 아니지만 사람들이 흔히 쓰는 말로 ‘개념’이라는 말이 있고, ‘컨셉’이라는 말이 있고, ‘개념어’라는 말이 있다. 어감이 조금씩 구분되기는 한다. 물론 영어로는 전부 concept이다. 누가 처음 ‘개념어’라는 말을 썼는지는 모르지만, 그런 말은 우리말에도 없고, 영어에도 없다. 아마 신문사 편집국 아니면 잡지사에서 만들어낸 말이 아닐까하는데, 개념이라는 말과 개념어라는 말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있어 보이지는 않지만, 굳이 개념어라고 말을 해야 뜻이 통하는 상황이 그렇게 아름다와 보이지는 않는다. ‘역전앞’ 혹은 ‘걸프만’과 같은 표현들이다. 이런 말들은 고운 우리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엄청나게 해롭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러나 해로운 말의 공해들도 가끔은 있는 것 같다.

3. 노무현의 진정성, 강금실의 진정성, 그리고 한나라당의 진정성

시기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얼마 전부터 사람들이 ‘진정성’이라는 단어를 즐겨 사용하기 시작한 것 같다. “누구누구에게는 진정성이 있다”라는 형식으로 활용되는데, 내가 가장 처음 이 표현을 들은 것은 “그래도 노무현에게는 진정성이 있다”라는 표현이었던 것 같다. 지난 서울시장 선거를 끝내고 공약에 대한 평가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순전히 정책 특히 공간정책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오세훈 서울시장의 공약보다 강금실 후보의 공약이 더 반환경적이며 반생태적이었다. 그래서 인간 강금실에 대해서는 난 잘 모르지만, 밖으로 드러나온 공약과 TV 토론에서 강금실이 했던 말만 가지고 평가하면 강금실은 오세훈 보다 훨씬 개발주의적이며 동시에 염치도 별로 없는 것 같다는 평가를 했다.

그 이후에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강금실에 대해서 그렇게 보면 안된다고 여러가지로 조언을 해주었다. 그 때 들은 얘기가 “강금실은 진정성이 있다”는 말이었다. 난 우리말을 예쁘고 아름답게 쓰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대체적으로 국어사전에 있는 의미에 대해서 조금 고민하는 편인데, 난 ‘진정성’이라는 말이 있는지 그리고 무슨 뜻인지도 몰랐다.

진정성이라는 단어로 가장 재미있게 들었던 표현 용례는 한나라당이 “북한정권에 진정성이 안 느껴져”라고 여러 신문에 보도된 정책회의에서 오고간 얘기들이고, 가장 최근에는 “열린우리당이 진정성이 있는지”라고 한나라당 당직자회의 결과가 신문에 보도된 얘기이다. 그야말로 ‘진정성’이라는 단어의 전성 시대인 셈인데, 노무현, 강금실을 거쳐 한나라당이 북한에 진정성이 있는가라고 질문을 하게 될 정도로, 지난 2년 동안 단어 중에서는 가장 지속적으로 구매되는 성공 상품에 해당하는 셈이다.

그러나 난 여전히 이 진정성이라는 단어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몰랐다. 나에게는 뜻이 통하지가 않는데, 여러 사람들은 이 단어를 가지고 그야말로 서로 잘 얘기하고, 의미를 잘 전달하고 있는 듯했다.

4. truthfulness인가? 아니면 authenticity인가?

내가 진정성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잘 모르는 이유는 우선은 우리말 사전에 나오지 않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진정’이라는 단어는 ‘거짓이 없이 참으로’라는 단어인데, 진정성이라는 단어는 그런 우리말의 진정에서 파생된 단어는 아니다. 궁금한 마음에 주위의 몇 사람에게 진정성이 영어로 무엇인지 물어봤는데, 알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래도 한 번 생각해보라고 하면, 몇 사람이 truthfulness가 아닐까라고 대답을 했는데, 정답은 아니다. 우리말의 진정성이 정말로 그 단어의 의미인지는 모르지만, 번역되어 사용된 진정성의 원어는 authenticity가 맞을 것 같다.

