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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자는 많아도 진짜 ‘학자’는 없다
[비나리의 초록공명] 한미FTA에 반대하는 언론노조의 단식농성 단상
 
우석훈   기사입력  2007/02/15 [15:38]
언론노조에서 지난 12일 월요일부터 언론재단(프레스센타) 앞에서 단식농성을 시작했다.
 
지난 여름부터 대중강연은 완전히 접었는데, 몸이 아파서 더 이상 그렇게 돌아다니면서 사람들 만나서 일일이 얘기하는걸 더 이상 견디기가 힘들었다. 벌써 1년 째 약을 먹는 중인데, 내가 이렇게 길게 약을 먹게 될 날이 올 줄은 나도 몰랐다.
 
길에서 농성하는 사람들 생각하면 가끔 꼭 이런 일들은 한겨울에만 벌어지는지 모르겠다는... 3년 전인가? 환경운동연합에서 광화문 열린광장에서 12월부터 반 노무현 환경정책을 걸고 장기농성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는 정말 엄청나게 추웠다. 시대의 마지막 마지노선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참여한 사람들만 몸이 힘들었고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정확히 얘기하면 더 나빠졌다 (이 시절의 얘기는 나중에 조직론에 관한 얘기들 정리할 때 이제 3년이나 지났으니 그 시절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좀 얘기를 할 생각이다. 아직도 나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결국 그 때 벌어지게 된다.)
 
어지간해서 피케팅에는 잘 안 나서려고 하지만, 늘 상황은 급하게 돌아가기 때문에 가끔은 집회 사회도 보게 되고, 일주일에 한 번씩은 기자회견장에 나가기도 하고 2년 전까지의 일인데, 건강도 안 좋았지만 맨 앞에서 뛰던 일들은 이제 다음 세대들에게 넘겨야 한다는 생각을 조금씩 하기 시작했었다.
 
학위 받은지 올해로 12년 째이지만, 아직도 학회에 나가면 나는 거의 막내이다. 사회학이나 정치학도 진보학회들은 대체적으로 그렇다는 말을 들었다. 친구인 김정훈 박사도 학회 나가봐야 막내라고 안 나간다고 한다. 이해는 가는 일이다.
 
▲ 언론노조 천막농성장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필자.     © 대자보 김한솔

언론노조의 단식농성장에 잠깐 가서 얘기하고 오는 일은 힘든 일은 아니지만, 막상 무슨 얘기를 할까 생각해보니까 또 막막하기는 하다.
 
사람들은 했던 얘기를 그냥 또 하면 되지 않느냐고 하지만, 난 한 번 한 얘기를 다시 하는 일은 하지 않고, 글도 한 번 쓴 얘기를 다시 쓰는 일은 하지 않는다. 나 혼자서 지켜온 원칙이기는 한데, 같은 얘기를 반복하기 시작하는 날이 오면 그날부로 짐싸들고 시골로 내려갈거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간다.
 
윗사람들을 보면서 배운 것이 별로 없기는 한데, 같은 얘기는 두 번 안한다는 작은 원칙을 지키려고 한다. 그래서 언젠가 본 거 그냥 달라고 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약간 황망하고, 강연도 그래서 어렵다. 강연의 경우는, 안 하기로 했다. 어차피 말 재주도 별로 없고, 말도 잘 못하는 편인데다가, 같은 말을 두 번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강연하면서 지키려니까 너무 어렵다.
 
원래 사회적 운동이라는 것은 같은 얘기를 계속해서 반복해서 말 하면 언젠가 듣게 된다는 암묵적 원칙 같은 게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더욱 간결한 구호를 만들고, 같은 구호를 동일하게 외치게 하는 것들이 효율적인 운동이기는 하다. 마케팅의 원리와 같다.
 
