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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 전쟁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고귀함과 삶의 혼
쿠르드족 출신 영화감독이 그린 전쟁과 인간-‘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
 
임흥재   기사입력  2004/08/02 [06:54]

오랜 만에 좋은 영화 한편을 보았다. 우리에게는 좀 낯선 이란 영화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이 그것이다. 영화를 본 후, 누가 만들었는지 크레딧이 궁금하여 인터넷 검색을 해보았더니 ‘바흐만 고바디’라는 이란 감독이 만든 영화이고 칸느영화제에서 황금카메라상을 수상하였으며 국제비평가연맹상을 받은 수작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감독인 바흐만 고바디는 쿠르드족 출신의 최초의 영화감독이라는 설명도 눈에 띤다.


▲쿠르드족 아이들의 눈물나는 생존투쟁을 그린 '취한 말들의 시간' 한장면     © 바흐만 고바디
쿠르드족 출신이라는 것이 예사롭지 않은 것은 그들 민족이 겪어온 수난의 역사와 지금 당대에도 나라를 갖지 못하고 이란 이라크 터키의 국경지대에서 흡사 난민처럼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는 현존 최대의 유랑민족이라는 사실과 맞닳아 있다. 또한 이라크에서 벌인 미국의 전쟁과 우리의 파병 결정으로 우리에게도 초미의 관심사가 되어버린 이라크 북부의 산악지역이 바로 쿠르드족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지역인 까닭이다. 영화는 바로 그 국경의 산악지역에서 살아가는 쿠르드족의 비참한 삶을 비춘다.


전쟁이 파괴한 일상의 삶, 그러나 척박한 땅에서도 희망의 새순은 돋고.


영화는, 흔히 열사의 땅으로 비유되는 탓에 이란 이라크 국경산악지역의 폭설과 추위를 모르는 우리의 상상력을 무참히 비웃으며, 이란 이라크간의 오랜 전쟁에 의해 파괴된 아훕일가의 삶에 앵글을 맞추며 시작 된다. ‘아훕(Ayoub)’은 이제 겨우 12살이다. 그의 어머니는 막내 동생을 낳다가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아버지는 전쟁 중에 쿠르드족의 유일한 생계수단인 국경지역에서의 밀수업을 위해 집에 있는 날이 없다. 눈물 속에 피어난 한 떨기 야생화 같은 ‘아마네(Amaneh)’는 아훕의 동생이다.


아마네는 영화의 시작과 함께 자신의 집안 사정을 일러 준다. 그녀에게는 아훕말고 마디라는 또 다른 오빠가 있다. 그 ‘마디(Madi)’는 선천성 장애아다. 불과 네 다섯 살 정도에서 성장이 멈춰버린, 하루라도 약과 주사를 거르면 살 수 없는 장애아다. 아훕과 아마네는 그런 마디를 데리고 돌보며 시장에 나가 짐을 나르고 물건을 신문지로 포장해주며 돈을 번다. 일하지 않으면 먹고 살 수 없음으로 말이다. 시장에서 돌아오는 길은 춥고 힘들다. 밀수품을 몸에 감추는 조건으로 겨우 얻어 탄 트럭이 검문에라도 걸리면 매서운 추위와 험한 산길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와야 한다. 집에는 언니 로진이 겨우 젖을 뗀 막내 동생을 돌보며 살림을 한다. 아훕과 아마네는 공부를 하고 싶지만 연습장 하나도 사기에 벅차다.


전쟁의 와중에서 도적이 출몰하고 포탄의 굉음이 시시각각 날아드는 국경을 넘나들지만 참담한 그들의 삶은 지옥과 다를 바가 없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마저 국경을 넘나들다가 지뢰를 밟아 싸늘한 시신으로 돌아온다. 온통 지뢰밭인 땅에서 농사도 지을 수 없는 아훕은 이제 한 집안의 가장이 된 것이다. 식구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란 짐을 지기에 아훕은 이제 겨우 12살이다. 그럼에도 그는 가장의 몫과 책임을 져야 한다. 너무나 가혹한 삶의 무게는 국경에 내리는 폭설보다 무겁고 살을 에이는 추위보다 무섭다. 마디는 더 이상 주사도 맞을 수 없고 곧 바로 수술하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훕은 그 지옥 같은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울지도 않으며 원망 또한 하지 않는다.


자신의 몸보다 두 배나 되는 짐을 등에 지고 말들조차 취하지 않고는 넘지 못하는 국경의 산들을 그는 넘는다. 오직 마디와 누이들을 위하여, 살아남기 위하여... 운명의 신은 아훕의 그런 처절한 생존의 몸부림마저 희롱한다. 죽음보다 깊은 고통의 노역으로 받게 되는 품삯마저 제 때에 받지 못하거나 떼어먹히기 일쑤다. 좀체 희망은 보이지 않는다. 아니 절망할 시간도 아훕에게는 없다.