문학 용어일 수도 있지만, authenticity라는 단어는 원래는 마케팅 용어이다. 소위 제품 브랜드의 ‘진짜 가치’라는 의미에서 “좋은 제품은 팔린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authenticity라는 마케팅의 전문용어는 그러나 아무래도 사람들이 의미하는 그 진정성과는 조금은 다르다. 사람에게 쓰는 말이 아니라 상품의 브랜드에 대해서 사용하는 말이고, 그 제품이 진짜 품질이 좋기 때문에 생겨나는 진짜 브랜드를 경영학에서는 이렇게 표현한다. 제품이 좋기 때문에 생겨나는 매우 특별한 가치가 진정성이라면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는 편하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가치가 있는가라는 질문은 논외로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본질이든 혹은 심성이나 아니면 품성이라도 하여간 사람을 제품으로 보고 그 제품이 가지고 있는 무엇인가가 다른 사람보다 낫다는 뜻이 진정성이라는 원래의 의미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진정성이 이런 것은 아닌 듯싶다. 노무현이 진정성이 있다고 말할 때 혹은 강금실이 진정성이 있다고 할 때에 두 사람을 일종의 객체로 보고, 더 나은 품질이 있고, 진품(authentic)이라는 의미에서 이렇게 사용하는 것은 아닐 것 같다. 얼핏 진실성(truthfulness)라고 나에게 진정성의 원 단어가 아닐까라고 얘기한 사람들이 이해한 대로라면, 겉과 속이 다르지 않거나 혹은 밖으로 드러나서 표출되지 않은 그 무엇인가가 내면에 있다는 의미로 이 단어를 사용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표리부동(表裏不同)이라는 말과 진정성이라는 단어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이것도 아닐 것 같다. 겉과 속이 다르다면 그 사람의 내면적 성격에 해당하는 특별한 단어를 사용할 필요가 별로 없다. 오히려 겉과 속이 다른데, 겉이 다르더라도 속을 믿어주어야 한다는 그 어떤 필요성이 있을 때 진정성이라는 말이 사용되는 것 같다.

조금 정리를 해보면, 노무현이나 강금실 같은 사람에게 적용되는 진정성이라는 단어는 비록 보이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안에 있는 “무엇인가 좋은 것”이 있기 때문에 겉만을 보지 말고 속을 헤아려 판단해달라는 말을 의미하는 것 같아 보인다. 보이지 않는 것? 요즘 유행하는 진정성이라는 단어는 그렇다면 보이지 않는 것을 표상화하거나 형상화시키는 그런 역할을 하는 단어인가?

한나라당이 북한정권의 인권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진정성이 없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이 경우는 아마도 정반대의 의미일 것이다. 겉으로는 무엇인가 하는 것 같지만, 속에는 그것에 상응하는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진정성이 없다’고 표현하는 것 같다. 이 경우를 그냥 쉬운 우리말로 하면 “겉과 속이 다르다”에 해당할 것이고, “사람 겉만 보고는 모른다”라는 말을 이렇게 표현하는 것 같다.

5. 심리학 용어인가?

진정성이라는 단어가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는 아무래도 사회과학에서 정의되지 않고 순간적으로 차용한 심리학적 전제 때문일 것이다. ‘좋은 마음(good will)’ 혹은 ‘좋은 동기(good motivation)’라는 말로 표현되거나 아니면 ‘좋은 의도(good intention)’ 같이 정의되지 않은, 그러면서도 심리학적인 어떤 개념을 끌고 들어오기 때문일 것 같다. 조금 풀어서 말한다면,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고 그런 마음이 변하지는 않았지만, 지금 상황이 좋지 않아서 그 의도가 잘 표현되고 있지 않다고 할 때에 “진정성이 있다”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 같다.

물론 진정성이라는 말은 맥락이 정의되지 않고 사용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 경우에 해당한다고 일반화시키기에는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어쨌든 ‘마음’이라는 말을 빌어서 표현한다면, ‘고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약간은 문학적 표현으로 이 단어의 의미를 대치할 수가 있을 것 같다. 말의 뜻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가 있지만 맥락을 해석하기가 너무 어렵다. 그 마음을 도대체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아니 거짓말탐지기를 갖다 놓고 일일이 속마음을 알고 헤아리고, 그리고 행동이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본심을 일일이 헤아리면서 모든 것을 판단해야 한다는 말인가?

이 순간 레이몽 부동(R. Boudon)이 80년대에 유행시켰던 ‘사악한 결과(perverted effect)’라는 개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사회구성원이 선의를 가지고 최선을 다했다고 하더라도 사회라는 일종의 구성체가 반드시 선한 결과에 도달한다는 보장이 없고, ‘모순’의 존재에 의해서 시스템이 반드시 아름다움이 만개하는 상황에 도달하지 못할 때 사악한 결과가 발생한다고 표현한다. 그런데 갑자기 우리는 동기가 좋다면 모든 것이 용서된다는 80년대식 품성론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닐까라는 의심을 지우기가 어렵다.

‘품성’이라는 정의하기 어려운 고상한 용어들 때문에 80년대 논쟁이 얼마나 비생산적이고, 서로 간에 다시는 품을 수 없는 악독한 저주와 선 가르기로 빠져들어갔던가! 설마 지금 사람들이 입에 달고 있는 “진정성”이라는 표현이 설마 21세기에 다시 등장한 신품성론 같은 것은 아닐까라는 의심을 지우기 어렵다. 진정성! 도대체 어떻게 사람이 다른 사람의 내면 깊숙이 감추어져 있는 진정한 생각의 흐름과 마치 영혼 깊숙한 곳 혹은 무의식 너머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그 목소리를 알 수 있단 말인가! 심리학자인가, 아니면 주술가인가!

진정성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나름대로의 감성에도 불구하고, 이 단어는 서로 간에 차이를 드러내거나 혹은 전개할 수 없는 상상의 한 지평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건전한 논쟁과 의견의 다름에 대해서 논의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설마 “진정성이 있다”는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진정하지 못하고, 잠재적 사기꾼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이 단어는 도대체 어떤 의미를 우리에게 주는 것일까? 주술적으로 “믿으라” 그리고 “용서하라”는 단어 혹은 도대체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북한당국이나 혹은 그 어떤 존재에 대해서 “증오하라”는 즉자적이면서 무서운 명령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의심을 지우기 어렵다.