그렇지만 학문은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맑스의 자본론에 대해서 알뛰세가 표현했던 "coupure epistemologique", 인식론적 단절을 설명할 때 사용했던 표현을 빌려오자면, "서술의 순서 ordre d'expposition"라는 것이 있고 "발견의 순서 ordre de recherche"라는 것이 있다. 생각하는 순서와 글로 옮기고 표현하는 순서가 동일하지는 않다는 얘기를 이렇게 어렵게 하다니...
 
인식론과 관련된 생각을 가끔 하는데, 학자는 같은 얘기를 반복하면 C급 학자의 위치를 유지하기도 어렵다. 같은 얘기가 열 번 정도 반복된다면, 그건 학자라고 부르면 안되고 퇴물이라고 불러야 한다. 그런 생각을 하고 서울에 돌아온 다음에 선배들을 보니 온통 퇴물들이었다. 
 
▲ 우석훈 성공회대 외래교수  © 대자보 김한솔
가끔 나는 내 스스로를 C급 경제학자라고 생각하는데, 이건 내가 현역이라고 생각하는 의미가 강하다. 비록 C급이라도 아직은 질문하고 답을 찾아가려는 현역에 있는 학자이다. 그게 사라지면, 나도 퇴물이 되는 날이 오기는 할 것이다.

 
우리나라 경제학자 중에서 학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표현하기가 민망하다. 젊거나 늙거나 같은 얘기를 반복해서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상품으로 전환되기 위한 퇴물에 가깝다.
 
피케팅에 잘 나가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거리에서 외치는 것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내 역할이 조금 다르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3년 전에 세웠던 공부 프로그램 중의 일부는 잘못 생각했던 것이라서 폐기했고, 어떤 것들은 새로 공부 프로그램에 들어오기도 했다.
 
혼자서 생각해보면 내가 가기로 생각한 길의 1/10 정도 온 것 같다. 1/10 오는데 12년이 걸리다니... 이 속도라면 다 가기 위해서는 아직도 108년이 더 필요하다. 살아서는 끝을 못본다는 얘기다. 그건 나도 알고 남도 알고 다 아는 얘기다. 그래도 상관은 없다. 나는 원래 대기만성형이기 때문에, 천천히 가면 된다.
 
한 가지 좋은 것은 나나 나의 아내나 혹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직계 가족들이 대부분 돈에 욕심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권력욕도 전혀 없고, 사람은 밥만 먹고 살 수 있으면 된다고 믿는 사람들이 내 주변에 있어서 버티는 데에는 별 문제는 없다.
 
가늘고 길게 살아간다는 말은, 또 다르게 표현하면 그래도 끝까지 간다는 말과 같다. 굵고 짧게를 외쳤던 내 친구들은 지금은 많이 받는 친구가 연봉으로 1억원 조금 넘게 받고, 대개는 6천만원 정도 받으면서 사는데, 다들 살아가는 것이 너무 힘들다는 호소를 한다. 평균적으로는 여자 동기들이 돈을 잘 벌고 행복도가 높고, 남자 동기들은 왜 태어났는지를 모르겠다고 할 정도로 심한 우울증들을 호소한다. 옛날에 자본론에서 힐퍼딩까지 같이 읽었던 친구들이지만, 지금은 살아가는 길이 너무 많이 갈렸다.
 
요즘 친구들 중에서 정신적 고통을 가장 많이 호소하는 친구가 국정원에서 고위직으로의 승진을 눈 앞에 두고 있는 친구이다. 얼마 전에 친구들끼리 모였는데, 그야말로 떡이 되어서 갔다고 한다. 1년 전에 봤었는데, 가슴이 아프다.
 
