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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타지가 망쳐놓은 로맨스없는 무협로맨스, ‘연인’
‘와호장룡’ 콤플렉스 걸린 장이모우의 한계 역력, 진부한 영상만 가득해
 
임흥재   기사입력  2004/09/21 [11:37]
 중국의 대표적인 감독인 장이모우가 황량하고 메마른 회색의 사막영화 ‘영웅’에서 초록빛 물씬 배어나는 촉촉한 환타지 ‘연인’으로 우리 앞에 돌아왔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사실 적지 않은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막상 영화 ‘연인’을 보면서는 그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고 말았다. 떠들썩했던 소문과는 달리 영화 속에서의 연인들은 그렇게 애달프지도 절절하지도 않은 사랑을 억지로 흉내 내고 있는 듯이 내게는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봉 전 미리 보았던 이 영화에 대하여 간단한 포스팅 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장이모우 감독의 영화 \'영웅\'이나 '연인'에서는 이제 인간의 얘기가 안 나온다. 대신 그들을 전하는 이미지만 있을 뿐...     © 장이모우 필름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당나라 때다. 물론 이를 영화는 설명해주지 않는다. 히로인 장쯔이가 속한 비도문이 어떤 문파이고, 왜 관부에서는 그들을 소탕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지를 설득력 있게 보여주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필자 역시 그러한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인터넷 검색을 한 후에야 알게 된 사실이다. 비도문이 민중들을 선동하는 세력, 즉 관부에 저항하며 민란을 획책하는 정도의 집단임이 극 중에서 유덕화와 금성무의 대화를 통해 드러나는 것이 고작이다.


영화는 '목단방'이라는 기루에서 술에 취한 금성무가 맹인 춤꾼인 소매(장쯔이 분)에게 춤을 추게 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쩔렁거리며 명징한 쇳소리를 토해내는 장쯔이의 금속 장신구와 수많은 악사들이 뜯어내는 현악기의 공명에 맞춰 화려한 춤사위를 선보이는 장쯔이. 이 영화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닌 소리와 색감, 그리고 관능적인 굴곡의 움직임이 화면을 채운다.

금성무의 소란에 이어 등장한 관부의 책임자인 유덕화 역시 소매에게 춤을 추도록 한다. 현악기의 가늘고 높은 소리가 이번에는 수많은 북들에 둘러 싸여 두텁고 낮은 소리로 바뀐다. 유덕화가 던지는 돌조각은 북을 때리고 튀어 나온 그것은 다시 다른 북을 두드리며 소매의 주위에서 진공한다.

 
소리는 이제 듣는 것에서 보는 것으로 바뀐다. 청각이미지의 시각이미지화를 영화는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보지 못하는 소매는 듣고 춤을 추고 귀로 소리의 방향을 쫓으며 화려한 춤사위를 펼친다. 그러나 우리는 눈으로 소리로 쫓고 소매(이름)의 (옷)소매에서 퍼져나간 분홍빛의 천들은 북의 표면을 튀어 올라 떠다니는 소리를 낚아채기라도 하듯이 소리를 휘감으며 스크린을 덮는다. 살아 움직이는 용의 발톱과는 같은 그 천들은 소리를 잡고 끌어 내리고 혹은 잘라내며 공간을 지배한다. 이윽고 소리를 제압한 소매의 소매는 칼을 빼어들고 소리의 주인인 유덕화의 심장을 찔러 간다.

그러나 아직은 소매의 춤사위가 유덕화의 소리를 제압한 것은 아니다. 암습은 실패하고 장쯔이는 체포된다. 관부의 책임자인 유덕화는 그녀가 비도문주의 일점혈육임을 확신한다. 보지 못하는 장쯔이는 이제 소리마저 닫아 버린다. 자진실토가 어려울 것이라 판단한 유덕화는 금성무와 공모하고 금성무는 장쯔이를 구해 내어 도망친다. 물론 비도문을 어둠 속에서 끌어내기 위한 위장탈출이다.

필사의 추격과 도망은 시작되고 금성무는 눈 먼 소매를 이끌며 숱한 위기를 모면해 나간다. 화면은 어지럽다. 고난도 와이어 액션을 숙지한 추격자들은 나무와 나무 사이를 가르고 화살과 대나무 창들은 그 추격과 위기의 급박함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며 커다란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날아가는 궤적은 살아 꿈틀대고 대숲을 가르는 바람 소리는 가슴 속으로 파고든다.

 
온통 푸르고 짙은 어둠이 깃든 숲 속에서는 은밀한 만남이 이어진다. 금성무는 유덕화를 만나 그 간의 경과를 보고하며 내일의 도피를 계획해야 하고 돌아와서는 소매의 낌새변화를 주시해야 한다. 또한 그녀와의 정분도 더욱 깊은 것으로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 깊은 정분이야말로 소매의 비밀을 들여다볼 수 있는 확실한 열쇠가 아니던가.

탈출과 추격은 사랑의 시작이다. 도망과 생사의 위기는 사랑의 장정이다. 테마는 시작되었고 도망친 거리만큼 사랑도 깊어간다. 날아드는 추격자의 뾰족한 창끝과 화살촉은 그들의 사랑을 기워주는 바늘과도 같은 것이다. 부딪치는 칼날의 비명소리는 거짓 사랑과 이제는 진짜 사랑이 되어 가고 있는 그들 사랑의 울음소리다.

 
이 영화를 환타지 같은 영상미에 주안점을 두면, 이 영화는 분명 볼 만 하다. 중국 무협이 대부분 그러하듯, 철저한 형식미(예를 들면 액션 신에서 한 손을 뒤로 돌리고 격투를 하는 등의)를 이 영화 역시 충실히 따른다. 소리의 파동에 따른 완급조절의 숨고르기 역시 빠지지 않는다. 무엇보다 기계적인 액션의 치밀함은 영화적 긴장을 담보하는 중요 요소다.