누이 로진은 곧 죽게 될 마디의 생명을 연장하기위해 시집을 간다. 말이 시집이지 그녀는 팔려가는 것이다. 신랑의 지참금 대신 마디의 수술을 해주는 조건으로 팔려가는 신세가 되어 산을 넘는다. 쌀자루 같은 푸대에 넣어져 로진과 함께 떠나는 마디, 아훕은 그 때서야 울 수 있다. 마르지 않는 눈물은 그의 사랑의 깊이며 돌리지 못하는 발걸음은 가족을 향한 절절한 아픔이다.


그러나 팔려간 신랑집의 시어머니는 마디를 팽개치고 그 값으로 얻은 노새 한 마리. 그럼에도 아훕은 절망하지 않는다. 아훕은 그 노새를 팔아 마디를 수술시키기로 결심한다. 수술을 시켜도 어차피 7,8개월을 더 살수 있을 뿐이다. 그래도 아훕은 마디를 살리기 위해 노새값이 더 좋다는 이라크를 향해 국경을 넘기로 작정하는 것이다. 품삯도 받지 않고 짐을 날라주는 조건으로 합류한 밀무역하는 무리들은 국경의 혹한과 험준한 산악을 넘기 위해 말과 노새에게 술을 먹인다.


아훕이 그 조그만 몸에 한 손으로는 노새의 고삐를 쥐고 한 손으로는 마디를 안고 국경을 넘게 되는 날은 다른 어느 때보다도 춥다. 그래서 노새와 말들에게는 평상시의 배가 넘는 술 네 병을 마시게 한다. 그렇게 아훕은 성인 장정이 혼자 넘기에도 힘든 국경의 산악을 마디를 업고 혹은 안고 노새를 끌며 오른다. 차마 눈물 없이 볼 수 없다.


이 영화의 포스터에 쓰여진 대로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가혹한 동화’라는 설명은 절대 과장이 아니다. 폭설은 끝없이 내리고 살을 찢을 듯이 불어대는 사나운 한풍은 뼈 속까지 얼리기에 충분하다. 말과 노새마저 한발자국 내딛기에도 힘든 그 잔인한 월경의 행렬, 그래도 아훕은 맨 손을 후후 불며 마디를 감싸 안고 산을 오른다. 누가 이토록 잔혹하고 처절한 삶을 아훕에게 던져 주었나.


잔인하고 잔혹한 운명의 신은 또 한번 아훕을 희롱하고 배신한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견디며 겨우 다다른 산등성이에는 도적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올라왔던 그 죽음의 길을 다시 내려가야 하는 그 비참한 시간 속에서 말들은 쓰러지고 너무 취한 말들은 넘어지고 나면 도저히 다시 일어설 수 없다. 다른 이들은 말을 포기하며 목숨이나마 건지겠다고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가지만 아훕은 노새를 포기할 수 없다. 노새는 곧 마디의 목숨이기 때문이다. “일어나, 제발 일어나” 노새의 고삐를 당기며 절규하는 아훕. “라힘아저씨, 제발 도와주세요, 누구 없어요, 제발 좀 도와주세요” 울부짖는 아훕, 나의 눈에 어느새 소리 없는 눈물이 흐른다. 두고두고 잊을 수 없는 영화의 장면이다.


지옥 구덩이에 빠진 것 같은 한바탕 소란이 멈추고 스크린이 페이드 아웃(Fade out) 페이드 인(Fade in)을 하고 나면, 폭설은 그쳐있고 바람도 잦아들었다. 산의 정상, 국경의 철조망이 쳐진 곳에서 아훕은 어딘지 모를 앞을 향해 시선을 던진다. 아훕의 눈에 맺히는 피사체는, 아마도 이라크로 가기로 했으니, 이라크일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아훕이 보는 곳을 비추지 않는다. 또한 아훕이 이라크에 가서 노새를 팔고 마디를 수술시켰는지 알려주지도 않은 채 아랍어로 쓰여진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다. 그것은 아훕의 삶이, 아니 쿠르드족의 눈물겨운 고난의 삶이 지금에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까닭일 것이며, 잔혹한 전쟁의 그림자가 오늘 이 시간에도 쿠르드족의 일상을 파괴하고 수난의 한 시대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네의 눈으로 본 전쟁과 삶 - 때문에 증오가 아닌 사랑으로 태어난 빛의 예술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은 아마네의 눈으로 본 필름의 기록이다. 주인공 아훕의 눈에 비친 전쟁통의 삶과 일상, 고난과 고통의 기록이 아니라 처연하도록 아름다운 소녀 아마네의 눈에 비친 세상이라는 사실은 이 영화의 힘이며 영화적 완성도를 견인하는 눈부신 아름다움이다. 이제 여덟아홉 살이나 되었을까, 그런 아마네가 오빠 아훕을 따라 시장통에 나가 돈을 벌고 장애아인 마디를 돌보며 기형적인 얼굴을 한 마디에게 수시로 뽀뽀를 해대는 장면에서 나는 소녀의 눈 속에 감추어진 처연한 아름다움과 슬픔을 동시에 느꼈다.


