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각이 여삼추라고 하지만, 노무현 정부의 지난 4년 동안의 변화는 정말로 격세지감이라는 말이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많은 것들이 변한 것 같다. 마음의 흐름으로는 그 시간들이 천 년만 같다. 노무현의 2만불경제와 균형발전, 그리고 이명박의 뉴타운과 청계천, 이 모든 것들이 꿈처럼 멀기만 하다. 그리고 지율스님의 목숨을 건 단식들이 머리 속에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격랑의 시대라는 말이 이상하지 않다. 거기에 화룡정점으로 한미FTA와 북핵 사태가 서 있다. 잊혀지지 않는 사건은 황우석 사태... 대충 이런 단어들이 지난 4년 동안 날 붙잡고 있는 단어들이었다. 그리고 세상은 나아진 것도, 바뀐 것도 별로 없어 보이는데, 앞으로 다가올 시간들이 더 무섭다고들 말한다. 지난 시간에도 이렇게 괴로운 것들이 많았는데, 앞으로 또 어떤 일이 다가오려나?
2. 신자유주의
내가 안 쓰는 단어 중에 '신자유주의'라는 단어가 있다. 어지간해서 나는 이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프랑스나 독일 사회에 잘 어울리는 단어이다. 지난 4년 간의 변화를 신자유주의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이상하다. 합리성이라는 말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 광풍과도 같은 질풍노도의 시간에 신자유주의 경향이라고 말하는 건 너무 고상하다.
노무현 정부의 신자유주의, 이건 사태를 정확히 설명하는 건 아닌 것 같다.
3. 양극화
내가 또 별로 안 쓰는 단어 중에 '양극화'라는 단어가 있다. 90년대 초반에는 나도 이 단어를 즐겨 사용했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양극화, 금융의 양극화, 기술개발의 양극화, 국제 무역구조의 양극화 등등의 용어를 나도 즐겨 사용하기는 했었다. 주로 중남미 분석하거나 아프리카 경제를 분석할 때 혹은 EU 통합에 따른 변화를 설명할 때 쓰던 단어인데, 요즘은 국민을 소득이라는 하나의 줄에 전부 세워놓고 소득에 따른 양극화라는 의미로 이 단어를 사람들이 종종 사용한다.
정확한 표현이 아니라는 생각과 사람을 그저 소득에 의해서 줄을 세운다는 생각에 왠지 마음이 아파서 나는 이 단어를 즐겨 사용하지 않는다. "사람에 대한 예의"라고나 할까? 아무리 설명력이 높더라도, 단순한 소득을 가지고 사람 줄 세우는 경우가 내 마음 한구석을 아프게 하는 것 같다. 그래서 잘 사용하지 않는다.
4. 빠...
내가 잘 안 쓰는 말 중에 "빠"라는 말이 있다. 이회창이 썼던 말인데, 그걸 왜 사람에게 쓸까? 역시 사람에 대해서 예의를 갖춘 말은 아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면, 더 이상 논의도, 토론도, 그리고 뒤돌아서면서 "미안했었다"는 말도 하기 어렵다. 이런 말은 되도록 사용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렇게 구조와 상관없이 사람을 외통수로 집어넣는 말은 고상한 말은 아니고, 되도록이면 피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것이 내 평소 소신이다.
5. 조중동
조중동이라는 말이 사용된 것이 4년 정도 되었는지 아니면 그 이상인지 잘 기억은 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언론이라는 말과 종이신문이라는 말과 조중동이라는 말이 일부 신문사의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대체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같은 정보값을 갖는 것 같다. 그런데 이 신문들이 하나의 행동패턴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그렇게 괴물들이기만 한 것인지 꼭 그렇게 확신이 서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조중동이 아니면 옳은 것이고, 조중동에서 모든 일들을 그렇게 몰고가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혼란스러운 상황이 생겨난 것인지 별로 확신이 서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 단어는 잘 쓰지 않는다.
6.
누구와 어떤 식으로 얘기를 하던지 간에 내가 느끼는 특징은 많은 사람들이 문제가 어디에 있고, 누가 잘못한 것인지 너무 명쾌하게 답변을 한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세상은 그보다는 좀 복잡한 것 같다. 가만히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을 해보면, 내 삶이 어려워진 것에는 내 잘못이 더 크다. 마찬가지로 세상에 답은 도통 보이지 않는다고 하면서 뭐가 잘못된 것인지를 너무 쉽고 술술 얘기할 수 있는 데에는 어딘가에 모순이 존재할 것 같다.
그래서 난 너무 쉬운 답변은 경계하는 편이다.
단순화의 오류에 빠져서 정작 내 삶을 오류로 빠뜨리고 싶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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