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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의 성서 읽기, 이대로 좋은가?
[류상태의 주일편지] ‘성서무오설’ 교리는 반드시 재검토하여 교정돼야
 
류상태   기사입력  2013/09/14 [09:30]
1. 성서는 사람의 책인가, 하나님의 말씀인가?

어렸을 때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라는 질문을 한 번도 받아보지 않은 분은 거의 없으실 것 같습니다. 사실은 엄마 아빠가 다 좋은데, 둘 중 하나로 대답하기를 은근히 강요(?)하는 질문자의 의도에 말려들어 어쩔 수 없이 한 분을 선택했던 기억을 갖고 계시는 교우님도 많으실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아이들은 “둘 다 좋아!”라고 씩씩하게 대답하기 시작했습니다. 반드시 둘 중 하나만 선택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사람의 책인가, 하나님의 말씀인가?”라는 질문에도 어느 한 쪽만 선택할 필요는 없습니다. 둘 중 하나이어야 한다는 생각은 흑백논리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이삼천년 전 근동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이 당시 그 지역의 언어로 쓴 ‘사람의 책’입니다. 하지만 깨어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 각성된 체험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거룩한 경전’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성서를 읽는 사람은, 먼저 성서가 ‘사람의 책’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종이와 문자의 집합으로 구성된 물리적 성서를 기록한 것은 ‘일차적으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살았던 ‘그 시대와 사회’라는 시공의 울타리 안에 갇혀서 살아가기에, 역사적 사실이나 우주의 질서를 이해하는 데 한계 내지는 오류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사실은 창세기 기자가 지구는 천체의 중심이고 움직이지 않으며, 그 주위를 태양을 비롯한 뭇별들이 떠다닌다고 “의심 없이” 믿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쉽게 동의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서가 ‘천동설’이라는 원시세계관 아래 기록되었다고 해서 성서의 가치가 무너지지는 않습니다. 성서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과학적 사실’이 아니라 ‘종교적 의미’에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찬란한 태양이 짙은 안개를 뚫고 저 하늘 위로 솟아올랐습니다.”라는 말은 신년벽두가 될 때마다 매스컴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태양이 떠오른 것이 아니라 지구의 자전으로 생긴 현상이기에 ‘과학의 언어’로 그렇게 말했다면 틀린 표현이 되겠습니다. 하지만 ‘과학의 언어’가 아니라 ‘삶의 언어’로 하는 말이기에 그 말에 시비를 거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처럼 과학적으로는 맞지 않지만 우리들의 삶의 자리에서는 여전히 의미를 주는 표현들이 있습니다.

여기까지 동의하실 수 있다면, “성서의 내용이 과학적으로는 틀릴 수 있다.”는 데에도 기꺼이 동의하셔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성서에는 오류가 없다.”는 오래된 교리가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될 사실은, 성서 기자가 하나님께 영적으로 사로잡힌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하더라도, 인간이기에 가질 수밖에 없는 지식의 한계나 오류의 가능성을 완전히 넘어설 수는 없다는 점입니다.

우리 기독교의 주요 교리를 만들어낸 사람들 역시 대부분 1500~2000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이기에 ‘그 시대의 세계관’ 안에서 생각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여 천체의 움직임이나 물리적 세계의 질서에 대한 이해는 오늘날 초등학생의 이해수준보다도 훨씬 원시적인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남긴 연구 결과와 기록이 아무리 신중하고 최선을 다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과학적 사실 뿐 아니라 역사적 사실에 대한 한계와 오류도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처럼 성서가 ‘사람의 책’이기에 담겨있을 수밖에 없는 오류나 한계를 정직하게 인정할 수 있을 때, 그때 비로소 우리는 그 한계와 오류를 돌파하여 정금과도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금광석을 용광로에 넣어 정련한 후에야 비로소 순금을 얻을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2. 성서는 시대의 산물이며, ‘고백의 언어’로 기록되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성서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기록 당시 사람들의 신앙고백으로 쓰여졌습니다. 그러므로 성서의 언어는 ‘과학과 논리의 언어’가 아니라 ‘고백의 언어’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 고백에는 객관성이 결여된 이기적 고백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당시에는 그것이 옳다고 확신했고 시대적으로도 용인되었지만, 현대사회에서는 반드시 재해석되어야 할 ‘원시 공동체의 이기적인 고백’도 많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시 시대와 사회 상황에서는 그렇게 이해되고 기록되었지만, 그 때와는 시대와 삶의 정황이 달라진 ‘지금, 여기서’ 우리가 새겨들어야 할 성서의 진정한 메시지는 무엇인가?” 라는 물음을 현대의 예수사람들은 끊임없이 묻고 재해석해야 합니다. 그 물음과 연구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기록된 그대로’ 읽는 것은 성서의 진실에 다가가는 데 방해가 될 뿐 아니라 매우 위험할 수 있습니다. 아래 구절은 그 하나의 예입니다.