자기를 위해서 사는 삶이 행복할 수 있을까? 나의 관찰에 의하면 힘들다. 위선으로라도 다른 사람들을 위한 장치들을 계속해서 만들지 않고, "나만 먹고 살거야"라는 인생은 밑도 끝도 없이 불행해진다.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 중에 이런 사람이 있는데, 아주 불행한 삶의 나락에서 벗어날 줄을 모른다. 혼자서 생각해본 것은 협동조합 같은 곳에서 봉사에 비슷한 일을 하면서 차라리 한 달에 100만원 정도 받는 삶을 지금이라도 선택하면 지금보다는 훨씬 행복해질 것 같지만, 이미 자신의 행복을 찾겠다고 단단히 결심을 한 뒤여서 어떤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죽어라고 주님만 외치는데, 그 주님이 성경책 어느 한 구절에 그렇게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가라고 말 했는지 도통 이해되지가 않는다.
 
피케팅에 나서면 그래도 세상에 대해서 조금 배우는 것이 있다. 요즘은 아주 싸늘한 시선 앞에 서 있게 되는데, 예전에는 그걸 장벽이라고 느꼈는데, 요즘은 그 장벽을 부수는 것에 대해서 더 많이 생각해보게 된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지난 12년 동안 나를 지켜준 것은 학문적 신념이나 도덕적 고민, 그런 것이 결코 아니다. 20대를 지나면서 나에게 전리품처럼 남은 대인기피증이 사실은 나를 지켜준 것이라는 생각을 가끔 해본다. 남 앞에 서기 싫고, 남을 만나기를 싫어하고, 가능하면 아무도 만나지 않고 살고 싶어하는 나의 대인기피증이 사실은 완전히 나락과 욕망의 함정으로 빠져버릴 수도 있던 삶을 지켜준 것이라는 생각을 가끔 해본다.
 
모든 우울증을 일반화하기는 어렵지만 내가 지켜본 우울증 중증환자들의 경우, 그 깊은 곳에 욕망이 있다. 그렇게 큰 욕망도 아니지만 예를 들어 자신의 치과를 가지고 환자들이나 치료하면서 조용히 살고 싶다... 이런 욕망은 소박해 보이지만, 우울증으로 가는 첨단길이다.
 
차라리 <로버트 태권브이>의 카프 박사처럼 "세상을 지배하겠다"는 욕망을 가지면 우울증은 걸리지 않는다. 작고 소박하지만 실체가 단단한 욕망, 그런 것들이 사람을 우울하게 만들고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다.
 
예를 들면, 딸의 어머니가 "난 네가 그저 오손도손 단란하게 사는 것을 보고 싶다"... 정말 소박한 욕망이지만, 이 어머니의 욕망을 이기지 못해서 자살한 여인들을 적지 않게 알고 있다.
 
작은 욕망이 큰 욕망보다 더 무섭다는 생각을 가끔 하면서 위선이라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 피케팅을 하거나 길거리에 앉거나 단식을 할 때, 마음 속에서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이런 것들을 생각해보게 된다. 아주 어렸을 때, 그러니까 아마 스무살 때인가? 5일을 단식한 적이 있었다. 박철규인가? 시체가 강에서 떠올랐을 때의 일이다. 무식해서 생짜로 굶었는데, 상당히 고통스러웠다. 몸무게가 불과 5일만에 수킬로가 빠질 정도로 진짜 단식을 했었다. 그 때 생각을 많이 했었다. 그 때부터 나에게도 담당형사라는 것이 생겨났었다.
 
사람은 욕망으로만 살아가지는 못한다. 나는 보통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손가락질 하는 시위대 안 쪽에서 늘 살아왔고, 저 무식한 것들이라는 손가락질을 내내 받으면서 어른이 되었고, 지금도 보통 사람들이 "저 대안 없이 반대만 하는 사람들"이라고 괄호쳐놓은 삶 안 쪽에서 살고 있다. 한참을 살아보니까 사실은 저 장벽 건너편에서 살아있는 사람들이나 이 쪽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세상은 똑같이 가혹한 것이고, 시장은 언제나 냉엄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새만금 방조제는 모든 사람에게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는 심판대와 비슷하다. 워낙 장엄한 규모는 사람들에게 마음 깊은 곳의 감정에서도 선택을 하게 만든다. 아주 무딘 사람은 아무 생각이 들지 않을 수도 있지만, 지금은 어쨌든 그 방조제 위에 올라서면 무엇인가 생각을 하게 된다.
 