“노무현은 진정성이 있지 않은가?” 이 명제에 대해서 반박하기 위해서 난 한 번도 얼굴을 본 적이 없는 노무현이라는 한 사람의 마음 깊숙한 곳도 알고, 그의 사생활을 대단히 잘 알아서 그것들을 자세히 열거한 다음에야 비로소 “아니, 그는 진정성이 없어”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우리말 사전에 나와있지 않은 진정성이라는 단어는 이런 면에서 논쟁을 가로막을 뿐더러, 상대방 역시 부당하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스캔’하는 초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같이 겨우 같이 이야기할 수 있게 만드는 마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어리석은 나의 생각으로 “진정성”이라는 단어는 아주 가끔 애교스럽게 표현되지 않고, 어떤 논의의 근거나 출발점이 될 때 심리학과 연계를 가장한 비객관적이고 주술적인 “내가 하는 말이니까 믿어”라는 뜻 이외에는 없는 것 같아 보인다. 그래서 이 단어는 고운 우리말은 아닌 것 같고, 의사를 전달하고 새로운 결론으로 사회구성원들이 찾아나가는데 훼방을 놓는 고약한 강요를 행사하는 단어라는 생각을 지우기가 어렵다.

6. 그럼 전두환은 진정성이 없나?

‘동기’의 순수성에 대해서 판단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러므로 ‘그 무엇이든’ 간에 동기 혹은 의도가 존재하고, 그가 했던 여러 가지 활동이나 말이 그 동기에 일치하는 것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 내가 이해하고 있는 바로는 이런 것들이 과학의 영역이고, 사회과학이 이러한 객관성을 가지고 있을 때 비로소 과학의 영역에서 움직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진정성이라는 단어가 성립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은 그의 동기와 총체적으로 판단된 나머지 행위들이 ‘일관성’이 존재하는 것인가에 의해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소위 보수주의자들만큼 동기와 행위가 일관되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심지어 치사해 보이는 여러 가지 말과 행위들도 그 동기 혹은 의도와 연결시키면 일관성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이 노무현이나 강금실에게 쓰고 싶어하는 그 진정성이라는 단어를 전두환 혹은 노태우 아니면 조선일보 같은 곳에 적용을 해보자. 그들에게는 진정성이 없는가? 설마 전두환에게 ‘구국의 결심’ 같은 것이 전혀 없었다고 말할 수가 있을까? 아니면 조선일보 편집국이라고 해서 의도가 없고, 그 의도와 일관되는 그 어떤 ‘진정성’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게 말하기는 어렵다.

어쩌면 해방 역사에서 가장 순수하고 일관되게 진정성이 가졌던 존재는 어쩌면 전두환일지도 모른다. 다만 그의 ‘진정성’이 우리의 진정성과는 달랐을 뿐이다. 그러므로 “너의 진정성과 나의 진정성은 다르다”는 보조명제가 없다면, “진정성이 있다”는 말만으로는 전두환의 진정성과 다른 사람들의 진정성은 전혀 구분되지 않는다. 심지어는 돈 밖에 모르는, 그래서 평생을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온 한 사기꾼을 상정해보자. 그에게는 진정성이 없는가? 그렇게 말하기는 어렵다. 그도 “돈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있었고, 그 한도에서 그의 진정성이 진실이다.

“진정성이 있지 않은가!”라는 요즈음 사람들이 즐겨 사용하는 표현을 요즘 사용하는 말들로 치환한다면 가장 비슷한 것이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 아닐까 싶다. 아무리 가난하고, 동네에서 왔다갔다하는 장삼이사 같아보이는 사람들이더라도 자신의 삶에 대해서 진지하지 않고, 그야말로 ‘진정’으로 살아가지 않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진정성을 운운하며 믿고 존경하라는 말은, 사실상 하루하루를 자신만의 삶으로 채워가는 모든 생활인 그리고 그들의 ‘일상성’에 대한 모욕이다.
만약 굳이 “노무현에게 진정성이 있다”는 말로 토론을 가로막는다면, “민중에게는 진실이 있다”는 선험적이면서도 무시무시한 명제를 끄집어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게 된다. 진정성이라는 단어는 우리말만 오염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도 오염시키는, 언어의 공해에 해당한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 글쓴이는 경제학 박사,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강사, 성공회대 외래교수, 2.1연구소 소장입니다.

* 저서엔 <88만원 세대>, <한미FTA 폭주를 멈춰라>, <아픈 아이들의 세대-미세먼지 PM10에 덮인 한국의 미래>, <조직의 재발견>, <괴물의 탄생>, <촌놈들의 제국주의>, <생태 요괴전>, <생태 페다고지>, <명랑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등이 있습니다.

*블로그 : http://retired.tistory.com/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07/02/21 [10:23]   ⓒ 대자보
 
  • 도배방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