“여자는 조용히 복종하는 가운데 배워야 합니다. 나는 여자가 남을 가르치거나 남자를 지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여자는 침묵을 지켜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2장:11~12, 공동번역).

성서가 일차적으로 ‘사람의 책’이라는 점을 받아들이지 않는 일부 신학자와 목회자들은 위의 성서 본문에 의해 21세기가 된 지금까지도 여성은 성직자가 될 수 없다는 남녀차별 논리를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본문은 당시 교회 현장에서 발생한 특수한 사정을 고려한다 하더라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남존여비’라는 전 지구적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시대의 한계’를 성서 역시 그대로 안고 있다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줍니다.

성서의 기록이 ‘시대의 한계’ 뿐 아니라 ‘원시공동체의 이기심’으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성서 본문들도 많습니다. 아래 본문은 그 중 하나입니다.

“너희 가운데 패륜아들이 나타나 너희가 일찍이 알지 못했던 다른 신들을 섬기러 가자고 선동한다는 소문이 나돌 것이다. 그런 소문이 나돌거든 너희는 샅샅이 조사해 보고 잘 심문해 보아 그것이 사실임이 드러나면 그같이 역겨운 일을 너희 가운데서 뿌리뽑아야 한다. 그 성읍에 사는 주민을 칼로 쳐죽여야 한다. 그 성읍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말끔히 없애버려야 한다. 거기에 있는 가축도 칼로 쳐죽이고 모든 전리품을 장터에 모아놓고 그 전리품과 함께 온 성읍을 불살라 너희 하나님 야훼께 바쳐야 한다. 그리고 언제까지나 폐허로 남겨두고 다시 세우지 마라. 너는 이런 부정한 것들을 건사해 두지 않도록 하여라.”(신명기 13장 14~18, 공동번역)

이 본문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어떤 극단의 선택을 했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타민족을 말살하는 이런 일은 종족 간에 벌어진 전쟁에서 승리한 민족이 패배한 민족의 복수를 막기 위해 선택한 잔인한 방법이었습니다. 하여 공동체 존망의 위기에 쫓긴 이스라엘이 극단의 처방을 내릴 만큼 위기를 느끼고 있었다는 점에서 당시의 그들을 이해할 수는 있겠습니다.

그러나 21세기가 된 오늘날까지도 “성서에 기록되었으니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여 이웃종교의 성전에 불을 지르고 단군상을 파괴하는 등의 무모한 행위를 저지르는 극렬 신자들이 있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가 깊은 책임의식을 갖고 반드시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될 슬픈 현실입니다. 하지만 성서가 ‘사람의 책’이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여전히 ‘오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규정하는 오래된 교리를 재해석하고 교정하지 않는 한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치유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3. 성서의 권위를 존중하되 합리적 해석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성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한국 교회가 안고 있는 또 하나의 문제점은, 같은 본문을 두고 다른 해석이 공존할 경우에 다수를 차지하는 ‘보수정통’ 교회에서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배척한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다른 견해’는 일시적 혼란을 가져오기도 하지만 합리적인 대화를 통해 보다 성숙하고 열린 신앙으로 인도한다는 점에서 장려되어야 할 일이지 이단시하고 배척할 문제가 아닙니다.

마태복음 25장에는 최후심판에 대한 비유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비유에는, ‘사람의 아들’로 오신 우리 주님께서 마지막 날에 천사들을 거느리고 영광의 보좌에 앉아 모든 민족 모든 사람들을 오른편과 왼편, 둘로 나누고 상벌을 내리신다는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주님은 오른편으로 분류된 사람들에게 “세상 창조 때부터 준비된 하나님의 나라를 차지하라.”고 하시고, 왼편으로 분류된 사람들에게는 “악마를 가두기 위해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본문에서 심판을 통해 사람이 갈 수 있는 곳은 극과 극을 달리는 두 세계 뿐, 중간 지점에 대한 언급이나 암시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심판의 기준도 매우 단순하고 명확합니다. ‘사람의 아들’이 헐벗고 굶주렸을 때 그를 도와준 사람들은 모두 준비된 나라를 상속받고, 그를 외면한 사람들은 모두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천국과 지옥’이 되겠습니다. 이에 대한 본문 구절을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 때에 그 임금은 자기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너희는 내 아버지의 복을 받은 사람들이니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였다. 또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으며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주었다.’” (마태복음 25:34~36, 공동번역).