"장하다"와 "가슴 아프다"라는 두 가지 중에서 선택을 하게 된다. 나는 가슴이 아프다는 감정을 느꼈다. 날씨 좋은 평일날 가면 버스로 관광을 와서 장하다고 손뼉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사실과 진실과 관련된 과학의 영역이 있고, 또 그와는 상관없는 마음과 영혼이 움직이는 영역이 또 하나 있다. 이걸 정신과학의 세상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이성이 통제하지 못하는 영역이 또 하나 있다.
 
시위대나 농성은 많은 경우 이런 선 안에서 판단이나 선택을 촉진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한미 FTA도 그런 질문과 비슷하다. 물론 새만금 보다는 훨씬 어렵고, 복잡하지만, 사람들이 판단하는 방식이 크게 다르지는 않다.
 
최소한 향후 10년간 한국 사회에서의 삶에 개인들의 삶 역시 갈라지는 역사적 분기점 위에 우리가 서 있는 셈이다. 각자 선택하선택의 결과들을 받아들이게 될 것인데, 사회적 삶만이 갈라지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 삶도 갈라지게 된다.
 
"나는 이 상태로는 도저히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선에 섰다. 물론 기계적으로 이런 결론에 도달한 것은 아니다. 나름대로는 꼼꼼이 생각을 해봤고, 앞으로 내가 생각하는 것들과의 모순을 줄이고, 또 내 마음 안의 부대낌을 줄이기 위해서 나름대로는 소위 옵티마이제이션이라는 장치를 하고 난 다음에 내린 선택이다.
 
대인기피증을 기꺼이 받아들인 것은 우울증도 싫고, 무기력감은 더더욱 싫고, 자학같은 것은 너무너무 싫기 때문이다.
 
"직시하라!"... 참 잔인한 말이다. 결과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인데, 그게 사회과학이 과학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 글쓴이는 경제학 박사,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강사, 성공회대 외래교수, 2.1연구소 소장입니다.

* 저서엔 <88만원 세대>, <한미FTA 폭주를 멈춰라>, <아픈 아이들의 세대-미세먼지 PM10에 덮인 한국의 미래>, <조직의 재발견>, <괴물의 탄생>, <촌놈들의 제국주의>, <생태 요괴전>, <생태 페다고지>, <명랑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등이 있습니다.

*블로그 : http://retired.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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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7/02/15 [15:38]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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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철용 2007/02/17 [09:38] 수정 | 삭제
  • 학자들중 자신의 솔직한 애기를 쓰는 사람이 있을까?
    솔직한 심정을 애기한다는 것은 아직도 양심이 건재하다는거 아닐까 합니다.

    명색인 학자는 많아도 진정한 학자는 없듯이...

    지식은 사적소유물이 아닌데 그렇게 생각하는 지식인들이 인식의 문제가 아닐까합니다.

    고민하는 .... 삶이
    걱정없는 .... 후대를 기약하는거 아닐까합니다.
  • 미친이반 2007/02/15 [22:06] 수정 | 삭제
  • 참 웃기는 말이다.
    모델을 배울 때 난 이게 그냥 교수들이 자기 자리 지키려고 만든 꽃놀이패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모델이 하는 역할은 어느 정도 인정한다. 하지만 괴테가 모든 이론은 회색이라고 했던가. 자신의 모델이 현실에 맞지 않으면 당연히 바꿔야 할 일이다. 하지만 내가 대한민국 학자라는 사람들에게 부탁드리고자 하는 말씀은 그게 아니다.
    언감 생심 그게 될 일인가!!
    하여 부탁 드리고자 한다.



    제발 논문좀 베끼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