아마네는 공부가 하고 싶은데 연습장도 없다. 오빠에게 “연습장 사다 줄거지”하는 아마네를 보면서는 너무나 풍족하여 버리는 것이 많은 우리의 삶이 부끄러웠다. 세찬 눈발이 몰아치는 날에, 그 작은 몸으로 마디를 안고 아버지의 무덤을 찾아 “제발 마디 오빠를 살려주세요, 아프지 않게 해주세요.” 기도하며 우는 아마네를 보는 것은 참으로 견디기 힘든 고통이다.


그 추운 날에 마디를 안고 무덤에 간 것 때문에 아훕은 아마네를 혼낸다. 가볍게 뺨을 맞은 아마네, 하루 종일 심통이 나있고 오빠에게 시선도 주지 않는다. 이를 눈치 챈 아훕은 달래보지만 “나 때렸잖아” 하며 여전히 뾰로퉁이 부어 있는 아마네. 아훕이 다시 살살 달래보지만 아마네는 여전히 “오빠가 나 때렸잖아” 대답한다. 바로 우리의 딸들과 조금도 다른 구석이 없는 아마네에게 누가 전쟁과 죽음과 고통과 절망을 강요하였나.


마디를 살리기 위해 아훕이 이라크로 떠나려는 시장에까지 험한 눈길과 산길을 내려와 오빠에게 도시락을 건네는 아마네. 보호받고 돌보아져 커야 마땅한 어린 소녀가 오빠의 안위를 걱정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것이 겨우 도시락 싸는 것뿐인 까닭으로 도시락 보따리를 내밀며 사선을 넘어가는 오빠를 위로해야 하는 슬픈 현실. 이렇게 전쟁은 어린 소녀를 미리 커버린 기형의 어른소녀를 만들었다. 그 기형의 소녀는 오빠가 마디를 치료하여 돌아오는 동안 갓 젖을 뗀 동생을 돌보며 살림을 책임져야 한다. 민족은 종교는 권력은 그렇게 너무나 아름다운 아마네를 지옥의 한복판으로 몰아넣고 희롱하고 고문한다.


그러나 아마네는 누구도 증오하지 않는다. 미움이란 단어는 애초부터 그녀에게는 없다. 아마네는 단지 기도할 뿐이다. 마디를 아프지 않게 해달라고, 그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오빠가 무사히 사선을 넘어 돌아올 수 있게 해달라고, 그래서 ‘일등을 두 번이나 한’ 자신에게 연습장을 선물할 수 있게 해달라고 아마네는 기도할 뿐이다. 비록 잔인한 운명 앞에서 눈물이 마르지 않을지언정 그녀는 아무도 원망하지 않는다. 왜 전쟁을 해야 하는지, 아빠가 누가 묻어 놓은 지뢰에 죽어 갔는지 아마네는 묻지 않는다. 자신 앞에 놓여 있는 삶을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간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우리는 더욱 슬프고 오래도록 처연한 아름다움을 잊지 못한다.


바로 아마네의 눈을 통해 세상의 구원은, 전쟁과 이념과 민족과 국경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사랑임을 영화는 보여준다. 아마네의 사랑이 있기에, 아훕의 치열한 삶의 의지가 있기에 영화는 ‘취한 말들의 시간’이 아니라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이 된다. ‘취한 말들의 시간’은 전쟁의 와중에 내동댕이쳐진 인간군상들의 생존만이 있는 시간이다. 그러나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은 그 지옥 같은 전쟁 속의 삶과 일상에서, 비록 취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시간 속에서도, 삶을 향한 진정한 의지와 가족과 이웃 나아가 인간에 대한 깊은 신념과 사랑을 잃지 않는 모든 이들을 위한 시간인 것이다.


어떤 권력의 횡포와 살인으로도 결코 굴복시킬 수 없고 빼앗아갈 수 없는 시간, 그것이 바로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인 것이다. 영화는 바로 그 위대한 시간을, 그 위대한 시간의 영속성과 구원성을 아마네의 눈을 통해 소리 없이 드러낸다. 이 영화는 과장이 없다. 인위적으로 과장하고 각색하여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억지를 감독은 부리지 않는다. 화면에 담긴 리얼리티와 함께 영화를 불후의 리얼리즘과 휴머니즘으로 승화시키는 힘은 바로 이런 감독의 진지한 자세에서 비롯된다. 스크린에 불어대며 아훕의 살을 파고드는 눈보라는 이제 여러분의 망막과 고막과 뇌리를 때리는 감명이 된다.


영화의 필름은 다 돌아갔지만 필자는 아훕이 마디를 살려내었음을, 지금 어디에서건 결코 빼앗길 수 없는 꿈과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음을, 아마네의 처연한 눈망울 속에서 아름다운 사랑의 꽃이 피어나고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들이 간직한 그 고귀한 사랑과 신념은 신마저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것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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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4/08/02 [06:54]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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