“그리고 왼편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의 졸도들을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 속에 들어가라. 너희는 내가 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지 않았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으며, 또 병들었을 때나 감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 (마태복음 25:41~43, 공동번역).

하지만 심판의 내용이 발표되자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이나 왼편에 있는 사람들 모두 판결의 이유에 대해 납득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절대심판권을 쥐고 왕의 자리에 앉은 ‘사람의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을 도와드렸습니까?”,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을 모른 체하고 돌보아 드리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이에 대해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웬만큼 신앙생활을 한 교우님들 중에 이 비유를 모르는 분은 거의 없으실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비유는 해석자에 따라 매우 완고한 교리를 지지해주는 근거로 이해되기도 하고, 따뜻한 인류애를 가르쳐주는 말씀으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본문이 보수적인 설교자에 의해 선포될 경우, 사람이 죽은 후에 갈 곳은 천국 아니면 지옥이며 중간 단계는 없다는 전통 교리를 지지하는 결정적 근거로 해석됩니다. 하지만 이 본문이 진보적인 설교자에 의해 선포될 때는 전혀 다르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본문의 중심 의도는 교리적인 재료를 제공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 전 상영된 <울지마 톤즈>에서 이태석 신부님이 보여주셨듯이, ‘헐벗고 가난한 이웃을 주님 대하듯 섬기는 삶’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본문에 나타난 최후의 심판이나,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이 가게 된다는 영원한 나라, 왼편으로 분류된 사람들이 가게 된다는 영원한 불 등의 비유는 모두 지극한 이웃사랑을 가르치는 데 필요한 극적 배경을 이루는 것일 뿐, 그것들 하나하나를 미래에 실제 이루어질 사실로 보는 건 잘못된 해석이라는 것이 진보 신앙을 가진 분들의 대체적인 시각입니다.

이처럼 같은 성서 본문에 대해 매우 다르게 해석하기도 하지만, 보수건 진보건 본문을 대하는 해석자들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철저하게 본문을 중심으로 논리를 전개하고, 본문의 권위에 의존한다는 점입니다. 보수적인 해석자는 물론 진보적인 해석자도 성서의 본문 자체의 권위에 의혹을 제기하거나 비판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심지어 성서비평학을 통해 본문을 파헤치는 학자들조차도 결국은 해체한 본문을 다시 조합하여 보다 합리적이고 현대인이 받아들일만한 근사한 결론을 내리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성서 자체의 권위에 도전하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성서의 권위에 대한 최종 승복, 이것이 보수건 진보건 우리 기독교 신앙인들의 공통분모이며 전통입니다.

그러나 성서가 현대인에게 여전히 의미를 가지려면, ‘성서의 권위’를 존중하되 해석자들이 그 권위에 구속되지는 말아야 합니다. 본문을 솔직하게 연구하고 이해하는데 방해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냥 아무 전제 없이 고문서나 고대 기록을 연구하는 역사학자들처럼, ‘일차적으로’는 아무 전제 없이 객관적으로 본문을 연구한 후에야 비로소 그 다음 단계로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려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위의 본문에는 보수적인 해석자와 진보적인 해석자가 주목하는 두 가지 요소가 모두 들어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지상의 세계’와 함께 ‘천상의 세계’와 ‘지하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이천 년 전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을 고스란히 담아내면서, 그 기반 위에 ‘심오한 이웃 사랑의 정신’을 예수사람들에게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현대인인 우리는 과학의 발전에 의해 오류로 밝혀진 원시세계관을 넘어, 그 중심 내용인 ‘심오한 이웃 사랑의 정신’에 집중하면 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성서는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인류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살아날 수 있으며, 우리 기독교 또한 지구마을 모든 이웃들과 조화를 이루며 상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서에서 진정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면, 원석을 용광로에 녹여 순금을 뽑아내듯이, TEXT(본문 자체)뿐 아니라 CONTEXT(그 본문이 기록되기까지의 역사적 정황과 저자의 의도 등 본문의 배경을 이루는 모든 것들)까지 충분히 연구한 후에야 비로소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에 다가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과거의 교리에 매이지 않은 열린 신학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입니다.