온통 푸른빛으로 물들어 있는 화면은 장쯔이와 금성무의 사랑의 색깔인 것처럼 보인다. 곧고 푸른 대나무 사이를 누비는 그들의 로망스는 집요한 추격자의 위험에도 아랑곳없이 쑥쑥 커가는 듯이 보인다.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스쳐가는 바람소리, 떨어지는 댓잎의 그림자는 위험보다는 아름다운 도피를 떠올리도록 만든다.


그 아름다운 숲과 배경은 이 영화의 테마가 거짓으로 시작하였듯이 중국이 아닌 우크라이나의 산 속이다. 장이모우는 그 아름다운 영상을 위해 우크라이나의 산 속까지 들어갔다. 광활한 꽃밭을 보고 막대한 제작비를 들여 꽃씨를 파종하고 일년을 기다렸다고 한다. 그러나 이상기후와 사스의 공포는 3일간의 도피에서 사랑을 느끼고만 금성무와 소매에 대한 사랑의 일념으로 비도문의 첩자가 되어 관부에 3년간을 암약한 유덕화의 사랑의 쟁투를 꽃밭이 아닌 눈밭으로 내몰고 말았다. 푸르른 산등성이에서 시작한 혈투가 갑자기 폭설과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계절로 전환되는 황당함은 환타스틱한 화면을 위한 콘티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자연의 훼방이었음을 아는 독자는 많지 않으리라.  


화려하고 인상 깊은 영상미를 뽐내며 스크린을 채웠던 푸른빛의 사랑은 깨어진다. 파죽지세, 대나무의 쪼개지는 결을 따라 영화의 스토리는 거침없는 반전을 보여준다. 소매는 맹인이 아니고 금성무는 어느새 그런 소매를 진정으로 사랑해버리고 말았다. 관부의 충견이었던 유덕화는 오히려 비도문의 첩자로 3년 전부터 관부에 암약하여 왔다. 목단방의 주인은 비도문의 대저의 신분이다. 갈라진 대나무의 속살이 푸른색이 아니듯 모든 것이 가짜다. 3년에 걸친 유덕화의 사랑과 3일의 도망에서 느낀 금성무의 사랑, 그 중심에 있는 소매의 사랑, 삼자간의 갈등과 긴장이 이 영화의 핵심테제임은 분명하다.


▲이안 감독의 '와호장룡'을 너무 의식한 것일까? 영화 속에 '인물'은 없고 이미지만 끝없이 펼쳐지고 있을 뿐이다. '작가주의' 장미모우 감독의 한계를 드러낸 것 같아 씁씁함만 더한다.     © 장이모우 필름
그러나 불행하게도 필자의 가슴으로는 또한 눈으로는 그들의 사랑과 갈등 그리고 절망과 불안이 느껴지지도 비쳐지지도 않았다. 시각적 이미지의 가장 단순한 전달기호, 즉 이차원의 사진이나 만화를 보면서 알게 된 사랑의 스토리에 대한 정보만이 머리 속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셋이서 누가 누구를 사랑했는데 여자는 누구를 사랑했다는 식의 정보의 전달만을 영화는 내게 보여 주었다. 감동이나 감흥은 없었다. 억지 춘향으로 사랑의 테마를 늘어진 판소리 마냥 틀어대는 필름의 투사에 필자는 철저히 실망하였다. 연인은 무협 로망스가 아니라 무협을 빙자한 환타지 영상 필름일 뿐이다.


공리와 장이모우를 세계에 알린 '붉은 수수밭'을 처음 보았던 때에는 그 붉은 색의 색감과 스크린의 질감이면 충분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장이모우를 만나는 독자 혹은 영화팬들은 매양 반복되는 색의 이미지와 그 메시지에 식상할 수밖에 없다.

아름다운 선율도 너무 자주 들으면 때로는 소음처럼 지겨운 법이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내 가슴을 울리며 들어오던 명징한 금속성도 차츰 지겨워져만 갔다. 중화스타들의 고정된 익살스러움(금성무의 경우)이나 표정과는 다르게 진정이 느껴지지 않는 배우의 몸짓(유덕화의 경우), 백치미를 과장한 장쯔이의 무미건조함은 영화를 보는 내내 필자를 화나게 하였다.


필자의 좁은 안목과 메마른 가슴이 문제인지도 모르겠으나 필자는 연인에서 그들 셋이 벌이는 사랑의 어긋남에서 아무런 감동도 받지 못했다. 화려한 영상미와 찌를 듯이 파고드는 소리에서 오히려 필자는 도대체 무슨 그림인지 알 수 없는 그림조각을 억지로 맞추어 놓은 망가진 퍼즐판을 보았다. 아름다운 배경이 그 안에서 뛰노는 사람들에 의해 어색해지고 이상해진 그림으로 둔갑해 버렸다.


온통 모래뿐인 사막에 뛰어 노는 사슴, 깊은 숲 속을 돌아다니고 있는 낙타가 그려진 그림책이 생각났다. 사랑은 어색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이라야 그 이야기를 듣는 우리들을 감동시키는 것이다. '연인'의 연인들은 바로 그 이상한 그림책의 사슴과 낙타 같았다.

나를 슬프게 한 사슴과 낙타의 이야기, '연인'을 본 필자의 인상이다. /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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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4/09/21 [11:37]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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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헤롱 2004/09/22 [05:00] 수정 | 삭제
  • 영화 맨 처음에 시대 배경 설명해 주드만..뭔 소리를 하는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