4. ‘성서무오설’이라는 오래된 교리는 반드시 재검토하여 교정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평범한 수학교사가 알고 있는 수학지식은 수학의 성인으로 추앙받는 피타고라스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피타고라스가 당대에는 최고의 석학이었지만, 지난 250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수많은 그의 후예들이 만들어낸 지식의 진화와 그것이 쌓여진 결과는 그 옛날 피타고라스가 발견하고 터득한 수학지식과는 비교할 수 없이 풍요로워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평범한 수학교사가 피타고라스의 위대함에 감히 범접할 수는 없다는 것을. 저 역시 저의 주님이신 예수께서 결코 아실 수 없었던 과학지식이나 역사지식을 갖고 있지만, 그렇다고 평범한 소시민인 제가 예수님의 위대함에 감히 범접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지금도 여전히 주님만이 제 인생의 구세주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성서에 담긴 물리적 세계관, 즉 땅은 움직이지 않으며 세계는 ‘땅 위의 세계’와 ‘하늘 위의 세계’ 그리고 ‘땅 속의 세계’로 나뉘어져 있다는 ‘삼층 세계관’은 당시에 어느 민족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보편적인 생각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돈다고는 결코 생각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이후로 이천 년 세월이 흐르며 진화된 인류의 과학과 지식체계에 의하면, 그 우주관은 틀린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우리가 자연스럽게 동의할 수 있는 이런 관점이 신앙의 세계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성서’라도 그것은 이천년 전에 만들어진 경전입니다. 과학과 합리에 의해 걸러져야 하며,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가려내야 마땅합니다. 그것은 다른 종교의 경전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성서의 진실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이러한 사실을 교인들에게 자세히 가르쳐야 할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진실을 말하기를 주저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래도록 그리스도교의 중심교리로 인식되어온 ‘성서무오설’이 가로막고 있기에, 조직에 대항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사실대로 말하기를 망설이거나 돌려서 말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사실을 아는 분들이 침묵하거나 정확히 말하지 않으면, 결과적으로 순박한 교우님들이 오랜 교리의 심연에 갇혀 헤어나오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의 장래를 위해 그분들이 용기를 내셔야 하며, 나아가 이 오래된 교리의 재검토와 교정도 반드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분들이 용기를 내어 바른 말을 할 수 있도록 교우님들께서 기도와 격려 등 하실 수 있는 모든 방법과 지혜로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우리 한국 교회에는 저와 다른 견해를 갖고 계신 신학자와 목회자들도 많이 계십니다. 제 견해를 존중받고 싶은 것처럼 저 역시 그분들의 견해를 존중하며, 열린 대화와 토론을 통해 한국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바람직한 방향을 함께 찾아보고 싶습니다. 하여 오늘의 주일편지를 마치면서 한국 교회에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 한반도 종교전쟁을 막기위한 류상태 목사의 고언이 담긴 「신의 눈물」(부제 : 한반도종교전쟁)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
성서의 바른 이해, 교회개혁, 다원화된 세상에서 과거의 선교방식을 답습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현대사회에서 교회가 당면한 이런 문제들은 믿음과 기도로만 해결할 수는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대형교회들이 앞장서서 공개 세미나를 열어 이런 문제를 합리적으로 다루어주십시오.

교회지도자들 뿐 아니라 일반 교우님들도 적극 참여하여 스스로 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대화와 토론의 장을 각 교회별로, 또는 지역 교회들이 연합하여, 최소한 일 년에 한 차례씩은 꼭 마련해 주십시오. 영락교회, 순복음교회, 소망교회, 금란교회, 명성교회 등 교인수 일만 명이 넘는 대형교회들이 이 일에 꼭 앞장서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내실이 따르지 않는 교회성장은 복이 아니라 화입니다. 교단과 교파를 초월하여 많은 교회들이 용기를 내서 ‘바른 신앙을 위한 세미나’를 열고 오늘날 우리 개신교회가 안고 있는 이런 문제들에 솔직하게 다가갈 수 있다면 한국 교회의 진정한 성장과 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류상태 선생은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이후 20여 년을 목회자, 종교교사로 사역했지만, 2004년 ‘대광고 강의석군 사건’ 이후 교단에 목사직을 반납하였고, 현재는 종교작가로 활동하면서 ‘기독교의식개혁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교양으로 읽는 세계종교] [소설 콘스탄티누스] [신의 눈물] [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 [당신들의 예수]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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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3/09/14 [09:30]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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